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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파다. 시조는 여러 문헌에 광(匡)으로 나와 있는데, 그는 경주이씨의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증손이며, 고려 태조 때 광록대부를 지낸 윤장(潤張)의 8세손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평창이씨는 광을 시조로 하는 파와 윤장을 시조로 하는 파로 양분되어 있다. 평창이씨의 중시조격 인물은 윤장의 8세손인 천기(天驥)로 고려 말에 원나라 제과에 급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 중추적 인물로는 천기의 증손인 영서(永瑞)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는데, 특히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영서의 아들 계남(季男)·계동(季仝) 형제가 뛰어나 계남은 연산군 때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종반정 공신에 올랐으며, 계동 역시 연산군 때 병조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만 718가구에 6만5천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수동의 평창이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계남계로서 그 7대손인 태석(泰錫)이 샛골에 거주하며 문과급제를 하면서 기록이 나타난다. 평창이씨는 조선전기에 출사를 하면서 서울 인근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나 연산군 이래 사화와 임진·병자 양란이후에는 대체로 향촌에 은거했다. 태석이 인천에 거주하게 된 것도 그 이전에 당쟁의 화를 피하여 인천에 내려온 때문이라 추정된다. 인천에 정착한 후 평창이씨가 정계진출의 길이 막혀있던 남인(南人)에 당색을 띠고 있었기에 은거하며 지내게 된다.
그러나 17세기말부터 남인이 정계진출이 시작되면서 평창이씨도 적극적으로 출사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승훈의 조부인 20대손 태석(1664년생)이 마침내 1693년 문과에 급제, 현감을 거쳐 성균관 직강(정5품)까지 역임하면서, 평창이씨 일족에게 출사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태석은 세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맏아들 광식(光湜·1690년생)은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고, 둘째 광직(1692년생) 돈령부 동지사를, 셋째 광익(光瀷·1703년생)은 한성부좌윤에 올랐다.
평창이씨의 가문에 꽂이 피던 영조 15년(1739) 그 22대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승훈의 아버지인 동욱(東郁)이다. 그는 태석의 둘째아들인 광직의 외아들로서 자는 유문(幼文), 호는 소암(蘇岩)이라 했다. 소암은 향리 샛골이 소래산(蘇來山)의 산자락에 위치한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1766년 문과에 급제한 동욱은 참판과 의주부윤을 지냈으며, 글씨에 능해 남인의 거두인 체재공이 지은 영월 자류루의 상량문을 쓰기도 햇다.
동욱은 승훈(昇薰)과 치훈(致薰) 두 아들을 두었다. 치훈이 문과에 급제하고, 승훈도 진사시에 급제한 후 평택현감을 시작으로 출세의 길을 걷는 등 인천의 평창이씨는 최대의 번성기를 맞았다. 곧 조선 숙종에서 영조대를 걸치는 평창이씨 3대 동안 5명의 문과급제자와 고급관료를 배출하면서 당당한 권세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향리 인천에서의 지배적 권한 또한 절대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승훈 가문은 남인계열이었고 자연 그 학문적 계통과 정치적 입지 또한 남인과 운명을 같이했다. 혼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승훈의 어머니는 이가환의 누이동생이자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李瀷)의 증손녀였다. 또한 이승훈은 실학자 정약용의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이벽과도 사돈관계를 맺게 되었다. 정약전, 약현, 약종, 약용 형제와 처남매부 사이가 된 것이다. 이들 모두가 성호 이익의 문인이자 그 학문적 영향을 받은 남인 계열의 가문이다.
성호학파가 18세기 중엽을 거치면서 경학을 중시하는 우파와 양명학 및 천주학에 경도된 좌파로 구분되는데 평창이씨는 성호좌파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같은 시기 샛골에서 서남으로 빤히 보이는 지척 도림동에는 성호 문인 가운데 종장의 위치를 점하던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1695∼1773)가 퇴계와 성호를 이어 온 경학에 충실한 학문적 축적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만수동의 평창이씨와 도림동의 파평윤씨는 같은 남인가문이자 성호 이익의 학문적 영향아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학문 경향을 꽃 피웠던 것이다. 특히 평창이씨는 정계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그 뜻을 펴고자 한데 반해 파평윤씨는 향리에 은거하면서 이병휴, 안정복 등 성호 우파계열의 학자와 학문적 교유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주희 blog.itimes.co.kr/kimju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