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山鴻毛(태산홍모)
泰 클 태 山 뫼 산 鴻 큰기러기 홍 毛 터럭 모
태산과 기러기의 깃털.
태산처럼 무겁고 기러기 깃털처럼 가볍다는 뜻으로, 경중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을 비유하거나, 사람에게는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무제(漢武帝) 때 태사령(太史令) 직책을 가진 사마천(司馬遷)이란 사관이 있었다.
역시 태사령으로 무제를 모셨던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중국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기록할 계획을 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하지만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아들 사마천에게 《사기(史記)》의 완성을 간곡히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저술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가 역사 집필에 몰두한 지 7년이 경과한 어느 날, 청천병력과 같은 재앙을 당하게 된다.
당시 한무제는 자기가 총애하는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인 이광리(李廣利)에게 흉노 정벌의 전공을 세우게 해 주기 위해 명장인 이릉(李陵)에게 보급을 맡아 이광리의 뒤를 돕도록 명했다.
그런데 이릉은 무제의 명을 받들지 않고 스스로 별동대 5천 보병을 이끌고 흉노의 땅에 깊숙이 침입하여 흉노의 정병과 독자적으로 싸웠다.
이릉은 흉노 선우(單于)의 3만 정병과 맞서 무려 수천 명을 사살했다.
흉노의 선우는 좌우 현왕(賢王)의 정병 8만을 불러들여 도합 11만의 병력으로 이릉을 공격했지만 용감무쌍한 이릉의 군사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흉노의 선우는 공격을 그치고 철군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릉의 부하 중 하나가 잘못을 저지르고 흉노로 도망하여, 이릉 군대에는 원병이 없고 화살도 거의 다 떨어졌다는 군사기밀을 알려 주었다.
이를 안 흉노의 선우는 말머리를 돌려 대대적으로 이릉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화살과 식량이 다 떨어지고 전사자가 반이 넘었으며, 퇴로를 차단당한 데다가 원군도 오지 않자 이릉은 할 수 없이 항복을 하고 말았다.
부하들의 대부분은 전사하고, 이리저리 도망을 쳐 간신히 한나라로 돌아간 사람은 4백여 명에 불과했다.
흉노의 선우는 포로로 잡힌 이릉의 용맹함을 높이 사 자기 딸을 아내로 주는 등, 이릉을 후대하였다.
무제는 이로 인해 대로하여 이릉의 노모와 처자를 주살하고 이릉의 죄를 문책하는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어느 누구도 이릉을 비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사마천은 무제의 노여움을 잠시나마 누그러뜨려 주기 위해 이릉의 과거의 전공(戰功)과 인품을 들어 그의 투항에 대해 변명하고 나섰다가 그만 무제의 진노를 사, 죄인의 몸이 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죄목은 ‘무상죄(誣上罪)’, 즉 없는 사실을 꾸며 황제를 모독한 죄로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사마천 앞에는 첫째, 사형을 당하는 것, 둘째, 속전(贖錢) 50만 냥을 물고 풀려나는 방법, 셋째, 부형(腐刑, 궁형(宮刑))을 당하고 풀려나는 방법 등 세 가지의 선택이 놓여 있었다.
사마천은 고심 끝에 부형을 선택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사마천이 47세 되던 해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마천은 더없는 치욕을 당하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