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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5장1~12절
제목 : 복이 있나니
산상수훈(5~7장)은 천국 백성의 헌장이라고 불립니다.
그 시작인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복이고, 그 나라에 어울리는 새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 중에서 제자들을 따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1. 산상수훈(1~2절)
1)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옴(1절)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무리를 보시고-'무리를'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십니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입니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은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 아래 평원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입니다.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입니다(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입니다.
제자들이 -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갈이'(출19:12)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심(2절)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습니다(욥 3:1;33:2; 단 10:16).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4:4).
가르쳐 -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입니다.
2. 팔복(3~10절)
1)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 천국이 그들의 것임(3절)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6:20)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 37:14;40:17;69:29;잠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사57:15;66:2).
더욱이 사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눅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입니다(시 69:29;70:5;74:21; 사61:1; 습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시34:6,18;51:17;사66:2).
복이 있나니 -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 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으로 나타냅니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줍니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입니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입니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 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4:17;8:29;12:28).
2) 애통하는 자의 복-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4절)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61:1의 반영입니다.
*사61: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입니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옵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눅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14:16)가 되기 위함입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7:17;21:4)가 될 것입니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입니다.
3) 온유한 자의 복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5절)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입니다.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습니다.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인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땅'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옵니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지역, 하늘과 땅(천지) (5:18,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의 땅은 시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입니다.
*시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66:22; 계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시37:1,11,22,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8:17).
*롬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 그들이 배부를 것임(6절)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십니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습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킵니다(시42:2;63:1;107:9; 암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3:3, 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입니다.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라고 주장합니다.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벧후 3:13).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배부를 것임이요 -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입니다(요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7절)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 -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 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됩니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듭니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입니다(클레멘트 1서 13:2).
이 말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계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입니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6)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 하나님을 볼 것임(8절)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 -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습니다.
문자적로 '가슴',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7:21; 눅21:14; 요 16:6 등).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히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볼 것임이요''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출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입니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7) 화평케 하는 자의 복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9절)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화평'(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 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습니다(사9:6,7; 눅2:14; 요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합니다(엡2:15-17; 골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습니다(신14:1; 호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들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의 복 - 천국이 그들의 것임(10절)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 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합나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입니다(요15:18-25; 행 14:22; 벧전4:13,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딤후 3:12).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입니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입니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입니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습니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입니다.
3. 고난과 복(11~12절)
1) 예수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으면 복이 됩니다(11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눅6:22,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2) 박해를 받은 자에게 상이 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2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합니다(눅1:47;10:21; 요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산상수훈(5~7장)은 호기심에 이끌린 무리가 아닌 호기심을 넘어 삶의 방향을 바꾼 제자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입니다(1,2절).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이 삶이 되고 성품이 되어 열매를 추수할 때까지(13장 23절) 추구해야 할 진리입니다.
2) 팔복은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만 누리는 복이고, 예수님 닮은 제자가 되어가는 복입니다( 3~10절).
이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과 다르며, 이 세상 나라의 가치관과 질서를 전복하는 “뒤집힌 복”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그 나라를 사모하지 않을 만큼 편안하고 넉넉한 삶이 축복이고 행복일 리 없습니다. 새해에 나는 어떤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약속하신 복과 얼마나 비슷하고 또 다릅니까?
3) 팔복 중 처음 네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행복입니다(3~6절).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로, 온유한 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소유가 없는 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 ‘심령의 가난’이 나머지 팔복의 기초가 되며, 그 심령에 천국이 임합니다.
4) 복 있는 자는 ‘사람들을 대하여’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해 기꺼이 핍박을 받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7-10절).
이것은 앞선 네 가지 복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에 긍휼과 진실이 머물고, 그 마음으로 다툼 많은 세상 속에서 화평을 도모합니다. 악이 득세한 세상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초상화이자, 예수님이 바라시는 제자의 자화상입니다.
5) 예수를 따르는 삶은 이 세상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그 결과는 박해일 수밖에 없습니다(11,12절).
세상이 거절한 예수를 환영한 대가로 받는 고난은 혹독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핍박을 ‘복’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상이 크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도피와 회피, 타협의 삶을 접고 이 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
공동체-세상이 부러워할 사람보다 주께서 복되다고 말씀하실 제자가 되길 원합니다.
열방-이슬람 경전의 문자적 해석의 영향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조혼이 금지되지 않고 있다.
말레이시아 사회가 조혼의 문제점을 분명히 인식하여 조혼을 금지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