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이렇게 역경을 극복하라
01/10수(水)고후 1:8-11, 고후 4:10-12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9).
군대에 가면 깔딱 고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일이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군인들은 잘 극복합니다. 고개만 넘으면 한 계급 올라간다는 소망, 꿈,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 과정의 훈련을 마쳐야 거기에 걸맞는 계급을 달게 됩니다. 군인들은 훈련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온 환경, 역경에 대한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예수와 인격적인 사귐이 있을 때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가 일치됩니다. 요셉의 환경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은 요셉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경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고난을 긍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9절). 말씀을 체험할 때 고난이 긍정으로 보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가난은 부요의 첩경이고, 슬픔에서 기쁨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내 속에 사실 때 양면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든 감사하게 됩니다. 루터 “천사는 하나님을 직접 섬기고, 사단은 하나님을 간접 섬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병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자신이 건강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성도의 역경은 순탄이 오는 길입니다.
▣고난은 나에게 약함을 배우게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8절).
약함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환란을 통해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배웁니다. 인간은 조금만 약해지면 절망, 좌절하게 됩니다. 반대로 강해지면 교만해집니다. 그 이유는 나는 약할 수 없는데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환란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존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일체의 비결을 배웁니다. 육의 사람은 약함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인간에게 고난의 양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약함을 배운 만큼 예수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역경은 자아의 죽음을 배우게 합니다.
자신이 죽은 무덤을 체험할 때 부활 생명이 나타납니다. 지금 자아 죽음을 배워야 합니다. 날마다 자아가 죽음의 사형틀에 들어갔다 나와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자아 죽음을 배우지 못하면 육신을 벗을 때 지옥에 갑니다. 예수 부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9절). 내가 죽어야 내 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고후 4:12).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나를 통해 주님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내가 십자가 체험을 하게 될 때 상대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미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환란 속에서 자신이 죽게 됩니다. 우리의 환란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And...
사도바울에게는 다메섹이 무덤이었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무덤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내 뜻이 사라져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반응, 세상의 평가에서 끊어져야 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칭찬, 비난에도 말이 없습니다. 죽음은 세상 평가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역경을 복되게 해석하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복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된 시각으로 보면 역경은 불행이 아닙니다. 육의 사람은 역경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지만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에게 역경은 긍정입니다. 역경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가까이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아를 죽음에 넘기라는 것입니다. 역경이라는 무대는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역경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잘 극복하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자아의 죽음은 주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이든 감사하며 그 상황에서 어떤 반응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무덤가에서 죽어있는 자들을 칭찬하든 비난하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 머물 때, 부활 생명이 나를 통해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죽어야 산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납니다. 십자가 원리를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죽겠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납니다.
나를 통해 주님이 상대에게 전달될 때 상대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입술로 전하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십자가 체험을 통해 예수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는 전도 원리입니다. 내가 죽을 때 상대가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나에게 역경을 주신 이유는 내가 죽어 주님이 내 안에서 완전한 인격으로 사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죽을 때만 그분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인격 안에서 두 주인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보다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역경을 자아의 죽음으로 잘 극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https://youtu.be/hDp-hZRBiqo?si=OMROKWTsPQX11C7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