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지만 한 발 한 발 / 최종호
3월 중순부터 복지원에서 한글 공부가 시작되었다. 평소에 하던 대로 수업을 몇 차례 하는 동안 이제껏 가르쳐 왔던 순서와 방식으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스러웠다. 놀란 나머지 담당자에게 그 아이의 궁금한 점을 몇 가지 물어 보았다. 낮은 지능 때문에 학습이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했다는 말과 함께 이곳 시설까지 온 과정과 성장 배경을 알려 주었다. 그제야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법을 달리했다.
전문가는 1학기 안에 단모음(ㅏ, ㅓ, ㅗ, ㅜ, ㅡ, ㅣ, ㅔ, ㅐ)은 깨칠 것이라며 포기만 하지 않으면 2년 안에는 글을 읽을 수 있으리라 예견했다. 하지만 여름방학 전에 그가 예상한 진도보다 더 나갔다. 복모음의 일부인 ㅑ, ㅕ, ㅛ, ㅠ, ㅖ, ㅒ까지 가르친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특히, ㅠ는 단번에 알아맞히지 못하고 ‘우’라고 했다가 ‘유’라고 하며 나를 쳐다보기 일쑤다. 반복이 약이라는 것을 알기에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마저 곧 확실히 터득하리라.
처음에는 ‘ㅓ’와 ‘ㅕ’를 구분하는 데도 어려워했다. ‘ㅓ’를 계속 ‘여’라고 해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확실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물론 조언을 받아 지도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입모양 카드로 다른 점을 설명하고 여러 번 따라했다. ‘ㅕ’는 ‘ㅓ’보다 강하게 발음하라고 했더니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ㅠ’는 어려워한다. 하지만 그 때에 비하면 괄목상대하다. 다루기가 많이 수월해졌다. 덩달아 아이의 자존감도 올라간 것 같다.
요즘에는 일명 ‘왜 삼형제’인 ‘ㅙ, ㅞ, ㅚ’와 ‘ㅘ, ㅝ’를 가르친다. 앞 모음은 짧고 약하게 발음하도록 한다. 뒤에 있는 모음과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 모음과 뒤에 있는 모음을 점점 빠르게 붙이다가 어느 순간 동시조음을 하는 것이 요령이다. 형태에서 보이듯이 두 단모음을 합친 소리다. 이대로 죽 가면 복모음을 다 가르치는 데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다음, 자음과 받침까지 가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나 가장 어려운 지점을 지난 것 같아 희망이 보인다.
학기 초, 방금 가르쳐 준 것을 잊어버리고 “뭐였더라? 아이고, 이 바보.”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때리고 나서 나를 보며 멋쩍은 표정을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공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머리 아파요. 오늘은 그만하고 싶어요.”라며 당황스럽게 한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녀석보다 조금 나은 아이도 같은 시간대에 공부하는데 먼저 가르쳐서 보내려고 하면 “나도 갈래요.”라고 한다. 하지만 2학기에 들어서는 많이 달라졌다. 비록 두번 밖에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보였던 거슬린 행동은 하지 않는다.
방학이 끝나고 나서 그동안 배웠던 것을 많이 잊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체계적으로 반복해서 가르치면 뇌에 읽기 회로가 생긴다는 전문가들의 말이 맞는가 보다. 난독증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샐리 세위위츠(Sally Shaywitx)는 『난독증 이겨내기』에서 “누구든지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가르치지 못할 아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 얘가 지금까지 내게 거쳐간 녀석들과 많이 다르기는 하나 더디게나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니 막힌 물꼬가 트인 듯하다. 목표에 도달할 시점이 그리 아득하지는 않은 것 같아 도중에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책임감도 느끼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클테니까.
첫댓글 좀 더디더라도 선생님이 애쓰시는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2학기가 끝날 때 즈음이면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타나서 미소 지으실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선생님이 노력하신만큼 아이도 발전하리라 봅니다. 아이에게 선생님은 은인이십니다.
이마를 치는 아이와 바라보는 선생님. 선생님 힘드실 텐데 전 즐겁게 읽었습니다.
참 힘든 일을 꾸준히 잘하고 계시네요.
아이와 선생님께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역시 난독증 전문가라 다르시네요. 응원합니다.
서냉님과 학생들을 응원합니다. 아자!!!
자세히 써 주셔서 읽고 있는 제가 지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단하신 선배님 존경합니다.
한글 가르치는 과정을 글로 썼는데도 이렇게 재밌는 글이 나오다니요. 글도 꾸준히 쓰시고, 더딘 아이들을 품고 지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도 멋집니다.
오,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