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 - 영천
1. 창녕조씨 영천 입향조
조신충(曺信忠)은 창녕조씨 영천 입향조(入鄕祖)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부인의 고향인 지금의 영천시 금호읍 창수마을로 은거하였다고 한다.
조신충은 5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조상보(曺尙保), 조상정(曺尙貞), 조상직(曺尙直), 조상치(曺尙治), 조상명(曺尙明)이다.
2. 영천에서 세거한 창녕조씨 후손
조신충의 첫째 아들인 조상보의 후손 중에서 문과 급제한 분으로는 조극승(曺克承)과 조규승(曺逵承) 형제가 있다. 두 분의 증조부인 조명직(曺命稷)은 지금의 영천시 금호읍 창수마을에서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두 분의 부친인 조경섭(曺暻燮)은 첫째 부인인 달성서씨 서덕순(徐德淳)의 따님과 사이에 조극승을 낳고, 둘째 부인인 경주이씨 이계신(李桂臣)의 따님과 사이에 조규승을 낳았다.
조극승은 1831년(순조31년) 문과 급제하여 예조좌랑, 사헌부감찰,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1875년(고종12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극승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영천 선원마을의 영일정씨 정유탁(鄭裕琢)과 겹사돈을 맺었다. 즉, 조극승의 외아들인 조병수(曺秉秀)는 정유탁의 외동딸과 혼인하였고, 정유탁의 셋째 아들인 정치구(鄭致龜)는 조극승의 외동딸과 혼인하였다.
조극승의 아우인 조규승은 1867년(고종4년) 문과 급제하여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을 거쳐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지냈다. 조규승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조병무(曺秉武), 조병익(曺秉翼)이고, 사위는 영일정씨 정진기(鄭鎭岐)이다.
3. 영천을 떠난 창녕조씨 후손
조신충의 넷째 아들인 조상치는 1419년(세종1년)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이르렀으나, 세조가 즉위하자 병을 핑계 삼아 영천으로 귀향하였다.
조상치의 아들인 조변흥[曺變興, 예안현감], 조변륭[曺變隆, 승문원사(承文院事)], 조변안[曺變安, 예조참의], 손자인 조석보[曺碩輔, 조변안의 아들로, 검상사인(檢詳舍人)], 증손자인 조계은[曺繼殷, 조변륭의 손자로, 종부시정(宗簿寺正)], 조계상[曺繼商, 조계은의 아우로, 우찬성(右贊成)]이 문과 급제하여 조선 전기 가문의 번성을 이뤘다.
하지만, 조계은과 조계상 형제는 영천에 있던 조부 조변륭(曺變隆)의 묘소와 부친 조구서(曺九敍)의 묘소를 명당 터라고 하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로 이장하면서 고향인 영천을 떠났다. 조계상은 중종반정(연산군 폐위)에 가담한 공로로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고, 훈구파로서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다가 파직되고 기묘사화(조광조 등 사림파 숙청) 이후 다시 등용되었다.
4. 영천으로 귀환한 창녕조씨 후손
조신충의 다섯째 아들인 조상명의 손자가 조말손(曺末孫)이다. 조말손은 1472년(성종3년) 문과 급제하여 영암군수 등을 지냈고, 그의 아들인 조치우(曺致虞)도 1494년(성종25년) 문과 급제하여 대구부사, 예천군수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조치우는 창원박씨(昌原朴氏) 박혁손(朴赫孫)의 따님과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창원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조치우의 아들인 조효연(曺孝淵)은 창원에서 태어나 1519년(중종14년) 문과 급제하여 함안군수 등을 지냈다. 조효연의 첫째 아들인 조윤신(曺允愼)은 5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조계익(曺繼益), 조광익(曺光益), 조희익(曺希益), 조호익(曺好益), 조겸익(曺謙益)이다.
조윤신의 첫째 아들인 조계익은 창원에서 세거(世居)하였고, 둘째 아들인 조광익은 밀양박씨 박홍미(朴弘美)의 따님과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지금의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로 이거(移居)하였는데, 1564년(명종19년) 문과 급제하고 1576년(선조9년) 중시에도 급제하였다. 조광익은 아우인 조호익이 경상도 도사의 모함으로 평안도 강동(江東)에 전가사변(全家徙邊, 지역토호세력의 지역에 기반한 권력범죄로 판단할 경우, 죄인을 그의 전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는 형벌)을 당하자,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여 아우인 조호익을 위로하고 술로써 회포를 풀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점점 병이 되어 1578년(선조11년) 임지의 관사에서 42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조윤신의 셋째 아들인 조희익은 1570년(선조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선대(先代)의 고향인 영천으로 이거(移居)하여 임진왜란 당시 아들인 조이함(曺以咸) 등과 함께 영천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1593년(선조26년) 세상을 떠났다. 영일정씨인 호수공(湖叟公) 정세아(鄭世雅)의 넷째 아들인 정수번(鄭守藩, 내금위장)의 장인이 조희익이다.
조윤신의 넷째 아들인 조호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의 청으로 전가사변(全家徙邊)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 등에 임명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1603년(선조36년) 지금의 영천시 대창면에 정착하여 여생을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당시, 영천 입암(立巖, 지금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로 편입되었다)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더불어 영천지역에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자식이 없어 조희익의 아들 조이수(曺以需)로 후사(後嗣)를 이었고, 조이수의 아들인 조완(曺輐)은 영일정씨인 호수공(湖叟公) 정세아(鄭世雅)의 셋째 아들인 정안번(鄭安藩, 용양위 부사과)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조윤신의 막내아들인 조겸익은 전가사변(全家徙邊)을 당한 넷째형님 조호익을 따라서 평안도 강동(江東)에까지 와 오래도록 근심과 괴로움을 함께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간지 겨우 한 해가 지난 1578년(선조11년) 둘째형님 조광익이 별세한지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일정씨로 문과 급제하여 거창현감을 지낸 정삼변(鄭三變)의 첫째 아들인 정사상(鄭四象)의 장인이 조겸익이다.
[출처] 창녕조씨 - 영천|작성자 변호사 정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