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성철과 향곡은 운부암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이후 향곡이 먼저 입적할 때까지 가장 편하게 대했던 도반이었다.
하지만 구도의 여정에서는 누구보다 준엄하게 서로를 경책했다.
체구가 크고 근기마저 비슷해서
두 선승이 으르렁거리면 범종이 울고 산천이 놀랄 정도였다."
▲ 성철 스님이 운부암에서 정진할 때 머물던 방에서
한 선객이 참선정진을 하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1939년 팔공산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북 마하연 남 운부암’이라 불릴 만큼 남쪽의 대표적인 수행도량이었다.
운부암은 은해사에서 산길 3킬로미터를 더 올라가야만 나타난다.
651년(신라 진덕여왕 5년) 의상 스님이 창건했고,
절을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줄곧 떠있어 운부(雲浮)라 했다고 전한다.
혹자는 절이 ‘구름 위에 떠있어’ 그리 불렸다고도 한다.
스님이란 어차피 떠도는 운수납자이니,
운부암은 구름처럼 떠돌던 수도승이 문득 멈춰선 무문관인지도 모른다.
성철은 그곳에서 도반 향곡(1912~1978)을 만났다.
향곡은 성철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선객의 만남은 개인은 물론이고 한국불교에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향곡은 16세에 양산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하여 18세에 득도했다.
20세에 운봉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고,
33세인 1944년에 깨쳐 역시 운봉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성철과 향곡은 운부암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이후 향곡이 먼저 입적할 때까지 가장 편하게 대했던 도반이었다.
하지만 구도의 여정에서는 누구보다 준엄하게 서로를 경책했다.
체구가 크고 근기마저 비슷해서 두 선승이 으르렁거리면
범종이 울고 산천이 놀랄 정도였다.
성철과 향곡 사이에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어찌 보면 별 얘기가 아닌데도 아이들의 천진한 장난처럼 속기가 없어 따사롭다.
하안거 해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가을,수좌 몇이서 포행에 나섰다.
햇살은 맑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가을은 참으로 그득했다.
잣나무에는 잣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잣나무숲을 걷던 성철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대뜸 향곡에게 말했다.
“향곡아, 저 잣을 따 올수 있겠는가?”
“아무렴, 내가 저걸 못 따겠느냐.”
“아무래도 네 몸집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자 향곡이 자못 씩씩거리며 잣나무로 달려들었다.
이를 성철이 급하게 말렸다.
“옷을 벗고 올라야지, 송진이 옷에 묻으면 어쩌려고.”
향곡이 옷을 훌러덩 벗고 잣나무에 올랐다. 체구가 커서 잣나무가 심히 흔들렸다.
잣을 막 따려할 때 성철이 나무 아래서 소리쳤다.
“아이고 큰일이다! 저기 아가씨들 서넛이 올라오네. 향곡아 빨리 내려와라.”
성철은 소리를 지르고 도망쳐버렸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이 대목까지 말하고는 혼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같은 얘기인데도 매번 즐거워했다.
보기 좋게 속은 향곡이 내려와 씩씩거렸을 것이니,
아마도 향곡의 분노에 잣나무숲이 들썩거렸을 것이다.
이때 성철의 이름은 전국 사찰에, 특히 선방에 널리 알려졌다.
치열한 용맹정진은 안거를 함께한 선객들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법랍을 따져 성철을 얕보다가도
막상 수행정진에 들어가면 성철을 따라갈 스님이 없었다.
성철은 수도팔계(修道八戒)를 지어 스스로를 다스렸다.
훗날 불필 스님과 후학들에게 전해준 법문 노트를 보면
치열한 구도정진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억천만겁토록 생사고를 헤매다가
어려운 일 가운데 어려운 일인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철석같은 의지 서릿발 같은 결심으로
혼자서 만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듯,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으리라.
1. 희생-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지 않으면 큰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오직 영원한 자유를 위해서 일시 소소한 영화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일시 환몽(幻夢)인 부모처자,
부귀영화 등 일체를 희생하여 전연 돌보지 않고 오직 수도에만 전력해야 한다.
2. 절속(絶俗)- 생사의 근본은 음행에 있나니
이는 제불(諸佛)의 통설이다. 음행을 끊지 못하면 성도(成道)는 못한다.
3. 고독- 수도에는 인정이 원수다.
서로 돕고 서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이 생사윤회의 출발이니
일체의 선인악업(善因惡業)을 다 버리고,
영원한 자유와 더불어 독행독보해야 한다.
일반에 있어서 일대 낙오자가 되어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지 못한다.
4. 천대(賤待)-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망하는 때이니
일시의 대접에 팔려 영원한 활로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천대받고 괄시받는 때만이 참으로 살아나가는 때다.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은
나를 제일 방해하는 마군(魔軍)이다.
중상모략 온갖 침해로써 나를 적대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은 없다.
5. 하심- 내 못난 줄 알 때가 비로소 철나는 때이다.
나이 팔십이 넘어도 내 잘난 것이 있으면 아직 철이 안 난 것이다.
내 못난 줄 알고서 일체를 부처님처럼 섬기게 될 때
참으로 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은 자연히 큰 바다가 되지 않은가.
남의 존경과 대접은 총알과 같이 피하고 독사같이 멀리해야 한다.
6. 전념- 한 몸으로 두 길은 못 간다.
영원한 자유는 화두를 바로 깨쳐 자성을 보는 데[見性] 있다.
그 외에는 모두 사로(邪路)다.
7. 노력- 모든 성공의 대소(大小)는 노력의 여하에 정비례한다.
영원한 자유는 보통의 노력으로는 성취하지 못한다.
고인들은 말하지 않고 잠자지 않고
사력을 다한 부단불휴(不斷不休)의 노력으로 성도했다.
8. 고행- 모든 타락과 실패는 해태(懈苔)에서 온다.
그리고 신도의 돈은 중을 죽이는 설비상(雪砒霜)이다.
고인이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철칙을 세움도 여기에 있다.
남의 밥 먹고 내 일을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는
만사 불성(不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정법이 두타제일인 가섭존자에게 가지 않았는가.’
그해 겨울 성철은 금강산 마하연 선원을 찾았다.
내금강 유점사의 말사인 마하연은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보우 스님이 출가했으며, 나옹선사도 머물렀던 천 년 고찰이었다.
장안사에서 10리 정도 오르면 표훈사가 있고,
그곳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마하연이 나타난다.
한때 승방 53개를 갖춘 화엄10찰로 명성을 날렸다.
마하연 뒤쪽으로 촛대봉, 앞쪽으로는 혈망봉과 법기봉이 솟아 있다.
마하연 자리는 ‘금강산의 복장(腹臟)’이라 일컬어졌으니
금강산 가슴의 한 복판이었다.
의상은 선객들이 가슴으로 산 전체를 품으라고 이곳에 선방을 열었을 것이다.
선승이라면 한번쯤은 마하연 선방에서 정진하고 싶어 했다.
그만큼 선방 규모도 커서 마하연에서 함께 한철을 났어도 서로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그곳에서 또 다른 도반 자운 스님(1911~1992)을 만났다.
자운은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으며 17세에 해인사로 출가했다.
24세에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고, 울
진 불영사에서 3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정진했다.
자운은 훗날 흐트러진 계단(戒壇)을 새로 정비하여
계율의 중흥조, 조계종단의 대표 율사로 추앙받았다.
종단 전계대화상을 지내며
수만 명에게 계를 주었다.
그 옛날 자장율사가 있었다면 근현대엔 자운 스님이 있었다.
수행에만 정진하려는 성철에게 문제가 생겼다.
선객들이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써 달라, 읽어 달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한문을 제대로 읽고 쓰는 승려들이 드물었다.
편지 글은 거의가 초서(草書)였다.
절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편지는 당사자가 쓰고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글을 모르니 누군가 읽어주고 써줘야 했다.
대개의 대필자들은 한껏 갈겨써서 자신의 유식을 뽐냈다.
그래서 편지가 오면 으레 동네 훈장이나 유학자에게 보여주었고,
답장 또한 써주는 대로 공손히 받아야 했다.
“철수좌가 초서에 능하다더라.”
소문이 돌자 선객들이 은밀히 성철을 찾았다.
59칸짜리 선원이었으니 대중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팔도에서 모인 스님들의 사연도 사투리만큼이나 각양각색이었다.
처음에는 정성껏 대독, 대필해주었다.
그러나 수많은 선객들의 부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성철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이면 영락없는 ‘편지 부탁’이었다.
특히 대필을 해줄 때면 서로의 사연을 알아야했으니 건성으로 써줄 수도 없었다.
나중에는 종일 편지만 써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스님들이 다가오거나 미소만 지어도 겁이 날 정도였다.
할 수 없이 대중들에게 ‘편지 사절’을 선언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글 좀 안다고 너무하는 것 아닌가.
글 모르는 중들은 서러워서 살 수 있겠나.”
그래도 성철은 한번 뱉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해 겨울 금강산에는 유독 눈이 많았다.
처음에는 설경이 곱더니 큰 눈이 내려 이내 설경마저 덮어버렸다.
그랬다,
결국 어떤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었다.
모양도 없이 공(空)할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공마저 없음이었다.
마하연 선원도 눈 속에 파묻혔다.
눈이 눈을 삼킨 세상에서 성철이 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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