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목사 안수에 새삼 한 마디
이진우 (2016,08.17.14:15)
근일에 벗 주도홍 교수가 작심하고 올린 글을 보았다. 여전히 일부 교단에서는 ‘뜨거운 감자’인 여성 목사 안수 건에 관한 글이었다.
그는, “여자들은 잠잠하라.” 하면서도 여성들로 하여금 교회 내 다양한 가르침 사역을 펼치게 하는 모순된 현실을 지적하면서, “칼빈의 아내가 사역에 참여한 것과 사도행전의 브리스길라가 가르쳤던 것” 등을 실제 여성 사역의 예로 제시하기도 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 입장에 동의한다.
성경에서 여성 안수 반대를 적시하는 듯한 내용은 바울의 서신서에 등장한다. 그러나 열린 눈으로 성경을 그 흐름으로 일괄해보자. 구약 초기부터 신약의 바울 서신서들까지.
죄로 오염된 인간 세계에서는 약자를 압박하는 일이 전통처럼 당연시되어왔다. 약자 중에 여자가 포함된다. 여자들은 철저히 무시됐다. 그런 문화, 그런 해 아래 세상에서도 끊임없이 여성들이 등장하고 쓰임 받고 존경받는 자리에 섰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사도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들 가운데에도 여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아마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인간 세계의 모든 차별을 철폐하는 바울 자신의 장엄한 결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바울이 마치 여성 비하식의 말을 뜬금없이 했다고 봐야 할까?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여성 안수 반대자들이 애용하는 전가의 보도 같은 몇 구절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마 디모데전서 2장 11절~12절일 듯하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딤전 2:11~12)
일단 기억할 것은, 모든 기록된 성경에는 원 독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기초 이해는 너무 중요하다. 야고보서의 원 독자와 로마서의 원 독자가 다름을 이해하게 되면, 두 권의 책이 충돌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디모데서는 1세기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이다. 여기서 언급된 여성도들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여성도가 아니라 당시의 에베소 교회 여성도들이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자세는 두 가지의 겸비된 안목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절대 진리와 상대 진리가 함께 섞여 있다. 절대 진리는 모든 장소와 시간, 문화,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라면 상대 진리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 문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상대 진리를 절대 진리로 해석하는 우(愚)가 여성 안수 반대론이 아닌가 한다.
성경을 맹목적 문자적 해석으로 매달리면 크게 잘못될 수 있다. 폐쇄적 율법주의, 많은 이단이 이로써 발발한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이 문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성경을 펼치고 견해 주고받았다. 그런데 토론이 일단 마무리된 뒤 그가 돌아앉으며 하는 말인즉. “… 에이, 여자가 무슨 목사를 해!” 나는 거기서 벽을 보았다. 유교적 동양 가부장적인 벽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잠재된 의식 밑바닥에 사실은 그것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감히 여자가….’
중국이 문화혁명 이후 종교적 암흑기로 들어갔다. 무서운 혹한이 지나고 그 땅에 봄이 왔다. 사람들이 왜 경악했는가? 복음은 가정교회라는 점조직을 타고 맹렬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 참혹한 탄압 시기에 그 공동체들을 누가 지켜냈는가?
“그때 남자들 없었어요. 가정교회를 이끈 것은 모두 여자들이었다니까요?” 단호한 중국 여사역자의 말이다. 지금도 중국 가정교회의 리더 70%는 여성들이다.
오래 전, 폐쇄된 선민주의에 빠진 유대 성도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는 선언한 바 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7)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