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내편 / 조경수
나의 결혼 생활은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딸 바보 아빠로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적어도 이 세상에 내편은 2명은 있다는 것이다. ‘왜 2명뿐이냐? 부모도 있고 형제도 친척도 있고 하다못해 친구도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보면 아마 이해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나는 30여 년 동안 장애인 생활시설을 여러 군데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나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지금의 나는 말하는 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지만 어렸을 때는 말을 잘 못해서 매일 구석에서 혼자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제대로 앉아있을 수 없던 몸임에도 불구하고, 또 겁이 없다보니 사고도 많이 치고, 말썽도 많았다.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모른다. 단지 장애가 있으니 부모가 키울 자신이 없었겠지. 인형처럼 귀엽고 깜찍한 딸이 있는 내가 이렇게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예쁜 아이가!’ 하면서 지금도 딸 바보 아빠로 행복을 누리며 잘만 살고 있는데 왜 나의 부모는 그 얼굴 한 번 더 마주하지 않고 기억도 안 나게 했는지 한때는 정말 많이 원망했었다.
나는 전공이 애니메이션이라 평소에 영화나 만화를 많이 보고 가끔 드라마도 본다. 하긴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영상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고 생각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감정이입도 한다. 사람에게는 많은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 많은 감정들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어떤 감정인지 모른 채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아차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한 편의 드라마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하나뿐인 내편’. 제목만 봐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은 우리가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어쩌면 나 자신이나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누구에게 한번 쯤 겪어봤을법한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내 속에 몰랐던 감정도 만날 수 있었다. 드라마의 내용은 여기서 따로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배경이나 감정 생각은 마음껏 표현해보고 싶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고아로 생활할 시대적 배경이 1970년대 중 후반으로 보인다. 나에겐 참으로 암울했던 시대였다. 말 한마디 잘 못하면 생사를 넘나드는 공포를 경험해야할 정도로 우리 모두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어제의 동무가 오늘의 시체로 발견됐던 끔찍한 경험을 겪고도 입을 다물어야지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유는 정박아, 오늘날 표현으로 지적장애 또는 발달장애로 보였으니 그들(보육교사)에게 나는 그저 돈 벌어다 주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오늘날 나를 이렇게 버티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천애고아가 이 험하고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나의 이름도 나이도 나에게 있는 그 어떤 무엇도 붙여주지 않은 채, 나 스스로 내 사람, 내편을 만들어가게끔 지금도 이끌어주고 있다고 믿는다.
내편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쉽진 않았다. 누군가의 아빠인 나에게 장애가 있지만 우리 딸은 나를 아빠로 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우리 두 사람 역시 그렇다. 세 식구 모두 장애라는 딱지가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산다.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외출을 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 가족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옛날처럼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우린 알 수 있다.
활보(활동보조인)랑 같이 다니다가도 선택하고 결정해야할 순간에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 있지 않고 옆에 있는 활보에게 향해 있다. 핸드폰 바꿀 때도 혼자 가면 안 해준다. 우리아이 학습지 면접 보는데 애기아빠인 나보다 활보랑 먼저 얘기한다. 신발 사러 갔더니 1,000원짜리 주면서 문전박대한다.
그래도 이런 건 약과라고 생각한다. 시설에 있었을 때는 아휴, 지옥이 따로 없었다. 내 몸이 무슨 샌드백인지 하루도 안 맞고 지나간 날이 없을 정도였던 시절, 오줌 싼다고 맞고, 똥 싼다고 맞고, 밥 안 먹어서 맞고, 밥 흘리고 먹어서 맞고, 심심하다고 또 맞고, 맞는 것도 이유라도 알고 맞으면 덜 억울하지 이유도 없이 뒤통수 후려갈기면 정말 죽고 싶었다. 때리는 방법도 참 다양했다. 무릎을 꿇게 하고 허벅지를 때리거나 엎드린 상태에서 엉덩이, 종아리, 발바닥을 때리기도 하지만 내가 겪은 최고의 고문은 거꾸로 매달린 채로 그냥......., 그 뒷이야기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장애라는 수식어는 나를 늘 따라다녔다.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서 주인공은 살인자라는 누명을 썼지만 살인전과자라는 수식어를 때어낸 주인공은 그저 평범한 우리 이웃에 사는 친절한 아저씨이고 또는 누군가의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이걸 우리 식으로 가져온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에게 장애라는 수식어를 떼어낼 방법은 없다. 살인자라는 수식어와 장애라는 수식어의 공통점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단, 살인자라는 수식어를 업으로 달고 사는 사람(킬러)은 예외다.) 그렇다면 두 수식어의 차이점은 뭘까? 살인 누명을 쓴 사람이 그 누명을 벗으면 그냥 사람이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람은 그 장애와 평생을 함께해야한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에게 상처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보가 되기 싫었다. 평범하진 않더라도 매 안 맞고 무시당하지 않고 작은 일에 공감하고 이해하며 소박하지만 나도 넓은 사랑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배움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선택권에서 멀어지고 만다. 불편한 몸은 나를 더 괴롭히고 더 아프게 한다. 아니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아이큐 검사 후 더 심해진 구타에 간질(정신질환)까지 하게 되면서 나는 살고 싶은 생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큐 점수 120은 그저 120이라는 숫자에 불가했다.
이쯤 되면 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오겠지만 그것 또한 내 몫은 아니었다. 깊은 어둠 속 시간은 흘러 시대는 변하고 영원히 내일이 없을 것 같았던 나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대학이라는 곳도 갈 수 있었고 좋은 사람들과 교제의 시간을 가짐으로서 친구도 많아졌고 상상도 못했던 내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진정한 사랑을 찾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것, 인생에 있어서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또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건 참으로 고귀한 선택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10년이 흘렀지만 우린 아직 깨를 볶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보물 때문에 삶의 이야기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서 나를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다. 부모도 형제도 심지어 나 자신도 모른다.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이 상대방 입장에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나는 말 못하고 못 움직이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뒷산에다 내다 버려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시대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일을 계획하면 완벽한 검증이 될 때까지 나의 행동과 생각을 보여주지 않을 때가 있었다. 공부도 그랬고 다른 놀이도 그랬다. 말을 못하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가지 못하니 눈치를 봐야했다. 누군가 한번 쯤 눈길을 줄만도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국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만다. 하루도 몽둥이찜질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 공포의 시간은 끝없이 계속 됐다. 차라리 죽자! 죽어! 밤마다 눈물로 기도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간들! 잔혹할 정도로 무식했던 그들은 과거의 정권처럼 그때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어디서 과거의 행동을 자랑처럼 여기고 형식적 선의를 베풀면서 또 다른 나를 괴롭히고 있진 않을까 두렵다.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은 누명을 쓴 주인공과 그의 딸이 생이별 했다가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만난 핏줄인데, 세상에 하나뿐인 아빠와 딸의 감정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아빠는 교도소에서 딸은 계모에게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상황, 그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겐 부모의 기억이 없다. 어렴풋이 엄마의 얼굴을 본 기억은 있었지만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선풍기와 이 몸에 남겨져있는 아픈 새끼손가락! 얼마나 힘드셨으면 귀한 아들을 남의 손에 맡기게 두고 가셨을까! 열 달 동안 뱃속에 품고도 3년가량 더 키웠다면 날 미워서도 못나서도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도 부모가 되어 그 입장을 이해해보려 하지만 힘이 든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왜 그 얼굴 한 번 더 보여주지 않고 나중에 찾을 수 있는 단서도 남기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움! 그것은 또 다른 감정으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 내편이 하나도 없다고 느껴진 때의 일이었다. 연말이었고 축제 분위기로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성탄을 알리는 트리장식도 화려했고 먹거리도 풍족했다. 또한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물들로 모두가 신나게 즐기고 있었고 나 역시 그 무리에 어울려서 즐겨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무엇이 왜 나를 우울하게 했는지 모른 채 살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는데 사실 그 감정이 사라졌을 줄도 몰랐다. 그러다 이 글을 작성하는 중에 아주 잠깐 동안 찾아왔었다. 나는 얼른 그 감정을 기억하고 과거에 그 감정을 만났을 그 자리에 있어 보았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로 즐거운 가운데 있지만 나는 즐겁지가 않다. 마음이 허하다. 두려워진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난 여전히 혼자가 된다. 내편은 없다. 내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과 놀이감은 잠깐의 행복은 줄 수 있지만 나에게 사랑은 줄 수 없다. 끝이 없는 공포, 암흑의 짙은 어둠은 쉬 아침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다. 시설 생활을 30년 가까이 한 것이 교도소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립생활을 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 후부터 공포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고 암혹의 짙었던 어둠에 아침 햇살 가슴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장애는 선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장애 때문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자유권, 평등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이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과거에 있었던 좋지 못한 상황을 보상받을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힘들고 어려운 순간, 공포와 두려운 감정에 억매일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천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이고 이름도 나이도 없이, 세상의 덩그러니 나 스스로 내 사람, 내편을 만들어가게끔 하셨다. 내 삶의 요소요소마다 잘 양념된 맛으로 감정을 소화시켜준 내편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