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2일(월)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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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 계>는 개봉당시 수위높은 노출로 세간의 관심을 불러모았지만, 정사신 하나만으로 회자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걸작이다. 대만의 거장 이안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욕망과 사랑의 경계, 집단에 속해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양면성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중국 역사 일각까지 한꺼번에 다루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홍콩으로 피난을 온 왕치아즈(탕웨이)는 대학 연극부가 되는데, 이때 연기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극부 리더에 의해 친일파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세워진 항일단체 조직원이 된 왕치아즈는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유혹해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그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쉽사리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람을 믿지 않는 이. 그러나 만남과 재회를 통해 둘은 서로에 대한 경계를 풀고 사랑에 빠지고 만다. 결국 왕치아즈는 조직의 암살 시도를 이에게 알리게 되고 극은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사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영화에서 담고있는 전체적인 내용은 요약하기 곤란할 정도로 크고 깊다.
서로에게 자신의 본심을 들키지 않아야하는 이와 왕치아즈의 베일에 싸인 눈빛. 서로에게 자신을 감춰 진짜같은 연기를 해야하는 이들은 타인의 삶을 살아가며 그것에 동화되어가는 배우의 삶과 고스란히 닮아있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자신을 감춰야 하지만, 또 감출 수 없는 오묘한 경계선에 놓인 삶을 연주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 삽입된 브람스의 <인터메조 제2번> 또한 위태로운 경계 사이에 선 두 사람 사이의 여백에 조용히 흐르며 극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작곡가 브람스 역시 스승의 아내였던 클라라를 평생 사모하여 자신의 마음을 감춘 채,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살아온 작곡가가 아니었을까? 브람스의 인터메조는 인생의 최후기에 작곡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브람스의 피아노 곡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브람스는 말년에 대작의 작곡을 피하고 주로 소품들만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짧은 멜로디 안에도 인간의 삶과 사랑에 대한 수없는 감정들을 가득 담아놓았다. 특히 말년 피아노 곡들은 구체적인 멜로디를 통해 기분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감정과 그 깊이를 고스란히 청자들에게 전달해준다.
소개하고 싶은 연주는 바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연주다. 백건우는 최근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브람스 말년의 피아노 소품들을 모아 발매했는데, 연주를 들어보면 그가 유럽에서 받고 있는 명망이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타건, 건반을 어루만지는 듯 하다가도 감정이 함부로 흐르지 않도록 음표 사이를 꽉 잡아가는 손놀림. 백건우의 브람스는 묵직하면서도 따스하다.
가슴에 사무치게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지만 외칠 수 없는 순간의 슬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싶지만 눈을 감아야 하고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삶의 비정함. 이 위태로운 간극을 메우던 브람스의 <인터메조 제2번>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삶의 또다른 이면을 노래한다.
<독립영화감독/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