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성최씨(杆城崔氏)
간성최씨의 시조 참판공 효민(孝敏)씨는 연산조의 참판 당시 왕에게 직간하다 미움을 받아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갔다. 자손들은 참판공의 뜻을 받들어 공명정대하고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였다. 자손이 500년 동안 선영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며 약 1,000여호가 돈목하게 살아오고 있다.
(1) 유래와 연원(由來와 緣源)
간성최씨 족보에 의하면 시조 참판공(之洵)은 강릉최씨의 시조 시중공(必達)의 15세손으로 되어 있다. 참판공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참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는데, 이조 개국 때 공이 많아, 호조참판에 오르고 간성군(杆城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간성군을 추모하여 본관을 간성이라 하여 현재 15세손까지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 관향지의 변천(貫鄕地의 變遷)
※간성(杆城) : 강원도 고성군 소재의 땅 간성은 본래 고구려 수성군인데 신라 경덕왕 때 수성(守城)으로 개칭했다. 고려초에 간성(杆城)으로 고쳤고, 이조초에 열산면을 합쳐 군으로 승격하였으며, 고종 32년(1895)에 강릉부에 속하였다. 수성(水城)이라고도 한다. |
첫댓글 오동잎님 간성 최씨의 시조가 필달계 족보에도 없고 대경공계 (최흔봉) 족보 17대손으로 나오는 지순으로 기재하셨는데
사실과 다르니 바르게 시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상세한 자료를 올리니 보시고 옳바르게 시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