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의 '사랑가' 엿보기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뵌단 말이 긔 더욱 거짓말이
날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리오
당신 거짓말이지요? 날 사랑한다는 말 거짓말이지요?
꿈에서 날 본다는 그 말은 더더욱 거짓말이 아닌가요?
나처럼 당신 생각에 잠 못 이룬다면 무슨 꿈에서 본단 말이오.
사랑도 이쯤 되면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사랑의 병을 앓아도 단단히 앓고 있지 않고는 토해낼 수 없는 표현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 속삭이고 또 다짐한다. '사랑해', '당신 사랑해요' 라고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이 했을 거짓말이 '사랑해'가 아닐까. 요즈음 신혼 여행 다녀오자 말자 곧장 갈라서는 커플이 25%란다. 일주일전 주례 앞에서 큰 소리로 '예' 하고 언약하였지 아니하였던가. 거짓말 했던 것이다. 입으로는 주례 선생 앞에서 '예'하였지만 속으로는 '신혼 여행 가보고'했던 것이다. 신혼 부부만 거짓말 사랑을 한 것이 아니다. 황혼 이혼이 마치 '남 장에 가면 거름지고 따라가듯이' 유행처럼 번져 있다. 40년을 서로 살을 섞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을 부부가 세상 떠날 날이 멀지 않은 耳順의 나이에 속된 말로 웬수 덩어리가 되어 시퍼런 칼날에 잘려 공중으로 두 동강 되어 흩날리는 비단 조각처럼 갈라선다.
사랑은 처음부터 거짓말이라고 작자는 말한다. 사랑의 언약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거짓말! 사랑은 거짓말이란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거짓말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두 번이나 한다고 작자는 따지듯이 원망한다. 날 사랑한다는 말도 못 믿겠는데 꿈에서 날 본다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유분수지'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것인가. 왜냐고? 나는 당신이 그리워 이토록 잠 못 이루고 날밤 꼬박 새우는데 무슨 잠잘 것 다 자면서 꿈 타령이나 하고 앉았으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여튼 시조에서 우리 조상님들의 종장 표현은 결정판이고 압권이다.
작자가 사랑은 거짓말이라고 독백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결코 최초가 아니다. 이미 그보다 거의 천년 전에 신라의 처용은 사랑에 속은 처절한 심정을 노래로 남겨 두었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런만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걸 어찌하릿고
밤늦게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고 있음을 보고 눈이 뒤집히지 않을 인간이 없으련만 충격의 강도가 도를 넘으면 동물의 신경 시스템은 마비되고 마는 법.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서 보면 하이에나 떼들이 누우 한 마리를 사냥하여 다리를 뜯어먹는데 누우 소는 눈을 껌벅거리며 고통은 고사하고 아주 편안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뜯어 먹는 하이에나 때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처용은 '빼앗긴 걸 어찌하릿고' 하고 아프리카 누우 처럼 차라리 체념해 버린다. 삼국유사에서는 사람으로 변하여 아내를 범한 역신이 처용의 용서에 감복하여 무릎 꿇고 빌었다는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처용을 두 번 죽이는 이야기. 내 보기엔 처용이 용서한 것이 아니고 핵폭탄 같은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던 것인데.
어쨋든 처용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사랑은 거짓말' 원조 노래이다. 처용은 거짓말 사랑에 체념하였고, 김상용은 거짓말 하는 임을 원망하였으며, 다시 몇 백년 후 소월은 '진달래꽂'에서 사랑하던 님이 떠나려하자 '영변의 약산 진달래꽂을 한 아름 가시는 길에 깔아 드릴터이니 사뿐 사뿐 밟으며 부디 잘 가십시오'하고 전송해주는가 하면 현대의 젊은 남녀들은 사랑하다가 헤어지면서 '친구로 남기로 했어요'한다. 애초부터 거짓말 사랑으로 시작했으니 해어진다 한들 무슨 대수인가, 울고 불고, 원망하고, 꽃길을 만들어주고 하는 마음에 없는 이벤트는 아예 질색으로 여기는 요즈음 세대의 영악함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는 지혜로운 처신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거짓말 사랑에 대한 대응도 이렇듯 달라진다.
'사랑가'는 아내가 남편에게 닭살 돋는 애정 표현으로 나눈 사랑의 유희 같기도 하고, 젊고도 젊은 청춘 남녀가 은빛 물결이 촛불처럼 나부끼는 강가에 앉아서 서로 나누는 사랑의 노래 같기도 한데, 이 시조를 지은 작자를 알고 보면 깜짝 놀랄 지경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서인의 우두머리로 병자호란 때 순국한 충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이고, 호는 선원(仙源)인데 저서로 '선원유고' 등이 전해지는 거물 정치인이자, 문인이며, 최고위 관직까지 거친 분이시다.
벼슬이 우의정을 지냈다고 하는데 우의정이 누구인가! 최고 권력자 임금을 지금의 대통령과 비교한다면 2인자인 영의정은 지금의 국무총리가 되고 좌, 우의정은 곧 부총리 급이다. 지금 시대에서도 부총리급 인사가 이런 사랑 타령이나 읊고 앉았다면 벌써 청문회가 열려 불려다니거나, 직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가 될터인데 하물며 유교 사상이 통치 이념으로 통하던 시대에 저자거리의 촌부는 물론 아니고 여염집 아낙이나 홍등가의 기생도 아닌 1인지상 만인지하의 우의정, 부총리 급 정승이 이토록 적나라한 사랑가를 지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놀라움과 충격에서 깨어나 정신을 수습하다가 아, 역시 조선 시대 우리네 선조들은 배웠다거나, 지위가 높다거나, 양반이었다거나 해서 폼만 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여유와 낭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지금같은 풍요의 시대에 살면서도 마음 속에는 좁쌀 한 톨 들어갈 여유와 멋대가리 없이 팍팍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자화상이 오히려 처량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김상용에 얽힌 또 다른 일화(逸話). 인조 16년(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용은 왕세자비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여러 신하, 귀족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전하다가 끝내 치욕의 항복을 하고 마는데 마침내 강화도마저 청군에 함락되자 김상용은 폭약을 던져 몇 몇 신하들과 함께 순국한다. 후에 영조 때 그의 충절의 정신을 기리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강화도에 그의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김상용이 불길 속에서 순국할 때 옆에 있던 13살 손자 김수전(金壽全)이 할아버지 따라 같이 죽기를 간청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조부가 함께 순국하였다니 참으로 만고에 충신 가문이요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가 아닐 수 없다. 지금 김상용의 묘 옆에 손자 김수전의 묘가 함께 있다고 한다.
김상용의 동생이 또 저 유명한 김상헌(金尙憲, 1570년~1652년)이 아닌가! 김상헌 역시 청나라와 끝까지 전쟁을 해야 한다는 대표적 主戰派였으니 결국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4년간 잡혀 지내고 돌아온 조선 중·후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이다. 좌의정을 지냈으니 형제가 대단하다. 김상헌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 남긴 패전국 신하의 아픔을 노래한 시조 또한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