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이사에게 충성을? / 단 9:3-10, 눅 20:19-26
오늘은 3.1운동 77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올해는 특히 독도 문제 때문에 3.1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예년에 비해 다양함을 TV나 신문 등을 통해 보았다. 해마다 3.1절을 맞이할 때 이 뜻있는 절기를 단순히 공휴일로 지내고 마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이 땅의 현실이 3.1운동을 뜻있게 되새겨 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본다. 이스라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3.1절은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같은 절기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가 실제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들도 3.1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먼저 일본 동경의 재일본 한국 YMCA회관에서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에 우리 유학생들이 조국의 광복과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쳤다. 이른바 2.8독립 선언서는 윤창식 목사의 사회로 시작하고 백관수가 낭독하고 윤목사의 기도로 마쳤다. 이 2.8독립선언은 바로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3.1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인 육당 최남선은 3.1운동의 근본정신이 기독교 정신에서 표현되었음을 말하였다. ‘나는 대체로 어려서부터 기독교 서적을 많이 읽었고 또 기독교인들을 수시로 상종하는 동안에 자연히 기독교적인 사상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본래 자유사상이 농후한 사람인데다가 독립,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말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인만큼 나에게서 기독교를 빼고서는 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최남선의 말처럼 3.1독립 선언문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표현된 자유, 평등, 평화 및 독립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1운동이 3월1일로 결정된 것도 민족 대표 33인 중 한분인 이갑성 씨의 말에 의하면 기독교 측의 의견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고종황제의 인산날인 3월3일에 거사하는 것은 고종황제께 불경이라하여 그 날을 피하되 인산날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상경한 것을 이용하기 위하여 3월3일에 가까워야 했다. 그러나 3월2일은 주일이므로 기독교 측에서 반대하여 결국 3월1일 토요일에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3.1운동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민족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좋은 결실을 가져오게 하며, 더 나아가서 일본과의 독도 문제도 분명한 주장과 함께 강력하게 밀어붙여 다시는 이런 망언이 나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 정신은 3.1운동 정신과 같은 것이며, 이 정신은 모든 인류와 민족의 자존과 독립,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 가장 대표적인 정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신을 이 땅 위에서 더욱 발전 계승해 나가야 한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사명과 희망이 있다.
오늘 본문은 3.1운동 정신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군국주의에 복종하는 관계를 밝혀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가 2주전에 설교했던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씀과는 또 다른 해석이다. 권세라고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도 있다고 성서는 말한다. 역사적으로도 그 당시 일제에 충성하고 협력했던 자들을 잘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는 일제의 권위는 일본인에게는 인정될지 모르나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는 인정되지 않는 권세였기 때문이다. 본문은 국가와 종교의 한계성을 분명히 말씀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라고 한 말씀은 평면상으로는 분명하게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갈라놓은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국가와 교회 간의 문제 해결에 참고와 귀감이 되어왔고, 국가와 종교의 관계 해명에 교과서 모양으로 다루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현대의 복잡한 상황에 제한없이 적용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본적인 자세와 의미를 준다는 뜻에서 국가와 종교에 관한 귀중한 교훈인줄 안다.
세금을 바치는 문제는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정탐(밀정, 스파이)을 보내왔다고 했는데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에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한 일로 되어 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같은 통속에 속하는 자들이었고, 제사장과 헤롯당이 그러했다. 당시 공무원들은 사두개파에 속해 있었다. 바리새인은 세금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을 반대했고 사두개인들은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이 양자택일의 올가미에 걸리도록 모함의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이방 나라인 로마국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로마 정부는 주후 6년 아켈라우스가 폐위된 뒤부터 유대인들에게 1년에 한번씩 남자 어른에 해당하는 인두세를 징수했다. 23절의 ‘간계(간교한 속셈)’는 마가에는 외식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 관공서에 세금을 내는 돈은 데나리온이다.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헬라에서 쓰는 므나라는 화폐와 유대 돈인 세겔이 있었다. 데나리온에는 화폐의 가치와 만든 때를 글자로 표시하였고 그때의 로마 황제 가이사의 형상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이 돈을 사용하는 모든 지역은 가이사에게 속해 있다는 간접적인 뜻이다. 24절 말씀은 가이사의 형상과 연호가 있는 로마 화폐를 가지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는 뜻이고, 재래의 화폐인 세겔로 하나님께 헌금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새상 나라의 선한 시민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선한 시민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곧 하늘나라의 시민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세상 나라만 택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택하는 자는 새상 나라의 참된 내용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하늘나라를 온전히 소유하기를 갈망해야 한다.
종교와 정치의 문제는 인류의 고대 때부터 있어왔다. 소포클즈의 비극이란 이야기에서 안티손이란 공주는 오빠의 장레식에 참석한다. 오빠의 장례식에 공주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나라의 법이다. 그런데도 안티곤은 오빠의 장례에 참석하고 재판을 받는다. 안티곤은 재판석에서 변론하기를 ‘죽은 자의 행사는 신께 드리는 예의이기 때문에 영원한 불문율에 속하는 하늘의 법이다. 하늘의 법에 순종하겠는가, 인간이 만든 지상의 법에 순종하겠는가?‘ 하고 묻는다. 중세기 카톨릭 교회가 속죄부 등 인간적인 부패로 어두워졌을 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늘의 것이냐, 땅의 것이냐의 대결이었다. 천하가 다 덤벼들어도 나는 하늘의 것을 따르겠다는 루터는 보름즈 종교재판의 피고인으로서 ‘여기 내가 서있다.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 개신교의 시작이 되었다. 하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의 문제는 비단 종교와 정치간의 문제만은 아니고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언제나 부딪쳐 오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안이한 법, 넓은 길을 택할 것이냐? 때로는 우리들의 신앙을 좀먹어 버리는 지상의 권위가 억압해 올 때, 돈문제, 혈연관계, 세상적 타협문제 등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모두 주님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분명히 가르고 매사에 식별이 가능할까?
독일의 히틀러 나치 정권 때 유대인 대학살을 단행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면 그때의 독일 기독교는 무엇을 했고, 어머어마한 조직력을 가진 카톨릭에서는 무엇을 했느냐? 죄없이 수백만의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교회가 한마디 반항도 못했느냐? 그때 천주교의 당면 문제는 두가지 길이 있었다. 뒤에 후환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유대인 학살을 반대할 것이냐, 아니면 카톨릭 전체 조직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타협할 것이냐? 악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지체없이 단호하게 싸워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 악을 건드리다가는 현재있는 구조마저 완전 박살이 날 판인데 현재의 교회 형태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나? 예수님의 사상은 절대 사랑이요 평화주의라면 그를 따르는 오늘의 제자들이 어찌 사람을 죽이는 전쟁연습을 하고 총쏘는 훈련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군대 입영을 반대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의 신앙이 더 좋은 신앙이요 하나님이 뜻일까? 전쟁은 무조건 악이라 해서 휴전선에 군인 한명도 세워놓지 않는 것이 좋은 신앙일까? 이 복잡하고 불분명한 현실 속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원리원칙에서 가이사와 하나님의 것은 분명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쉽게 둘을 갈라놓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인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란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을까? 우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구실로 묻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우선 이런 무모한 올가미에 걸려넘어가서는 안되겠다는 의도가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면 유대 애국주의자의 비위를 건드리게 되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막강한 로마제국의 현실적인 형사법에 걸리도록 되어 있다. 예수님은 올가미에 걸리지도 말아야겠지만 그 올가미를 놓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깨닫게 하고 자신들이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이쯤되면 예수가 아무리 날고긴다해도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겠는가 하고 의기양양 했었다. 그야말로 물샐 틈이 없는 작전계획이었다. 그러나 인간들만의 생각과 행동에는 반드시 허점이 있다는 것을 감안할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하다. 꼭 그렇게 돼야만 하는 필연성은 인간에게는 없다. 그런 필연성에는 차선의 방법이라든지 더 좋은 방법 등을 묵살해 버리는 허점이 잇다. 그러므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물음에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미련을 두려는 말씀, 곧 하나님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냐는 문제는 미련을 둘 문제이지 갑작스레 해결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이사의 것인 것 같지만 두고 보면 하나님의 것이 있고, 하나님의 것임에 틀림없어 보이나 가이사의 것인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더구나 신앙에 있어서 확실히 판단하기 곤란한 점이 많다. 철저히 율법으로 세련된 바리새인의 신앙이 세리의 것보다 확실히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인간들의 사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위선이라고 하신다. 아벨의 제사보다는 가인의 호화로운 제사를 열납하실 것 같으나 하나님은 아벨의 보잘 것 없는 제사를 받으신다.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은 경건한 것 같고 성서적인 것 같고 반할 정도로 유혹이 되지만 그것이 지독한 가이사이 것이라는 것을 알 때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인간적이고 실수가 많고 우리 보기에 영 구원받지 못할 버린 자식들 같으나 그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은 모두가 가이사의 것일 수도 있고, 모두가 하나님의 것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결국 가이사에게 바친다고 해서 그것이 가이사의 것이 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옛날 로마시대에 로마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내는 것은 가이사에게 속한 땅에 살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인데, 그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얼굴이 박혀 있는 것은 그 돈을 사용하는 권내의 인간이나 자연까지 모두가 가이사에게 속한 것이라는 표이다. 그러나 자기 얼굴이나 박혀있는 것을 바쳤다고 해서 천하가 자기의 것이 되는 줄 알고 있는데 이는 웃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모두 하나님의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하신 말씀도 결국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고 바치기 때문에 바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내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곧 가이사의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드리라고 했나? 그것은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읽으시는 주님은 ‘가이사이 것이 있고 하나님의 것이 있는 줄 아는 어리석은 자들아! 그렇게 알면 그렇게 행할 일이지 묻기는 왜 묻느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 일과 하늘의 일을 따로 갈라놓으신 분은 아니다. 세상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살라는 것, 세상과 하늘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 내 마음 속에 하늘나라가 없다면 죽어서도 하늘나라는 있을 수 없다는 것, 이 세상 전체 우리들의 생 전체가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사는 것이 드리스도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전체를 요구하시는 분이지 내것과 하나님의 것,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와서 예수를 책잡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알고 있으면 그렇게 할 일이지 왜 나에게까지 와서 묻느냐는 뜻이다. 이미 자기들의 전제를 가지고 자기들의 해답을 가지고 잇는 자들에게는 설교도 교훈도 필요없는 것이 된다. 그런 자들에게는 ‘네 아는대로 해보라’ 하는 대답이 가장 현명할 뿐 아니라 걸려 넘어가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은 당신들이 결정해서 할 일이지 왜 나에게 물을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이다. 자기들이 결정해서 할 일임애도 어떻게 할까요 하는 것은 겸손한 것 같으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 제일 큰 죄악이다. 무엇이 안되면 모두 남의 허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리가 바로 예수를 잡으려는 심보와 같은 마음들이다. 결국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권고가 주님의 말씀의 이면에 깔려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사랑 안에서만이 옳은 사명에 있고 책임전가도 없으며 제 할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이 세상 온통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요,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어찌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을 갈라놓을 수가 있겠나? 가이사의 것을 위해 바친 것은 혹 제한이 있고 임시적이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것에는 제한이 잇을 수 없고, 낸다 안낸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것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목숨까지도 바치는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신뢰, 확신, 믿음에서만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자. (1996-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