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상태 체험 후기 2>
지난 주말(6월 말) 아름다운 상태를 체험하고 나서, 며칠간 제 삶은 전에 없던 활력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루 한 시간도 같이 아이와 놀아주기를 버거워하며 핸드폰만 보고 있던 저의 저질 체력이 아이와 공원에서 3시간을 함께 신나게 뛰어놀고도 거뜬해졌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변화한 요 며칠이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고 합니다.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조금 더 진실한 저의 내면을 털어놓고 함께 울고 웃는 저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상태에서 세웠던 저의 명료한 의도는 제 삶에서 더 활력과 즐거움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또한 연구 중 막혀있는 부분에서, 어떻게 해야 빨리 끝낼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름다운 상태’ 과정을 통해 저의 현재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 뿐만 아니라, 과거 어린 시절 경험에 대한 재정리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상담자들이 그렇겠지만, 저는 자주 상담에서 과거의 제 모습 같은 내담자들의 측면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또 함께 치유해야 할 문제가 오는구나 하면서 저 스스로의 상처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6월은 이러한 내담자로부터의 동시발생이 다발적으로 나타났던 달이었고, 제가 상처를 충분히 다시 접촉하지 못하고 억압했기 때문인지 제 무의식은 저를 아주 무겁게 침잠시켰습니다. 몇 주간 지독한 졸음과 무기력에 시달려야했고, 논문의 마지막 정리를 앞두고 아무런 생산성도 보이지 못한 채 암울한 마음으로 꾸역꾸역 일상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에게도 상처로 기억되는 6월, 20여년 전의 상처를 다시금 만나야 하는구나 하는 자각과 함께 제 안의 상처와 분노를 마주하기 위해 과정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첫날 효록스님께 딕샤를 받으면서 저의 생산성이 막혀있었던 것은, 제가 바른 의도로 연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빨리 끝내버리려는 욕구가 앞섰던 나머지 원래 자비의 서원을 세우며 연구를 시작했었다는 초심을 잊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고, 바른 의도가 바른 노력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각이 들면서 스님의 손이 머리에 얹혀지자 바로 어깨와 가슴에 강하게 있던 중압감이 스르륵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머리를 밀랍처럼 감싸고 있던 두꺼운 노란색 껍데기 층이 반으로 갈라져 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미지를 보면서, 이제 막혀있던 머리가 돌아가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한편, 딕샤를 받기 전, 감사한 분들을 떠올릴 때, 얼굴 한번 뵙지 못했던 돌아가신 친조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할머님을 떠올리면서는 약간의 원망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전에 유독 불안이 많으셨다는 할머님, 그 기질이 아버지를 타고 나에게로 전해진 것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바사나 자세로 누워있는데, 할머니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할머니는 생전에 아들 넷을 먼저 앞세우셨는데, 빨치산인 아들 때문에 모진 고문도 많이 겪으셨다고 합니다. 처형된 아들은 시신도 찾지 못했고, 할머니는 수 십년 후 돌아가실 때에도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할머니의 처절한 슬픔과 원한, 뼈저린 고통이 처음으로 가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슴의 통증은 지금껏 느껴본 적 없었을 만큼 가슴 한가운데를 찢는 것만 같고, 가슴 전체에 고통의 소용돌이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아픔에 온몸이 떨려왔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통을 없애야겠다,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그냥 저절로 일어나서, 저는 느끼고 바라보기만 할 뿐 다른 어떤 시도도 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 잦아들고, 울음이 잦아들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시 차례로 떠올랐는데, 마음 속에서 ‘받아지니겠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스르륵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전의 뜻을 받아지니겠다는 다짐 같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에 불교를 현대화하기 위해 제자들을 유학도 보내시고, 독립운동도 지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불교를 현대화하겠다는 뜻을 받아지니겠다고 한 것 같은데, 다른 메시지가 더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과 20여년 전의 제 트라우마 때문에 가슴 안에 가득한 분노가 생겼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보아도 납득이 가는 얘기이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제 가슴 안에 있던 무시무시한 분노는 저 하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여러 대를 거쳐 겪어왔던 분노, 할머니의 분노가 응축되어있고, 그것을 풀어줄만한 자손에게 내려온다는 효록스님의 말씀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제가 충분히 겪어내면 가족들이 겪어낼 몫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딸 셋을 키우느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척박한 환경,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 우리 모든 가족의 아픔이 필름이 지나가듯 주루룩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만은 아닐 수 있겠구나, 선대의 고통이 더해져서 우리가 그토록 더 힘들었구나 하는 자각이었습니다. 그 환경 속에서 자라나면서 겪어야 했던 저의 모든 상처들 또한 줄줄이 떠오르고 하나로 엮여지기도 했습니다.
둘째 날 명상을 통해서는 저의 호기심이라는 주제로 제 상처들이 엮어졌습니다. 엄마가 낳자마자 아들이 아니라고 내버려둔 갓난아기를 딸처럼 키워준, 우리 집에서 일하던 이모가 저를 떠난 이유도, 자라면서 다양한 사고와 상처를 겪어야 했던 이유도 그 바탕은 나의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호기심이 많았고, 그 충동을 이기지 못했고 매번 다치고 상처받으면서도 그 호기심의 문을 열고 말았던 어린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아이가 참 안쓰러워 많이 울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굴하지 않는 호기심이 당차고 생명력 있게도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이유가, 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이 또 나와 남에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 두려움이 먼저 드는 것이라는 통찰도 생겼습니다.
한편, 그 호기심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연구를 놓지 않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그 호기심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하면 되겠다는 희망도 들었습니다. ‘논문 쓸 때가 제일 즐겁다’는 마음 속 목소리가 soul sync 명상 중에 올라왔습니다. 연구의 슬럼프마다 찾아왔던 효록스님과의 O&O 아카데미 여정이 매번 저에게 다시금 아름다운 상태 속에서 바른 의도를 세우고, 바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저를 일으켜주었습니다.
분노가 녹아서 자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그대로 자비로 전환되는 것이라는 효록스님의 말씀, 번뇌즉보리, 막대한 분노는 큰 자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스님의 말씀이 저를 붙들어줄 또 하나의 기둥이 될 것 같습니다. 맑고 따사로운 현존으로 함께 해주시고 인도해주신 효록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현존만으로도 제 몸과 마음 안에서 치유의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짧은 이틀간이었지만 함께 해주신 스님들과 선생님들의 치유적인 에너지와 깊은 눈빛, 따뜻한 품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통받는 많은 분들, 고통으로부터 도망다니느라 더 큰 고통을 만나고 있는 분들께 이러한 치유와 통찰의 기적이 선물처럼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제가 ‘아름다운 상태’과정을 통해 느꼈던 모든 행복감과 통찰과 치유의 결과를 널리 회향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