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요즘, 제주 사람들조차 돌아보지 않던 조그만 마을이 독특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영화감독 장선우가 몇 년째 그곳에 깃들어 살다 카페까지 열었고, 디자이너・화가・음악인 등 문화예술인과 독특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 눌러앉아 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기에’라는 궁금증으로 대평리를 찾았다. 제주중문관광단지에서 자동차로 7분 거리. 그러나 이곳을 중문단지의 휘황한 불빛과 연결시키기란 어려웠다. 포구를 끼고 있는 작고 아늑한 마을. 군산이 뒤에서 감싸 안고, 파란 마늘밭이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주민들은 이 마을을 ‘난드르’(제주도말로 넓은 들이란 뜻)라 부른다. 포구 옆에는 해안절벽인 박수기정이 마을의 바람막이 보호자라도 되는 양 서 있고, 그 뒤로 동그스름한 산방산도 얼굴을 내민다. 푸릇푸릇한 밭과 여기저기 피어 있는 꽃, 파란 바다에 반짝이는 햇살, 억새….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눈을 이고 있어 봄여름가을겨울을 넘나드는 비현실적인 공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 들어선 외지인들은 부지런을 떨려하지 않는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 혹은 펜션의 마당에 앉아 푸르게 펼쳐진 마늘밭과 그 너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일몰 때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는 바다와 해안절벽이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조금 지루해지면 마을 한 바퀴를 돌고 해안가를 산책한다. 빨강・파랑 함석지붕을 이고 있는 마을의 집들은 고만고만한 크기에 대문이 없다. 제주도에서 대문 대신 설치하는 정낭조차 없다. 이 마을 사람들이 오랜 세월 얼마나 서로 터놓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삼거리슈퍼는 마을 사람들의 생필품 보급처이자 사랑방. 삼거리슈퍼 주인 아저씨는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홍반장처럼 AS기사를 쉽게 부르지 못하는 주민들이 뭔가 불편함을 호소하면 달려가고, 주인 아줌마는 주민들의 하소연을 넉넉하게 듣는다.
삼거리슈퍼가 있는 길목에는 게스트하우스 ‘곰씨비씨’ ‘티벳풍경’ ‘몽실하우스’를 알리는 예쁜 표지판이 놓여 있다. ‘곰씨비씨’는 함께 여행사를 다니던 30대 여성 두 명이, ‘몽실하우스’는 디자이너로 일하던 여성이 이곳에 반해 눌러 살면서 연 게스트하우스. ‘티벳풍경’은 배낭여행가로 유명한 박상철씨 부부가 연 티벳 분위기의 게스트하우스다. 세 곳 모두 옛집을 빌려 내부만 고쳐 쓰고 있다. 삼거리슈퍼의 주인 아줌마는 “인상을 보면 어느 게스트하우스로 갈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곰씨비씨’로 분류되었지만, ‘티벳풍경’으로 향했다. ‘티벳풍경’는 조용한 이 마을에서 단연 튀는 존재. 집 입구에는 태국에서 배로 실어온 인력거가 놓여 있고, 벽과 마당에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티벳의 문양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울긋불긋 치장한 이곳에 대해 “무당집 같다”며 싫어하는 주민도 있었다 한다. 1988년부터 해외로 나가 동남아・중국 등지를 때론 노숙을 하며 맨몸으로 헤매 다녔던 박상철씨는 “나같이 못 배우고, 돈 없고, 외국어를 못하는 사람도 세계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도록 쉼터이자 정보통, 보호자로서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태국의 카오산 로드와 라오스, 중국의 따리와 투르판에 배낭여행객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던 그는 티벳에 게스트하우스를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이름에 ‘상’자가 들어가니 이렇게 상처가 많은가?라는 생각에 이름을 박승철로 바꿔 말하기도 한다는 그. 그는 길 위에서 마음을 치유하고 또 상처 입은 사람들을 품으면서 도인(道人)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길에서 만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아내인 이영화씨와도 함께 길을 다니면서 동반자가 되었고, 그가 카오산 로드에서 연 ‘만남의 광장’을 찾았던 대학생이 중년이 되어 다시 이곳을 찾기도 한다. 창고를 개조해 만든 ‘도미토리’에서도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자 한쪽은 해안가, 한쪽은 박수기정을 향해 커다랗게 뚫린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미토리에 놓인 독특한 침대 7개와 의자, 책상, 창틀 모두 그의 솜씨라 했다. 버려진 물건들이 그의 손에 가면 뚝딱뚝딱 실용적인 물건으로, 작품으로 변신한다. 천장에는 옛집에 살던 할머니가 쓰던 이불을 붙여놓았는데, 단열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포스트 모던한 작품으로도 보였다. 그물망을 씌운 시계는 ‘이곳에서는 시간에 구애받지 말라’, 빈 새장은 ‘누구든 새장에 갇혀 살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채 매달려 있었다. 도미토리 옆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그는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해내는 자리”라고 설명한다. 통곡을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기도 하는 자리라고.
[Tip] 특급 호텔이 모여 있는 중문관광단지에서 가까운 거리여서 중문단지에 숙박하면서 이 마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마을에서 머무르고 싶다면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박과 펜션,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다. 민박에서 이곳 주민들의 정을 느꼈다는 여행객도 많다. ‘티벳풍경’ ‘곰씨비씨’ 등이 옛집에 만든 게스트하우스라면, ‘돌담에 꽃 머무는 집’(http://cafe.daum.net/jeju-doldam)은 신축 게스트하우스라 시설이 깔끔하고, 욕실이 딸린 가족실을 이용할 수 있다. 별도 건물에 카페도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였던 재일교포 고(故) 이타미 준이 설계한 포도호텔도 안덕면에 있다. 산방산과 서귀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중산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단층 건물에 둥근 처마지붕이 포도송이를 닮았다 해서 포도호텔로 이름 붙여졌다 한다. 돌담에 둘러싸인 밭과 억새 등 제주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독특한 조경에 자연과 공존하려 한 이타미 준의 의도를 호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하루쯤 이곳에 묵거나 식당을 이용할 수도 있는데, 새우튀김우동이 맛있다는 사람이 많다. |
처음 만난 여행객들이 가족같이 어울리는 게스트하우스
제주올레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우리나라에도 여행객들이 함께 어울리는 게스트하우스 문화가 형성되어가고 있는데, ‘티벳풍경’에서 그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거실과 부엌을 사이에 두고 문고리조차 없는 방들과 7명이 함께 방을 쓰는 도미토리. 이곳을 찾은 손님들은 금세 가족같이 되어 서로 챙겨주고 심지어 간섭까지 한다. 밤이면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흉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대평리를 찾은 날 밤, 그룹 ‘들국화’의 멤버였던 최성원씨가 이곳에 묵고 있는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음악친구를 찾아왔다. 10명 남짓 둘러앉은 자리에서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제주’ 하면 떠오르는 노래 ‘제주도의 푸른 밤’을 그 노래를 만든 뮤지션으로부터 듣다니,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음날 아침, 바다는 잔잔하고 햇살은 따뜻하게 내리비쳤다. 올레길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마루에 앉거나 누워서 한없이 나른한 평화를 즐겼다. 그곳에서 만난 올레꾼들은 “제주도에 게스트하우스가 수십 군데 생겼는데, 아침 일찍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밤 11시면 불을 끄는 등 규율이 엄격한 곳이 많다. 이곳이 가장 자유로운 게스트하우스 같다”고 말했다.
저녁때에는 포구 앞에 있는 또 다른 게스트하우스 ‘돌담에 꽃 머무는 집’에서 송년음악회가 열렸다. 삼거리슈퍼 앞에 주민과 관광객을 위한 음악회가 열린다고 포스터가 붙었었다. 홍세영 대구예술대 교수와 딸의 아코디언 연주, 정인호씨의 아프리카 타악기 연주, 무형문화재 이수자 김성태씨의 대금 연주가 이어지고, ‘사랑과 평화’ 멤버였던 정한옥씨의 연주로 음악회는 마무리됐다. 정한옥씨 역시 대평리의 주민이다. 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갓 구운 고구마와 말랑말랑한 쑥 인절미를 대접받고, 곳곳에서 협찬한 작은 선물들을 추첨을 통해 나눠 가졌다. 2011년 가을 문을 연 이 게스트하우스에 벌써 마니아 손님들이 생겨 경품을 협찬했다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자랑했다.
대평리에 부쩍 사람들이 많이 찾기 시작한 것은 올레길이 열리면서부터. 대평리는 제주올레 8코스가 끝나고 9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 8코스는 서귀포시 월평마을에서 출발해 중문을 지난 후 열리해안산책로를 따라 대평포구에까지 이르는 길. 주상절리와 흐드러진 억새가 일품인 코스다. 9코스는 대명포구에서 화순금모래해변까지 이르는 길로, 아름답기로 이름난 안덕계곡에서 원시림을 경험할 수 있다.
올레 코스를 다 걷기 어렵다면, 9코스 초입인 대명포구에서 몰질(말이 다니던 길)을 따라 박수기정까지 오르기를 권한다. 대명포구는 고려 때 제주에서 키운 말을 원나라로 실어 보내던 곳.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 박수기정에 오르니, 널찍한 평원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바다를 끼고 있는 작고 예쁜 대평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뒤편 군산에 오르면 한라산과 서귀포, 송악산, 마라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
해녀들의 발언권이 세서 해안도로도 내주지 않았던 마을. 예전에는 낚시꾼 외에는 제주 사람들도 잘 모르던 이 한적한 포구 마을이 요즘 여러 면에서 변화하고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 해녀들이 공연을 하고, 축제가 생기고, 2009년부터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돼 여기저기 벽화와 조각품도 들어섰다. 외지인들이 땅을 사들이면서 마을 주변에 펜션과 고급 주택들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더 볼거리가 많아지고 더 편안해졌지만 “나만의 보물 같은 장소를 잃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사람도 많다. 이 예쁘고 아늑한 마을을 떠나면서 ‘이곳이 지나치게 바뀌지 않기를, 본질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