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의 목적이 단지 거주를 위한 것이라면 소로우가 집에 대해 내린 정의가 그것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 자신이 살 오두막을 지을 터에 먼저 지하 저장고를 팠다. “나는 이렇게 땅을 파는 데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는데, 그것은 어떤 위도의 지역에서든 땅속을 파고 들어가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가장 웅장한 저택 밑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뿌리채소를 저장해두는 지하 저장고가 있다. 그 건축물이 사라지고 난 오랜 후에도 후손들이 땅속에 있는 그 움푹 팬 곳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집이란 것은 여전히 굴 입구에 만들어 놓은 일종의 현관에 불과하다.” 그 지하 저장고 즉 동물의 굴이 진정한 집이고 그 위에 세워진 건축물은, 제아무리 으리으리해도, 그 굴로 들어가기 위한, 그리고 머잖아 사라지게 될, 현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아쉽게도, 나는 내 마음에 들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현관을 한 번도 짓거나 소유한 적이 없고, 이제까지 나에게 집은 주로 주거 목적으로만 기능했다. 집에 관한 나의 이력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돌이켜 보니 나는 이제까지 총 두 번 집(아파트)을 구입했고 아홉 번 이사를 했다. 나는 기다란 툇마루가 있는 오래 된 초가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 집이 우리 집이었다. 광주에서 중·고·대학교를 다니면서는 여기저기 기와집이나 양옥집에서 빌붙어 살았다. 1984년 결혼하면서 19평짜리 운암동 주공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는데, 그 집에서 3년을 사는 동안 나와 내 아내가 맞벌이해서 모은 돈에 살고 있던 아파트의 전세금을 합하고 또 은행에서 융자도 받아서 30평짜리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들어갔다. 연탄보일러를 때던 주공아파트에서 살다가 도시가스 난방에 라인마다 엘리베이터가 운행하는 당시로서는 최신 고급에 해당하는 그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날 나는 널찍한 앞 베란다에 나가 멀찍이 보이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찼다.
그 아파트에서 채 1년도 살지 않고 뉴욕으로 건너가서, 처음 생활하게 된 집은 창문도 없는 7평이 채 되지 않는 반지하 스튜디오룸이었고, 거기에서 2년쯤 살다가 6층짜리 다른 아파트 건물의 꼭대기층 원베드룸으로 이사했다. 나는 이사했던 그날 그 집에서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 만족과 황홀의 물결에 휩쓸린 기분이었다. 우리나라로 하면 대략 17평 정도 크기의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는데도 조그만 침실이 하나 따로 있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앞쪽 창문으로 하늘과 사람들 사는 세상이 훤히 바라보인다는 것 때문에 나는 가슴이 설레다 못해 벅차올랐다. 특히 이사한 첫날 저녁에 창문을 통해서 멀리 넓게 내려다보이는 바깥 풍경과 거리의 불빛, 흘러가는 자동차들, 보도의 사람들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3년을 살고 나서 가로수 길과 숲, 호수가 있는 한적한 외곽 마을로 다시 이사했고 그때도 기분이 날아갈 듯 흐뭇했다. 그러나 그런 흐뭇함은 대체로 두세 달 정도 유지되는 것 같다.
더 좋은 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얻는 만족감은 계속해서 유지되는 게 아니다. 최초의 만족감은 곧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만족감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만족감이 사라진 마음의 자리에 다시 결핍감이 생기고 더 크고 좋은 집에 대한 욕망이 떠오른다. 지금 나는 중소형 아파트에서 18년째 살고 있다. 불편한 건 없다. 하지만 흡족하지도 않다. 특히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값이 해마다 거의 수직 상승하듯 치솟아 그곳의 집주인들이 급 부자가 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심기가 불편하다. 심지어 낙후해 가는 지방 도시인 광주에서도 어떠어떠한 신축 아파트가 기존 아파트보다 가격이 몇 배 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잠자코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난뱅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씁쓸하다.
집의 근본목적은 물론 거주이고, 그것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은 안락과 편리함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먹고 마시고 잠을 자는 데는 14평이나 104평이나 별 차이가 없다. 우리의 몸은 제 크기를 벗어나서 공간을 점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큰 집의, 제아무리 큰 침실에서, 제아무리 큰 침대 위에서 잠을 잔다 하더라도 우리가 잠들어서 점유하는 공간은 자신의 몸의 크기를 넘어설 수 없다. 그밖에 다른 기본 생활을 하는 데도 순전히 신체적 차원에서라면 개인은 자기 몸의 크기를 훨씬 초과하여 공간을 차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명사회에서 집은 다른 동물의 굴처럼 단순히 은신처의 기능만 하는 게 아니다. 집이 단지 그런 기능만 하는 거라면 인간의 집이 다른 동물의 굴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오늘날 집은 그러한 차원을 훌쩍 넘어서 여러 가지 다른 목적과 기능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정든 임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에서 사는 데 만족하지 않으며, 아무리 “님과 함께”라도 “반딧불 초가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으스대는 “멋쟁이 높은 빌딩”에서 혹은 크고 멋진 저택이나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도널드 트럼프가 말하는 “머니 머신”(money machine)—가 된 오늘날 우리에게 집은 그 안에서 거주하는 곳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직접 짓고 가꾸고 꾸미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해 가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즉 자아실현의 대상과 수단으로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 멋진 전원주택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EBS TV의 “건축탐구 집”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다. 멋진 전원주택을 갖고 싶은 시청자의 욕구를 자극하면서 동시에 좋은 집을 자랑하고 싶은 집주인의 욕구를 충족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주는 집의 디자인에서부터 인테리어의 세부사항, 사용하는 자재의 질감, 정원과 조경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자신의 성향과 의도, 가치관 등을 반영하여 손수 노동하며 집을 만들어 간다. 그런 활동을 ‘짓는다’고 한다. 글도 옷도 짓는 것이기는 하지만, 집을 짓는 만족감은 다른 어떤 걸 짓는 즐거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보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직접 실행해 보지 못했으니 그저 그렇게 짐작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 TV프로그램의 집주인들처럼 자기 집을 시청자라는 만인에게 소개 혹은 자랑하는 데서도 못지않은 만족을 느낄 것 같다.
하지만 집 자랑이 조금 더 확대 왜곡되면 집이 과시적 욕망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한 사람이 인생에서 승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불특정 다수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집이다. 물론 옷이나 자동차, 백 등도 과시의 수단이 되지만 성공을 만인에게 과시하기에는 집이 최고다. 왜냐면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집은 지어놓기만 해도 그 자체의 위용이 그걸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 집 주인의 성공과 부, 권세를 과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대저택을 짓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살아가는 걸 머릿속에 그린다기보다는 그걸 통해 자신의 성공과 권세를 한껏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 사회와 영원히 차단된 무인도에서 아방궁이나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놓고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웅장한 집을 지어서 과시하는 것이 특별히 더 큰 차별적 만족감을 주는 또 다른 이유는 대저택이 옷, 가방, 자동차보다 성취하기에 훨씬 더 어려운 것이어서 아무나 쉽게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한 사람이 종종 맨 먼저 하게 되는 일은 크고 좋은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 상징적인 인물이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이다. 그는 뉴욕시에서 막강한 부를 성취하자 롱아일랜드에 대저택을 지었고 그걸 과시하여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다시 그걸 통해 옛 애인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대저택이 우월을 과시하는 데는 그 배경에 다수의 초라한 누옥들이 있어야 더욱 효과적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화자인 닉의 누추한 집이 그런 대비적 기능을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누군가의 과시를 통한 우월감은 그 배경을 이루는 주눅 든 다수의 열등감을 전제로 해야만 위력을 발휘한다. 자랑질이나 과시는 열등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우월한 사람들이 쾌감을 얻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심리적 가학 행위이다.
외관의 위용을 통해 직접 과시할 수 있는 단독주택과는 달리 공동주택인 아파트는 위치와 브랜드, 평수가 가격 결정의 요인이고, 그 가격이 곧 과시의 징표이다. 멋진 단독주택이 직접적이고 실물적인 과시라면 개별적인 집의 모양을 직접 보여줄 수 없는 값비싼 아파트는 기호적이고 개념적인 과시이다. 어떤 아파트가 좋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은 그곳이 그 지역 주민들의 어떤 욕망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화적 욕구일 수도 있고 경제적 욕구일 수도 있고 교육적 욕구일 수도 있다. 간혹 그게 좋은 자연 환경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있지만 그런 욕구의 영향력은 미미하고,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아파트의 위치는 주로 사회문화적인 요인에 의해서, 심지어 집단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건설회사에 따른 아파트 브랜드 개념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허구적이다. 물론 견실한 대기업 건설회사가 더 큰 자본이나 앞선 기술, 체계적인 경영을 통해서 더 튼튼하고 더 쾌적한 아파트를 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런 대기업에서 지은 아파트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도 더러 있으며, 그 안에 살면서 브랜드 때문에 실제로 더 큰 이점을 얻지는 않기 때문에 값비싼 아파트의 브랜드가 반드시 그만큼의 실질 가치를 보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아파트 브랜드에 대한 선호에는 막대한 돈을 들여 실행하는 광고비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위 명품 브랜드 상품이 그걸 구입하는 데 들인 돈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담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급 브랜드에 실절적인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브랜드 값은 대부분 심리적·허구적 가치이다. 그만큼 그것은 과시 목적에 부합하다.
이른바 ‘똘똘한’ 아파트를 소유하려는 또 다른 주요 목적은 투자이다. 재산을 늘리는 방식에는 저축이나 주식 투자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을 통한 재테크보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식이 있을까? 내가 아는, 부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렸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서울에 산다. 서울의 아파트는 사놓기만 하면 액면가치가 해마다 ‘따블, 따따블’로 불어나는 유가증권인 셈이다. 즉 집이 사놓고 값이 올라가기를 기다렸다가 되파는 상품이 된 것이다. 굳이 지금 당장 팔아서 현금으로 바꾸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울의 집은 돈이 그득 채워진 든든한 금고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가난해졌으며, 새로 집을 마련하고 삶을 시작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자기 집에 대한 꿈이 불안과 좌절을 안겨주는 악몽으로 변질되었다. 누군가가 그처럼 불행하게 되었다면 그 반대쪽에 그만큼 행복하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집값이 오른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건물의 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땅값이 오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건물 자체는 사는 순간부터 낡기 시작하므로 그 가격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으며, 오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땅값은 왜 오르는 걸까? 그것은 땅이 가진 사회문화적 특성 때문이다. 땅의 사회문화적 특성이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땅을 이용할 때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것은 땅이 다양한 용도로 이용될 수 있다거나, 나뉠 수도 있고 합쳐질 수도 있다거나, 사회적·경제적·행정적 위치에 따라 가치와 가격이 변한다는 특성을 말한다. 이러한 특성은 인간이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자연 상태의 땅을 개발, 활용함으로써 부가되는 특성이며, 바로 그것 때문에 땅값이 변동한다. 어떤 땅이 황무지로 남겨져 있는지 아니면 개발되어 농토나 산업 용지, 상업 용지나 택지가 되는지에 따라서 그 가격이 심하게 달라진다. 즉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이용 방식에 따라서 땅의 가격은 엄청나게 변동한다.
어떤 지역의 땅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는 계기는 주로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영향에 의해서이다. 즉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어떤 특정 계층이나 집단이 어떤 특정 지역을 개발하려고 계획하면서 그 지역의 땅값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 현상은 대도시가 발달하는 경우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거의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도시 영역 안에서도 어떤 특정한 지역—서울 강남처럼—의 땅값이 단기간에 치솟는 것은 그곳을 개발하기 위한 정책적 결정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처럼 땅값이 치솟는 양상은 ‘시작은 미미하지만 실로 그 끝은 창대하다.’ 시작 단계에서는 땅값이 몇몇 사람들이나 어떤 특정 집단의 의도와 계획에 의해 통제될 수 있지만, 상승 속도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사회 전체의 집단 심리에 의해 좌우되므로 정부 정책도 좀처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간단한 원인이나 계기에 의해서 촉발된 사회현상이 집단 심리에 의해 시너지가 생겨나고 그것이 증폭되고 또 증폭되는 것이다.
집을 재산 증식의 가장 유력한 수단으로 삼아 투자하거나 투기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즉 부동산 재테크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사회는 존립이 불안정한 사회이다. 올라간 집값으로, 즉 올라간 땅값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용인된 착취이다. 그래서 그 소수의 수혜자들에 대해 그렇지 못한 다수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거기에서 사회적 불신과 적대감이 생겨난다.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회는, 즉 집을 사고팔아 부자가 되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그것은 정당한 수입이라기보다는 착취에 가깝다. 특히 지구라는, 본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땅을 사고팔아 부를 축적하는 건 부정한 행위이다. 지구상에 인구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제한된 자원인 땅이나 제한된 재화인 집에 대한 수요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가격도 오를 수밖에 없다. 일시적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지구상 인구가 줄어들거나 문명이 퇴보하지 않는 한 전체적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땅과 집은 항상 부족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강자가 더 넓은 땅과 더 크고 좋은 집을 더 많이 차지하게 되고, 약자가 그만큼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그처럼 한정된 땅과 집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의 경쟁은 개싸움과 다를 바 없다.
첫댓글 샘의 6층 원베드룸 아파트의 감동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나무가 좋아서 햇볕이 좋아서 라고 했더니, 너무 낭만적인 소리한다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는데요. 호미님 글을 읽으니 좀 위로가 되네요. ㅎ 정독했습니다.
좁은 땅 그것도 반토막난 땅에서 집이 재테크 일순위 수단이 되는 대한민국의 불안정한 사회를 반영하는 것 같아 참 씁쓸합니다.ㅜㅜ 술술 강의를 듣는것처럼 글에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뉴욕 그 비싼 주거비의 도시에서 "6층짜리 아파트 꼭대기층 원베드룸"에 들어가셨을 때 정말 기뻤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현직 의사이고 자신도연금을 받는 한 친구도 얼마전 뉴욕을 여행하면서 호텔이 너무 비싸서 서둘러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고 하네요~~~
저장고나 굴이 있으며,뒤꼍에 샘이 있는 집이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