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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골 골짜기 / 호 2:14-20, 막 2:18-22
어느 도시에 예수를 잘 믿는 노총각이 있었다. 그는 큰 사업에 성공을 했으나 혼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아리따운 여성을 중매로 만났다. 그리고 중매쟁이이 말만 듣고 그 여인의 신앙상태를 확인도 않고 그녀와 함께 일생을 같이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 아내가 결혼한지 꼭 8달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고민하던 중에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며 열심히 하나님께 물었다. 그가 기도할 때마다 주께서 그의 마음 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인생이 불쌍하지 않느냐? 그냥 데리고 살아라.’ 그래서 데리고 살기로 하였으나,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아내에게 자백을 하라고 추궁하였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번만 용서하여 달라고 빌었다. 남편은 다시 한번 더 그러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은 후에 그 아들을 기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내는 이 아들이 출생한 후에도 남편이 사업 때문에 출장만 가면 카바레 등을 돌아다니며 제비족과 놀아났다. 한번은 남편이 한달간 집을 비운 사이에 임신하였다. 남편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평소에 못마시던 술까지 마시면서 아내를 추궁하였더니, 뱃속의 아이는 분명히 당신의 아이라고 우겨댔다. 남편은 눈물과 인정에 약해서 그녀와 헤어지기에는 너무도 그 여인을 사랑했다. 그래도 태어나는 자식만은 볼 마음이 없으니 혼자 기르라고 호령하면서 눈감고 지나가기로 하엿다. 이번에는 딸이 태어났다. 그는 아기가 태어나던 날 혼자서 밤길을 거닐다가 돌아왔다. 아내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아내와 아기가 있는 방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아주 좋은 약이었다. 1년쯤 지나자 비록 정체불명의 딸이지만 이 딸의 재롱이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남편의 마음의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 갔다. 그런데 사업을 확장하다보니 1년간 외국에 나가있게 되었다. 그는 아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부탁을 하고 또 부탁을 하였다. 아내는 염려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믿기지 않았지만 사업 때문에 할 수 없이 외국으로 갔다. 1년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또 임신을 하였다. 딸이 젖을 떼자마자 아들이 태어났다. 이번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이혼장을 내놓고 ‘이 아들은 누구 아들이냐?’고 물었다. 아내는 자기의 추한 과거를 고백했다. 아내의 소행은 괘씸하였지만 그녀를 버리기에는 너무도 사랑하였으므로 한번 더 용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대신 벌어다주는 돈으로 부정하고 다녔으므로 저금통장만은 빼앗았다. 그리고 이제 새출발을 하자고 다시 두 손을 잡았다.
이 이야기에서 남편은 하나님이고 부정한 아내는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고 또 떠나가는 하나님 앖이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사 54:5절상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서 우리와 생애를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집요하게 하나님 없는 삶을 추구한다. 약 4:4절상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간음은 단순한 도덕적인 간음이 아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주님과 더불어 살아야할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성서는 음행에 빠졌다고 말씀한다. 본문에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라고 하였다, 성서는 이 여인들이 처하여 있던 삶을 가리켜 아골 골짜기라고 말씀한다. 이 여자의 삶은 아골 골짜자기에서의 방황이었다.
수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의 전투에서 무참하게 패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아간이란 한 사람의 범죄 때문이었다. 탐욕과 욕정을 이기지 못해서 범죄했던 아간이란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주었고, 말할 수 없는 비극을 경험하도록 하였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힘주십사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서 죄악을 버리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범죄자 아간이 색출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죽였다. 그리고 그가 범죄한 물건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와 물건들이 불타는 화염으로 끓어오르던 골짜기를 아골 골짜기라고 부른다. 이곳은 범죄의 골짜기이며 환란의 골짜기였다.
성경에 나타난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였던 고멜이란 여인이 처하여 있던 삶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 없이 범죄한 자리에서 방황하는 인생의 골짜기이다. 우리 중에 환란의 골짜기와 범죄의 골짜기에 빠져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없는가? 이제 이런 아내를 향해서 말하는 호세아의 음성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호세아는 지금까지 아내의 범죄, 음행과 부정한 역사들을 쭉 증거하였다. 그 다음에 ;그러므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했는가? 그 여인을 위로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파격적인 사랑이다.
1.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호세아는 그를 타일러서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서 말로 위로한다고 하였다. 왜 거친 들로 아내를 데리고 갔을까? 조용히 아내와 단둘이 그의 삶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서주석을 보면 여기서의 거친 들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서 가던 도중의 광야, 다시 말하면 훈련의 광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 없이 방황하는 우리에게 삶의 교훈을 베풀기 위해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나가신다.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우리를 교훈하시어 우리와 바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때때로 이 광야는 고독일 수 있다. 명예의 훼손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별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은 낙원에 거하고 있는 동안은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인파 속에 싸여서 재미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가 있다. 하는 일들이 순조로울 때 주의 이름을 망각한다. 권력이 상승할 때 인생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오만할 수 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느날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신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우상이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할 최선의 계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의 골짜기에 빠져서 방황하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3절상에 보면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쾌락과 즐거움과 사치와 허영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은 남편을 잊었다고 말한다. 사업이 잘 되자 하나님을 망각한다. 명예가 높아지자 하나님을 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추방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자녀된 신분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사람 가운데서 누가 이런 배신의 쓰라림과 억울함을 당하고서도 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현저하게 다름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아골 골짜기에 위로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거친 들판에서 고독하게 울고 있던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을 보라.
2. 하나님의 위대한 소망이 있다.
1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어로 주인이란 말은 바알이고, 남편은 잇쉬이다. 이 여인은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체면이 서지 않았다. 감히 남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여인은 갈등 속에서 번민하였다. 마치 탕자의 심정과 같았다. 그가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지만, 차마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무엇이라 말하나? ‘아니다. 너는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이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여기서 가슴으로 품어주는 놀라운 사랑을 엿볼 수가 있다, 위대한 회복의 역사가 있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연인처럼 대접하시며 영광스런 신부로 삼아주시어 우리의 남편이 되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탕자의 회복은 처음보다 더 축복스러운 것이었다. 여러분, 에덴보다 다시 찾은 새하늘과 새땅의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복된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미래의 복된 소망을 주신다. 본문에 나타난 남편의 사랑은 모든 부정을 잊고 어두운 시절이 없었던 아내처럼 여자의 권한을 회복시켜 신혼의 감격속에서 아내를 맞이한다. 여기 이런 남편의 사랑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9-20절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