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어떤 사람이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닌데도 습관적으로 나서서 삐딱하게 말하거나 지적질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척을 지게 되고 미움 받게 되어 결국은 반격을 당해 큰코다친다는 뜻이다. 스스로 피곤한 인생을 사는 경우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부모가 술 먹고 낳은 아이는 나중에 공부도 못하고 헬렐레한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시면서 “그게 유전의 법칙이야”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멘델의 유전 법칙에는 그런 말 없던데요, 혹시 그거 사기의 법칙 아닙니까?”라고 모난 소리를 했다가 교무실 옆 자료실로 불려가 삽자루로 빠따를 맞은 적이 있다. 요즘 의정 간의 갈등이나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나는 나설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런 문제가 나와 사실상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나서서 말을 보태고 싶어 한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보통 사람들의 성향이나 기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질적인가를 아래 인용문과 같이 재미있게 표현한다.
“다음 물품은 스페인산 소의 생가죽들이었다. 그 생가죽들에는 소꼬리가 붙어 있는데, 그 모습이 소들이 남미 북쪽 스패니시 메인 대초원인 팜파스를 가로지르며 질주했던 때 그 모습 그대로의 꼬임과 치켜 들린 각도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지독한 완고함을 나타내는 하나의 유형이었으며, 모든 체질적인 악습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의 절망적이며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진정한 성향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그걸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화시킬 희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바이다. 동양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개의 꼬리가 가열되어 압착되고 매듭으로 둥글게 묶여질 수 있다. 그리고 12년 동안 수고스럽게 그걸 그대로 둔 후에 보면 그 꼬리가 다시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소꼬리나 개꼬리가 상징하는 것처럼 뿌리 깊은 습벽을 효과적으로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들을 아교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들은 그런 꼬리들을 가지고 실제 아교를 만든다. 그러면 그것들은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있게 될 것이다.” ― 『월든』 제4장 「소리들」
위 인용문에서 소로우는 당시 처음 등장한 증기기관의 화물차가 세계 각지로부터 수입된 물건을 싣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 상업이라는 게 인간사에서 얼마나 고질적이고 강력한 삶의 동기가 되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활동은 인간에게 결코 뿌리 뽑아 없앨 수 없는 속성이 되었다. 그런데 상업 활동을 통해 돈을 벌려는 성향 말고도 우리에게는 더욱 자질구레한 고질적인 성향들이 많다. 그런 성향은 왜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걸까? 상당 부분 타고난 기질적인 원인 때문일 것이며,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행해지면서 몸과 마음에 붙어 거의 자연스러운 상태인 것처럼 굳어졌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욕구와 관련된 것 같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일종의 만족감을 주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만이 쌓이게 되니 반복적으로 그렇게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시기심이나 질투심과도 관련된 것 같다. 그런 요인들이 합쳐져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그런 모습을 불 보듯 환히 보게 되는데도, 자기 자신만은 그걸 영구히 보지 못한다. 그게 우리 몸의 눈의 맹점이고, 우리 마음의 눈(성찰)의 아이러니다. 그건 우리가 자신의 시선을 결코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혹시 어렴풋하게 윤곽을 볼 수 있다 해도 그걸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왜냐면 그것이 그의 정체성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늙어갈수록 그런 성향이 점점 더 경화되고 고착된다. 어떤 사람은 잘난 척하고 어떤 사람은 야비하며 어떤 사람은 겉과 속이 너무 다르고, 어떤 사람은 점잔 빼며 어떤 사람은 상스럽다. 어떤 사람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거짓말하고, 어떤 사람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담화한다. 어떤 냉소적인 사람은 비꼬아 말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 어떤 사람이 바로 나다. 이 글의 스타일도 골치 아프게 삐딱하다. 그게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다. 그저 둥글둥글하게 사는 게 좋은데, 못된 버릇이 몸에 배서 고쳐지지 않는다.
요즘은 에밀리 디킨슨의 생쥐처럼 사는 게 부러워지는 정치 광풍의 시절이다.
Papa above!
Papa above!
Regard a Mouse
O’erpowered by the Cat!
Reserve within thy kingdom
A “Mansion” for the Rat!
Snug in seraphic Cupboards
To nibble all the day,
While unsuspecting Cycles
Wheel solemnly away!
높은 곳에 계시는 아빠!
높은 곳에 계시는 아빠!
한 마리 생쥐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고양이에 의해서 꼼짝 못 하게 된!
당신의 왕국에 마련해 주세요
그 생쥐를 위한 “대저택” 하나!
거룩한 찬장 속에 아늑하게 들어앉아
하루 종일 이빨로 갉아대게 해주세요,
그러는 동안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순환하는 세월이
근엄하게 지나가도록!
[해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화자는 자신을 가장 천한 존재인 생쥐로 표현한다. 게다가 그 생쥐 화자는 고양이의 발 아래 짓눌린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그 생쥐 화자는 하나님에게 천국에 안식처 하나를 마련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나아가서 그 설치류 화자는 천국에서 자기가 온종일 이빨로 갉아댈 수 있는 아늑한 찬장 하나 정도면 족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천국은 으리으리한 궁전이 아니라 안전하고 아늑한 조그만 공간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 화자는 무언가에 의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혹은 단지 삶에 의해서 짓눌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화자가 만족스럽기 위해서 원하는 것은 거창한 행진이나 왕관, 대단한 영광 같은 것이 아니고, 단지 혼자 편안히 이빨로 갉아댈 수 있는 어떤 것이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지막 두 행에서 그러한 달콤한 단순성이 깨진다. 디킨슨은 뜻밖에도 여기에다 세상에 대한 복잡한 관점을 이입시킨다. 순환하는 긴 세월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태양계 혹은 우주 전체는 우리의 현재 고통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사후 세계에 대해서 어떤 것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이처럼 단순히 운행하고(wheel) 있을 뿐인 우주가 이빨로 뭔가를 갉아대고 있는 조그만 생쥐와 아이러니하게도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근엄하게 운행하는 세상과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 생쥐는 자신만의 조그맣고 편안한 천국을 갖고 싶다.
― 『에밀리 디킨슨 시 읽기: 그 녀석은 이 왕관을 만질 수 없어』 나희경 번역 및 해설. 도서출판 동인. 2022: pp 28-30
첫댓글 처음에는 대저택을 생쥐가 지낼 소박한 찬장형 천국이 아니라, 고양이를 불러들이라는 뜻으로 읽었어요. 고양이를 가둬둘 대저택을 하나 지어서 데려가시라, 는 의미로!! 흠…
지옥만 준비되어 있네요.
지옥처럼 보이는 그것이 곧 천국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호미 님의 냉소적 유머는 이미 스타일의 지위를 획득했어요 . 그냥 쓰셔도 재미있습니다. ^^
에밀리 디킨슨의 관찰력, 시적 대상과의 동일화, 대단하군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냉소적인 캐릭터, 매력 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