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적 밖에는
2022. 2. 27(주일낮예배) 마태복음 16:1-4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고 고백한다.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서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부족함이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2009년 탈렌트 이광기씨는 신종플루로 아들 석규군을 잃었다. 7살된 아들을 잃은 이광기씨는 오열하며 아들 장례를 치루었다. 그런데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석규군의 취학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아들을 보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망신고를 하였다. 그리고 석규군의 이름으로 된 사망보험금이 나왔는데, 그 돈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석규가 죽은 후 얼마되지 않아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한 아이티를 위하여 전액을 기부하였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석규가 입던 옷과 석규가 그린 그림으로 티셔츠 200장에 인쇄하여서 아이티로 날아갔다. 이틀을 날아서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 이광기씨는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많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광기씨의 눈에는 그 아이들이 모두 석규로 보였다. 그 아들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는데, 여기저기 석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광기씨는 그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도 얼마 전에 너만한 아들을 잃었어! 너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 순간을 잘 이기면 하나님이 분명히 더 좋은 길을 주실꺼야!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도 그 말을 알아듣고 있는지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후 이광기씨는 불쌍한 아이들의 아빠로 살기로 다짐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광기씨가 신앙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왔다갔다 하던 이광기씨는 아들이 죽은 후에 진짜 신앙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신앙인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은 이광기씨는 석규의 죽음에 대하여 감사를 말한다.
우리 석규가 축복의 아들같아요. 아이를 통해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비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았으니까요. 그래서 감사해요.
부모가 죽으면 땅에 죽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이광기씨는 석규를 가슴에 묻은 사람이다. 그런데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이광기씨가 이해가 되는가? 마태복음 14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온다. 세례요한이 죽은 후 유대인들은 목자 잃은 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표적을 보여 주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먹이심같이 나 예수는 너희를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건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이다. 제자들이 광풍을 만나 고통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다가오셨다. 그때 제자들은 귀신이다고 고함치며 두려워 떨 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내니라고 하는 단어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 있는 모세를 부르셨다. 그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누구라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고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그 말씀이 내니와 같은 의미이다.
놀랍지 않는가? 광풍을 만나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백성에 애굽에서 구원한 그 하나님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내고, 또 광풍을 멈추게 하심으로 제자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마태복음 14장이다. 마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또 물위를 걸어오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에는 가나안 여인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갔을 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울부짖는 여인의 간청을 듣는다.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있었던 여인이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울부짖는 그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고 말한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개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마 15:27)고 하면서 부스러기 은혜라도 나누어 달라고 간청한다.
왜 여인은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붙잡았겠는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인은 사람은 내 딸의 병을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 라고 칭찬하신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이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광교지구촌교회 김인환목사님은 왜 하나님은 코로나를 잠잠케 하지 않나요?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 설교 마지막에 존 레녹스가 쓴 코로나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라는 책의 내용을 말씀하였다.
위기에 처할 때 우리가 찾는 것은 희망이다. 2020년 3월 10일자 뉴욕 타임즈에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마티아 페라레시의 이런 기사가 실렸다. 뜨거운 물은 손 소독제가 아니고 기도는 백신이 아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종교가 영적 치유와 희망이 근본적인 원천이다.
뜨거운 물이 손소독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기도가 백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해도 코로나에 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영적 치유와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코로나에 감염되던 되지 않던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희망을 가지고 사는 모습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희망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교회 지체들 중에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고통하는 분이 있다. 아마 그 분들 중에 어떤 분은 철저하게 방역수칙을 지켰는데, 왜 내가 감염되었을까? 하는 억울함을 말하고, 또 코로나에 걸린 나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존 레녹스는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영적치유와 희망이 생길 것이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에 걸렸는데, 하나님을 바라보아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하나님이 충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고, 그를 통하여 충분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맞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이고, 율법을 많이 알고 있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4절로 말씀하신다.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제가 몇 주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산을 옮겨 바다로 던지면서 봐라 내가 하나님 맞지!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깜짝 놀라 그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겠는가?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욥바항으로 간다. 그리고 마침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그 배를 탔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요나는 풍랑으로 인하여 바다에 빠지게 된다. 그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였는데, 물고기 뱃속에 있던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런 표현을 쓴다.
(욘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여기서 스올은 무덤, 음부를 말한다. 그런데 사공들에 의하여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내가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고,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요나는 3일만에 그 스올의 뱃속에서 나온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스올에 계시다가 3일만에 부활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아니 십자가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나의 표적에는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니느웨로 간다. 그리고 3일길을 걸어야 하는 니느웨 성읍을 하룻길을 걸으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을 선언한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 성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면 성읍이 무너지기 전까지 선지자는 울부짖으며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그런데 요나는 하루만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였다.
무슨 말인가? 성읍 전체에 다 전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니느웨 성읍 사람들은 왕에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식하며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요나가 복음을 전할 수 없을만큼 악독했던 니느웨 사람들도 요나가 전한 멸망의 선포에 회개하였는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당신을 가르치시고, 그 증거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있는가? 김병삼목사님이 지난 주 설교하면서 이런 유머를 말하였다. 오래 전에 한 아버지가 고등학교 다니는 딸과 함께 식당에 갔다. 돈까지 함박스테이크를 팔던 그때 아버지는 딸과 함께 고기를 먹고 있는데, 딸이 식당의 음악을 듣고 아빠 이 곡이 무슨 곡이예요? 하고 물었다. 그때 아빠는 아주 당연스럽게 돼지고기지 라고 대답했다.
아빠가 왜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하였겠는가? 목사님은 이 이야기를 한 후 원로 장로님들과 이야기하면 모두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장로님들이 이렇게 자기 이야기만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이렇지 않은가?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도록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였고, 또 십자가를 통하여 그 표적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서 다윗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과 음성이 들리지 않아서 내 생각만 하고, 내 말만하고 살지는 않는가? 이제 하나님의 비전이 보이고, 또 말씀이 들림으로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며 그 예수의 구원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