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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극단의 일을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도 그저 그런 수준이 아니라, 둘 다 전문적인 지식과 탁월한 영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작물육종학을 전공한 농학자가 시인으로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 드문 일을 한상기 박사께서 해냈다. 이번에 시집 <<구름도 가는 길이>>를 펴낸 한상기 박사는 농학자이면서 시인이다.
이 시집의 저자 한상기 박사는 농학자라도 예사 농학자가 아니다. 아프리카인의 주식인 ‘카사바’를 병충해에 강한 품종으로 개량하여, 아프리카 식량난 해소에 크게 이바지한 분이다. 그 성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기네스 과학공로상과 영국 생물학회 펠로우 상을 받을 정도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친 학자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예사 시인이 아니다. 벌써 10여 년 전에 첫 시집 <<아프리카, 광야에서>>를 발간하고, 이어서 <<영혼의 메아리>>를 발간해서 시인으로서 이력이 만만찮다. 게다가 이번에 새로 발간한 시집 <<구름도 가는 길이>>는 한국어판을 내기 전에 이미 영국 ‘올림피아’ 출판사에서 “Even Clouds Have Their Way”라는 제목의 영문판 시집을 먼저 간행했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시인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작물학자이자 국제적인 시인을 겸한 아주 보기 드문 인물이 저자 한상기 박사이다.
2. 학자이며 시인인 저자를 어떻게 호명해야 할까. 아프리카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역만리 광야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바친 육종학자이지만, 그의 시집을 다루는 여기서는 ‘시인’이라 일컫고자 한다. 시인 한상기는 시집의 첫 시 <택하지 않은 길 위에서>를 자신이 선택한 인생의 길에 바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네/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네/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네.”라고 하는 프로스트 시의 착상을 시인은 아래와 같이 패러디했다.
젊은 날, 내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많은 발자국에 닳아 있던 길
다른 하나는 풀잎이 무성해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은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택했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길 (‘택하지 않은 길 위에서’ 앞부분)
실제로 젊은 날의 시인에게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육종학 전공 박사였던 시인이 갈 수 있는 첫째 길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식물육종연구소이고, 둘째 길은 아프리카에서 새로 창립된 국제열대농업연구소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오랜 전통의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소를 제쳐두고,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신생 연구소를 택했다. 학자로서 개인적인 성취보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더 귀중한 사명이라고 여겼던 까닭이다.
1970년대 초에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로 가서 젊음을 바치는 일은 쉽사리 결정하기 어렵다. 인생을 거는 모험적인 결단이 있어야 했다. 시인만 대단한 결단을 한 것이 아니라, 어린 첫딸을 한국에 남겨 두고 따라나선 시인의 아내도 대단한 결단을 한 셈이다. 그렇게 아프리카로 가서 23년 동안 식량 작물 연구에 헌신했다. 그들의 주식 작물인 카사바와 얌, 고구마, 플랜틴 등을 개량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특히 카사바를 개량하여 병에 강하고 수확이 많은 ‘슈퍼 카사바’ 품종을 만들어, 아프리카의 오랜 식량 부족 해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나이지리아에서 추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추장 이야기는 <<까만 나라 노란 추장>>이라는 아동용 그림책으로 발간되어 20여 쇄를 찍었다고 한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 길이 나를 만든 길이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그러나 내 영혼이 반드시 가야 했던 길”이라고 한 것처럼, 시인은 남들이 가지 않은 좁고 험한 길을 감으로써 작물학자로서 세계적인 성공을 이루고 국제적인 시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시인은 노력한다고 쉽사리 되는 것이 아니다. 애쓴다고 시상이 떠오르지 않는 까닭이다. 시인이 “나이지리아 북부에 머무르던 중,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에 매료되어 두 편의 시를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오묘한 자연이 곧 시상이어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그를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3. 시인으로서 한상기는 길의 시인이다. 인생의 길을 선택할 때부터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두 길을 놓고 숙고했다. 시 <가는 길>은 누구든 진정으로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잘 분별해서 가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는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지금 그대로 ‘가는 길’이 있는가 하면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고, 앞으로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어떻게 길을 갈 것인가? “가는 길을 놓치면/ 고양이도 제비도 두루미도 사람도 헤맨다/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가면/ 고양이도 제비도 두루미도 사람도 안 된다/ 가야 할 길을 잃으면/ 고양이도 제비도 두루미도 사람도 곤란하다”. 가는 길은 정확하게 가야 하고, 가서 안 되는 길은 결단코 가지 말아야 하며, 가야 할 길은 잃지 말고 반드시 가야 한다. 시인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스스로 ‘가야 할 길’을 마땅하게 분별해서 갔기 때문에 어떤 시인의 시보다 설득력을 지닌다.
시 <구름도 가는 길이>는 구름의 길을 빌어서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숙고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금방 떴다 가버리는 구름에도/ 다니는 길이 있다./ 금시 뭉쳤다 곧 흐트러지고 마는 구름에도/ 가는 길이 있다”. 가는 길이 전혀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떠 있는 구름에도 마땅한 제 길이 있다. 구름의 길은 비를 내려야 할 곳에 비를 내리는 것이다. “언젠가 어데선가/ 비를 내리지 않고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
구름이 비를 내리는 길은 뭇 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생명을 살리는 길이야말로 최선의 길이자 하늘의 길이다. ‘구름도 가는 길’이니 하물며 사람이야 더 이를 필요도 없이 가야 할 길이다. 시인은 아프리카에서 작물 육종으로 굶주리는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해서 갔다. 메마른 사막에 비를 내려 뭇 생명을 살리는 구름과 같은 일을 스스로 감당한 것이다.
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은 슬기롭다.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은 그 뒷모습이 아름답다. 시인은 그 길을 가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23년을 보냈다. 아프리카에서 젊음을 온통 불사른 것이다. 시 <아프리카에서의 23년>은 생애사의 증언이자 자기 고백이다. “아프리카 생활은 참으로 외롭고/ 어려웠습니다.”로 시작되어, “주님의 은혜로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프리카에서 23년간 체험한 삶입니다.” 로 마무리된다.
한 편의 인생 보고서이기도 하고 지난한 삶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넓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전혀 아는 사람도, 의지할 데도, 어려움을 나눌 데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시인 부부만이 서로 의지한 채 23년을 분투하며 살았다. “아내는 수백 번 나의 봇짐을 싸고,/ 수천 번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습니다./ 혼자 지샌 밤이 수천 번이고, 나는/ 험한 길을 달리며 진땀을 흘렸습니다./ 비행기 연착을 기다리며 보낸 날이 수십 일/ 말라리아에 여러 번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부부만 함께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한, 또 한 분이 있었으니 주님이었다. 주님이 가까이 함께 하며 위로하고 힘을 주었다. 주님의 은혜로 오늘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한다. 아프리카에서 23년의 삶은 시인에게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된 삶이면서, 또한 일의 보람을 한껏 누리도록 베풀어준 주님의 은혜가 있어서 늘 감사하는 삶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
노시인에게 <낙엽>은 무엇을 상징하는 길일까? “낙엽은/ 하늘이 내려 보내는/ 메시지요/ 신호요/ 편지라요.” 낙엽은 누구나 마침내 가야 할 길을 상징한다. 낙엽이 주는 메시지와 신호, 편지를 아는 것은 슬기롭다. 낙엽처럼 땅에 떨어져서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 낙엽처럼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대지를 살찌우는 아름다운 헌신이다. 시인은 낙엽이 주는 소식을 받고서도 “정말 뚜껑을/ 아직껏// 못 열어 보았어요”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역설이다. 왜냐하면 낙엽을 하늘이 보내는 메시지라고 규정할 때부터 시인은 누구보다 낙엽이 전해 주는 상징을 잘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의 상징처럼 시 <땅속의 돌>도 여전히 흙으로 회귀를 이상으로 여긴다. “땅속 깊숙이 묻혀 있는 돌/ 이끼 끼지 않으나/ 땅 속에서 밖으로 들쳐 나온 돌/ 이끼 잔뜩 낀다.” 이끼는 세속에서 살면서 겪게 되는 허물과 오염을 뜻한다. 세상에 드러나 있는 이상 허물과 오염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따라서 “언젠가 다시 땅속에/ 깊숙이 묻히게 되는 날/ 온 몸에 낀 까만 이끼/ 모두 벗어버릴 것이니 새 세상을/ 고대하며 기다려보자”고 노래한다. 낙엽이 그러했던 것처럼 돌도 사람도 마침내 돌아가야 할 길의 본디 자리는 흙이자 땅속이라는 것이다. 시 <귀소(歸巢)>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이르게 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자 진리의 길이다.
4. 시인의 시는 예사 시인들의 시와 다르다. 우선 난해하지 않다. 자기 삶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난해할 까닭이 없다. 흔히 언어유희라고 하는 작위적인 말후림도 없다. 진솔한 정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까닭이다. 시의 행 구분을 하지 않고 이어서 쓰면 산문이나 다를 바 없다.
시집의 표제로 삼은 시 <구름도 가는 길이>는 “나는 23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일했다./ 대륙의 여러 나라 붉은 흙 길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와 같이, 개인적인 이력 서술로 시작된다.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 무한히 펼쳐진 대지가/ 쇳물처럼 붉게 달아오른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위로는/ 솜털처럼 가벼운 구름들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표현에서 특별히 시적 서정이라 할 형상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그대로 소박하게 서술한 산문 형태의 문장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연에서는 역동적 서정이 출렁인다.
길을 잃은 아프리카!
갈증에 메마른 아프리카!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그 애달픈 이름을
입속으로 세 번 부르자
내 두 손이 절로 모아졌고
하늘을 향해 격렬한 기도가 솟구쳤다.
(‘구름도 가는 길이’ 부분)
바로 그때 “불현듯 한 줄기 영감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짧은 시를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시의 제목을/ ‘구름도 가는 길이’라 붙였다.” “그런 다음 40년이 지난 뒤,/ 그 한 편의 시는/ 이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시집의 제목을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시집의 머리말에 해당되는 시이다.
<아프리카에서의 23년>이 자서전적 시라면, 이 시는 시를 쓴 내력과 시집 제목의 이력을 설명하는 해설적 시이자, 한편으로는 믿음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름도, 사막도,/ 그리고 길 잃은 모든 영혼도/ 분명히 제 갈 길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쓰여진 기도의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도는 허투루 하는 ‘바램’이 아니라 독실한 신앙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생애사를 다룬 자서전적 시가 있고, 시집 해설적인 시가 있는가 하면, 시적 고백의 시가 있다. 시인에게 시는 무엇인가 고백하는 시가 <예술은 영혼의 생존방식이다>이다.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은/ 사치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는 가장 인간다운 방식이다.” “나에게 시란 단순히 언어를 다듬는 일이 아니라,/ 영혼의 숨결을 글로 남기는 일이다.”
따라서 “시는 나를 지탱해 준 힘”이었고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러므로 “누가 읽지 않아도,/ 세상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나는 오늘도 시를 쓴다.” 시는 생존 수단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학자에게 ‘카사바’ 품종 연구는 육체적 생명을 살리는 ‘생존의 도구’였다면, 시인에게 시는 인생의 황혼에서 마주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존재의 확인’이라 할 수 있다.
5. 아프리카인들은 원래 흑인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아예 흑인이라는 말도 없었다. 처음부터 흑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백인이나 황인과 같은 인간이 있었을 뿐이다. 아프리카인들이 흑인이 된 것은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정복하면서부터였다. 그때 그들이 흑인이라 일컫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아프리카인들은 흑인이 되었다.
유럽인들도 원래 백인이 아니었다. 흑인이나 황인과 똑같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프리카를 정복하여 아프리카인을 흑인이라 하고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백인이 되었다. 그들 스스로 백인으로 거듭나자 백인이라는 말도 생겨나서 위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백인들은 오만한 특권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위험하고 잔인한 정복자가 되었다.
시 <민들레>는 이러한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민들레는 원래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런데 “민들레가/ 우리 집 뜰에서/ 자라 꽃 피우니/ 잡초가 되었다” 민들레가 들에 피어 있으면 누구나 아름답게 여기는 꽃이다. 민들레 꽃씨가 뜰의 잔디밭에 날아와 자라니 꽃이 피어도 잡초로 간주된다. “매년 뽑고 뽑았어도/ 또 나오고 또 나온다” 그러니 짜증스러운 잡초일 수밖에 없다. 민들레도 잔디처럼 뜰에서 가꾸면 잔디보다 이쁜 화초가 된다.
같은 풀이고 같은 꽃인데 어디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화초도 되고 잡초도 된다. 잔디밭에 꽃이 나면 꽃도 잡초가 되지만, 꽃밭에 잔디가 나면 잔디도 잡초가 된다. 자연생태계인 풀숲에는 잡초란 있을 수 없다. 모두 대등한 초목이다. 초목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인간이 그 가치를 임의로 결정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오만이자 횡포이다. 백인과 흑인의 인종차별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인류사회에 인간이 있었을 뿐 원래 흑인과 백인은 없었다. 만일 흑인들이 세상을 백인처럼 지배하게 되면 백인들은 어떻게 될까. 백인들 또한 한갓 잡초처럼 하찮은 노예로 취급될 것이다.
시 <무엇이 특별한가>는 서구 중심의 세계 인식이 흑백 차별만큼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반 고흐의 그림을 몰라주던/ 불란서 루브르 박물관의 벽에는/ 무엇이 그리도 특별한가?” 하고 따지듯이 묻는다. 대단한 작품을 남긴 ‘반 고흐’의 그림조차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박물관에 진열해 놓은 작품 수준은 보나 마나 뻔하다는 것이다. “불란서 사람들의 와인은” 뭐가 특별하여 고급이라 하는가? “불란서 사람들의 손가방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명품이고 고가인가? “불란서 사람들의 빵은” 뭐가 그리 좋아서 “아시아 사람들의 술빵보다 낫다고 말하는가?” 낫다고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구라파와 아프리카를 대조해서 묻는다. “구라파 사람들이 즐겨먹는/ 올리브 기름은/ 아프리카의 팜유보다/ 뭐가 좋은가?// 구라파 사람들의 노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노래보다/ 무엇이 훌륭하여/ 더 높이 평가받는가?” 더 높이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다만 이러한 평가는 유럽중심주의에서 빚어진 편견일 따름이다.
우리도 이런 편견 속에서 유럽을 일방적으로 동경하고 숭배하며, 프랑스 상품이라면 으레 명품으로 우상화한다. 시인은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아프리카의 음식과 노래, 예술, 문화 등이 유럽의 그것들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유럽의 잣대로 명품과 고급을 규정할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는 우열이 없으며 문화가 만들어진 맥락 속에서 저마다 독자적 가치를 지닌다고 인식하는 문화상대주의가 필요하다.
6. 시는 대상에 대한 상투적 인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준다. 새로운 인식은 상투적이지 않기 때문에 낯설기 일쑤이다. 그러나 ‘낯설게 하기’의 효과는 새로운 일깨움을 감동적으로 던져주는 구실을 한다. ‘봄’에 관한 시는 참 흔하다. 봄에 대한 은유도 상투적이다. 날씨가 따뜻하면 봄 날씨 같다고 한다. 새싹이 파릇파릇 솟아나거나 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이 왔다고 한다. 진부한 은유이지만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인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 시 <봄>에서는, 날씨가 따뜻해지고 새싹이 솟아나며 꽃이 피어도 “봄이 온 게 아니라네” 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봄인가. “내 찬 마음이 녹았을 때”, “내 메마른 마음에 새싹이 솟았을 때”, “내 어두운 마음에 꽃이 피었을 때” 봄이 온 것이라고 한다. 자연의 계절적인 봄보다 내 삶의 내면에서 겪는 마음의 봄이 진정한 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의 봄보다 더 절실한 봄이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정말로 봄이 온 것은 “내 외로운 마음에 님이 왔을 때”라고 한다. ‘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님’이 찾아오는 것보다 더 절실한 봄이 없다. 화창한 봄이라도 사랑하는 님이 떠나버리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 이상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는다. 그러나 한겨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문득 찾아오면 얼어붙은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내리고 화사한 봄꽃이 피어오른다. 꽃을 보는 봄이 아니라, 님을 보는 봄이 가장 진정한 봄이다.
시인은 농작물 육종학을 전공하는 과학자답게 식물과 자연을 시적 대상으로 적극 끌어들인다. 시 <민들레>도 그렇고 <봄>도 그렇다. 시 <해>는 자연현상을 다루었다. 시의 서두에서는 상투적으로 ‘해’를 묘사한다.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지면 저녁이다// 해가 길어지면 여름이고/ 해가 짧아지면 겨울이다/ 해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해”. 마치 한 편의 동시를 읽는 것 같다. 인식하는 현상 그대로 아무런 가감없이 오롯이 서술한 까닭이다.
먼저 상투적 현상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다음, 이것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따라서 다음 연부터는 앞의 사실을 부정한다. 한 마디로 “해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는 그냥 있어/ 그런데 해가 우리에게/ 일찍 보였다 늦게 보였다 해// 일찍 보이면 여름/ 늦게 보이면 겨울”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해는 그냥 있는데 지구가 돌기 때문에 해가 뜨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정작 움직이는 것은 지구인데 지구는 고정적 실체로 그냥 둔 채, 해가 뜨거나 지고, 해가 길어지거나 짧아진다고 하는 것이 상투적 인식이다. 작고 미세한 것은 물론, 크고 거대한 것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가시적으로 인식되는 대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있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의 한계, 또는 인간중심주의를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시 <해와 달과의 숨바꼭질>도 인간의 시각이 가지는 착각을 다룬 작품이다.
시 <바다는 그래서 크다>도 자연의 섭리를 다룬 작품이다. 개울물과 냇물, 강물, 바다를 크기 순으로 열거한 다음 그 높낮이를 따진다. “이 중에서 바다가 제일 낮고/ 개울물이 제일 높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자연현상을 있는 그대로 읊었다. 문제는 그다음 연이다. “제일 작고 하찮은 게/ 가장 높다고 요란스럽게 흘러대는 것이 개울물이다.” 개울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표현되었다.
요란스레 떠드는 개울물은 가뭄이 오면 가장 먼저 말라붙는다. 그러나 가장 낮은 바다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다. “낮아서 크게/ 낮아서 많이/ 낮아서 그렇게 오래 담는다.” 진정으로 큰 것은 높다고 요란을 떠는 것이 아니라, 낮은 데서 묵묵히 넓고 깊게 포용한다. 그러므로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인간이 되려면, 바다처럼 낮아지는 겸손한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시 <진리의 강>도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의 흐름에서 낮고 겸손한 마음을 찾는 작품이다.
7. 시인은 과학자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주님’, ‘생명의 말씀’을 노래한 시가 여러 편이다. 시 <자연은 벙어리>는 하느님을 은유한 작품이다. “자연은/ 침묵 속에서 살고/ 침묵 속에서 말을 듣고/ 침묵 속에서 말을 건넨다”. 그러면 어떻게 침묵하는 자연과 소통할 것인가.
자연의 말을 들으려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길밖엔 없다
침묵 없이는
침묵의 자연을
알 길이 없다
침묵의 하느님을
알 길이 없다.
(‘자연은 벙어리’ 일부)
하느님은 자연처럼 늘 침묵한다. 하느님은 인간 세상에 적극 개입하고 나서는 법이 없다. 거룩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소통하려면, 말을 건네고 응답을 들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침묵의 존재인 하느님을 인간으로 여기는 일이다. 진정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은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길밖에 없다. 말하기를 멈추고 침묵하며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여 응답하지 않는다고 하여 ‘하느님은 부재한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시 <호박에 귀가 있다더냐?>도 하느님의 존재를 읊은 작품이다. 호박이 제 스스로 싹이 트고 넝쿨이 뻗어나가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을 따른 까닭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침묵으로 들어야 하는 것처럼, 호박은 귀가 없어도 말씀을 잘 알아듣고 따르는 까닭에 모든 생명활동을 차질 없이 착착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호박에 말씀을 알아들을 귀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 시의 끝부분을 보자.
넝쿨을 뻗어
꽃 피고
열매 맺혀 그 안에
씨를 듬뿍 받으라는 그
말씀을 알아들을 귀가 있다더냐?
호박에 그런 귀가 있다더냐?
....
호박은 귀 없이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
귀가 없는 호박도 말씀을 잘 알아듣고 삶을 차질 없이 잘 살아간다. 왜냐하면 생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이다. 호박은 귀가 없지만 생명이기 때문에 말씀을 알아듣는 영적인 귀가 있다. 하물며 사람들은 귀를 가지고도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은 호박과 같은 생명이면서도, 의식하고 사유하며 신앙하는 영혼을 지닌 특별한 생명이다. 그럼에도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 <뿌리>는 곧 ‘주님’을 은유한 것이다. “뿌리/ 나는 너에 붙어 있지만/ 너는 나에게/ 아직도 멀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나는 “네 자리에 서 있지만”, “너 때문에 살지만”, “너로 하여금 꽃피지만”, “너와 하나지만”, “너를 찾고 있지만” “너는 나에게 아직도 멀다”고 읊조린다.
후반부에서 뿌리였던 ‘너’는 ‘주님’으로 바뀐다. “주님/ 저는 주님에 붙어 있지만/ 주님은 저에게/ 아직도 멀으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저는 “주님 자리에 있지만”, “주님 때문에 살고 있지만”, “주님으로 하여금 꽃피지만”, “주님과 하나지만”, “주님을 찾고 있지만”, “주님을 믿고 있지만”, “주님은 저에게 아직도 멀으옵니다”고 노래한다.
신앙인으로서 주님은 식물의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뿌리는 생명을 살아있게 하는 근본적 존재이다. 뿌리와 서로 붙어 있고 함께 살고 하나로 살지만 아직도 멀게 느껴지는 것처럼, 주님 또한 늘 믿고 함께 하지만 내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실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지 못하는 자기 신앙을 반성하는 간절한 뜻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기도 중에 신비체험도 한다. 시 <밤과 낮이 하나>는 신앙 체험을 담은 작품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합장기도하고 관상에 들어갔을 때 체험한 것이다.” 그 체험이 바로 “밤과 낮이 하나가”되는 상황이다. 그 상황은 “밤도 아니요 낮도 아닌” 상태이며, “어둔 색도 아니요 밝은 색도 아니라/ 회색” 상태였다. “밤과 낮이 하나인 세계”는 “하느님 나라”이고, “어둠과 빛이 하나인 세계”는 “정녕 하느님 세계뿐”이다.
하느님 세계는 밤도 낮도 아니고, 어둠도 빛도 아닌 세계이다. 이분법을 초월한 중간 세계이자 둘을 아우르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다만 하나인 세계가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인 조화의 세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법(不二法)의 세계와 같다. 불이법을 스스로 터득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시인은 기도 중에 그런 세계를 체험한 것이다. 그 순간 시인은 “하느님의 어루만지심”을 실감할 뿐 아니라, 영혼과 “육체에도 전율을” 느낀다. 시인은 신비체험의 순간 “내 영혼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빛과 평화를” 남겼다고 고백한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8. 누구든 시인에게는 시심(詩心)이 있다. 동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동심(童心)이 있다. 동심은 흔히 천심이라고 한다. 시인의 시집에는 동시라고 할 만한 시가 제법 많다. 시 <동심>은 동시처럼 꾸밈없고 순수한 작품이다. “동심은 천심/ 나는/ 어린이가 되어/ 천심을 품고 산다” 시인의 시심을 동심이자 천심이라 했다. 동심이 천심인 것은 거짓 없이 진실하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린이처럼 살고 어린이처럼 시를 쓴다. 그런 특별한 까닭이 있다.
집사람이
어린이가 되었다
그를 위하여
나도 어린이가 되어
함께 즐겁게 산다(‘동심’ 일부)
시인의 아내는 특수한 질병으로 어린이처럼 되었다. 어린이가 된 아내와 눈을 맞추고 서로 소통하려면 아내처럼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어른이 어린이처럼 몸짓을 하고 어린이처럼 말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서 퍽 불편하다. 그러나 손주들과 놀 때는 손주 수준에 맞추어 그렇게 하지만 불편하기는커녕 아주 즐겁다. 그것은 손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까닭에 기꺼이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처럼 사는 것을 즐겁게 여긴다.
“천심을 안고/ 즐겁게 산다/ 짝짜꿍하며/ 즐겁게 산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천심’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살 수밖에 없다. 짝짜꿍하며 노는 것은 ‘동심’이다. 그러니 동심을 품고 어린이처럼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이처럼 ‘동심’을 동시처럼 썼으니 내용과 형식이 격에 꼭 들어맞는 시라 하겠다. 시 <사람의 마음>도 동시처럼 읽힌다.
하늘에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들이 있고 구름이 떠 다녀
아름답다
산에는 나무가 있어
아름답고
강에는 물이 있어
아름답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며,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감정을 꾸밈없이 나타냈다. 자연을 아름답게만 보는 눈도 어린이의 시선이다. 이 시가 동시이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은 ‘사람의 마음’을 노래하는 다음 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진리를 찾는 의욕이 있어
아름답고
의리를 지키는 혼이 있어
아름답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은 어린이가 아닌 어른의 시선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없다. 마음은 볼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무형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 “진리를 찾는 의욕”과 “의리를 지키는 혼”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스스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실천해 온 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 부분은 시인의 ‘자의식에 바탕을 둔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9. 시인은 시인이기 전에 농학자이며 작물육종학자이다. 학자로서 시심이 없을 수 없다. 시 <진리를 향해 떠나는 여정>은 학자로서 경험적 삶을 말한다. 학자는 진리를 탐구하는 자이다. “진리를 찾아/ 걸어가도 걸어가도/ 끝은 보이지 않네// 진리를 찾아/ 밑으로 파고 들어가도 파고 들어가도/ 바닥은 보이지 않네”라고 했다. ‘학해무변(學海無邊)’이라는 옛말처럼, 드넓은 학문의 바다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찾아 나서도 진리의 끝은 보이지 않고 아무리 파고들어도 진리의 바닥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학자로서 아무리 노력해도 진리를 찾는 목표에는 이르지 못한다. 당연히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닌지 회의적이기 마련이다. 시인도 학자로서 그런 회의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헛수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헛수고를 부정하며, “아니야 아니야/ 진리의 세계 안에/ 머물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족해// 그것이면 충분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어”라고 만족한다. 시인은 학자로서 진리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은 진리에 상대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은 진리에 이르기 위해 자료를 찾고 체계를 세워서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과정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절대적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적 성과는 불완전한 까닭에 언젠가 후학들의 학문에 의해 비판되고 극복되기 마련이다. 진리는 학문을 이끄는 지표이고 학문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작업이다. 그런 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학자로서는 진리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과학자답게 시도 논리적이다. 시 <존재의 목적>은 먼저 “모든 것에는/ 존재의 목적이 있다”는 정언 명제를 가장 앞에 내세운다. 다음에는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에도/ 목적이 있다”에서부터 “구름이 떠다니는 것에도”, “강물이 흐르는 것에도”, “새가 우짖는 것에도” 목적이 있다고 한다. 자연의 모든 현상이 그러한 것에는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는 사례들을 열거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러니/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큰 뜻과 목적이 있지 않겠는가”하고 설득한다. 결국 인간의 삶도 일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함으로써 저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성찰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구체적 사실을 논리적 단계로 구성하여 설득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과학자이면서 명상시집을 낼 만큼 명상가로서 자질도 갖추었다. 이 시집에도 명상시가 적지 않다. 시 <하나 되려면>은 너와 나가 하나 되는 길을 읊은 명상시라 할 만하다. “네가 네 것을 버리고/ 내가 내 것을 버리면”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네가 내 것을 갖고/ 내가 네 것을 갖으면”, 또는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으면” “너는 나고/ 나는 너”여서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서로 하나 되려면, 자기 것을 버리는 ‘무소유의 삶’과, 자기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나눔의 삶’, 서로가 서로를 자기처럼 품어주는 ‘포용의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와 ‘너’라는 대조적 언어로 단순명쾌하게 설파한 작품이다.
시 <소리>도 명상시이다. 소리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응시해서 터득한 시이기 때문이다. “소리는/ 앞도 없고/ 뒤도 없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소리는/ 찰나에 피어나/ 순간에 사라진다.// 붙잡을 수도 머물 수도 없다.” 다만 소리는 소리일 뿐이다. 따라서 “그저 있는 그대로/ 소리는/ 소리다.” 하고 오금을 박아 매듭을 짓는다.
소리에 대한 시인만의 통찰이 오롯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소리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가변적 실체이다. 고정적으로 잡아둘 수 없는 것이 소리이다. 잡아두기 위해 녹음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녹음을 풀 때만 실체를 잠깐 드러낼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리는 덧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소리를 기억할 뿐 아니라 마음에 담아둘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소리의 “찰나 속에 깃든 영원을 느끼기” 바란다고 했다.
명상시는 깨달음의 시이기도 하다. 시 <진리>는 인간의 깨달음에 관한 작품이다. 사람들은 진리가 객관적 실체로 나와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진리는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다만,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어도 진리인 줄 알아차리지 못할 따름이다. “진리가/ 바로 옆에 있어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모르면/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는 “알아주는 이가 있을 때만 진리다”. “내 하루의 밥상 위에도/ 저녁노을 속에도/ 진리는 숨어 있다”.
저녁노을은 언제나 거기 있지만 내 스스로 삶을 관통하는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면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리는 각성의 눈을 뜨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진리를 진리로 알아차리는 일이 바로 깨달음이다. 진리를 스스로 깨달아야 마침내 그 진리가 내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나는 지금/ 그 진리를 보고 있는가” 자문하는 말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카사바’의 품종 개량으로 아프리카인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수많은 사람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던 육종학자가, 이제는 시인으로서 <<구름도 가는 길이>>라는 시집을 통해 사람들의 메마른 정서를 역동적으로 성숙시키는 영혼의 길잡이 구실을 하고 있다. 평생 땅만 보며 연구해 온 학자가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시를 썼다는 것은, 작품 안에 담긴 철학적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뜻한다. 내면적 성찰과 기도와 명상으로 독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주는 것은 인류에 대한 또 하나의 사랑이자 공헌이다. 그러므로 ‘카사바’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노학자에게 ‘시’는 자연과 세계에 바치는 겸손한 헌사이자, 자신에게 허락된 인류에 대한 마지막 헌신이라 할 수 있다.

첫댓글 귀한 글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