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은 지방관아인 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우리선조의 始原은 경남-칠원을 거쳐서, 경기도 廣州이지만
조선 성종조부터 장흥부 예수빈과 광춘산을 중심으로, 평화, 송암, 포곡, 관산,장평 나중에는 장동등지에 살았다. 원래 무장인 副司果 諱 이신재(고종 15년, 1878년 光緖 4년/副司果-오위(五衛)의 종육품 무관 벼슬. 현직에 있지 않은 문관, 무관, 음관(蔭官) 및 그 밖의 잡직의 자로 음서임 )은 구 한말 동지돈령부사(돈녕부직제, 判府事-知事-同知事=3품)에 오른 분인데 장흥 廣李로서 유일하게 보성廣李와 교유하던 분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웅치인데 웅치는 제암산의 아랫 마을로, 제암산은 장흥과 보성의 경계를 이룬 산이다. 웅치는 고종조까지 장흥부 소속이었으나, 일제시대 보성군으로 편입된 곳이다.
제암산에서 발원한 웅치의 정자강은 장동과 유치를 거쳐서 보성강으로 흐른다. 정자강을 물줄기를 따라 좌우로 마을이 군락을 이룬다 보성 廣李의 집성촌인 禮洞은 강산의 강건너 마을이고 제 모친의 시집은 신류인데 연암의 강건너 마을이다. 예동은 구한말 面의 治所였다. 태어난 곳은 연암(구암과 연향동의 마을) 마을로, 어렸을때 설날과 추석때는 동네 80호의 집에 일일이 세배를 다닌다. 친척이든 아니든 나이 어린 자는 웃어른에게 세배하는 풍속이어서 세배를 다녔다, 1960년도,
그러면 1원, 5원 세배 돈을 주던 시절이다. 가가 호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에게 반드시, 세배하는 것이 풍속이고
일가든 아니든 동네의 60이상 되시는 어른들이 계시면
하대의 분들은 반상을 차려 머리에 이고, 가솔을 데리고 세배를 했다. 남자어른들은 단체로 무리를 지어 세배를 올린다.
세배를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뉘집 손인고 묻는다.그집 아들과 며느리가 옛날 방촌 양반(諱 이종근)방촌댁( 장흥 魏씨(방촌위씨, 위곤의 직계후손-존재(存齋) 관산읍 방촌리)의 아들 良洙다(부친의 字, 호적명 明洙) 못 알아드신다. 다시 옛날 초곡아짐의 시아버지 거기 벼슬한 분의 손자.그러면" 아.벼슬하신 분.." 하시며, 알아 차리고 그집의 長孫이냐고 반갑게 맞이 햇다.즉 동지사 어른이신 諱 이신재 공을 말한다.그분들 할아버지, 할머니들 이야기가" 동지돈녕부사 諱이신재공은
용양위 부護軍의 諱 이용원공과 같은 나이 또래로, 원래 무신인데, 항상 말을 타고 다녔다고 했다. "집안의 노비와 여비(몸종),식솔이 많았단다.(諱 진삼-諱중박-명래.직래.영래 -諱용장/ 용원.용선-諱신재)원래 장흥부 장동 북자동 일대에서 살았는데, 舊韓末 日帝 初期에 처가집(金海金氏)이 이곳이라 말년에 웅치로 이사왔다고 그랬다.
동지사 諱 이신재공의 父가 諱 이용장이고 諱 이용장의 父가 諱이명래이고 동생이 諱이직래이고
이분의 父가 휘 李仲璞공이고 父가 諱 李震三공이다.贈 동부승지공 諱 이직래의 아들이 동 시대 호군공 諱 이용원공이다.
이 분은 장흥 북자동일대 장동장평등지 에서 살다가 호군 공이 죽자, 이용원가의 후손들이 각각
夫人들께서 아들과 가솔을 데리고, 노년에, 웅치로, 이사오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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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이신재공과 諱 이용원 공은 같은 또래다. 장흥의 장동.장평에 고종조에 宮中 丞官 한 분이 있고
妻家쪽으로 궁내부와 내시부에 한 분, 내명부에 한 분이 계셨다고 들었으며, 이분들로
諱이仲璞 공의 집안 후손들이, 구한말 힘을 썼다고 들었다. 물론 합병 이후에는 몰락을 했지만,
일제병합기 증조부님은 벼슬을 물러난 뒤에 웅치로 이사와 노년에 웅치에 사셨다 연암의 마을은 연향동과 구암으로 이뤄진 곳인데 연향동은 오래전의 마을이고, 구암은 구한말에 이뤄진 곳이다. 야산이 내려와 끝머리에 축조된 마을로
앞은 폭 40미터의 내가 있다. 뒷산을 두고, 좌와 중간에 작은 폭포가 흐르고, 좌측 폭포지점에 방앗간이 있고 가운데 폭포와 우측의 바윗돌산을 두고 산을 뒤로하면서 축조된 집이 세곳이 있다. 뒷쪽에 두 채, 앞쪽에 한 채, 남향으로, --형으로 증조부 어른신들이 지은 집같다(초등학교 시절까지 건재) 집터의 넓이는 논 다석 마지기크기였고, 대문과 대문에 딸린 집이 있고,
대문집의 옆 後 텃밭이지만 집이 한채가 있고, 마굿간이 있었다. 안채 앞에는 감나무와 넓은 텃밭이 있다.
마당을 지나면 왼편에 두레박을 사용하는 우물이 있고(부억옆),그리고 안채가 있는데,
안채는 외편으로는 정지방과 부억, 부억의 우측으로 음식을 내가는 방과 이어 연결된 안방, 마루대청와 곳간 마루우측으로 양식방과 살림방 이어서 겹채로 서재용방과 둣방이 있다.
안채는 겹채 였슴, 집 우측으로는 아주 오래된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고, 집 뒤 야샨과 함께 석빙고(얼름보관소.음식보관소)가 있고 다시 대나무숲, 감나무 숲이 있고 우측에 창고, 빈터에 농기구 보관고, 대략 이런 구조의 집이,
세곳이었는데,마을을 들러서자 마자 마을의 맨앞-앞쪽은 선대공의 집(지금은 淸州韓氏의 집)이고,
그 뒷쪽은 諱李容元 공 후손과 諱 李容璇 공 후손의 집이었다.
동네 대부분 집들은 전부 단층에 토방이 낮았는데, 이 세집 만은 토방이 아이 키보다 높았고, 돌계단 위에 집을 지어서
사람들이 먼저 돌계단을 오르고 나서 신발 벗고 마루 올라서 방으로 오르는 구조이다.부억문은 마당의 높이이다.
(당시 동네의 대부분 집들은 돌계단이 20-40센치 높이인데), 이 세집들은 보통 130-150센치 높이 였다.
(두 家도 후손들이 光州 . 長興으로 이사를 감, 어렸을때 기억으로, 李容璇 할아버님이, 한말부터 서당을 하시었슴-서당이름, 愛蓮齊 ,제자 350명 訓長훈장 李容선, 웅치면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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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사 공은 중년에 貞夫人이 돌아가시자 後室을 보았으며,
이 후실 부인(仁川李氏)과는 노년에 웅치 서동에 사셨다. 증조부님은 아들, 딸을 두었다.
曾祖父후부인 인천이씨 사이 딸 하나를 두고 돌아 가셨고,
후부인과 같이 살면서 모든 전답과 토지를 가지고 가서, 친 조부님이 힘들게 사시게 되었다
曾祖父 후부인님은 제가 6살때까지 서동에 살고 계셨는데, 기와집에 으리으리하게 사셨고, 어머님과 歲拜를 갔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장동 우체국에 다니셨는데, 제암산 기갯재를 넘어다니면서 출퇴근을 했다.
어느날 눈이 많이 와서 출근을 못해서 퇴직 당했다 들었다.
曾祖父님이 후부인님과 살면서 재산과 논을 전부 가지고 가셔서, 우체국에 다닌 할아버지가 힘드셨다고 했었다.
더욱 할아버지는 가세가 기울어서 1930-40년경, 같은 동네 구암의 오두막집으로 이사했고,
빚이져서 원래의 집은, 할아버지가 청주한씨에게 팔았다.
할아버지가 사시는데 힘이 들었고 큰아버님과 아버님 代는 집안이 완전히 기울어서 오두막 집에서 사셨다
1953년 내가 태어날 때에는 오두막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님도 사시는데 힘이 들었다 했다.
曾祖父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曾祖父후부인님은
제가 어렸을때 까지 사셧다, 왜냐하면 西洞에 명절때,추석때 세배를 갓고
어머님은 세배상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님은 안가셨다 왜냐하면 후실은 정부인이 아니기에,
세배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다고 햇고 할아버지가(諱 종근 공) 돌아가시면서
西洞의 증조부님의 후부인에게는 찾아가지말라고 했다고 유언하셧기에 아버님은 안가셨다.
그런데 초등 6년 무렵에, 曾祖父 後夫人님이 아버님에게 기별하기를, 죽음이 다가오니,
"내가 廣李 曾孫인 아버지 집에서 죽고자하니 전재산을 가지고 갈테니
받아 주라고 했다는데. 그 曾祖父 후부인의 "딸(증고모님, 全州李氏에 출가, 사위와 같이 살았슴)이
안된단다"고 해서, 결국 본가로 曾祖父후부인님이 오시지 못하고 "딸 집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당시 증고모님도 제가 중학까지 세배를 했었다. 曾故母님은 옛날 벼슬한 할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무척크고
얼굴 형도 아버님-이용원/용선공의 후손들과 생김새가 비슷했다.증조 할머님은 키가 작고 체구가 작은 가련형의 여인이었으며 용모가 깨끗하셨다. 세배 한적이 있는데 할아버지의 증손이라고 하면서 귀여워햇고. 벼슬 이야기하면서,
나중에는 "증조후부인할머님이 제게 무슨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증고모)가 하려던 이야기를 막았다. 나의 親조모님-방촌위씨 분은 제가 세살 때 돌아가셨다는데
증조부님의 후실부인 님은 그때까지 살아계신 것이다. 나이가 90정도 였다.
내가 학교를 서울서 다니게 되어 後의 소식을 몰랐는데.후에 어머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당시 曾祖父후부인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에게 알리지 않고 저들끼리 초상을 치렀다고 화를 냈었다. 증조 후부인의 부고를 장례치룬 한참 후에, "다른 사람 인천이씨 종가(웅치면사무소 이 書記)를 통해서 들으셧고 "아버님이 무척이나 화를 내셨다."
재산 문제 때문이다. 증고모님(서동, 전주 이씨와 결혼)은 그 뒤 전 가산을 팔아가지고 서울로 이사 가심.
그러나, 마음씨가 좋으신 착하신 아버님은, 증조후부인님도 증조부님과 같이 제 2배의 반열로 제사를 같이 모셨다.
나중에 당시 증조할머님이 내게 이야기하려다가 멈춘 사실에 대하여 부모님은 순수한 분이셔서 잘모른다
그러나 아버님에게 나중에 이야기하니" 아마 전답의 일부를 우리집에게 양여하려고 한 것 같다" 했다
면사무소에 다닌는 인천이씨 李書記(증조할머님 친척)가 전갈이 오기를,
寶城邑의 구기동에 曾祖父님 명의의 야산이 있는데 아버님 앞으로 이전하라고 아버님이 移轉을 했고,
나중에 山을 구기동의 鄭씨, 崔씨 등에게 再 이전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장흥 어디에 증조부공의 토지. 전답이 있었다는데
농사만 짓는 아버님은 찾지를 못하고, 그냥 나중에 돌아가셨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모두 曾祖 할아버지의 토지라 생각이 된다. 할아버지가 벼슬 할 무렵이면
장흥에 사셨기 때문이다. "연암의 산과 논이 전부 너의 선대 토지다" 라고 동네 분들이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나는 오두막집에서 논 두마지기 농사를 짓는 가난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 시절 아버님 어머님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게 사셨다. 나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했고 부모님은 나를 가르키시느라 뼛골이 상하셨다. 내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너무나 힘들게 일을 하셔서 고생해서 돌아가신 것이고,이것을 생각하면 항상 내 마음이 찢어지게 아픈 것이다. 그랬단다. 중학교 갈무렵에 아버님은 나를 학교에 보내지말고 일을 시키자고 한 것을 어머님이 우겨서 보냈단다. 난 아버님 등골을 빼먹고 공부한 것이다.그만큼 집이 어려운 것이었다....
(할머님은 長興 魏氏인데 몸종을 데리고 살정도로 方村의 부자였으나.
시집을 와서도 일은 하실지 모르는 분이라 들었다. 제가 세살때 돌아가셨다.)
구암의 이신재공의 가, 생김은 이모양이나 토방이 1미터 30으로 놀음,
대문채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