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기사 검색을 하다가 관심이 더 가게 된 책. 이전에 다른 매체를 통해 이 책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올해 도서 구입 목록에 넣어두었었다. 그런데 막상 9월 초에 책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재미있는 책들을 읽느라 정작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는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터넷 기사 검색을 하다가 더욱 관심이 가게 됐다. 기사의 내용은 어느 여자 연예인이 [82년생 김지영]과 이 책을 읽은 감상을 썼는데 그게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것이라는 맥락의 전형적인 낚시 기사였다. 10월 첫 주 황금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도서관에 급히 가서 책을 챙겨 퇴근했다.
연휴에 시간날 때마다 틈틈이 읽을 생각으로 가져온 책이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전부 읽어버렸다.
제목처럼 학교에서 보건교사를 맡고 있는 '안은영'이라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학교 이야기 답게(?) 첫 부분은 '혜현'과 '승권'이라는 고등학생 커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책 뒷 표지에 언급된 안은영은 이렇다.
친구들에게 '아는 형'이라 놀림받는 안은영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로 귀신과 맞서는 안은영
어쩐지 좀 귀엽고 왜인지 되게 멋있는 안은영
세상에 둘도 없는 보건교사, 우리들의 안은영
묘사된 이미지로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보건교사 안은영은 '퇴마사'이다.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가 그녀에게 보이는 것인데 이를테면 그녀는 남고생들을 싫어한다. 그들이 뿜어내는 '에로에로 에너지'가 너무 강렬해서 볼 때마다 지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한 입자들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인공 '은영'의 눈에는 너무 잘 보여서 원래 직업이었던 간호사를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임용고시를 치르고 보건교사가 되었단다. 고통스럽게 죽은 귀신을 보는 것보다는 에로에로 에너지가 조금 더 참을만 했으니까.(사실 그녀도 이것을 미리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저 병원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고보면 인생이란 한 막장을 벗어나면 또 다른 막장이 기다리는 연속이 아닐까?)
학교 설립자의 손자인 한문 선생 '인표'
은영의 눈에 보이는 인표는 누군가 그를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그 사람은 인표의 할아버지로 학교 설립자이다. 이 할아버지는 죽으면서 학교를 반드시 유지해야하며 학교 부지에 다른 건물을 올리지 못하도록 신신당부하고 인표는 꼭 선생을 시켜야한다는 특이한 유언을 남긴다), 죽어서도 강력한 의지를 발휘해서 그에게 아주 큰 행운의 부적을 붙여 놓은 사람이다. 어느날 학교 지하3층에서 아주 큰 검은 에너지를 느꼈을 때 은영은 혼자 힘으로 막기 힘들면 인표의 그 부적의 힘을 사용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는데 실제로 인표의 행운의 에너지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
혜현에게 번번이 고백할 기회를 놓친 승권이 뿜어내는 한(음.. 남학생의 고백못한 한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이 학교 지하의 귀신의 힘과 합해져 아이들이 집단으로(아마 그 집단은 연애가 잘 안되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시작조차 못하고 차인 아이들로 이뤄져있는 듯 하다. 모든 아이들이 이 현상에 빠진 건 아니었으므로 추측컨대 그렇다는 거다.)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리려는 마수에 걸렸을 때 은영 혼자서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인표의 손을 잡고 지하 3층의 괴수를 처치한다. 이 사건 때문에 운동장이 통째로 터져 학교 밖으로 날아갔다. 뉴스에는 M고 운동장에 매설되어 있던 가스관이 터졌으나,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보도가 나갔다. 괴수가 죽을 때 가스관도 터지긴 터졌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는 말로 사건은 마무리 되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보니 정말 말도 안되는 서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하지만 책에 한 번 빠지게 되면 그런 의심은 들지 않을 만큼 상상의 이야기 선이 잘 구축되어있다.
이외에도 흥미 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결론적으로 내가 보기에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었다.(응? 근데 페미니즘 소설이 뭔데?) 끝까지 읽어도 도대체 어느 부분이 페미니즘 이야기인줄 모르겠어서 고민할 때 딱 한 부분 의심가는(?)부분이 있기는 했다.
백혜민이라는 얼굴이 달처럼 둥글고 입술은 붉어서 한복이 잘 어울리게 생긴 전학생이 등장하는 부분으로 그녀는 무려 '하북 위례성'때부터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옴을 잡아 먹는(옴을 잡아먹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물론 이 옴 역시 눈에 보이는 벌레가 아니라 혜민이나 은영과 같은 퇴마사들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벌레로 옴이 붙은 인간은 얼마 안가 죽게 된다. 이런 옴을 자꾸 먹게 되면 아무리 퇴마사라지만 혜민도 고통스러워한다.) 퇴미사이다. 아무튼 옴이 번질 때마다 인간 세상에 태어난 혜민은 이번 생이 마흔여덟 째 혹은 마흔아홉 번째 환생한 것이다. 자신은 그저 시스템의 일부란걸 컴퓨터를 배우면서 알게되었단다. 버그가 생기면 패치가 나오는데 은영이나 혜민 자신이 그것이라는 것. 은영은 악기(악한 기운)를 잡고 혜민은 옴을 잡으면서 에러를 수정하는 그래서 자신은 거의 NPC 같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 NPC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게임을 안 하니 알 수가 없지. 게임은 언제 배우지? 퇴직하면 배워야 하려나? 에휴..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
사설이 길었는데 아무튼 이 혜민이 하는 말에서 페미니즘적 요소(?)를 찾을 수 있었다. 마흔 몇 번이나 환생한 혜민은 여자로 태어난 건 처음이라고 한다. 이유는 전란 시에는 강간 살해의 위험이 남자보다 여자의 경우가 훨씬 높고 아무튼 그래서 지금까지는 자동으로 남자로 이 세상에 왔단다. 이런 혜민에게 은영이 여자로 태어나보니 어떠냐고 붙자 생리통 빼고는 모든게 새롭고 거의 좋다고 말한다. 남자였을 때는 호전적인 기분이 들었고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맨 앞에서 싸웠었단다. 어찌되든 상관없었으니까 어리고 무모한 병사였고 전란 없는 시대에는 살아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처음 여자로 태어났고 처음으로 평화롭다고 말한다. 딱 이만큼.
근데 지금도 모르겠다. 이것때문에 이 소설이 페미니즘 소설인가? 고개가 갸우뚱할 뿐이다.
이런 저런 말들이 많지만 정작 이 이야기를 쓴 정세랑 작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끝까지 읽으면서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자신의 실패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 작가는 성공했다.
오랫만에 읽은, 그냥 유쾌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