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柳) 군의 맹장염 수술 – 약의 남용
「약화(藥禍)란 말이 있다. 옛부터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를 석녀(石女)라 했는데 이를 영어 스트릴(sterile)이라 한다. 한데 스터릴이란 말은 석녀의 뜻 이외에 소독멸균 한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한다. 자신의 건강에 과민하여 몸 안팎의 균을 소독멸균하고자 약을 과용하다 보니 저항력이 약해져 끝내는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하는 석녀 같은 불모인간으로 타락하고 만다는 진리를 이 말이 암시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눈 속에 파묻혀 잠들고 있는 에스키모 개를 가엾다고 집안에 들여놓고 기르면 피하지방(皮下脂肪)이 감소, 털이 빠져 석녀(石女) 아닌 석견(石犬)으로 타락한다고 한다. 사람도 외계 환경에의 적응력이나 또 균에 대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게 마련인데, 근대화과정에서 과보호나 약물과용으로 이 적응력과 저항력을 약화시켜 걸핏하면 앓아눕는 약체인간(弱體人間)으로 타락시켜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藥禍(약화)라 한다.」 어떤 책에서 읽은 글이다.
웬만한 세균이 인체에 들어오면 체내의 저항군이 포위 섬멸시켜버리는데, 약이라는 원병(援兵)으로 대리전(代理戰)을 시켜오다 보니 이 저항군이 의존심이 강해지고 게을러져 있으나 마나 한 쓸모없는 병력이 되고 만 것이다. 藥禍(약화)가 사회문제가 된 근원적인 연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에서는 이 약화에 무척 예민하게 대처하고 있다는데, 우리 국민이 이에 둔감한 데는 한국인 나름의 의식구조가 공모(共謀) 하고 있다고 본다.
약국이나 병원을 찾아가 “빨리 낫는 약이 없습니까”하고 묻는 환자가 많다고 들었다. 약을 맹신하고 또 단김에 쇠뿔을 뽑듯 성급하게 나으려 들기에 약을 많이 먹게 되고, 또 성급하기에 이 약 저 약 찾아 먹고 본다. 지금도 많은 약 광고가 단번에 낫는다는 뉴앙스를 풍기고 있음도 우리 한국인의 즉효(卽效)욕구에 부응하려 함일 것이다. 지금이야 의학분업이 되어 그럴 수는 없지만 그 습성은 남아 있다는 생각이다.
스페인령 라스팔마스항에서의 일이다. 일등조타수 류(柳) 군이 아랫배가 아프다기에 병원엘 보냈더니 맹장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현지에서 수술을 받게 됐다. 그 전에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서는 맹장염은 손에 박힌 가시를 빼듯 간단히 수술로 끝낼 수 있을 만큼 어렵잖은 병이라 별 걱정없이 수술받기로 하고 본인도 서명을 했다.
수술도 잘 끝나고 거의 퇴원하기를 기다리는 데 병원에서 선장(船長)이 좀 와야겠다고 한다. 가슴이 덜컹하는 느낌이다. 무슨 잘못이나 부작용이라도 발생한 것일까? 온갖 상상을 하며 급히 가보았다. 퇴원을 앞두고 있으니 멀쩡한 상태로 의자에 앉은 류 군이 집도한 의사와 울그락불그락 한 얼굴로 언쟁(言爭)을 하고 있었다.
의사 왈 “캡틴, 이 사람 정신이상 아니요?” 한다. 더욱 놀란 가슴이 철렁했다. 류 군은 “약을 달라면 줘야 할 것 아니냐.”고 큰 소리다. 마치 제가 의사인 것처럼….
내용인즉 이제 됐으니 퇴원하라고 하자 류 군이 마이싱(항생제)를 달라고 한 것이다. 의사는 더 이상 항생제가 필요 없으니 줄 수 없다고 한데서 연유된 것이다. 항생제란 상처가 화농(化膿)했을 경우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약이며 이젠 화농의 염려가 없으니 처방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의사의 주장. 이에 대해 만약에 화농이 재발할 경우를 대비해서 추가처방을 해 줘야 한다는 것이 류 군의 주장이었다.
“지금까지 의사인 내가 직접 봐왔는데 무슨 소리냐. 화농증상이 보이면 다시 의사를 찾으면 되잖느냐”. 의사로서 수월찮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약분업이 없던 시절, 약방에서 누구나 대부분의 약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시절이라 출국할 때는 미리 마이싱도 한 봉지씩 사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그것이 만병통치약인듯 먹었으니 항생제의 과용(過用) 내지 남용(濫用)을 해온 한국 사람들이었음이 들통난 셈이다. 의사에게 한참 동안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설교(?)를 들었다. 요점은 약의 과용과 남용에 대한 얘기였다.
현재 병의 상황이나 후유증과는 관계없이 나라마다 있는 문화의 차이점을 이해해 달라고 간청하여 며칠 분의 마이싱을 처방 받는 것으로 결말을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저네들보다 ‘미개한 국민들’이라는 의사의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봐도 합리적이고 당연한 처사이다. 그 이후로는 내 자신도 약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시중에 나도는 말, “아프면 병원에 가야 의사가 먹고 살고, 처방한 약을 지어야 약사가 살지만 그 약을 먹지 말아야 환자가 산다”는 말 속에 담긴 숨은 뜻을 깊이 생각해 볼 만하다.
그래서 지금도 처방받은 약을 다 먹지 않는다. ‘약도 일종의 독(毒)’이란 당시 의사의 말에 공감을 한다. 적당히 완화되고 자신이 ‘이만하면…’ 하고 생각되면 약을 중지하고 자연치유 쪽으로 돌린다. 내 몸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래서 그런지 나름대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3. 최군의 맹장염
1983년 4월이다. 중동(中東)에서 양하를 마치고 아프리카 동부 마다카스칼 섬과 마주보는 나라 모잠비크의 수도인 마푸도항을 목적지로 남하하는 중 21일 새벽 5시, 당직 중인 일등항해사가 기관부 1기원인 최 군이 복부 통증으로 몸부림치고 있다고 급히 전화했다. 진통제부터 주사하게 하고, 현지 Agent(대리점)에 도착 즉시 의사를 수배하라는 전문(電文)을 띄우고 선속(船速)도 높였다
그날 오후 7시경 외항에 닻을 내리자 러시아인 도선사(Pilot : 導船士)가 승선, 내항(內港)에 묘박하고 내일 아침 일찍 접안(接岸)한다고 했다. 다음날인 22일, 접안함과 동시에 10시 반경 최 군을 병원에 보내고자 하는데 환자 이외는 아무도 상륙이 안 된다고 한다.
이 나라는 공산주의국가로 북한과는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만, 우리나라와는 없었다. 부득이 대리점을 통해 귓동냥으로 정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3시경 급성맹장염으로 수술에 들어간다고 연락이 왔다. 다행히 2~3일 정도 대기한다니 적하(積荷)가 끝나기까지는 웬만하면 퇴원시켜 싣고 갈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현지에는 P & I Club(선주(船主)상호보험)가 없어졌으니 대신 다른 보험사를 지정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급히 선주 등 관계 회사에 텔렉스를 보냈다.
한데 수술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최 군이 퇴원, 업혀서 배로 왔다. 용태(容態)가 생각보다 훨씬 못하다. 병원에서는 약이 없어 더 이상의 입원은 의미가 없으니 강제로 퇴원시켰다고 한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선주와 본사에 급히 전문을 띄우면서도 걱정이 태산이다. 수장(水葬)이라도 치러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찔했다. 원래가 작은 체구에 바짝 여윈 체질인데 수술을 마친 후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쫓겨오듯 한 처지가 정말 불안하고 불쌍했다. 하지만 이것이 엄연한 현실임에야 어쩔 수 없다. 기관부와 취사부(炊事部)에 명하여 최우선적으로 최 군을 살리고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최 군의 얘기에 따르면 겨우 수술은 받아 통증은 없어졌지만 먹는 것이 부족하고 입에 맞지 않은 데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아 전화로 연결시켜 준 곳이 이북대사관이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긴장된 상태에서 이북 말투를 듣고 보니 ‘죽어도 배에 가서 죽어야겠다’는 각오 끝에 귀선케 해 달라고 했더니 병원 측에서도 얼씨구나 하고 보내버린 것이었다. 그들도 외국 선원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싫었던 모양이다.
모잠비크! 내가 승선 중 다녀본 60여개 국 가운데 알바니아와 더불어 최빈국(最貧國)이 아니었나 싶다. 정박 기간 중 선교(船橋)에서 내려다 보면 인부들이 올라와 맨 먼저 뒤지는 것이 본선의 쓰레기통이었다. 우선은 먹을 것을, 그리고는 일상생활용품이 될 만한 것이다. 심지어 버린 음료수병이 귀중한 일용품이 된다. 어느 나라없이 도선사(導船士)라면 수준이 높은 사람들인데 고용된 러시아인 도선사가 치약 하나, 비누 한 개, 휴지 등을 적선(積善)하길 요구하며, 이 나라의 수도인데도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짐작이 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60년대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지 독립 열풍에 영향을 받아 1964년에 사회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이 결성되어 이의 주도 아래 당시 지배국이었던 포르트칼과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포르투갈은 진압을 위해 막대한 전비와 군 병력을 쏟아부으면서, 모잠비크는 포르투갈군과 식민지 독립군 게릴라 간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974년에 모잠비크의 적국이자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포르투의 국내 혁명으로 아프리카의 식민지 유지를 고집하던 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이후 들어선 포르투갈 민주주의 신정부의 승인으로 모잠비크는 이듬해인 1975년에 독립을 쟁취했다고 한다. 지금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지만 공산주의로 부유한 나라는 없다.
그렇게 해서 최 군이 회복세를 보이더니 살아났다. 모두들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했다. 귀국하지 않고 계속 승선, 만기(滿期)를 채우고 가겠다고 했다. 책임을 가진 자로서 우선은 뿌듯하고 대견스러운 생각마져 들었지만 고민도 많았다.
귀국 후 그의 노모와 형이 함께 사는 집으로 초대를 받아 정성껏 만든 점심 한 끼를 대접받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하던 그의 노모에게 내가 더 고마움을 가지기도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