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눈과 카메라는 서로 비슷한 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눈꺼풀과 셔터, 홍채와 조리개, 수정체와 렌즈, 망막과 필름이 각각 대응하는 기능을 하면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고루 본다. 그에 비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반적인 카메라는 거의 대부분 좋은 일만을 본다. 여행에서 감탄하는 멋진 풍경이나 꽃구경에서 보는 아름다운 꽃들,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인상적인 자연의 사물들, 잘 생긴 자기 자신의 모습(셀카), 결혼식이나 생일에서의 기쁨 등 행복한 순간들을 본다. 반면에 보안용 감시 카메라, 흔히 말하는 시시티비 카메라는 주로 나쁜 일을 보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려는 조짐을 본다. 즉 그것은 범죄 상황을 보거나 범죄 이전 단계 상황을 미리 보아 우리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눈이 시시티비 카메라가 아닌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하루 24시간 주 7일 일 년 365일 시시티비 카메라는 쉼 없이 나쁜 일이나 그 조짐만을 보니 매우 괴롭고 피곤할 것 같다. 어쨌든 우리의 눈이든 기계장치인 카메라든 대상인 사물을 본다. 그렇다면 그 대상을 보는 주체 즉 나 자신의 마음은 누가 혹은 무엇이 볼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걸 성찰이라고 한다. 우리의 “글쓰기 치료 연구” 강령에도 “진솔한 자아 성찰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사실 모든 문예적 글쓰기는—일기든, 편지든, 문자 메시지든,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어느 정도 성찰적 성격을 띤다. 그래서 거기에는 그만큼 자신의 생각과 경험, 시각과 감정, 가치관과 성격 등이, 싸잡아서 자신만의 스타일이라는 개념으로 반영된다. 그런데 문제는 성찰에 ‘영원한 맹점’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자신을 제아무리 철저히 비추어 보려고 해도 영원히 볼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다. 다른 모든 사람들 눈에는 훤히 보이지만 자기 자신의 눈에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나의 어떤 부분이 있다. 그게 참 이상하고 아이러니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달린 시시티비 카메라—자신의 멋진 모습이나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부족한 부분이나 고통스러운 면을 반성적으로 살펴보려고 하기에—를 통해 지금 자신의 마음속 괴로움을 살펴보거나 그 녹화 장치에 담긴 문제 되는 장면을 재생해 봄으로써 우선은 평안을 얻으려 하고, 다음으로는 자신이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글쓰기가 바로 그러한 성찰의 유력한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런데 또 다시 아이러니컬하게도 성찰이라는 행위의 결과가 반드시 유익한 건 아니다. 성찰을 통해 자신의 뭔가 잘못된 부분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 결과 마음이 위축되고 마음속이 어두워질 수 있다. 자신이 행하는 성찰의 한 가지 부정적인 효과를 지적하자면 그것이 자칫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경우는 성찰이라는 행위가 내가 겪은 모든 실패와 고통, 능력의 한계 등에 대해 자책하게 만드니 결과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줄어들고 마음이 위축되는 걸 느낀다. 인생 후반부 시점을 지나면서 절감하게 되는 노화와 더불어 심화되는 그러한 예민한 열패감은 매우 위험하다. 무신론자의 우울증도 아마 그런 종류일 것이다. 신(God)이 자기착각의 산물이라 해도 그게 더 유익한 걸 어쩌겠나.
그래서 우리는 때로 자신의 마음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관대한 착각을, 그리고 자신의 열정을 덥히기 위해서 강렬한 환상을 필요로 한다. 가수 남진의 “나야 나”(작사 양인자, 작곡 차태일)라는 노래가 그렇게 외친다. “아자 내가 뭐 어때서/ 나 건들지마/ 운명아 비켜라/ 이 몸께서 행차하신다/ 때로는 깃털처럼 휘날리며/ 때로는 먼지처럼 밟히며/ 아자 하루를 살아냈네/ 나야 나야 나 나야 나야 나/ 밤늦은 골목길 외쳐보아도/ 젖은 그림자 바람에 밀리고/ 거리엔 흔들리는 발자국/ 어둠은 내리고 바람찬데/ 아자 괜찮아 나 정도면/ 나야 나야 나 나야 나야 나”
착각이나 환상은 부정확한 것이고 때로는 틀린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건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심리적 기제일 수 있다. 그래서 그게 우리에겐 꼭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이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실상이 아니라 모호하고도 찬란한 환상을 가져야만 멀고 험한 길을 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착각이나 맹점을 가져야 보다 더 활기차고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속을 샅샅이 비쳐보고 그 현실을 수학처럼 오차 없이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그리고 자기 성찰에 ‘영원한 맹점’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안정된 마음 상태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착각은 자유고, 환상은 에너지이다. 지나칠 정도로 나 자신에게 신경과민하고 비판적인 ‘호미’는 아마도 자기착각과 환상의 결핍으로 인해,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자신감을 잃게 되고 불안해지고 그러다가 우울증에도 걸리고 공황장애에도 걸리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노화와 겹치게 된 그런 식의 대책 없는 성찰이 초래하는 무력감이나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나의 시선과 관심을 바깥세상의 일—주로 정치적인 상황이나 사회적 부조리—들 쪽으로 돌리고, 거기에 개탄과 비난의 화살을 맹렬히 쏘아대며 어떤 정치인을 맹목적(盲目的)—눈이 먼 상태에서—으로 나쁘게 보며 미워하고, 그 반대쪽 정치인을 역시 맹목적으로 좋게 보며 지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나 자신을 진보나 보수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원인이자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런 생각도 착각일 수 있겠지만, 착각은 자유니까.
첫댓글 ’착각은 자유, 환상은 에너지‘
운율이 따~딱 맞습니다.
뇌속임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미래에는 더욱 유용하지 않을까합니다. 저는 이걸 연습해요.ㅎ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려면 적당한 착각이나 환상이 있어야겠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