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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1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한반도의 여말선초 시기 고려와 조선 왕조에서 한반도를 침입하던 왜구의 주요 기항지 가운데 하나인 쓰시마섬을 토벌한 것을 가리킨다.
정벌은 총 3번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조선 세종 1년(1419)에 단행된 제3차 대마도 정벌을 칭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불러, 왜구(倭寇) 문제가 아닌 한반도의 왕조를 침략의 주체로 칭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충정왕 2년(1350),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를 침략하자 합포의 천호 최선과 도령 양관 등이 이를 격퇴해 적 3백여 명을 죽였다.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장장 40여 년간 총 3백여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략해 고려 민중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고려는 일본 정부에게 왜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럴 힘이 없었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 시대라는 전란에 휘말렸고 특히 규슈 일대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전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반도에서 맹위를 떨친 왜구는 한반도와 매우 가까운 대마도(쓰시마 섬)를 거점으로 삼았다.
본래 대마도 땅이 매우 척박해 식량 생산이 요원해서 고려와 교역해 식량을 구입함으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여몽전쟁과 원나라의 일본원정 이후 교역량이 줄어들자 왜구의 선봉 역할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이에 고려 우왕 13년(1387) 관음포 전투에서 전선 47척으로 왜구의 전선 120척을 괴멸시키는 등 왜구를 상대로 맹활약한 명장 정지는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1281)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후 왜구는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괴멸된 뒤 수그러들었지만, 고려 창왕 즉위년(1388) 고려가 제2차 요동정벌을 단행하느라 부산한 틈을 타 양광도를 휩쓸었고 가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부 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에 정지가 위화도 회군 직후 양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 전주목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해 왜구를 진압했다.
이후 위화도 회군의 주역 세력은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한 뒤 분위기를 쇄신할 겸 한반도를 빈번하게 침략하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이 박위의 지휘하에 대마도로 출정했다.
박위는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는 숙위병인 '우다치'에 임명된 후 김해부사, 상주부사,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고, 김해부사로 재임했을 때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켰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해 회군공신에 올랐다.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군비가 차츰 해이해졌다.
그러므로 섬에 사는 왜적들이 함부로 노략질을 한지 이미 40여 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3면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으나 국가는 다만 수세만 취하고 장수들은 아직도 가서 칠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대는 용기를 분발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험한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화근을 전복하고 건물과 함선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포로되었던 우리 백성들을 고향에 돌아오게 했으니 이로써 국가의 수치를 씻었으며 이로써 신민의 원수를 갚았도다.
승전 보고가 처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진실로 기뻤다.
이제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그대에게 의복, 안마(鞍馬), 은덩이 등 물건을 주노라.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위는 다만 집과 배를 불살랐을 뿐이고 실상 포로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원된 병력의 규모가 나와 있지 않고 자세한 전투 경과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1차 대마도 원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며, 박위가 백성 100여 인을 구출한 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적선 3백 척과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을 볼 때 왜구의 피해가 컸음은 분명하다.
박위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조선 건국 후에도 왜구가 침략하여 조선 태조 2년(1393)부터 태조 6년(1397)까지 4년간 53회에 달했다.
특히 태조 5년(1396) 8월 9일 왜선 120척이 경상도에 침입해 동래, 기장, 동평현을 함락하고 전선 16척을 탈취했으며 수군 만호를 살해했다.
이에 진노한 태조 이성계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을 5도 병마도통 처치사로 임명하고, 남재를 도병마사, 신극공을 병마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와 일기도를 정벌하게 했다.
김사형 등이 길을 떠날 때 태조가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전송했고, 김사형에게 부월과 교서를 주고 안장 갖춘 말, 모관, 갑옷, 궁시, 약상자를 내려줬으며, 남재, 이무, 신극공에게는 각각 모관, 갑옷, 궁시를 내려줬다.
또한 태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써왔다.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했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에게 명령하여 출정하게 하는 것이니, 소호(召虎)]가 회이(淮夷)를 정벌한 것과 윤길보(尹吉甫)가 험윤(玁狁)을 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를 한결같이 옛일을 따라서 일찍이 경솔한 거조가 없었던 것은 이들 백성들이 동요될까 염려했던 것인데,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은 의관의 명문이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큰 재목이라, 기품이 삼엄하고 입지가 홍의(弘毅)해서 서정(庶政)을 처리할 때는 다 이치에 맞고, 인재를 천거하면 모두 그 소임에 합당하여, 밝기는 허(虛)와 실(實)을 잘 알고, 슬기로움은 외적의 난을 제어할 것이다.
이에 제도 병마 도통처치사(諸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절월(節鉞)을 주어 동렬(同列)을 시켜 돕게 하고, 널리 막료를 두어서 그 위엄을 중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부복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을 도모하여 나의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을 어기거나, 수령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하라.
김사형의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의 전력이며 언제 대마도로 떠났으며 구체적인 전과와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전혀 알 수 없다.
일각에서는 대마도 정벌 첩보를 접한 나가온 왜구의 투항과 조선 육지에서의 왜구 토벌 등의 성과로 인해 이미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한겨울이었으므로 대마도, 이키섬으로의 정벌이 실제로는 실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주원방포를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이 걸린 것을 감안해 볼 때 상대적으로 2개월간의 긴 원정 기간이 있었고 또 1397년 1월 30일 김사형이 두 달 만에 돌아오자, 태조는 홍인문 밖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이해 위로했고 의안백 이화, 좌정승 조준, 봉화백 정도전에게 명해 김사형에게 잔치를 베풀게 했으며 그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전과를 거둔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므로 대마도 정벌이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조선왕조실록엔 원정을 단행한 지 18일이 지나 12월 21일에 왜인 구육(㡱六)이 3인을 인솔하고 와서 장검 하나와 환도 하나를 바치면서 "전하께서 항복하는 자를 어루만져 안정시켜 주시고 지난날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신다기에, 토지를 청해서 백성이 되려고 하옵니다."라고 밝혔다는 기록이 있고, 이듬해 4월엔 왜구 나가온(羅可溫)이 병선 24척을 이끌고 조선에 항복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
나가온은 당초 1월에 조선에 항복할 뜻을 밝히고 아들 도시로(都時老)와 반당(伴黨) 곤시라(昆時羅)를 볼모로 삼아 계림 부윤 유양에게 보냈다.
그러나 유양이 병을 칭하며 나가서 보지 않자, 왜구들은 진의를 의심하다가 지울주사 이은을 납치해 도망갔다.
이때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 충청도 도절제사 이귀철, 전라도 도절제사 김빈길, 경기우도 절제사 김영렬은 이들을 잡지 못했고, 5도 통제사 김사형은 이 네 장수들을 경산부에 잡아 가두고 이 사실을 태조에게 보고해 죄를 물으라 요청했다.
이에 태조 6년(1397) 2월에 태조 이성계는 최운해, 이귀철, 김빈길, 김영렬을 순군부에 가두고 대간과 형조로 하여금 국문하게 했다가 김사형과 의성군 남은이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자 최운해를 안변 진명포에, 김영렬을 옹진에, 김빈길을 청해에, 이귀철을 평양에 유배하고 모두 수군에 편입시켰다.
그러다가 4개월 후에 다시 최운해에게 곤장 100대를 치게 한 뒤 청해도 수군에 복무하게 했고, 김빈길을 장 90대 후 흑림 수군으로 옮겼으며, 이귀철을 장 90대에 안주 수군으로 옮겼고, 김영렬을 장 90대에 옹진 수군으로 옮기게 했다.
이런 불미스런 일이 있었지만, 태조는 다시 항복해온 나가온 등을 너그러히 용서하고 나가온을 선략 장군(宣略將軍)에 임명하고 부하 도시라(都時羅) 등 8인은 각각 영사정(領司正)·부사정(副司正)의 직책을 줬다.
또한 나가온의 아들 도시로가 사망하자, 태조는 사람을 보내 장례를 정중하게 치뤄주게 했고 나가온은 감격하여 울었다.
이후 나가온은 임온(林溫)으로 개명했고 그의 부하들 역시 조선 이름으로 개명해 조선의 관직을 역임했다.
태조 7년(1398)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선을 방문해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래, 대마도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예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갔다.
이들 사절단은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보낸 자들이었고, 왜인 상인들도 이들을 따라가 항구에 돌아다니며 교역했다.
이로 인해 여러 폐단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은 부산포와 내이포에 한해 왜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고, 통행 증명서인 행장(行狀)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게 했다.
또한 태종 18년(1418) 3월 경상도의 염포와 가배량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시켰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 대에만 소규모 침략이 60여 차례 있었다.
그나마 소 사다시게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왜선을 가능한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려 노력했으며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백성들을 돌려보냈기에 조정에서는 그를 괜찮은 인물로 여겼다.
그러다가 소 사다시게가 사망한 뒤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는데, 이 시기에 기근이 들어 대마도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다시 왜구가 활개를 쳐 조선과 명나라를 향한 약탈 행렬이 이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소 사다모리에게 왜구를 제어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대마도의 실권은 왜구의 두목이자 소다만호(早田萬戶)인 사에몬타로(左衛門太郞)가 장악하고 있어서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세종 1년(1419) 5월 초, 왜선 39척이 비인현 도두음곶을 침략했다.
그들은 조선 병선 7척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많은 조선 병사들을 살육했으며, 만호 김성길은 창에 찔려 물에 떨어졌다가 겨우 헤엄쳐서 살았고, 아들 김윤은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여기고 "아비가 이미 물에 떨어져 죽었으니, 내가 어찌 혼자 싸우다가 적의 손에 죽으리오."라며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후 왜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육지에 올라 비인 현감 송호생의 군대를 격파하고 송호생이 달아난 성을 포위해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성 밖에 있는 민가의 닭과 개를 노략해 거의 다 없어지게 했다.
이에 지서천군사 김윤과 남포진 병마사 오익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하고 송호생이 성밖으로 나와 협공하자, 왜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또한 5월 12일엔 왜선 7척이 해주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고, 13일엔 황해도 조전절제사 이사검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에서 적선 38척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왜구들은 이사검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조선을 치러 온 것이 아니라, 본래 중국을 향하여 가려고 했으나 마침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여기에 왔노라.
만일 우리에게 양식을 주면 우리는 곧 물러가겠으며, 전일에 도두음곶에서 싸움한 것은 우리가 먼저 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대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을 하수(下手)하기에 부득이 응했을 뿐이다.
이에 이사검이 사람을 보내 쌀 5섬과 술 10병을 줬으나, 왜구는 도리어 보낸 사람을 잡고 양식을 더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사검은 진무(鎭撫) 2인과 선군(船軍) 1인을 보내어 쌀 40섬을 주었으나, 왜구는 이속과 진무는 돌려보냈지만 선군을 잡아두고 이시검과 대치했다.
이에 태종과 세종은 근심하며 대호군 김효성을 경기, 황해도 조전 병마사에, 예빈 소윤 장우량을 황해도 경차관으로 임명하여 각기 병사를 이끌고 해주로 파견했다.
또한 태종과 세종은 박은, 이원 및 조말생과 이명덕을 대궐로 불러 왜구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세종이 말했다.
각도와 각 포구에 비록 병선은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방어가 허술하여, 혹 뜻밖의 변을 당하면, 적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변환(邊患)을 일으키게 될까 하여, 이제 전함(戰艦)을 두는 것을 폐지하고 육지만을 지키고자 한다.
판부사 이종무와 찬성사 정역 등이 반대했다.
우리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전함이 없으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지강도 반대했다.
고려 말년에 왜적이 침노하여 경기까지 이르렀으나, 전함을 둔 후에야 국가가 편안했고, 백성이 안도했나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사검이 왜구에게 협박하여 식량을 내줬으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왜적은 병선이 많이 모이면 약한 틈을 치러 할 것이다." 하며 여전히 수군의 효용성을 의심했다.
반면, 태종은 류정현, 박은, 이원, 허조 등을 불러 왜구가 중국으로 치러 간 틈을 타 대마도를 치는 게 어떤지 물었다.
이에 신하들이 대마도를 치는 건 위험하니 적들이 귀환할 때를 노려 역습하자고 제의하자, 태종은 단호하게 답했다.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 오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적이 돌아옴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고, 만일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고,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이후 태종은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 이숙묘, 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 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 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게 했으며, 경상, 전라, 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배를 타는 데 능숙한 병사들을 이끌고 6월 8일에 견내량에 집결하여 대마도 정벌을 준비하게 했다.또한 영의정 류정현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했다.
이리하여 제3차 대마도 정벌의 막이 올랐다.
대마도 원정을 결정한 태종은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경도로 보내고, 왜구와 내통한다고 의심되는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으로 나눠 보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달했다.
또한 간첩이 있을 것을 우려해 요해지(要害地)를 지켜 행인들을 점검하고 통행증이 없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게 했다.
이후 태종은 6월 9일 전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교서를 반포했다.
병력을 기울여서 무력을 행하는 것은 과연 성현이 경계한 것이요,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라, 옛적에 성탕(成湯)이 농삿일을 제쳐 놓고 하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 선왕(宣王)이 6월 같이 더운 때에 험윤(玁狁)을 토벌했으니, 그 일에 있어 비록 대소는 다름이 있으나, 모두가 죄를 토벌하는 행동은 한 가지라.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1410)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이 용이 나는 천운에 응하여 위덕이 널리 퍼지고 빛나서,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 주시는 덕을 입어 그렇지 않으리라 믿었더니, 그러나 그 음흉하고 탐욕 많은 버릇이 더욱 방자하여 그치지 않고, 병자년(1396)에는 동래(東萊)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니,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 병술년(1406)에는 전라도에, 무자년(1408)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까지 하니, 그 포학함이 심하도다.
두 번째 제주에 들어와 살상함이 많았으니, 대개 사람을 좋아하는 성낸 짐승처럼 간교한 생각을 숨겨 가지고 있는 것은 신과 사람이 한 가지로 분개하는 바이지마는, 내가 도리어 널리 포용하여 더러움을 참고 교통하지 않았노라.
그 배고픈 것도 구제했고, 그 통상을 허락하기도 했으며, 온갖 구함과 찾는 것을 수응(酬應)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고, 다 같이 살기를 기약했더니, 뜻밖에 이제 또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아 비인포에 몰래 들어와서 인민을 죽이고 노략한 것이 거의 3백이 넘고, 배를 불사르며 우리 장사(將士)를 해치고, 황해에 떠서 평안도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며, 장차 명나라 지경까지 범하고자 하니,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게 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내가 삶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어버리는 것을 오히려 하늘과 땅에 죄를 얻은 것같이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이제 왜구가 탐독(貪毒)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뭇 백성을 학살하여 천벌을 자청하여도 오히려 용납하고 참아서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제 한창 농사짓는 달을 당하여 장수를 보내 출병하여, 그 죄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아아,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 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여, 여기에 이해(利害)를 말하여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6월 19일, 원정군은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했다.
이때 동원된 병선은 227척, 병력은 17,285명이었고, 함선에 실린 식량은 65일치였다.
이때 태종은 6월 8일 견내량에 집결한 함대의 출항 소식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오지 않자 형조 참판 홍여방을 체복사(體覆使)로 삼아 원정을 떠나지 않는 까닭을 알아보려 했지만 정현이 17일에 이미 출항했다고 보고하자 그만뒀다.
그 후 태종은 함대가 역풍으로 인해 거제도로 돌아왔다고 하자 병조 정랑 권맹손을 경차관으로 삼고 파견해 질책하는 내용의 교지를 류정현에게 전달하게 했다.
금월 11일 갑신은 곧 발선하는 길일이거늘, 제장이 배가 떠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고, 12일 을유에 겨우 배가 떠나서 거제도에 도착하고, 17일 경인에 이르러 또 제장이 배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고, 또 제장의 보고에 이르되, '17일에 배가 떠났으나, 바람에 거슬려 거제도로 돌아왔다.' 하니, 이것은 다 행군하는 큰 일이어늘, 경이 어찌하여 분변하여 장계하지 않았는가.
위에 적은 그날의 더디게 된 사유와 역풍의 진위를 속히 분변하여 장계할 것이며, 또 제장을 독촉하여 발선하게 하라.
권맹손은 명을 받들어 거제도로 내려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함대가 대마도로 떠난 뒤여서 교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한편 태종은 중국으로 간 왜구가 대마도로 돌아올 것을 대비해 경상, 충청, 전라 해도 각처의 조전 절제사로 하여금 각각 병선을 거느리고 요해지에 머무르면서 돌아오는 적을 요격하게 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대마도 정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할 것을 우려해 원정 함대가 출항한 뒤에 일본 사신을 돌려보내게 하고 일본 정부에게 일본 본토를 칠 의사가 없음을 알리게 했다.
6월 20일, 선봉 함대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했다.
섬에 있던 왜구들은 이들을 바라보고서 요동으로 출정한 대마도의 왜적들이 원정 약탈에 성공한 후 귀환한 것으로 오해하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환영했다 한다.
그러나 그 직후에 조선 함대가 모두 도착해 두지포에 정박하자, 왜인들은 모두 넋을 잃고 도망갔다.
다만 50여 인이 남아서 두지포에 상륙하는 조선군과 교전했으나 패퇴해 양식과 재산을 버리고 험준한 산에 숨었다.
이종무는 귀화한 왜인 지문을 보내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자는 자손에게까지 마땅히 후하게 하려니와, 은혜를 배반하고 들어와 도적질한 자는 처와 자식까지도 아울러 죽일 것이니, 이것은 천리의 당연한 바요, 왕자(王者)의 대법(大法)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더불어 물 하나를 서로 바라보며 우리의 품안에 있는 것이어늘, 전조가 쇠란했을 때에 〈그 틈을 타서〉 경인년으로부터 우리의 변경을 침략했고, 군민을 죽이었으며, 가옥들을 불사르고 재산을 빼앗아 탕진했다.
연해 지방에서는 사상자가 깔려 있는 지가 여러 해이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이 용비(龍飛)하시어서 운을 맞아서 〈너희들을〉 도와 편하게 하여 서로 믿고 지내게 했으나, 오히려 또한 고치지도 아니하고, 병자년에는 동래에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병선을 빼앗고, 군사를 살육했으며, 우리의 성덕 신공(聖德神功)하신 상왕이 즉위하신 후 병술년에는 조운선을 전라도에서 빼앗아 갔고, 무자년에는 병선을 충청도에서 불사르고 그 만호까지 죽였으며, 재차 제주에 들어와서는 살상이 또한 많았다.
그러나 우리 전하께서는 거치른 것과 때묻은 것을 포용하시는 도량이시므로, 너희들과 교계(較計)하고자 하지도 않으시고 올 적에는 예를 두터이 하여 대접하시었으며, 갈 때에도 물건을 갖추어서 후히 하시었다.
굶주림을 보고 도와주기도 했고, 장사할 시장을 터주기도 하여,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저버린 일이 있었던가.
지금 또 배 32척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틈을 살피며, 비인포(庇仁浦)에 잠입하여 배를 불사르고 군사를 죽인 것이 거의 3백이 넘는다.
황해를 거쳐서 평안도에 이르러 장차 명나라 지경을 침범하려 하니, 은혜를 잊고 의를 배반하며, 천도를 어지럽게 함이 심한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장사가 비록 잡으려고 쫓아 갔으나, 만호 중[僧] 소오금(小吾金)을 도두음곶[都豆音串]에서 죽였고, 만호 중 요이(饒伊)를 백령도에서 죽였으며, 구라(仇羅) 등 60여 인을 다시 궐하에 끌고 갔다.
이에 우리 전하가 혁연히 성내면서 용서함이 없이 신을 명하여, 가서 그 죄를 묻게 하시니, 수죄하는 말에 이르기를, '수호(守護)의 선부(先父)는 〈조선〉 왕실을 마음껏 섬겨서 정성을 모으고 순종함을 본받았으니, 내 이를 심히 아름답게 여기었더니, 이제는 다 그만이로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자식 사랑하기를 그 아비와 같이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토죄할 적에도 수호의 친속들과 전일에 이미 순순히 항복하여 온 자와 지금 우리의 풍화(風化)를 사모하여 투항한 자들만은 죽이지 말고, 다만 입구(入寇)한 자의 처자식과 여당만을 잡아 오라고 한 것이다.
아아, 우리의 성덕 신공하신 상왕 전하의 지인 대의(至仁大義)는 멀리 고금에 뛰어나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케 했으니, 수호는 우리 전하의 뜻을 받들어서 적당(賊黨)으로서 섬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쓸어서 보내되,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선부(先父)의 정성을 다하여 바치던 뜻을 이어 길이 길이 화호함을 도타이 하는 것이 어찌 너의 섬의 복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뒷날에〉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오직 수호는 삼가 도중(島中)의 사람으로서 대의를 알 만한 자들과 잘 생각하여라.'고 했노라.
그러나 소 사다모리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조선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선 129척을 빼앗아 아군이 사용할 20척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조리 불살랐다.
또 가옥 1939호를 불살랐고 114명의 목을 베고 21명을 사로잡았으며, 밭에 있는 벼 곡식을 베어버리고 중국인 남녀 131명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구출한 중국인 포로들을 통해 왜인들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는데 그것은 대마도가 현재 기근이 심하고 또한 갑자기 침공을 당해 모두 겨우 양식 한두 말만 가지고 달아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포위한다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정보를 접한 조선군은 훈내곶(訓乃串)으로 진출하여 목책을 세워 놓고 적이 왕래하는 중요한 요지를 지키면서 장기 주둔할 태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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