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잎이 푸르다 / 이임순
계절은 봄인데 날씨는 겨울이다. 모습도 없이 허공을 휘젓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린다. 외투 자락도 들썩인다. 일기예보에 강풍으로 섬사람들의 이동 수단인 배의 운항이 중단되었다고 하더니 그 힘이 느껴진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사납게 울리더니 앞에 가는 사람의 우산이 날려 처박힌다. 부슬부슬 비까지 온다. 손에 든 우산을 펼칠 수가 없다. 다행히 옷이 젖을 만큼 내리지 않는다. 볼이 얼얼한데 버스정류장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한다.
골목길을 벗어나 아기를 업은 엄마를 만났다. 그녀는 참 용감해 보인다. 이렇게 궂은날 외출을 나선 것도 그렇고, 하나 키우기도 힘들다고 출산하지 않는 데 업고 걸리고 간다. 피부가 가무잡잡한 다문화가정의 여성이다. 걷는 아이가 제 엄마한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나무가 우는 소리에 알아들을 수가 없다. 춥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업은 아이는 두툼한 옷을 입고 세상모르고 자는데 걷는 얘는 겉옷이 얇고 모자도 없는데 목이 훤히 보인다.
목도리를 풀어 아이 목에 둘러준다. 그리고 장갑을 벗어 녀석의 손에 끼운다. 잠자코 있던 녀석이 “따뜻해요”한다.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우리말을 한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일곱 살 하면서 두 손의 손가락을 펼쳐 보인다. ‘현우’라고 본인 소개도 한다. 아이와는 말이 통한다. 어디 가느냐고 하니 동생이 아파 병원에 가는 중이란다. 어린이집에 다니는데 엄마와 함께 가려고 결석했다고 덧붙인다. 아빠가 엄마를 보호해주라고 했다고 한다.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한테서 어른 같은 말을 들으니 왠지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아 측은하다.
비까지 오면서 바람이 매서운 이런 날 돌아다니면 성한 사람도 아프게 생겼는데 남의 일 같지 않다. 등에 업은 아이는 엄마의 체온이라도 느낄 수 있는데 현우는 춥게 보인다. 저만큼 버스가 온다. 아이가 목도리를 푼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내게 돌려주려고 그런단다. 선물한 것이라고 하니 “고맙습니다”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콧등이 맵다.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오늘처럼 울림이 있기는 처음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무늬도 없는 내가 쓰던 그저 평범한 목도리다. 그런데도 현우는 고마움을 알고 넙죽 절까지 한다. 심성이 착한 당찬 아이 같다.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헤쳐 나갈 것 같은 믿음이 간다. 철이 너무 빨리 들어서일까? 아니면 우리말이 서툰 엄마의 말을 전허다 보니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현우에게 보호자라는 멍에를 씌웠을까?
두 사람의 대화에서 설핏 병원비가 모자라면 어쩌나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 주머니에 지폐 두 장이 있다. 현우 잠바 호주머니에 넣어주며 집에 갈 때 따뜻한 어묵국 사 먹으라고 하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물쭈물한 표정을 짓고 다른 것을 사도 되느냐고 묻는다.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하니 설날 할머니 집에 갔을 때 사촌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동생이 샘냈다고 한다. 이럴 수가. 병원비가 모자라면 어쩌나 걱정된 되다, 얼얼한 속도 풀어주고 싶었는데 현우는 다른 용도로도 쓸 생각이다. 참 믿음직하다. 어린 것의 마음에 어른이 들어앉아 있다. 오늘 나들이가 현우의 사회생활의 첫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출산율이 낮아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자라다 보니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아이가 드물다. 더구나 아직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은 철부지가 동생을 생각하다니 떡잎이 건강하고 푸르다. 현우한테 글 읽을 줄 아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건너편의 간판을 가리키니 뚜렷하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좋다고 하니 아빠도 그랬다고 한다.
어린이집에서 읽은 책의 제목을 알려준다. 아빠가 한 달에 한 권씩 동화책을 사 준다고도 한다.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으니 길을 가르쳐주는 경찰관 아저씨가 되는 것이 꿈이란다. 그러더니 수신호 하는 흉내를 늠름하게 낸다.
버스에 두 자리가 비어있다. 나한테 앉으라고 한다. 엄마 옆에 보호자가 앉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어른인 내가 그 자리의 주인이라 한다. 생각이 참 올곧다. 하는 말에 정도 묻어난다. 엄마는 아이가 하는 양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다. 우리말이 서툴러도 알아듣기는 한 것 같다. 엄마가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하냐고 물으니 베트남 말로 하는데 자주 하는 몇 마디 외에는 알아듣지 못한단다. 되도록 우리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하니 동생보다 먼저 잘했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현우가 그런다. 엄마 말은 어렵다고. 그녀한테는 우리 말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둡던 그녀의 표정이 바뀐다
현우의 밝은 표정을 보니 움츠러들었던 가슴이 펴진다. 고맙다는 인사를 스스럼없이 하는 아이가 많았으면 하는 따뜻한 바람이 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따뜻한 바람처럼 온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현우의 마음이 아랫목 같았습니다.
저도 읽으면서 따뜻하다고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온돌방처럼 따듯한 현우한테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선생님 따뜻한 마음이 현우에게 그대로 저달 되었을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현우의 따뜻한 마음이 저에게 전달 되었습니다.
나였으면 '안됐구나.'하면서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데 선생님의 측은지심이
그들을 도왔네요. 박수치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날의 현우 모습을 보셨다면 선생님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음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사 혼자는 살 수 없으니 아우르며 살아야지요.
와,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싶지 않은데 정말 좋은 어른이세요.
부끄럽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해야하는데 떠벌린 꼴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