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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 / 사 61:10-62:5, 계 7:13-17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인데 장막이 무엇인지 아는가? 천막은 알지요? 우리가 야외예배 때 치는 천막은 천정만 있다. 그런데 장막은 옆에도 둘러져 있는 천막으로 바람 등을 막아준다. 천막에서 생활한다면 참 불편할 것이다. 작년 야외예배 때 천막 지주대가 바람에 날리면서 제 머리에 부딪혔다. 잠깐 사용하기 위해 친 천막도 이런데 이동하면서 치는 천막은 어떨까요? 젊을 때 야외로 놀러가서 하룻밤 자는 것이야 재미있다고 하겠지만 영원토록 천막에서 살아가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장막은 이스라엘에서 떼를 지어 이동하면서 짐승을 기르는 유목민, 양치는 목자, 군인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만든 주거용 천막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여 만든 성막도 장막의 일종이다. 장막은 낮의 뜨거운 햇빛과 밤의 추위와 들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으로 안전과 보호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해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보호하며 평안히 거주할 수 있게 한다는 깊은 뜻이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장막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이렇게 보호하겠다는 뜻이 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런 장막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지 않은가? 옆 사람에게 다같이 말해 보자. ‘아무개님, 하나님의 장막에서 사세요.’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래 하나님의 장막에서 복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주할 보금자리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장막에 거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영원히 행복한 자라고 하였다.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다시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상하지도 않으며 참된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의 학정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몰래 모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주리고 헐벗고 목마르고 눈치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모습이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장막에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상하지도 않으며 참된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된다며 위로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에 시편 기자는 84:1-2에서‘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도 고후 5:1-2에서 ‘손으로 지은 장막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 모든 성도들 역시 그 하늘 장막을 향해 오늘도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축복을 누릴 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1. 죄 문제를 해결한 자입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피로 옷을 빨면 옷이 하얘질까? 피로 옷을 빨면 붉게 되지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문제를 용서받고 성결해진 사람을 가리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 곧 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도 심각한 과제가 죄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야말로 인류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복된 장막에 거할 수 있는 여부를 가늠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 5: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이렇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단코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복된 하늘의 장막에 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해결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행 4: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일가족 6명을 무참히 죽인 살인마 고재봉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한 후에 동료 죄수 1,800명을 전도했다. 또한 짐승 같은 김대두는 18명을 죽였지만 회개하고 구원받아 3,000명을 전도했다. 종로 골동픔 가게 ‘금당’ 살인사건의 범인 발철웅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라는 참회록을 남겼다. 그리고 자기의 제자인 이윤상 군을 죽인 냉혈인간 주영형도 수감 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고, 죽기 전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기증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런 사실로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믿게 된다.
우리가 영원한 하늘 장막에서 복된 삶을 누려야 한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과학의 발달이나, 문화의 진보는 우리를 영원한 장막의 복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영원한 장막의 복된 삶을 보장받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 바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해결자이시다. 누구든지 그 분께 믿음으로만 나아오면 모든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 그래서 진정 의로운 자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2. 주를 위해 일한 자이다.
본문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고 하였다. 이에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위해 봉사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 때의 일이다. 봉우교회(현 경동제일교회)에 임귀현이라는 마부꾼 출신 영수가 있었다. 그는 말을 끌고 다니는 시간과 집에서 밥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라도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는 4시에 잠이 깨면 먼저 예배당에 나가서 엎드려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청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일을 나갔다. 그리고 저녁 때 집에 돌아와서도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문단속하고 돌아와 잠을 잤다. 이것이 평생토록 그의 일과였다. 이때는 전깃불이 없어서 석유 등에다가 블울 켜고 살 때인데, 주일 밤이나 수요 저녁에는 예배위원들보다 먼저 가서 10여 개나 되는 남포등을 말끔하게 닦아 놓았다. 그 성의와 정성을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그를 위해 봉사하는 자는 자기의 지혜나 방법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신 11:1절의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인간의 뜻과 방법으로 일하는 자들은 이 땅의 일시적인 영광과 장막에 더 큰 관심과 목적이 있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장막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진정 하나님의 뜻과 방법만을 따라 순종하며 그 뜻을 이루기에 최선의 헌신과 봉사를 다하는 자들이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은 하늘 나라에서도 멈춰지지 않는 중요한 일상생활이다. 그러므로 천국생활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의 생활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정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장막에 거하기를 원하는 자라고 한다면, 자신과 세상의 일들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 주님을 위한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3. 믿음으로 큰 환난을 이겨낸 자입니다.
또한 본문 13-14절에 보면 흰 옷입은 자들이 큰 환난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흰 옷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환난을 이기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을 상징한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뜻만을 따르고 이루려면 필연적으로 환난과 역경이 찾아온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그들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고쳤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 그들을 신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말리며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임을 밝혔다. 그때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대하는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이 몰려와 군중들을 선동해 바울을 돌로 친 후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내다버렸다. 성도들이 달려와 둘러서 있는데 그때야 바울이 깨어나 아픈 몸을 이끌고 성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각지를 다니면서 성도들에게 굳세게 마음먹고 항상 믿음에 충실할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말했다. 이 말씀처럼 굳건한 믿음으로 여러 가지 환난을 통과하고 이겨낸 자가 결국 하나님의 장막으로 인도함 받게 되는 것이다.
악한 세상 가운데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환난 속에서 믿음을 잃고 낙심하며 세상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장막에 이를 수 없다. 이렇듯 성도의 길이 어렵고 힘든 것은 사실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데 있다. 어떤 경우에도 세상과의 타협은 불의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고의적인 반역임을 알아야 한다. 불의와 죄악과 타협하는 자들은 아무리 그 구실이 보편타당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환난과 박해를 피하려고 믿음을 배반하는 심각한 죄를 지은 자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의 영원한 장막을 향한 길은 결코 쉽고도 안일한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박해 없이 고난의 주와 동행할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내 뜻과 정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택하며 복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또한 약 1:2-3절의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는 말씀처럼 모든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도 결단코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원한 장막은 분명 여러분의 거할 처소로 허락될 것이다.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란 모든 시대의 모든 환난을 겪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자들을 말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속에서 승리한 모든 성도들이다. 이들에게는 영원한 인식과 풍요함이 있으리라고 약속한다. 환난을 이기고 거쳐 나가면 그 이후로는 다시는 고통도 주림도 목마름도 없는 영원한 평강의 삶을 보장받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몇 십년에 불과한 이 땅에서의 삶의 질곡과 고통을 인내하고 승리하여 마침내 복된 삶을 쟁취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만이 이린양의 피로 씻긴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장막을 사모하는 있는가? 생활 여건이 점차 좋아져서 이 땅에 있는 장막이 넓어진다고 하늘이 장막을 잊고 살지는 않는가? 아니 이 땅의 장막을 넓히기 위하여 하늘의 장막에 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지체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결코 이 땅의 잠시잠간 동안 있을 장막을 위해 영원한 하늘 나라 장막을 상실해서는 안되겠다. 하늘 나라 장막에 거할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죄 문제를 해결한 자이다. 하늘 나라 장막에 거할 수 있는 자는 주님과 그 분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한 자이다. 또한 하늘 나라 장막에 거할 수 있는 자는 믿음으로 큰 환난을 이겨낸 자들이다. 진정 우리 모두 이러한 자격을 갖춤으로써 영원한 처소요, 지극히 영화로운 하나님의 장막에 온전히 거하는 자들이 되자. 죄의 나태함과 낙심함으로 인해 그 귀한 장막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다같이 따라 하세요.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이 됩시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환난을 극복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그 피의 능력을 의지하기 바란다.
< 축 도 >
지금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풍성하신 긍휼로 사랑을 나타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속 사람이 강건하도록 날마다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도우심과 교통하심이, 오늘 주의 전에 나와 예배하며 구원 얻은 기쁨을 다시 한번 느끼고 감격하여 돌아가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그리고 저들의 가정과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실지어다. 아멘. (2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