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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2학기 과제물 (온라인제출용)
교과목 명 : 역사 현장을 찾아서
학 번 :
성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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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과제유형 : ( 공통 ) 형
o 과 제 명 : 역사현장을 찾아 현장을 상세히 묘사하고 그 역사성을 찾아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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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란 과제물을 함에 있어 어느 곳을 선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현재와 가장 가까운, 조선 500년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건국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 현장인 경복궁을 선정하였다.
2.답사 및 진행 과정
2016년 9월12일 경복궁을 찾았다. 광화문역에 내려 경복궁에 도착하여 보니 맨 처음 국립고궁박물관이 보인다. 마침 월요일 휴관이라 관람은 하지 못한 채 근정전, 경회루,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등 경복궁 내부를 모두 둘러보았다.
막상 글을 쓰려하니 일부 건물에 대하여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데다 국립박물관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9월 22일 재차 방문하기로 하였다.
박물관 및 경복궁에 대한 인터넷 자료를 사전에 검색하여 정보를 숙지하였다. 출력한 인터넷에 자료와 필기도구를 지참하여 길을 나섰다.
경복궁에 있는 모든 건물에 대하여 기록하고 사진을 찍고 건물입구 마다 안내문 내용을 읽으며 그에 관련된 역사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눈에 띄지 않았던 건물까지 일일이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건물마다 설치된 안내판 중요내용을 자세히 적다보니 시간이 상당히 많이 소요되었다. 오후 6시, 관람이 끝날 시각이 되서야 관람을 마쳤다.
3.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전소하게 되었다. 이것을 1867년 흥선대원군이 다시 재건하였다. 그러다 1895년 이 곳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 잃은 빈 공간이 되었다. 그 이후 1910년 한일합병으로 조선은 국권을 잃게 되고, 일본인들은 을 경복궁 앞마당을 헐어 조선총독부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이 훼손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경복궁은 중국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이다. 궁궐의 동쪽에는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가 있고, 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있다.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 정전, 편전이 앞부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 공간인 후원은 뒷부분에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는 경복궁을 조선의 법궁으로써의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4. 경복궁 관람 및 느낀 점
4-1) 경복궁내 국립박물관
이곳은 지하1층, 지상1층, 지상2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이다.
지하1층 전시실에서는 궁중음악, 황실의 행차 조감도가 전시되어 있고 과학전시관2에는 물시계와 해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그 시계는 현재도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안내문에 보니 2시간 마다 종과 북 징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실물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그 규모가 어마 어마하다. 세종대왕 재임 시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500년전에 이러한 기술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일본과 청나라에 침략을 당하여 갖은 수모와 백성들이 수모를 겼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하 1층에는 일월오봉도 병풍, 삼궁지연도 병풍 외에 총 열두 점이 전시되고 있다. 종묘에서 지내는 역대 왕들에 대한 제례 모형이 있다. 그에 대한 동영상도 상영 중이다. 이러한 동영상은 생전 처음 보았다. 임금님의 행차에 관한 기록화 또한 감동적이었다. 한번 행차 시에 수 천 명이 움직이는 그림을 보니 어찌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놀라웠다.
1층에서 눈에 확 띄는 것은 순종황제(1907-1910) 시절 미국 GM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 차와 순종황후가 탔던 영국 다임러사의 리무진이었다. 그리고 왕실의 의례가 전시되고 있고 고종황제 어진이 있었다.
2층으로 올라오니 입구에 조선 왕실계보가 있었는데, 1대 태조 이성계부터 27대 순종까지 재위기간, 업적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세종대왕에 대해서만 적어보았다.
4대 세종대왕, 재세(1397-1450), 재위(1418-1450).
업적; 1420년 집현전 확장, 1421년 종묘 영녕전 창건, 1429 농사직설 편찬,
1434년 양구일구와 자격루 발명, 갑인자주조, 1441년 측우기 제작,
1443년 훈민정음 창제, 4군 설치 완료, 1449년 6진설치 완료.
이번 관람 중 새로 알게 된 내용이 있다. 경복궁에 불이 난 시점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한 것이다. 선조 재임 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몽진을 하게 되었다. 왜란이 끝난 후에 되돌아오니 경복궁과 창덕궁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당시 월산대군의 사저(현재의 덕수궁)였던 곳으로 옮겨 정사를 보았다고 한다. 14대 선조시대가 끝나고 15대 광해군(1608-1623) 재위 시절에 창덕궁을 중건하게 되고 그 후부터 고종 황제 재임시 경복궁이 복원 될 때까지 270년 동안 창덕궁은 법궁으로써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 되었다고 한다.
2층은 조선왕조 역사 기록물과 왕들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었다. 즉위식에서 입었던 옷, 면류관, 순종 황제 추존어보, 영조가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하사한 은인, 영조가 세손(정조)에게 이르는 글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눈이 띄는 것은 조선의 궁궐 돌궐도(1820-1830)였는데 발자국으로 대강 재 보았더니 약 가로8미터 세로5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한눈에 창덕궁, 창경궁을 볼 수 있는 조감도 이다.
4만 여점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힘없던 구한말,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일본외의 많은 나라들에 유출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게다가 일본에 의한 유출은 37년 동안 어마어마한 양이 빼돌려졌을 텐데 우리 후손들이 그 유물들을 파악하여 반환받는 것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정부와 모든 국민들이 지속적으로 유물 반환에 온 정성을 쏟아야 될 것이다.
4-2) 경복궁
우선 광화문을 보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니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 탄 것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65년(고종 2)에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한다. 1927년에는 일제의 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경복궁의 여러 곳이 헐리고 총독부청사가 들어서면서 광화문은 경복궁 북쪽으로 옮겨졌다. 이후 광화문은 6·25사변 때 폭격을 맞아 편전인 만춘전(萬春殿)과 함께 불타버렸다. 1968년에 석축 일부가 수리되고 문루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되었다가 2006년 들어,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해체되었다. 이후 광화문 이전 공사가 개시되어 2010년 8월 완공되었다고 한다.
입장권을 끊고 표를 내는 곳은 흥례문이고 이곳에서 서서 보면 정면으로 근정문이 보인다. 흥례문과 근정문 중간에 영제교가 있다. 영제교를 거쳐 근정문안에 들어가면 근정전 전면에 신하들이 좌우로 서 있을 때 직위를 나타내는 표석이 보인다. 근정전은 왕들의 즉위식을 하던 곳이며 외국 사신들을 만나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하던 곳 이라고 한다. 정전에 안에 있는 일월오봉도는 조선국왕을 상징 하는 것으로써 국왕이 큰잔치에 궁궐 밖으로 행차 나갈 때는 이 병풍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근정전 밖 뜰에는 좌우 표석에 중간에 임금이 들어가는 곳은 약간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정전을 지나면 사정문이 보이고 안으로 입장하면 전면에는 사정전 그리고 좌측에는 천추전과 만춘전이 있다.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이며 임금이 평상시에 정사를 보던 곳이다. 천추전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새로운 문물을 창제할 때 이용하였으며 문종(1452년)이 승하한 자리이기도 하다.
사정전의 뒤쪽으로 가니 향오문이 나온다. 향오문으로 들어가면 강녕전이 보이는데
강녕전 좌측에는 경성전 건물이 보이고 우측에는 연생전 건물이 보인다.
강녕전을 지나면 교태전이 나온다. 이곳은 왕비가 거처하면서 궁안의 생활을 총 지휘하던 곳이다. 1918년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으로 옮겨 사라진 것을 1995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교태전에서 나가니 소주방 일원 건물이 보인다.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와 궁중의 음식준비 하던 곳이며 내소주방, 외소주방, 생물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안에 들어가니 옛 우물터가 나온다, 조선시대 최초 궁궐우물터로 경복궁 복원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내소주방에는 은식밥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놨다. 외소주방은 일반인들의 관람이 금지되어 있다.
다시 나와 밑으로 나오니 자선당과 비현각이 건물이 보인다. 자선당은 세자가 거처하던 곳이고 비현각은 공부하며 정무를 보던 곳이란다. 다음에는 뒤쪽으로 한참 올라가니 자경원 일원이 나오는데 이곳은 고종(26대)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대비를 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조대비 거처를 궁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성대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니 자경전. 복안당, 청연루, 협경당 건물이 있다. 뒷마당으로 가니 십장생 굴뚝이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었다.
다음에는 흥복전 권역별 복원공사가 한참 진행중에 있었다.(공사기간2015.9-2018.12)
20미터 올라가니 우측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전통 생활양식과 관련된 4,000여 점의 민속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세종시 개발, 이전의 모습이 전시된 곳이기도 하다. 이어서 함화당과 집경당 있는데 후궁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그리고 약간 걸어가니 향원장과 건청궁이 있는데, 호수 가운데 팔각정이 있고 그 뒤쪽이 건청궁이다. 이곳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거처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1895년 10월8일(음력8월20일) 일본인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곳이다. 우리나라 국모가 일본에게 시해되었다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국모 시해는 우리나라 모든 사람에게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이며 이러한 만행을 일삼은 일본에게 우리는 언젠가 강력한 경제적, 군사적 제제로 응징하리라 생각한다.
이곳에서 나와 보니 장고라는 곳이 나온다. 궁중연화나 제례에 쓰기위한 장을 보관하는 곳 이다.
경복궁 좌측에 맨 뒤편에 대원전 일원이 있어 가 보았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빈전 관에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중에 관을 묻은 후에 혼전을 신주로 모셔 정해진 정례기간을 치른 후에 종묘에 신위를 모시게 된다고 한다.
내려오다가 흠경각과 함원전을 갔다. 이곳은 세종이 농업발전을 위해 천체와 시간을 측정하고자 만든 건물이다. 바로 옆에 경회루가 보인다. 내부에는 들어가지 갈수 없으며 인터넷에 신청 받아 신청자에 한하여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연못 안에 있는 건물로써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조선시대에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며 건물이 매우 아름답다.
5. 마무리하며
경복궁을 관람하면서 1차 방문 시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건물이나 역사를 알게 되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고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종 임금이 복원하기 전 270년 동안 방치되었다니 외세 침략으로 인한 약소국가가 겪은 설움은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는 백성들까지 피눈물나는 고통의 삶이었을 것이다.
일제시대 때 경복궁의 정기를 끊는다 하여 일부 건물을 임의대로 철거하고 멋대로 자기네 건물을 짓고, 마구 헤치고, 수많은 유물들을 도둑질하여 갔을 뿐 아니라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인들을 군인들에게 매춘시키기 위하여 위안부로 끌고 갔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하여 생생히 증언하고 있으니 함께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같은 민족으로써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똘똘 뭉쳐 국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이 최근 일어나고 있는 국론 분열 상황을 보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교과서에 나와 있듯이 관동 대지진 사건에서 1만 명이라는 민간인을 대학살하고 반성하지 않고 있는 일본인들과 일본 정부를 보면서 약소국이 되면 또다시 이런 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싶으니 모든 국민은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