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기문(隆起紋土器) 토기
융기문이란 알파벳W자 모양이 새겨진 토기로, 우리말로는 덧무늬 토기라고 한다. 이 무늬의 특징은 그릇표면에 흙띠를 덧붙여 무늬를 만든것으로, 무늬를 음각한 빗살무늬 토기와는 구분된다. 즉 무늬를 덧 붙여 만들었다 하여 덧무늬 토기라고 한다.
이 융기문 토기는 이른 민무늬 토기(원시무문토기)와 함께, 우리나라 토기중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하는 토기이다.
덧문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초기 것의 형태로 추정되는 토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산 동삼동(東三洞), 양산(梁山) 신암리(新巖里), 양양(襄陽) 오산리(鰲山里), 춘천(春川) 내평리(內坪里)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가 대표적이다. 한편 일본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 고시다카유적[越高遺蹟(월고유적)]에서도 한국식 덧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주구가 달린 융기문토기(영도구)
부산광역시 영도구(影島區) 영선동(瀛仙洞)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초기의 융기문토기. 높이 12.4㎝, 입지름 16.4㎝. 형태적으로 볼 때 반구형(半球形)의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발형토기)]이다. 바리모양토기=사발형토기
또 동삼동과 영선동 일대에서 나온 사발형 토기를 자세히 보면, 그릇 입술 한쪽이, 물을 따르기 편리하도록 삐죽하게 나온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를 귀때 토기 혹은 주구토기(注口土器)라고도 한다.
주구토기(부리토기)
서울 암사동(巖寺洞) 빗살무늬토기유적의 연대는 BC 4000년 무렵인데 비해, 쓰시마섬 고시다카유적의 연대는 BC 5000∼BC 4500년 무렵으로 한 때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 BC 510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가 발견되었고, 현재에는 제주 고산리에서 나온 토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연대는 기원전 7000년까지 올라간다. 따라서 덧무늬 토기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방향으로 전파되어 나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토기는 무늬로 구분하기도 하고 형태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두가지를 다 고려 하여 쓰기도 한다.
또 오산리 유적의 발굴로 인하여, 그동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로 생각되어지던 빗살무늬 토기 이전에 이미 덧무늬 토기문화가 전개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수 송도 출토 덧무늬토기
덧무늬토기형중 가장 일반적인 사발형(발형 –바리)토기이다. 여수 송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높이 는35.2cm로, 상당히 큰 편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아마도 곡식이나 물을 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양 오산리 유적 토기
양양 오산리 토기
양양 오산리는 우리나라 내륙 신석기 시대의 시작점이라고 평가 할만큼 중요한 유적지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기원전 6000년에 이르는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무늬와 형태도 다양하다.
우선 토기의 밑면은 평평한 평저형(납작밑)토기들로, 바닥에 내려 놓기편리하다. 덧무늬토기는 소량이지만 현재까지 내륙지방에 출토된 덧무늬 토기중에는 가장 이른 기원전 51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밑바닥이 좁고 몸통부분이 넓은 발형토기와 옹기형 토기 , 호형토기 등이 있다. 옹기형 덧무늬 토기, 덧무늬 형태의 대표적인 W자형 무늬가 있다. 사발형(바리 혹은 발형)토기로 덧무늬 혹은 덧띠 무늬가 표면에 붙여져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시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이다. 서해안지역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형태인 뾰족밑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 문양은 구연부(입구)와 기복부(몸통)에 시문되어 있는데 구연부에서 기복부까지 어골문(고기뼈 모양)으로 무늬를 새겼다. 대체 부등호 >>의 모양이다.
구연부에 체크무늬인 사격자문(斜格字文)이 새겨져 있다.
양양 오산리 유적지 내에서 출토된 목이 달린 단지형토기, 이렇게 몸통이 굵고 목부분이 가는 형태를[壺型(호형)]토기라 한다.
또 손잡이가 달렸다 하여 띠 손잡이토기 라 하며 신석기 말기에 처음나타나 청동기 시대까지 이어 진다. 최초의 형태는 평안북도 지역에서 보이는데, 따라서 양양을 비롯한 강원 동해안 지역은 선사시대 문화의 중요한 이동통로 역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 지역에서는, 여러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들이 한곳에서 출토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