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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료 지급소설>
은밀한 거래
박 윤 자 작
휘..휘..휘..
입술을 통해 표출되는 휘파람 소리는 오늘도 기쁨으로 시작되나 보다.
여름이 시작되는 길목이라서인지 밤 8시 무렵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편안한 시간이다. 길가의 가로수에 상큼한 바람이 머물고, 숱이 많은 녹색의 짙은 잎들은 건강함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나 신록이 우거져 가는 모습이 무척 좋다.
손님의 호출을 받아 잠시 기다리는 동안 녹엽들의 고마운 존재를 느끼며 나무 아래로 들어가 그를 감싸 안아 본다. 햇빛을 피할 이유도 없는 시간이지만 내가 찾는 그늘이란 언제나 행복함 그 자체인 자연의 세계이다.
대리운전을 호출 할 시간으로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점잖아 보이는 사모님이 한잔을 하셨는지 나를 불렀다. 나를 부른 사모님은 낯이 익은 얼굴이다.
“ 사모님, 대리운전 기사 신기석입니다.”
손님을 모실 때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대리운전 기사 신기석입니다.”라는 맨트는 매번 하는 말이라 어색할 것도 없다.
“오, 신기사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신가요?”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도 신기사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감사 인사도 못 드리고....”
“아휴, 별 말씀을요. 댁으로 가실거죠?”
“예”
나는 사모님 댁으로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손님을 모시다 보면, 모신 손님 수만큼의 다양한 성향, 또는 수없이 많은 삶의 내용들이 들어 있음을 느낀다. 물조루의 구멍에서 고르게 뿜어내는 물줄기처럼 모두가 평등하게 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함은 늘 ‘수없이...’, ‘다양한..’...등으로 수식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 손님으로 모신 사모님 역시 특별한 삶의 과정이 있었기에 내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낮에는 동생네 가게에서 계산대 일을 도와 주고, 5시부터는 대리 운전을 하고 있다. 은행에 다니다 명예퇴직을 하고 어정쩡한 나이에 새롭게 시작할 일도 마땅하지 않아 요리 솜씨 좋은 동생이 시작한 일을 조금씩 돕고 있는 정도이다.
은행에 다닐 때 다른 동료들은 테니스나 골프와 같은 스포츠를 하며 여가를 즐기지만, 나는 차를 몰고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전국 구석구석 지도책 하나, 김밥하나 들고 다니기를 즐겼다. 목적지를 향해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가는 나는 네비게이션 이나 다름없다. 잘못 찾아가면 지도를 다시 읽고 내 머리에 재검색 명령을 내리면 어느 순간 원하는 곳으로 찾아가곤 하니, 이 재미 역시 대단한 쾌감을 안겨 준다. 그래서 여러 차례 “나 명퇴하고 운전 할까”하고 생각해 오던 차에 조건이 맞아 진짜로 명예로운 퇴직을 한 것이고, 운전과 관계된 일을 찾다가 대리 운전을 생각한 것이다. 생각 할 것도 없이 운전하는 일은 나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이고 즐거움을 주고 있다. 운전대를 잡으면 휘파람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니 제2의 인생길이 제법 행복하고, 직장에서 받는 여러 가지 긴장의 압박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명퇴를 잘 하였다는 생각도 들곤 한다.
2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직장을 정리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동생네 가게에 점잖은 신사분과 사모님이 찾아왔다. 신사분은 인근에 있는 대학에 강의를 나가시는 교수님인데 사모님과 재혼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 평소에 교수님은 내가 친자연주의자요 은행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리운전을 시작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노라고 하였다. 교수님은 나와 안면은 있지만 목례정도 하는 사이로 친함은 없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나에게 얼마간 사모님 바람 좀 쏘이며 여행을 시켜 달라고 하였다. 서로 편안하도록 제반 경비도 미리 계약하자고 하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대리 운전이 아니고 기사로서 나만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사모님의 차를 이용하여 당일 여행을 하는 것으로서 통행료, 식사비, 일당을 제공하겠다며 도와 달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 눈동자 풀린 무의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지금 당장 답하기 어려우면 제가 내일 다시 들르겠습니다. 충분히 생각하시고 답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문을 나섰다.
전국의 좋은 곳을 찾아 여행 다니는 것이야 나의 취미이고 노하우라 할 수 있으니 오히려 기쁜 일이지만 교수님이 원하는 만큼 사모님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더구나 모르는 사모님을 모시고 돌아다녀야하니 나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모님의 말 못 할 고민이 있을 거라며 흔쾌히 승낙 하였고, 안전 운전과 편안한 동행으로 도움을 드리리라고 마음을 정하였다.
나는 동생이 운영하는 분식집 옆 아파트로 갔다. 약속한 장소에 교수님 부부가 다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한 부부는 내가 운전 할 사모님 차로 안내해 주었다. 교수님은 차키를 건네주며 차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해 주시고, 사모님의 어깨를 토닥이며
“잘 다녀와요”
말하고 차가 빠져 나가기를 기다렸다. 사모님은 입가의 미소만 머금은 채 “예” 한마디 마치고는 손을 들어 인사하며 남편이 계속 서 있는 것이 미안했는지
“출발하시죠”
하고 재촉하였다.
4월 중순, 황사가 조금 낀 듯 하였지만 날씨는 맑은 편이고 따사로운 햇살도 좋았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신록의 성찬을 차리기 위한 연두 빛 여린 잎들은 햇빛의 축복을 기다리며 하늘을 향해 가슴을 열고 있다. 사모님을 모실 계획이 없었다면 나 혼자서 어디라도 달렸을 상큼하고 이쁜 날씨임엔 틀림없었다.
아파트를 빠져 나와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을 하였다.
“저기, 사모님, 어디 가시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요?”
“특별히 생각한건 아닌데, 산이나 계곡이면 좋겠어요.”
“예, 좋습니다. 그럼 1시간 정도의 거리인 가까운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시간은 자유로우나 남편 퇴근 전에는 돌아오고 싶군요”.
“잘 알겠습니다.”
나는 국립공원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내가 좋아하는 지리산의 달궁 계곡을 향해 달릴 것을 염두에 두고 광주에서 곡성을 지나 호남고속국도를 조금 내려가 석곡 인터체인지에서 구례로 향해 달리리라는 생각지도를 입력했다. 네비게이션이 아닌 내 머릿속 지도에 새겨 넣었다. 한참을 달려도 나나 사모님이나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걸어볼까 생각하다가 말씀이 없는 분에게 잔소리로 들리지나 않을까? 또는 사색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 말을 거는 것 대신 준비해 온 시디를 작동시켰다. 요즘 유행하는 발라드 풍의 가요를 틀었다. 사모님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움직임이 보였다. 차창밖에 고정 된 시선이 잠시 내 손 끝에 머물더니, 엷은 미소를 띠었다. 백미러로 비춰지는 사모님의 얼굴은 수심은 조금 있어 보이나, 탄력 있는 피부가 젊음을, 선명한 이목구비가 예쁘다는 느낌을 주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바람 쐬는 여행이 필요할까? 왜 남편이 아닌 대리운전 기사를 시켰을까? 궁금증을 안고 운전하던 나는 어느덧 구례읍을 지나 천은사 입구에 이르렀다. 매표를 하고 다시 성삼재를 향해 달렸다. 성삼재에 잠시 내려 열심히 눈 운동을 하며 맑은 공기를 흠뻑 마셨다.
“어머나! 이렇게도 넓어요? 지리산이? 아, 시원해”
사모님은 어색하게 한마디 하였지만, 사모님도 행동에 제약이 따르고 나역시 사모님 못지않게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부자연스러운 동행임엔 틀림없지만 내가 자연스럽게 사모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기로 하였다.
“사모님, 여기는 성삼재인데 풍광을 잘 살펴 보십시오. 상하좌우원근으로 이쪽에서도 보시고, 저쪽 반대편에서도 보십시오.”
“신기사님은 이곳을 잘 아시나 봐요?”
“예, 저는 자주 오곤 하지요.” 천왕봉, 바래봉, 반야봉, 만복대...등을 안내된 표지판과 실제 봉우리들을 보면서 나는 검지 손가락을 이용하여 설명을 하였다.
“저는 처음이랍니다. 지리산이 이렇게 웅장한 줄 몰랐어요.”
성삼재의 풍경을 보며 4월인 지금 몇 개의 계절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부러운 듯 이야기 하였다. 가족끼리, 또는 친구끼리, 학창시절에라도 한번쯤의 추억은 있을법한데 가까운 광주에 살면서 그것도 어른이 지리산을 처음 와 본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을 불문하고 성삼재 주차장은 올 때마다 만차 표시를 알리는 주차 도우미들의 손 신호를 본다. 바로 사모님이 지금 느끼고 있을 쾌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 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나도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움을 맘껏 마시고 즐겼다. 아마도 저분의 심장에 고인 찌꺼기들이 녹아 내려가 자연에서 얻는 쾌감의 주머니가 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감을 갖기도 하였다. 자연 친화적인 성향을 지닌 분일 거라는 혼자만의 결정을 내리고 잘 모셔야겠다는 의무감 깃든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여행의 첫 경험지인 성삼재에서 진한 기억을 새기고, 계곡을 따라 쭉 내려가다가 반야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에 차를 세웠다. 주말이면 등산객이 붐벼 주차할 곳이 없는 곳인데 오늘은 평일이라서인지 차를 세울 공간이 있었다. 사모님이 차에서 물건들을 내리려하자 쟁반소는 지금 휴식년제로서 보호 구역이기 때문에 머무를 수는 없는 곳임을 알려드리고 맨손으로 사모님과 함께 숲속을 걸었다. 50여미터 정도 걸으면 쟁반소가 나오고 그 느낌 만큼은 꼭 전해 드리고 싶어서 잠시 들렀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식물들, 물소리, 새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산속의 작은 자리 한켠 차지하고 울려 퍼지는 숲속의 오케스트라를 감상하기 위해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나 스스로 수준 높은 관객이라는 생각이 들자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느낌이 나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만큼 쟁반소를 사랑하고 타인에게 알려주고,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은 곳이다. 사모님에게 숲속의 생물들이 놀랜다며 살금 살금 가야한다고 숨소리마저 크다고 귀여운 협박을 하며 쟁반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연두-녹색-진녹색 물의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3단계의 에메랄드 물 빛깔을 어느 화가의 수채화로 표현이 가능할까? 숨이 멎는 듯한 순수하고 정갈한 저 물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햇빛에 반사 되어 투명하고 고운 에메랄드 물보석을 가득 담고 있는 쟁반소가 이 여인의 심장에서 어떤 작용을 할까? 이 가녀린 여인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진(心震-마음의 지진) 속에 감탄과 찬사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나는 무음의 경건함으로 오케스트라를 감상하였다. 부디 이 여인이 행복해 지기를 기도 하면서....
쟁반소에서 담아 온 감동의 울림은 가슴 속 보석으로 평생을 함께 하리라 기대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준비한 배낭과 사모님이 가져온 물건들을 들고 달궁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산속이라서인지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고, 넓적한 바위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하늘을 보니 소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 이파리들이 겹겹이 단을 쌓아 널따란 차양을 쳐서 햇빛을 가려 주었다.
햇빛에 흡수되어 잘게 부서지며 뿜어내는 하얀 거품들, 풍덩 뛰어 들고픈 에메랄드 물빛, 지리산 계곡에서 흘러나온 수없이 많은 물 웅덩이들이 모두들 각각의 특징을 띠고 존재하는 어느 한곳에 와 있다. 연신 감탄만 하고 계신 사모님과 앞으로 몇 번을 함께 할지 몰라도 동행자와 일단 친해지기로 하였다. 사모님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을 오늘 첫 번째 목표로 정하고, 나는 물가에 있는 나무에서 같은 수가 매달린 나뭇잎을 2개 따와서 “사모님,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죠?”라고 청했다. 어렸을 때 아카시아 이파리 똑똑 따던 추억을 인용한 것이다. 갑자기 사모님이 “하하하” 크게 웃었다.
“웃었어요. 방금 하하하 하고 웃었어요. 아이, 사모님 웃을 줄도 아시네요?.” “아니 뭐예요? 나는 뭐 사람 아닌가요?”
“웃으니까 힘이 납니다. 쫌 유치 찬란 해서 부끄러웠거든요.”
“그럼 계속 웃어야 하나. 신기사님 신나라고?”,
“예, 웃어 주세요, 말씀도 하시고요.” “하하하하”
우리는 한바탕 시작부터 큰소리로 웃었다.
“안전과 편안함 그리고 신나는 신기사니까 어려워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예, 알았어요. 우리 이파리 따기 게임 합시다.”
사모님의 재촉에 가위, 바위, 보 게임이 시작되었고, 승패에 따라 웃음과 아쉬움의 함성은 고저의 리듬을 타며 이어졌다. 초등학교 시절의 방법으로 나는 시작 전에 두 손바닥을 엇갈리게 잡고 한 바퀴 돌려서 무엇을 낼 것인가 점을 친 뒤 손을 내밀어 가위, 바위, 보를 외쳤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함보다는 어린아이처럼 조잘대며 상대방을 웃게 할 방법의 작전이었다. 많은 고객을 상대하던 내 직업적 습관이 나도 모르게 동원 되어 즐거운 분위기 연출에 도움이 되었는지 사모님은 그 모습에 마냥 즐거워 하였다.
“햐!, 좋다. 진즉 은행 그만 두고 이렇게 살았으면 요, 요 주변머리는 훤하게 빛나지 않았을텐데.”
나는 장난기 담아 내 검지 손가락으로 뽑혀 나간 머리카락 대신 반질반질한 대머리 주변을 꾹꾹 찔러 댔다.
“햐!, 좋다. 진즉 팔자 고쳐 이렇게 살았으면 요, 요 가슴속은 새까맣게 타지는 않았을텐데.”
하고 사모님이 당신의 검지 손가락으로 명치쪽을 나와 같은 방법으로 누르며 이야기 하였다.
“왜, 따라하세요? 저작권 침해거든요? 그리고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아휴, 쪼잔하게”
나의 장난 섞인 말투에 사모님의 밉지 않은 표정이 나를 웃겨 주니 서로가 호탕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파리 따기는 누가 이겼는지 졌는지도 모르고 웃다가 끝이 나 버렸고, 간식 먹는 시간이 되었다. 아파트 주변 이야기, 분식집 이야기, 나의 직장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을 묻고 답하며 사모님이 가져온 과일을 꺼내 먹으면서 한참을 보냈다.
“남편분과는 언제 결혼하셨나요?”
“9개월 되었습니다.”
“인품이 좋아 보이시던데....”
“그래요. 저에게는 과분한 분이지요.”
“과분이라니요? 인품 좋은 교수님과 결혼하셨다면 사모님이 그만큼의 인물이 되신다는 뜻이겠지요.”
“재혼은 하였지만 내가 있을 자리가 맞는지?, 자꾸 불안 하고 자신이 없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그냥 행복하면 되는 거지. 그냥 누리세요.”
사모님의 시선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가에 머무는가 싶더니 눈망울에 이슬이 맺혔다.
“제가 너무 경솔했다면 이해하십시오.”
짧지만 어린아이처럼 경쟁하며 치뤘던 게임, 주고 받는 대화속에 어색함이 많이 사라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어 저기 고기 있어요.”
“산천어 랍니다.”
“뛰어 올라왔다 가네요.”
“곤충이나 풀이 떨어지면 꼬리를 딱 치고 올라와 먹이를 채가는 거예요.” “송사리는 보통 물 위쪽에서, 왕초 송사리는 더 아래쪽에서 노닐지요”
“와, 와 왕초요?”
“그래요, 송사리보다 더 큰 고기요.”
“고기들도 왕초가 있네요?”
왕초라는 말에 사모님의 얼굴이 순간 파르르 떨면서 평상심을 잃은 듯 하더니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 점심을 먹기 위해 도시락을 풀었다. 동생이 싸 준 김밥과 사모님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펴놓고 뷔페보다 훌륭한 황후의 식사라고 칭찬하며 맛있게 먹었다. 가만히 보면 사모님은 젊고 이쁜데가 있으며, 음식 솜씨도 괜찮은 듯 하였다.
사모님은 남편과의 재혼에 만족 하면서도 아직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모님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고 그걸 해결해 주려는 것이 남편분이 제안한 여행의 목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 하였다. 은행 고객 중에 그저 하소연 할 때 이야기만 고분고분 들어 주어도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 될 때가 있다. 성급하게 해결하려고 묻거나 알려고 하지 말고 사모님이 스스로 말하도록 그래서 잠재의식 속에 있는 모자란 자신감이 채워질 수 있도록 그냥 고개 끄덕끄덕 들어 줘야겠다는 내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신기사님은 왕따 당해본적 있어요?” 갑자기 사모님이 끊긴 대화를 시작하려고 말머리를 열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왕따라는 말이 없었지만 친구들과 놀면서 누구랑 놀지 말라는 권유를 받아 본적은 있지요. 근데, 금방 다시 친해지고 싸우고 반복했어요. 저도 누구랑 놀지 말라고 말 한적도 있는데 그런 일은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라 지금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어요.” “저는 왕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왕따인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봐요. 친구들과 안 어울리고 혼자 다니고, 혼자 밥 먹고, 거의 혼자 지냈거든요.” “저도 누가 나랑 놀지 말라고 했을 때 상처는 되었지만 남자들은 예민함이 더 적나 봐요.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왕초라고 불리는 아이가 있었어요.”
왕초라는 말에 그래서 놀랐나보다. 물고기 세계의 왕초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 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사모님 내면의 고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졌어요. 도시에 살다가 시골로 갔는데 저는 아이 때부터 혼자 지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전학 갔어도 문제가 없었어요. 모두들 순박했고, 내가 혼자 지내는 성격인데도 다른 아이들이 간섭하거나 왕따라고 놀리지 않더라고요. 같이 놀 때도 있는데 잘하나 못하나 칭찬도 사과도 모두 수용해주고 잘 지냈어요. 그러다 5학년 때 다시 도시로 전학을 갔어요.”
“다니던 학교로 갔나요?”
“아니요, 다른 학교였어요. 자식은 저 혼자였기에 엄마가 데려가서 함께 살았어요. 2년간 떨어져 살다가 다시 함께 사니까 할 말도 많지 않았고, 엄마도 일을 나가시니까 바쁘셔서 딱히 할 말도 없었어요. 원래 말수가 적고 혼자 잘 지내는 나를 왕초라고 불리는 아이가 어느날 부터인가 나만 보면
“너 왕따지?”
“야, 왕따!”
하는 식으로 놀리기 시작했어요. 왕따도 아닌 내가 삽시간에 왕따라고 소문이 났고 진짜 왕따가 되어 버렸어요.”
“선생님이나 어머님께 말씀 드리지 그랬어요?”
“말한다고 아이들이 달라지지 않아요. 어른들 말 대접에 한 두번 놀아 줄지 몰라도 왕따라는 게 쉬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문제는 왕따라고 놀려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만의 방어막이 있으면 또 달라지기도 하지만 강자는 늘 약자를 놀리며 그 힘을 과시하는가 봐요. 다른 아이들도 수시로 놀리니까요. 그나마 나는 혼자 지내온 성격이라 이정도지 진짜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 녀석은 그럼 혼이라는 것을 나지도 않나요?”
“여자아이예요”
“예?, 여자 아이가 왕초라고요?”
“사람이 일단 적극적이고 야무지면 몇 번 놀리다 마는데 저는 소심하니까 주위의 말에 예민해져 갔어요. 하루도 그냥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바보 만들기 진짜 쉬워요. ‘저애 바보야’를 몇 번 읊으면 아이들 세계에서는 금방 바보가 되는 거예요. 선생님은 잘 놀아주라고 반 아이들한테 말씀하시지만 당한 사람의 마음을 하나하나는 모르니까 해결도 할 수 없어요. 왕따라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친했던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요. 학교에 오갈 때는 물론이고, 밥도 혼자 먹고, 이동 수업 할 때도 혼자 다니고.... 어쩌다 혼자 일 때가 있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라요. 왕따라고 느껴진 순간 아이들 세계에서 버림받아 내던져진 느낌이 들어요. 너무 슬퍼요. 왕따를 당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일까지도 슬슬 눈치가 봐지고, 친구가 말만 걸어와도 왕따 시키기 위한 시비로 들리고, 그러다 점점 나를 방어하기 위해 선생님께 말하다보면 하찮은 것까지 이른다고 아이들은 나에게 문제 있는 것처럼 찌질이라 말해 버리고요. 처음에 괜찮게 지냈던 아이들까지 멀리하니까 점점 우울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나 만족은 없고 시간만 채우고 앉아 있는 거예요. 괴로움과 두려움만 가득 안고요.”
“왕따 시킨 아이들의 인성들이 그렇게 나빠서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나는 격한 감정에 욕이 따라 붙었지만 점잖은 사모님 앞이라 겨우 참았다. 사모님은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느라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음에 또 오자고 약속하고 짐들을 정리하였다. 달궁 계곡을 뒤로하고 오던 길을 거슬러 광주로 돌아왔다. 오늘 지리산을 오게 되어 고마웠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좋아한다는, 일주일 후에 다시 여행 하자는 이야기들로 하루를 마감했다. 가슴속에 무겁게 들어앉은 응어리 덩이가 발효되어 산화 되려면 자연을 벗삼는 치유 과정은 더 필요 할 듯 하다. 자연과 함께하면 세상의 고민은 모두 해결 될 것이라고 내 스스로 저 여인의 의사가 되어 친환경 자연 치유 처방을 내렸다. 다행히 든든하게 후원해 주는 남편이 있기에 치유는 더 쉽고 빠를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약속 날을 기다렸다.
지난번처럼 아파트 입구로 갔다. 남편인 교수님이 나를 불러 사모님이 쟁반소에서 받은 감동, 주고 받았던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고 하였다. 부인이 너무 좋아하니까 좋고, 말수가 늘어서 좋다고 하면서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나는 나름대로 좋은 장소로 생각해 둔 곳이 있지만 일단 사모님 의사를 듣고 싶어서 여쭈었다. 사모님은 지난번에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쟁반소가 한번 더 보고 싶다고 하면서 잠시라도 좋으니 들렀다 가자고 하였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익숙한 코스인 천은사와 성삼재를 지나 쟁반소를 향하여 달렸다.
쟁반소는 비가 한번 내린 뒤라서 물이 좀 더 많아지고 녹색의 잎들이 더한층 싱그럽게 자라 있는 듯 더 무성하였다.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내 혼미한 정신에 갇힌 온갖 찌든 때들을 맑게 씻어 내고 있는 듯 신령스러웠다. 한참을 서 있던 사모님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천사들이 목욕하며 머물다 간 자리에서 일상의 상념들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버리는 순간이라고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오늘 목적지를 향하여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쟁반소는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기도하고 정리하는 곳이라면, 폭포는 가슴을 뻥 뚫어 맺히고 꼬인 것들을 토해 낼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쟁반소를 빠져나가 88고속국도를 달리다 함양 분기점에서 대진 고속국도로 약간 올라가 서상 인터체인지에서 쭉 들어가리라고 머릿속 네비게이션에게 명령하였다. 1시간여 이상 걸리는 경상남도 함양에 있는 기백산의 용추 폭포를 향해 신나게 달렸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만든 물레방아 시원지인 안심마을에서 잠시 쉬어갔다. 연암 선생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자 북경에서 체득한 실용 지식으로 공장(工匠)에 직접 기술을 가르쳐 베틀·양수기·물레방아 등 새로운 아이디어로 생산기구를 제작해 사용하도록 했다는 안내문을 읽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재 물레방아 주변을 산책하였다. 예부터 내려오는 물레방아에 대한 정겨움과 친근감이 은밀하고도 야릇한 사랑이야기를 전해 주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던 내 지식의 오개념이 연암 선생의 과학적 실험정신과 선진화 노고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노라고 말했다. 사모님은 나의 이런 고백에 묵묵부답이나 가장 큰 크기의 입모양으로 소리 없는 미소를 띠었다. 나도 같은 모양을 지으며 따라했다. 소리 없는 미소도 일종의 표현이며 눈과 입과 얼굴의 모든 근육을 운동시켰다. 즐거움과 만족을 표현하는 움직임이었다. 물레방아 마을에서 눈도장을 찍고, 산 좋고 물 좋은 기백산 정상을 바라보며 달렸다. 바로 용추 계곡을 향해서 달린 것이다.
용추 계곡 입구에 차를 세우고 폭포주변에서 멈추었다. 기백산과 금원산의 깊은 곳에서 모이고 모여서 이룬 물이 떨어지니 이곳이 바로 용추폭포이다.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사방으로 물방울을 튕겨내어 장관을 이루고 승천을 위한 용의 몸부림처럼 멈춤 없는 폭포의 웅장한 소리는 드럼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폭포주변을 돌다가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걸었다. 피톤치드가 다량 분비되는 시간이라서인지 한껏 건강해지리라 욕심내며 눈도, 코도, 입도, 그리고 마음까지 모두 활짝 열어 놓았다. 숲을 이루는 요소가 어디 나무와 흙 뿐이랴! 무성한 잡초도 모난 돌멩이도 지저귀는 새소리와 나뭇가지에 머무르다 가는 바람까지도 모두 한데 어울려 이루어낸 조화가 바로 숲이고 자연이리라. 자연을 감상하는 서로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대화로 산책을 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사모님과 나는 폭포 주변에 놓인 바위를 의자 삼아 앉았다.
“신기사님, 너무 고마워요. 속이 시원하고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자연을 좋아하고 자주 찾는 이유도 바로 이런 연유랍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이겠지요? 남편이 왜 저를 신기사님과 함께 이 여행을 시키는지 알 것 같아요. 이제 신기사님 덕분에 답답한 가슴도 풀고, 자연 감상도 하고 너무 좋답니다.”
지난번 왕초한테 따돌림 당하다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이야기 해달라고 나는 사모님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사람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품성이 너무 중요하고 삶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학창시절, 청소 시간에 보면 그 아이의 됨됨이를 알 수 있거든요? 선생님은 늘 청소시간 이야기로 책임과 인성에 관한 교육을 시키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 아이의 됨됨이와 인성이 비교적 잘 나타나는 시간이라서인지 그러셨던가 봐요. 커가는 아이들은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성격이 형성된다지만 어릴 때 얌체 기질은 어른 되는 성격형성에 포함되어 나타날 거라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어요.”
사모님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했던 과거의 사연 담긴 깊은 한숨을 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왕초가 청소구역을 제가 하고 있는 계단으로 같이 해달라고 선생님께 청하더라고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구역이라 선생님은 대견스럽다고 칭찬하시면서 금방 바꾸어 주셨어요. 청소 시간에 저는 비로 쓸고 걸레로 열심히 닦았어요. 왕초는 야, 여기, 쓸어, 닦아! 명령이나 하고, 저는 묵묵히 청소하고 하는 식이 매일 반복되었는데 하루는 걸레질하는 내 손을 밟으면서 명령조의 말을 하는 거예요. 말없이 닦고 일어서려니까 내 머리채를 잡으며 ”야, 여기도 닦아야지“하면서 노려 보았어요. 너무 슬프고 화가 났지만 하소연 할 때도 없었어요. 마침 어떤 선생님이 지나가시다 보셨어요. 청소가 끝나고 나를 오라고 하셔서 수업이 끝나고 그 선생님 교실로 갔어요. 눈물 범벅이 된 저의 자초 지종을 들으시더니, 왕초를 혼내시는 것도 없이 다음날 아침 우리 교실에 오셔서 나를 칭찬 하신거예요. 이렇게 깨끗하고 정성껏 청소를 하는 아이를 보기 힘든데 우리 학교 모범생이라고 저를 다독이며 띄우셨어요. 사실 청소는 제가 생각해도 잘 했거든요. 그 다음날은 옆 교실에 데리고 가서 칭찬하고, 그 다음날은 또 옆 교실에 가서 칭찬해 주시고, 저는 왕따에서 일약 청소 모범생이 되었어요. 선생님이 의도적으로 저를 왕따에서 면하게 하는 방법을 쓰신 것 같아요.”
“그 다음은요?”
“인간은 적응의 천재라잖아요. 나에 대한 왕초의 힘이 약화 되었고, 더 이상 놀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왕따로 각인 된 상처는 지워지지 않은 수술 자국처럼 나를 자신감 없는 아이로, 우울한 아이로 만들어 갔어요. 중학교, 고등학교를 따분하고 지루함 속에 다녔어요. 학창시절에 가장 추억 거리가 많은 시절인데도 저는 친구하나 없이 지냈으니 얼마나 재미없었겠어요. 지리산 한번 못 갔으니 알만 하잖아요? 대학도 가기 싫었어요. 엄마가 많이 실망하셨지만 그 무렵 편찮으셔서 간호도 필요했어요. 결국 엄마도 돌아 가시고 혼자 남았어요. 회사에 취직했으나 직장에 들어가서도 말이 없고 어울릴 사람도 없으니 사회 생활 역시 무미 건조 했어요. 다정하게 말하며 사는 모습이 부러움보다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고, 괜히 어울리다 뒷 담화나 들리면 왕따 시킬까 고민하고. 또 왕따 당하느니 혼자인게 나을거야 하고 내 마음 주변에 튼튼한 철조망을 쳤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직업을 찾았어요. 바로 병원 간병인이었어요 사람들을 덜 만나는 야간 근무를 지원했어요.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부부가 교수였던 남편 부부는 많이 행복했는데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하셨대요. 부인은 투병생활 1년여 끝에 저의 간병과 남편의 지극 정성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어요. 돌아 가시면서 저의 손을 잡고 남편의 장래를 부탁하더군요. 아이도 하나 두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많이 울었지요. 그 후 남편과 서로 연락이 되었고, 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처음으로 느끼며 많이 기대었어요.”
“남편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고 존경하지요. 어느날 남편이 나무와 꽃과 물, 새소리...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며 계곡도 산도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말로만 들을때는 그 의미를 몰랐어요. 그냥 ‘자연을 좋아하는구나’ 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현실의 하찮음에 마음 다치지 말라며 위로 하신 걸로 생각되던걸요?”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산이나 계곡을 원하셨군요. 좋습니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신 남편께 감사드리며 감상 많이 하세요.”
“예, 고마워요, 이제는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나가자고 해야겠어요. 자신이 생기는군요. 무슨 말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아니 후련해요. ”
한번 말문이 터지자 소곤소곤 하는 강연처럼 사모님의 지난 일들이 이어졌다.
“나는 30을 훨씬 넘긴 나이에다 남편은 재혼이기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어요. 그러나 문득 문득 왕따 시절이 생각났어요. 어떤 방식으로 또 내가 내팽개쳐질지 모르는 일이고 또 다른 아픈 생채기가 생길게 두려워서 결혼에 대한 생각이 왔다 갔다 했어요. 남편은 태도가 변해가는 나를 보고 초혼과 재혼의 부담이라 생각 했나 봐요. 재혼과 상관없이 난 남편을 무척 좋아했어요. 정말 결혼해서 잘 살고 싶었어요. 만나면 편안하고, 웃게 해주고 따뜻한 사람이라 느꼈어요. 남편은 왕따의 상처는 살면서 치료할 수 있다고, 남을 의식하다 내 삶이 멍드는 것처럼 바보짓이 없다며 날 다독이고 달래어 주었어요. 내가 왕따의 상처에서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게 해준 남편 덕분에 결국 결혼을 한 거예요.”
“참, 잘 하셨어요.” 나는 어색하리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시선은 목표 없는 응시로 한참을 보냈다. ‘사모님의 기분이 훨씬 업(up) 되었고 왕따의 기억을 치유한 자세가 매우 적극적이어서 참 다행이야’라고 느끼며 두 번째 기사 역할을 마무리하였다.
몇 번의 여행이 더 있었다. 은근히 사모님과 하는 여행을 내가 더 기다리게 되었고, 이 여인 역시 즐거워하며 재잘 거리듯 애교도 부리게 된 어느날 교수님이 내개 편지 한통을 건네 주었다.
신기사님,
아내에게 친절함과 정성을 다해 마음을 치료해 준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기사님께서 다녔던 은행의 지점장님과 제가 아주 친한 친구사이여서 신기사님에 대하여 잘 압니다. 그래서 홀로 지내신 신기사님께 제 아내를 부탁 드린 겁니다. 그간 말이 없던 아내가 제법 말을 하고 웃기기까지 하면서 얼굴표정이 밝아지니 안심입니다. 이런 모습이 계속 되도록 신기사님께 부탁드립니다.
신기사님,
사실은 제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성생활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를 위해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고 뒷바라지 하다 보니 저도 몰랐지요. 마음에 드는 여잘 만나 결혼하면 나아질걸로 생각했는데, 아직도 치료중이랍니다. 아마도 아내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운 이유도 될 겁니다.
아내는 남자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 저를 남자로 사랑한다기 보다 아내의 내면에 고이고 고인 내상(內傷)을 치료해 주었다고 감사함과 존경심으로만 바라보고 있어요. 저의 상태가 이렇게 길게 갈 줄 알았으면 아내와 헤어져야 마땅하지만 아내에게 드리운 마음의 치료를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로 헤어지자고 하면 아내는 영원히 혼자가 되고 말겁니다. 착하고 이쁜 아내를 더 이상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신기사님과 친해지게 한 후, 두 분의 연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저는 아내가 신기사님을 이성적인 감정으로 대하기를 기다렸는데 아내는 저에 대한 양심과 부담감 때문에 무척 조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가 겪는 무수한 고독의 밤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요. 오늘은 아내의 손도 잡아 보시고 어깨위에 손도 좀 올려 보시고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저는 연수도 있고 치료도 할 겸 미국엘 다녀 오렵니다. 치료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내를 가두고 있는 남편이라는 울타리, 결혼이라는 감옥에서 아내를 구해 주고 싶군요.
나 역시 아내와 사별하고 인생 자체가 삭막해져 버린지 오래다. 하나 있는 자식은 외국에 나가 살고, 여동생 집에만 왕래하며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터에 이 여인을 통해 새로운 감정에 눈뜨며 즐거움을 찾았노라고 흡족해 하며 잠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편지를 읽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이 여인과의 허락된 데이트를 은근히 기다리며 즐긴 것이 들통난게 아닌가?, 아니면 진정 내가 이 여인을 좋아해도 되는 건가?, 이 여인과 더 이상 만나지 못하면 나는 평상심을 찾을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하며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다음날 사모님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잠을 못잔 나의 눈은 동공이 풀려 피곤함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사모님과의 여행을 미룰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어디로 떠날 것인지, 어떤 내용의 여행을 원하시는지 다른 때 같으면 서비스 만점의 질문을 던지겠지만 오늘은 말문이 굳게 닫혀 입이 떼지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느낀 사모님은 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앉아만 있었다. 잠을 못자서 머리가 텅빈 듯 하다고 하자, 차를 멈추고 시동을 끄게 하더니 나의 고개를 뒤로 젖혀주며 눈을 감겨 주었다. ‘모텔이라도 가면 좋겠는데’....말 끝을 흐리며 나를 진심으로 재우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사모님은 혼자서 내 뱉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차에 힘찬 시동을 걸고 인근의 모텔로 들어갔다. 반사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이라 사모님도 얼떨결에 행동을 같이 했다.
둘이서 만날때마다 자연경관이 좋은 곳을 찾았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장소를 생각해가며 먼 곳, 가까운 곳, 꽃길, 노을길....많이도 다녔지만 의도하는바 없이 충동적인 행동은 처음 있는 일이다.
무작정 침대에 누웠다. 정말 깊고 깊은 잠 세계에 빠져들고 싶었다. 사모님이 어정쩡 어찌할바를 몰라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옆에 앉으라 하고는 깊이 잠들고 말았다. 얼마간 자고 일어나보니 쌔근쌔근 잠든 사모님 얼굴이 내 옆에 있었다. 얼마만인가? 여인과의 동침이.
나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대려다 말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손님에 대한 절차도 예의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굶주린 한 마리의 야생 동물이 먹잇감을 앞에 놓고 포식 직전의 행동처럼 막무가내로 그녀를 그리고 나를 욕정에 불타게 했다. 사랑의 포로가 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많은 날들을 참고 견디어 온 고독의 밤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다고 합리화되고 이해가 되어버렸다.
한바탕 회오리가 지나간 뒤 내 가슴위에 얼굴을 묻은 사모님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이제 어떤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흑흑....”
우리가 집에 도착하자 아파트 입구에서 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고마워요. 다음에 한잔 살 테니 기다려요. 하하하하”
교수님은 웃음과 함께 사모님의 손을 잡고 사라져갔다.
박윤자
광주교육대학교 졸업, 현 초등학교 교장
순천대학교 수학교육 석사 및 박사
수필집 : 나를 다시 생각한다
소설 : 은밀한 거래, 우리 엄마 회춘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