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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이라는 기호
어떠한 사건은 다른 말을 하고 싶게 한다.
수학적인 내용 상세는 바로 직전에 첨부한 요약 문서를 참조하라.
1. 들어가면서 : 정칙 점 체계
결정(結晶)이라는 기호를 생각해보자. 결정들은 놀랍도록 반복적인 구조를 지니는데, 그 구조들이 무한 격자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기하라는 것은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증명된 사실이다. 이토록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은 기하학적 계산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면서 추동할 뢴트겐 X선 같은 실험도구의 발달이 늦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정을 확정하는 수학적 귀결들은 차분히 따라 가보면 수학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수준의 것들이다. 힐베르트의 소개를 따르면 심지어 이 무한 격자는 굳이 입체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평면의 정칙 점 체계로 표시될 수 있다. 무한 격자 체계의 다른 이름인 이 정칙 점 체계는 일정한 간격을 한 단위로 하는 마치 바둑판과 유사한 대단히 단순한 모양새를 띤다.
결정이라는 기호가 정칙 점 체계를 바닥으로 한다는 것 때문에 주지주의에 현혹되지는 말자. 지자(智者) 플라톤이 형상의 이데아가 다면체의 이데아로 환원되는 순간을 이데아가 종합되는 순간으로 상상하였듯이, 결정이라는 기호가 그 근원에서 정칙 점 체계로 환원되고, 결국 그 정칙 점 체계의 해명이 모든 결정이라는 기호의 근원일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교부 철학자들과 헤겔, 러셀에게도 있는, 이러한 주지주의적 종합은 모든 기하학적 상상력에 어슴푸레 드리워져있다. 이러한 접근은 다종성, 다양성, 다면성을 해체하려는 시도이다.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2. 결정이라는 기호: 구조와 힘
정칙 점 체계는 결정의 시원 단위가 아니라, 결정의 환경이다. 정칙 점 체계 자체가 형태의 규격을 제한한다고 하여서, 그 자체로 소금이나 마그네슘 등등을 튀어 오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정칙 점 체계는 그 생김새만큼이나 완전히 무미건조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하학적인 풀이가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결정이라는 기호를 어떠어떠한 군과 아군에 포함하게 하는 근거는 그것이 공통의 환경을 공유한다는 점에 있지, 공통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점에 있지 않다. 결정을 통해서 정칙 점체계를 역추적하는 것은 거기에서 작용하는 공통의 요소를 축출하는 작업이 아니라, 공통의 환경을 추상하는 작업이다.
환경은 결정의 차이들을 견디는 바닥과 같은 것이다. 스토아 학자들이라면 원인자들의 원인자인 선건원인자(προλεγόμενον)라고 칭했을, 순수 성질이다. 오직 그 환경이라는 바닥만이 그 차이를 견디기에 그것은 특유의 지위를 획득한다. 바탕과는 다르다. 바탕은 차이들이 놓여있지 않는 여분까지도 차이와 상관없이 포함하면서 훨씬 더 능동적으로 작동한다. 기하학자들의 소망과는 다르게 실제 존재하는 기하학적인 결정에서도 여분의 점체계가 이미 만들어진 결정을 가용적인 다른 결정으로 바뀌게 유도할 수는 없다. 이미 만들어졌을 때만이, 상상되고 추론되는 점 체계가 있을 뿐이다.
환경은 흡사 너무나 손쉽게 모든 결정들에서 역추적되어서 반대로 그 환경에서부터 결정을 규정할 수 있을 것처럼 믿긴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구조에만 한할 뿐 그 자체의 성질을 뜻하지는 않는다. 소금의 단단한 결정구조와 소금의 짠맛에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 즉 소금과 같은 결정구조를 만든다고 그것이 곧 짠맛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소금의 짠맛을 규명하려면, 화학적으로만 양태를 좁힌다고 할지라도 훨씬 더 복잡한 연동들을 규명해야 한다. 이 말은 정칙 점체계가 플라톤의 다면체처럼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들을 통해서만 상상되는 결코 경험되지 않는 바닥 값이라는 것을 뜻한다. 환경은 최종의 종합이 아니라, 최초의 이산이다.
결정이라는 기호들에게 공통의 환경이 있다는 것은 우리 지성이 그 결정이라는 기호들을 하나의 바닥 위에 겹쳐서 세울 수 있게 만든다. 이 말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결정들에는 군과 아군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군은 아군으로서 어떤 상위군에 중첩되고, 또 다른 어떤 군은 다른 군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정팔면체 군은 정십이면체 군의 부분 군이다. 달리 말해, 정십이면체군 안에는 정팔면체 군이 같은 정칙 점 체계를 충족하며 들어갈 수 있다.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정팔면체 군의 존재는 그것을 아군으로 삼는 상위군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이 상위군이 가능한 한에서만 이 정팔면체 군은 존재한다. 이는 결정학자 피에르 퀴리의 한 법칙의 가장 단순한 실례이다. “한 현상은 그것의 특징적인 대칭을 또는 이 대칭의 아군들 중 하나의 대칭을 소유하는 환경 안에서 존재할 수 있다.”(시몽동,『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본 개체화』에서 재인용, 163쪽).
결정이라는 기호의 환경이 순간 입체의 도형과 평면의 점 체계로 분열된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 같은 개념이다. 정칙 점 체계로 하나의 다면체를 구성하는 순간부터, 그 다면체의 상위군은 평면에서도 충분히 예측된다. 다만 그것은 최초의 이산인 이 환경에서는 분산되어서 공리로서 떠돌았을 뿐이고, 어떤 도약을 통해서만, 예컨대 기하학자의 상상력을 통해서 입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이미지를 표상할 수 있다. 이 상상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굳이 선건원인자인 최초의 이산을 원인자들로 재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정칙 점체계라는 선건원인자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게 된다.
결정이라는 기호가 발생하였을 때 우리는 이처럼 두 가지 방식으로 이 환경을 해석할 수 있다. 이 결정의 특성(대칭성)을 자신의 핵심 특성(대칭성)으로 공유하되, 아군으로서 포섭하는 더 큰 단위체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군(亞群)’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무작정 상위군으로 뛰어드는 것은 풍성한 결과를 얻기 힘들다. 이 결정과 동일한 등급으로서의 결정들을 함께 연상하면서, 차차로 그 특성의 특질을 파악하여, 군들 항을 연관(聯關)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 군들 자체를 둘러싸면서, 그 군들의 특징을 자신의 핵심축으로 삼으면서도 상위에서 그것을 둘러싸는 것, 말 그대로 환경의 정의인 그 상위군과 관계(關係)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상위군에서 핵심축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 특징들을 근거로 삼아 더 상위군으로 끝없이 귀납해나가든지, 격자 체계의 한 속성을 밝히면서 분석을 종결해야 한다. 어떤 하나의 기호가 있을 때, 그 기호와 동일한 등급의 기호들을 수집하고, 그 기호들을 아군으로 삼는 상위군으로서 환경을 추리해서 이 기호의 본질을 밝히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한편 결정이라는 기호를 완전히 평면화하여, 마치 정칙 점 체계라는 무한 평면 위에 처음부터 있었던 불연속적인 군처럼 취급하는 방식이 또한 있다. 이렇게 하면, 정칙 점 체계라는 결정의 환경이 무매개적인 것처럼 가능한 한 투명하게 처음부터 드러난다―앞서 말했듯이 결정 자체가 정칙 점 체계에서 무매개적으로 튀어 오른 것이 아니기에 ‘처럼’이라는 말을 썼다. 이 방식은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살을 상상하지 않고, 그 점들과 점들의 연관을 직접 상상하는 방식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점들의 속성에서 새로운 점들의 속성을 연역해내고자 한다. 이때 연구자에게 아군은 보조적인 것들일 뿐이고, 끝없이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주요 작업이다. 처음의 결정으로, 처음의 도형으로, 처음의 점으로, 처음의 속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는 격자 체계의 새로운 속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성 자체는 최초의 이산으로서 무매개적인 것일 수 있다.
이처럼 기호로서 결정의 환경은 결정의 구조적 싹처럼, 결정의 규격화를 떠받친다. 우리는 그러한 한정성에 기대어서만이 존재자들에 대한 해명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개체의 존재론적 틀만을 이렇게 언급하면서 그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한 반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규격화와 함께하여 결정을 생성하는 나머지 반쪽인 힘 자체에 대해서 나는 아직 말하지 못했다. 결정은 만들어진 것이고,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 있으며, 그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을 추인하면서 현현하는 흐름이 있다. 즉 군들 사이의 중간적인 수준이 있다-중간적인 군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 힘은 결정의 구조와 짝을 맞추어서, 실제로 그러한 결정이 만들어지게 한다. 비유하자면, 이 힘은 열이나 소리처럼 굽이치면서 흐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힘을 신화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것은 이 구조화와 함께 하는 것이지, 선행하거나 후행하는 것, 혹은 압도하거나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힘은 구조로서의 결정과 상당히 비슷한 속성을 공유한다. 함께하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다. 정칙 점 체계처럼, 이 힘은 사방에 무미건조하게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덩어리로서 발현된다. 그리고 그 발현 속에서 그 속성이, 마치 결정이 그러하였듯이 선건원인자로서 역추적된다. 이 선건원인자가 있어야만이 그러한 현상의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다른 점이 있는데, 이 힘은 어떤 치(値)로서 존재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정보라는 것이다. 정보는 언제나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결정처럼 닫힌 체계로 특정한 시공간에 그 자체로(自然)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인의 힘은 바깥에서 흙에 주어질 수 있지만, 흙의 결정은 이유를 물을 수도 없이 흙 스스로 그렇게 맺어진 것이다. 물론 흙 자체의 성질은 복잡한 우주적 연동 속에서 이유를 물을 수 있게 진화된 것이지만.
3. 결정이라는 기호: 표현과 내용
도약. 기호들의 가장 심층에는, 당연히 꼭 똑같은 형태는 아니겠지만 정칙 점 체계에 준할 만한, 연구로 밝혀낼 수 있을 만큼의 일정한 규격을 지닌 극소의, 그리고 극한의 표현소들이 바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바닥은 그 위에 무언가 기호가 놓였을 때만이 표현의 무언가로서 입증되며, 그 입증된 표현소를 가지고 다른 속성을 연역할 수 있는 성격의 장소이다. 이 장소는 바닥답게 0도의 무엇이기에 스토아주의자의 용법을 빌리자면, 틀림없이 있으나 비구현적인 렉톤(λεκτον)과 같은 것인데, 실재로도 스토아주의자들은 이 렉톤이 시원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장소와 같은 것이라고 일찍이 말하였다. 그렇기에 정칙 점 체계에서 각종 기하학적 묘미들이 정확히 예측되었고 기존 결정들이 그 안에 정밀하게 포획되었듯이, 각종 표현들이 이 표현소를 바탕으로 예측되었고 기존 표현들이 그 안에 포획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덜 말한 것이다. 이것들의 표현을 이끌어내면서 이 표현이 본유적인 것이 아니라, 되고 있는 것이며, 하고 있는 것으로 만드는 어떤 힘이 반드시 여기에는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용이다. 내용은 형태가 아니라 치(値)로 있으면서, 기호를 이 치에 도달하기까지의 어떤 연속체이게 만든다. 이 치에 도달했을 때만이 이 표현은 한 기호로서 지각될 수 있다. 내용이 이러한 것이기에 내용을 맞대하는 의미학은 단순히 개념발달사가 아니라, 언제나 바깥에서 기호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고정된 정보로서 개념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철학이다.
4. 나가면서 : 생성을 위하여
바로 여기에서 생성에 대한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 그렇다면 생성은 있을 수 없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본원적으로 다소 진부한 기호들을 난관에 밀어 넣는 어떠한 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은 지금까지의 이 기호들이 어떠한 출구도 없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게 나를 옥죄는 소여(所與)로 만든다. 사건이 만들어낸 이 답답함은 만들어낼 수 있는 기호가 몇 개 없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아니다. 표현소와 내용소 자체의 규격을 벗어난 기호는 공상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뒤에나 현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답답함의 대상은 이 사건 자체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문제 자체를 새롭게 바꾸어야 할 때를 느낀다. 우리는 생존해야 했기에 내가 만들어낸 기호는 나만의 것으로 내성화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왔었다. 이 내성이 내 세계를 답답한 문제로 만들었다는 자각이 촉발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드디어 우리는 이 사건을 대면한다, 회피가 아니라.
어떠한 사건은 다른 말을 하고 싶게 한다.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시대적인 반시대성을 기치로 운집할 때가 있다. 이 사건은 말을 하지 않고 싶게 하거나 말이 아닌 다른 것을 하고 싶게 하지 않는다. 2017년에 다른 말을 절실하게 만든 바로 그러한 사건이 분명히 있었다. 이 하고-싶음 없이는 어떤 것도 새로이 일어날 수 없다. 현자는 생성하는 이 인민의 하고-싶음을, 이 내재성을 걸맞은 함으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사람들과 더불어서 자신의 삶을 주창하고, 때로는 걸맞은 됨을 만들면서 이 하고-싶음들을 목숨 바쳐 밀어 넣는 자이다. 간단히 말해 그는 말하고-싶음이 만들 수 있는 말함을 진단하는 자이다. 모호한 수사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말을 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침묵은 집어치워야 한다. 반민주적인 권력자를 다른 권력자로 교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하고, 인도주의자(humanitaire)의 자리를 위해서 인문주의자(humaniste)를 처단하는 한 시기가 용출(涌出)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하고, 내가 불우한 것을 말할 것이 아니라 나를 불우하게 만드는 너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새로운 방식의 기호가 떠오른다. 깃발은 상징이 아니라, 말의 재현이다.
생성은 바로 이 순간에 증명된다. 인민은 0이 아닌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0을 찾는다. 인민은 0이 시작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무한한 생성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새로운 표현, 다룰 필요가 없다고 여겨두었던 다음 차원의 위상학적 대칭성이 탐구된다. 새로운 내용, 함께 그 이상은 허무맹랑하다고 배제했던 다음 치를 상상한다. 그것을 상상하는 순간부터 지금의 기호들은 부조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고리타분한 사람들만을 가장 합리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답답해진다. 그 합리성을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사뿐히 즈려밟는’ 방식의 창조가 구시대를 분쇄한다.
고차원에서는
808,017,424,794,512,875,886,459,904,961,710,757,005,754,368,000,000,000의
특질(대칭)이 존재한다. 인민의 생성만이 기호의 새로운 차원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