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이 이슈가 되는 시대이다.
목포 근대문화유산으로 홍역을 앓고 있는 국회의원과 서울시민의 문화유산인 40년된 식당, 을지면옥등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뉴스들이 오르내리는 걸 보면 도시재생의 방향성은 재활용이 아닌가 싶다. 얼마전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제주시민회관과 더불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던 오래된 건축물들이 시민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들을 많이 보았던 터라 도시재생은 새롭게 짓고 역사를 청소하는게 아닌 건 분명하다.
수 많은 전쟁을 통해 파괴된 도시를 재생하며 성장해 온 건축기술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건축만을 지향해서는 안된다. 낡고 오래되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공간을 오롯이 보존한다는 것,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재생방식이어야 한다.
제주시내 구도심의 중심에 있는 제주북초등학교의 김영수 도서관이 뜨고 있어서 찾았다. 새로운 도시재생을 보여주는 명소로 등극 할 것이라 생각된다.
1967년 이 학교 출신 김영수 어른이 도서관을 지어서 기증했다고 한다. 50여년이 지나며 학생들도 줄고 도서관도 낡아 주민과 행정, 도시재생센터가 합심하여 만들어 낸 작품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책읽는 화장실이 있다. 책을 읽다 화장실에 갖혀 버릴듯한 분위기...
이곳은 도서관의 딱딱한 개념을 뛰어 넘었다. 오래되고 버려지는 것들을 활용하려 전국을 발로 뛰며 구했다는 고재를 한옥을 짓는 방식으로 꾸며 아늑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작은 방들이 늘어 선 놀이공간 같은 분위기의 도서관, 마을주민들의 사랑방과 아이들의 복합공간을 꿈꾸며 만들었단다. 힘들고 쉬어 가고픈 그런날 이곳에서 며칠씩 책을 읽어도 좋을것 같다. 아직 일반인을 위해 오픈되지는 않았다고한다. 2019년 5월경 일반인에게 오픈되는 것을 기다려 본다.
한옥 분위기 물씬 풍기는 기와며 나무를 써서 만든 솜씨는 제주츨신 탐라지예 건축사무소 권정우 소장의 작품이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내려온지 얼마되지 않는 그는 틈나는 대로 제주의 오래된 것들을 찾아 다니고 주변국가들의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버는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한다. 아직까지 변변한 집한채 갖지 못하고 낡은 집에서 가족과 생활하는 건축가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 오는 봄날, 이곳에서 책을 읽다 잠이 들것만 같은 분위기다. 느낌이 좋다.
어느 방에서든 따스한 창가를 느낄 수 있다.
주민들을 위한 공간도 만들어졌다. 간단한 모임을 해도 좋겠다. 도서관이 책을 보는데만 쓰인다는건 아쉬운 일이다. 예의를 갖춘다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어도 좋겠다. 때에 따라 음식을 나누는 도서관은 어떨까?
아늑한 방을 보고 있자니 늦은 저녁에 한숨자고 가도 좋겠다는 느낌이 샘솟아 나온다.
마치 오래된 여관방이나 오래전 길모퉁이 있던 주막이 이랬을까?
건축의 마무리는 상량이다. 상량문에도 기원을 담았다.
모교를 지독히도사랑했던 사람의 글이었나 보다.
곧 도서관이 아니라 재생모범사례로 구경하는 사람들이 들끓을 것 같다.
계단에서건 어디서건 책을 들고 읽으면 도서관이다.
오래된 벽을 살렸다. 그 느낌 그대로 오래전의 이야기가 살아 있다.
화장실 앞 수전도 어릴적 학교의 분위를 담았다. 참, 정감이 넘친다.
담담한 색감은 차분함을 보여준다. 튀지 않지만 분명히 튄다.
2층에 있는 아이들의 공간, 누워서 책을 보건 앉아서 보건 도서관은 책을 읽으면 그만이다.
제주의 작가가 만든 용문양, 용이되라는 뜻일까?
계단에도 책을 꽂아 넣어 걷다가 쉬다가 어디서건 책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벽을 마감한 목재와 책꽃이로 쓴 목재도 오래된 느낌을 준다.
계단을 내려가다 왼쪽의 고재에서 느껴지는 세월을 읽는다.
수많은 이야기를 오롯이 담고 있다. 툭 건들이면 말을 꺼낼것 같은 분위기....
이 학교는 1907년 5월에 개교한 제주관립보통학교로 만들어 졌다. 일제강점기 제주군수를 역임한 문신. 윤원구군수에 의해 지어진 학교이다.
그의 기록을 디지털 제주대전에서 찾아 보았다. 군수직을 받고 내려 온 군수가 학교장을 겸직했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1905년 조선시대 마지막 제주목사 조종환(趙鍾桓)이 이임한 뒤 제주목사는 폐지되고 제주군수로 바뀌었다. 1906년(광무 10) 동래군수이던 윤원구가 초대 제주군수로 부임하였다. 윤원구가 제주군수로 부임하던 때는 일본에 의해 조선의 행정제도가 개편되고 있던 시기였다.
목(牧)·현(縣)제도의 면 행정, 즉 풍헌(風憲), 경민장(警民長) 등의 명칭이 면장·회계·면서기 등으로 개편되었으며, 군수가 보통학교의 교장을 겸임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군수 윤원구는 제주공립보통학교 교장을, 정의군수 장용견(張容堅)은 의신학교(義信學校)와 정의공립보통학교 교장을, 대정군수 김종하(金宗河)는 한일학교와 대정공립보통학교 교장을 겸직하였다.
제주목사가 재판소 판사를 겸하였지만, 제주구 재판소에 일본인 판사 다가야[多賀谷熊雙]가 임명되었다. 1907년 제주우편국을 설치하여 일본인 가미하라[神原信一]가 파견되었으며, 관재서를 설치하여 통감부 관리가 장악하도록 하였다. 1908년(순종 2)에는 제주경찰서 서장에 일본인 시미즈[淸水重滿]를 임명하고 대정·정의·서귀포에 경찰관 분파소를 설치하였다.
제주도 내 여러 진(鎭)의 무기 및 군사 시설이 모두 소각되었고, 제주성 안에 주둔한 조선인 군대를 해산하고 일본의 헌병,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8년에는 공제당(共濟堂)에 있던 전패(殿牌)가 옮겨졌으며, 산천단(山泉壇) 등에서 시행하던 공식 제사가 중지되었다.
윤원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당하였으니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1908년 12월에 사임하고 떠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북초등학교 - 해방전에 붙은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제하에서 지명에 동,서는 운이 뜨고 지는걸 보여준다고했다. 남, 북은 그 반대의 개념이다.
단순한 의미부여에 그치지만 우리는 아무런 의미도 모른채 같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한때 제주에서 가장 큰 학교였고 제주시내에 있어 가장 많은 졸업생을 배출해 온 학교이다. 불과 10여년 전에는 폐교위기까지 몰렸던 아픔을 가진 학교이다.
1907.01.10
제주관립 보통학교 설립인가
1909.
05. 제주관립 보통학교 개교 4년제
1938.
04 제주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
04 제주북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51.
06 제주북국민학교로 개칭
1996.
03 제주북초등학교로 개칭
2007.
05. 19 개교 100주년
북초등학교는 제주목의 객사였던 곳이다. 관덕정 바로 뒷편이니 당연히 그런 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학교 정문 앞 표석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 이곳에 1년여정도 중등 1년 과정의 사설 의신학교를 만들어서 병설하다가 오현단으로 옮겨간 학교가 같이 있었다. 그 학교는 1909년 공립제주농림학교 개칭 인가를 받아 1940년까지 귤림서원자리에 있었다.
그 학교는 지금의 한국토지공사 자리 인근으로 1940년에 옮겨가게 된다. 현재 KAL호텔 서편에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었던 전농로가 바로 그곳이다. 에전에 농림학교가 있었던 자리라고 전농로로 불리다가 한자를 바꿔 쓰는데 뜻은 잊었다.그 농림학교가 북초등학교에서 시작했고 최초의 교장은 윤원구 군수인 셈이다. 훗날 농림학교는 농업고등학교에서 제주고등학교로 바뀌고 얼마전에는 최초의 교장의 후손을 찾아 도민증을 수여하는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제주시 원도심을 지켜 온 학교는 역사의 현장으로도 제주인들의 아픈 역사를 대변해 왔다. 제주의 아픈 4.3항쟁의 역사에도 이 학교는 등장한다.
그 자리에 1967년 사비를 털어 도서관을 지은 제주북초등학교 출신의 김영수씨는 2층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 점점 학생들이 줄어들고 도서관도 낡아 가는걸 바라보던 뜻있는 분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와 제주도교육청, 제주북초등학교, 제주도 도시재생과,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 제주마을만들기종합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등이 한 뜻이 추진됐다.
그 아픈 역사의 현장에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황국신민서사를 그대로 답습한 1968년의 국민교육헌장이 그 1년전에 만들어진 건물을 가로막고 있다. 초등학교 다닐때 학교에서 달달외우던 그 국민교육헌장이다. 이 또한 역사임에는 분명하다. 아프고 슬픈 전체주의 국가통치 이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 시대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도서관에 있어야 할 이유로는 부족한 게 많아 보인다.
(황국신민서사)
아동용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성인용
1. 우리는 황국신민(臣民)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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