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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시점의 사용과 작품의 완성도
강 돈 묵
흔히 소설에서 시점을 말한다. 아직 수필에서 시점을 거론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수필에서도 정확한 시점의 사용을 요구한다. 특히 소설적 기법을 차용한 수필에서는 그 사용의 정확에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흔히 소설에서 시점을 말할 경우 네 가지로 말하지만, 더 세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전문적으로 세분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흔히 회자되는 네 가지만이라도 정확히 알고 사용해야 한다. 대상이나 사건을 어떤 위치에서 보고 말하는가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지는데, 이것을 시점(視點 ‧ point of view)이라고 한다.
어떠한 각도에서 대상을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분명히 다른 효과를 얻게 된다. 또 기술의 허용 범위도 확연히 다르다. 여기서 1인칭 소설, 2인칭 소설, 3인칭 소설의 차이가 발생한다. 1인칭 소설에서는 의식의 흐름을 다룰 수 있지만, 여타의 소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갈 때에는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기술할 수 있어도 남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여기서 네 개의 시점을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어느 시점을 선택하든 그 때에는 반드시 글에서 요구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엮어가는 이야기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가에 따라 시점을 선택해야 한다. 이 시점의 선택에 혼란이 빚어지면 작가가 말하려는 바가 제대로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또 정확한 시점을 선택하면 글의 맛을 더하고, 독자의 뇌리에 오래 남는 명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하고 있다. 옥희라고 하는 여섯 살 난 아이의 시각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관계를 기술한다. 바로 여기서 이 소설의 성공은 시작된다. 이 소설은 바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수월하게 환치시킬 수 있다. 사랑방 손님이나 어머니가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사랑을 기술해 갈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 시점으로 가는 순간 이 소설은 삼류소설로 추락하고 만다. 아직 어른들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여섯 살 난 아이의 눈으로 기술해감으로써 아주 더 할 수 없는 지순한 사랑의 이야기로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점은 이야기에서 요구하는 것으로 제 자리에 가 있을 때 빛이 난다.
여기서 작가는 시점의 선택에 신중해야 함을 자각할 것이다. 그런 작가는 없겠지만, 그냥 특이한 시점을 활용해 보자는 식의 안이함에서 선택,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수필에서는 이 문제에 더욱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태생적으로 작가의 고백문학인 수필은 대개의 경우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요즈음에 와서 많은 수필가들이 수필의 영역 확대를 위해 노력하다 보니, 시점의 다양화도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박수를 보내면서도 걱정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필은 대부분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작품을 망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특수한 장치가 없이 수필에서 여타의 시점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의 깊은 고민을 거쳐 얻어져야 한다. 이 시점의 적절한 선택은 작품의 맛을 한결 더해 주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앞으로 더욱 시점의 변화에 작가들의 관심이 모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문학미디어”에는 산문으로 소설이 두 편 수필이 11편 수록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작가에게 있어서 애정이 가지 않는 작품이 없을 것이다. 작가의 치열한 창작열에 의하여 얻어진 것들이다. 그 노력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소설의 경우 김란의 “태양이 물들었다”는 초등학생의 눈으로 어른들의 일그러진 삶을 그려주고 있다. 초등학생인 세미가 엄마의 이탈한 삶을 기술하는 글이다. 그러니까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어찌 보면 앞에서 말한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엄마가 아버지와는 떨어져 살면서 마약에 손대고 있는 고릴라 삼촌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 것을 목격하고 기술한다. 고릴라가 경찰에 잡혀가자 엄마는 다른 남자와 또 그와 같이 행동을 한다. 그것을 목격한 세미가 골프채를 드는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성문화가 잘못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일그러진 현실을 잘 그려 주었다고도 볼 수 있고, 무너져 내리는 우리 사회의 도덕성에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소설의 전편에 걸쳐 그려진 주인공은 딸을 둔 어머니로서의 기본적인 모성마저도 없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다. 그 인물의 존재는 오직 섹스뿐이다. 그것도 사랑이 곁들이지 않는 몸의 쾌락만을 즐기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화자를 초등학생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그리려는 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기술하기에는 오히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낫지 않았을까. 어린이의 시각을 동원할 때에는 그들이 갖고 있는 순백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들을 끌어들여 관찰자로 놓을 필요가 없다.
화자의 위치와 각도에 맞는 기술은 글의 생명이다. 이 소설에서는 초등학생으로 화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의 시각의 위치는 초등학생이었다가 어른이었다가 수시로 변한다. 이것은 바로 시점의 부적절함을 확인하는 증좌이다. 어린아이의 시각을 빌어 말할 때에는 언제나 어린아이로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 그것이 혼란에 빠지면 독자에게 얻어야 할 신뢰감은 거리가 멀어진다. 한번쯤 시점의 문제를 고민하게 하는 글이다.
수필 이봉하의 “정응열 옹에게”는 어린 날 서울 명동거리에서 인분 치우는 마차를 같이 끌던 친구에게 보내는 회한의 편지이다. 둘만이 간직한 공유의 세계가 있기에 조리에 맞지 않는 문맥이 혹 있다손 치더라도 공감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는 글이다. 하지만 기왕에 수필로 세상에 내놓을 때는 독자의 편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1인칭 단수와 복수의 시점을 적절히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말을 탄다는 꿈에 부풀어 서울에 올라왔으나, 겨우 인분 치우는 마부 일을 해야 하는 처지를 알았을 때 느꼈던 황당함, 명동거리에서 인분이 엎어졌을 때의 난처했던 추억 등이 사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이 글을 읽어가면서 웃음도 나오고, 한편으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적절한 시점의 활용으로 독자들을 그들만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김선화의 “물 길러갔다가”는 꿈속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꿈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일이 꿈속에 나타난다. 어찌 보면 그렇게 정연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의식의 세계인 현실이 지나치게 정신적인 무게를 가지고 내재해 있으면, 그것이 꿈인 비현실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가를 알 수 있다. 늘 작품에 골몰하여 있기에 꿈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1인칭 시점은 ‘의식의 흐름’을 다룰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 수필에서 작가의 꿈속을 다루기에는 다른 시점의 활용은 불가능하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무의식의 세계라 해도 의식이 잠재되어 작용하기에 그렇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계에 와서도 바로 자신의 내부에서 일고 있는 의식에 충실할 수 있는 것도 두 영역이 동질적인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의식의 세계에서 그 어떤 장치로도 가려지지 않는 것이 꿈의 세계이다. 그럴싸한 수식으로 세상일을 다 가린다 해도, 잠 속까지 따라와 본연의 색깔을 띠는 잠재된 의식의 뿌리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속여 넘길 수가 없다.
잠에서 깨어 종일토록 간밤의 꿈을 더듬는다. 해답을 찾지 못하고 앓던 가슴이 뻥 뚫린다. 방황하던 의식의 닻을 내려 추구하던 본래의 자리에 얌전히 둔다. 그래, 그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다. 유유한 인생길에서 참견 좋아하는 한 나그네를 만나 어이없게도 두 다리가 조금 휘청했을 뿐.
사람 살아가는 일, 그것도 문학의 길이란 신성한 물을 길어 나르는 행위와 흡사한 것이리라.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수심 깊은 곳의 물 한 그릇 얻는 것과, 잡다한 일상이 너울대는 의식 세계를 걸러 그럴 듯한 사념의 결 한 가닥 끌어내는 것이 무에 다르겠는가. -김선화의 <물 길러갔다가>에서
이언주의 “모리국시” 노부부가 운영하는 구룡포의 국수집 이야기다. 그 이름의 유래가 ‘모르는 사람이 여럿이 모디서 먹는다, 일본말 모리(많다)에서 왔다, 주인도 이름을 모른다.’에서 왔다며 구구하지만, 결국 주인 노인의 말로 정리된다. ‘그기요, 모리는 사람끼리 모디서 묵는다꼬 모리국시 아이라요. 이거는 우 모디서 먹는 음식인기라요.’ 바로 여기서 이 음식의 특성이 드러난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도 함께 어울려서 서로 정을 나누면서 먹는 음식인 것이다. 작가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가치인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리국시에 들어가는 해산물도 잡어가 아닌 생아귀나 생태 같은 고급어종으로 바뀌었다. 뱃사람들로 북적대던 까꾸네집은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일을 도우는 사람도 없이 꾸려가는 노부부에게 이제는 식당일이 힘에 부처 보인다. 세월이 흘러도 오래 된 포구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직도 남아 있는 후한 인심뿐이다. 그리고 모리국시는 혼자서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노부부는 냄비에 한 사람만큼의 양만 끓이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며 손님을 돌려 세운다. 혼자 먹는 모리국시는 이미 모리국시가 아니다. 구룡포에 가면 절대로 혼자서는 먹을 수 없는 모리국시가 있다. -이언주의 <모리국시>에서
철저하게 작가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을 기술한 것이 아니고, 구룡포의 국수집을 묘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대를 이끌어 내고 있다. 작가의 감정이나 의식이 전혀 가미되지 않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느낌의 객관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점은 작품에서 요구하는 것을 올바로 파악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때에 그 묘미가 배가된다.
이재영의 “별을 찾아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50년간 가슴에 담아두고, 짝사랑하던 여인을 만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강민철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마음 속 깊이 짝사랑하던 여자. 더러는 말도 건넬 수 있었지만, 한 번도 용기를 내어보지 못하고 가슴에만 새겨둔 여자. 이제 직장에서 퇴직하고 죽기 전에 한번 만나 보겠다며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겨우 만나게 되는 여자. 박명선. 하지만 그녀는 옛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수필은 소설적 기법을 활용한 수필이다. 우리가 수필에서 소설적 기법을 차용해 올 때에는 철저하게 그 기법에 충실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있었던 현상에 끌려 기록하기에 급급한 면이 없지 않다. 적어도 우리의 체험이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되려면, 그 글감이 갖는 의미를 찾아내야 하고 종내에는 글감의 본질을 찾아 독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소설적 구성의 맛도 찾기 어렵고, 주제가 무엇일까 하고 의도적으로 찾으려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선 글감에 대한 해석 자체가 덜 된 상황에서 집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쪽으로 기운 면도 있다. 소설과 수필의 차별화는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로되, 그래도 의식하고 작품을 생산할 필요는 있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입과 행동을 통하여 주제를 나타내지만, 수필은 수필가의 입으로 직접 주제를 말한다고 하는 차이점이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오히려 강민철과 박명선의 행동에서 주제를 찾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전지적 작가시점을 택했다. 두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 수 있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기술해 가면, 이런 이야기는 재미를 상실한다. 가슴 속 깊이 평생을 끌어안고 살아온 비밀 같은 이야긴데, 그것을 다 아는 입장에서 기술하면 그것이 무슨 흥미를 끌 수 있을까. 정말로 이런 이야기에서는 시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래야 가슴에 새겨진 아리따운 추억이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며 전달될 것이다.
시점은 글의 내용, 주제에 따라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적합한 시점을 전개해 간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작가의 노력을 요구한다.
김단아의 “도플갱어” 특이한 기법을 동원한 수필이다. 문학은 끝없는 자아 찾기이다. 도대체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 우리는 늘 항해를 한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성찰의 기회를 얻는다.
거울을 본다. 내 안에 있는 그녀에게 문을 두드린다. 귀찮다는 듯이 일어나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 아닌 그녀가 웃고 있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마음을 얼레고 달래보았다. 주체할 수 없는 그녀가 불덩이로 변하여 나를 뜨겁게 달군다. 뺨을 갖다대어 꼬집어보니 아프다. 나와 쌍둥이인 그녀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남아 있는 많은 시간들을 서로가 다독이며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직이 소리 내어 불러본다. 또 다른 나인 그녀가 대답한다. 귀를 쫑긋하고 세우니 어찌된 셈인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김단아의 <도플갱어>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 꾸준히 탐색하는 모습은 작가 관찰자의 시점으로 가능하다. 가장 잘 알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선뜻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찾아나서는 일에 게으르다. 작가 김단아는 이런 일에 나선다. 그리고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사적인 감정이 없이 그대로 기술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아주 혹독하리만큼 객관성을 유지하려 한다. 끈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려면 작가 관찰자 시점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기능을 얻는다. 이 글에서 형태단락의 구분을 주지 않고 하나의 통으로 묶은 것도 작가의 의도이다. 끝없이 질기게 자신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단락의 구분도 배제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떠한 작품이든 그 작품에서 요구하는 시점이 있다. 이것은 글의 주제와 글감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한 작품을 완성하면서 그 작품에 적합한 시점을 찾아 나서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 시점은 글의 주제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 한 수단이기도 하다. 같은 이야기라도 시점의 차이에서 확연히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번 “문학미디어”에는 시점을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 많았다. 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점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고민해 볼 일이다. 이 시점은 작품의 내용과 주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작품을 쓸 때마다 적합한 것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