제 9강 첫 번째 증명: 갈라디아 교인의 성령체험 (갈3:1-5)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은 앞서 언급한 명제를 하나하나 증명해 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핵심부분입니다. 앞서 언급된 명제는 바로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갈2:16)라는 말씀 가운데 담겨있습니다. 즉,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라는 명제에 대하여 이제부터 여섯 가지의 증명들이 하나씩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 첫 부분이 3장 1-5절이며, 내용은 “성령체험” 증명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증명은 다시 다섯 가지의 질문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질문 1: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3:1)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갈라디아 1장 11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자매 여러분”이라고 친근하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들을 엉뚱하게 “어리석은(anoetoi) 갈라디아 사람들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누군가 그들을 홀렸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앞선 강의를 생각해보면, 그 누군가는 슬쩍 들어온 “거짓 교사들”입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제대로 얻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율법을 준수한다는 증거로 “할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게 만들었으니, 무언가에 홀린 것 아닌지 강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을 보면 홀린 것은 “마법에 걸린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방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행하는 할례에 대하여 엄청난 혐오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의 말에 속아서 더러 할례를 받는 일이 일어나고, 그 소문이 퍼지자 덩달아 마음이 흔들려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이것은 마법에 걸린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광적인 집단행동은 미숙한 판단과 군중심리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믿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미신의 영역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경고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의 세력들에 의하여 유죄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그의 죽음과 부활 선포를 듣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니, 할례 같은 미신적인 신앙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대의 설교자였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말한 “어리석음”의 의미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기는 어려우나, 그들이 속기는 쉽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지식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어렵게 배운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들에 의해서도 너무 쉽사리 속아 넘어간다. 왜냐하면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 진리는 너무 쓰기만하고 즐거운 것이 못되지만, 거짓은 언제나 달콤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병든 눈을 가진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우리의 신앙이 어떤 마법 같은 일에 홀려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 질문 2: 어떻게 성령을 받았습니까?(3: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받은 성령이 어떤 경로로 경험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으로 바꾼다면, 초심을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이유로 맨 처음에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하고, 언제나 겸손하고 성실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성령체험이 율법을 지켜서 경험한 것인지,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인지 말입니다. 당연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그 때에, 그들에게 율법은 곁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절처럼, 복음의 소식을 듣는 그 순간 마음에 감동이 밀려왔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제 와서 할례를 받으려고 하니 바울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초심>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소식”이라고 번역된 말은 “믿음의 선포”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를 담은 번역은 “믿음을 이끌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선포”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개념대비법을 사용합니다. “인간의 율법 준수” 대(對) “믿음을 이끌어 내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행위로냐?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냐? 묻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이 생겼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서 율법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늘 붙들어 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3. 질문 3: 영에서 출발하여 육으로 마치려고 합니까?(3: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영과 육의 대조는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영과 육이 조화로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별하라는 것이 맞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하고 인내하는 일은 영적인 영역의 일이지만, 욕심내고 독점하고 군림하는 것은 육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또 “어리석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만일 그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 얽매이게 내버려 둔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인도 아닌데 유대인처럼 살아야하는 멍에를 지게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멍에를 가볍게 하려고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앙의 길에는 출발점과 목적지가 있는데, 목적지는 언제나 그 신앙이 더욱 성장하여 나가는 방향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지금 거꾸로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과거에는 육적인 것만 생각하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이제는 점점 더 영적인 것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만일 반대로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가면서 오히려 육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할례를 행하게 한다고 믿음이 완성되겠습니까?
4. 질문 4: 경험은 다 어디로 사라졌습니까?(3: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여기서 “체험”이라는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는 “괴로움”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사용된 단어 파스코(pascho)는 “고생하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했던 체험 또는 경험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동시에 “많은”이라고 번역된 단어 토사우타(tosauta)는 많다는 뜻 안에 “엄청나다”(great)는 뜻이 담겼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일은 단순히 평범한 경험이 아니라 “엄청나게 잊지 못할 무거운 체험”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기억을 던져버리고, 율법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니 바울은 기가 막혔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오순절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선포가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그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베드로의 선포내용을 요약하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행2:38) 그들이 한 곳에 모일 때부터 성령은 함께 하셨고, 그날에 신도의 수가 3000명이 늘어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형편을 살펴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아주며, 함께 만찬을 나누는 것을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처음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매우 좋게 보였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신비를 가슴으로 경험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도 신앙”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율법주의의 침입을 경고하고 싶은 바울의 마음이 여기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5. 질문 5: 율법으로냐? 복음으로냐?(3:5)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5절의 내용은 두 번째 증명으로 넘어가기 전에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주요 논점을 들이대는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엄청나게 잊지 못할 무거운 체험”의 출처가 어디인지 생각해 보라는 요청입니다. 그것은 율법준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주신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기적을 행한다.”(energon dynameis, ἐνεργῶν δυνάμεις)는 말은 직역하면 “권능으로 영향을 끼치다.”는 의미입니다. 해석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인데, 축귀나 치병이나 혹은 카리스마적 은사 등등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율법아래에서는 없던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일회적인 체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엄중하게 묻습니다. 이런 성령의 활동이 율법을 행한 것으로부터(out of works of the law) 나온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듣는 것으로부터(out of hearing of faith)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율법의 내용을 믿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처음 유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아니었다면 여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갚으며 살고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는 보복할 생각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그 율법조항 하나하나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율법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구현되는 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성령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매일 매일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것에서 신앙의 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2024년 6월 9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