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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4장1~22절
제목 :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서다
사도들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 걸인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으로 고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몰려들어 자연적으로 솔로몬 행각에서 백성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1. 설교의 결과(1~4절)
1)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싫어하였습니다(1~2절)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도개인들이 나타났습니다.(1절)
*제사장은 산헤드린에 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이고,
*성전 맡은 자는 성전 수비대(守備隊)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사장 가운데서 임명된 사두개파 출신이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하스몬 왕가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은 사두개파출신인 레위인들로 구성되었고,
로마 정부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싫어하였습니다.
여기 “싫어하여”는 “심히 격노하고 크게 불안해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시 종교 체제로부터 아무런 합법적 권위도 받지 않은 자들이 성전에서 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며,
복음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자 노릇을 하였습니다(마26:3,4).
*마26:3,4절 “[3]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이때도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자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 정부와의 협력하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것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대적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자기들의 교리와는 반대되는 혁신적인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부활 교리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라고 백성들에 가르침을 보고 싫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의미 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예수'는 '예수 안에서',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기초로 하여'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과
예수를 계획적으로 죽인 제사장들에게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2) 고난을 받음(3절)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을 집행할 권리를 갖고있지 않았지만,
성전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등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의 법에는 해가 지면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을 못하게 되어있었다.
그런고로 의회가 모일 수 없었고 어떤 송사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回附)하지 않고 감금시켜 놓은 것입니다.
3) 예수를 믿는 자가 남자의 수가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그때 개심한 사람 가운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남자의 수만을 가리킵니다.
'오천명이 되었더라'는 지금까지 믿게 된 예루살렘 신자들의 총수라 봅니다.
아무튼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박해 속에서도 계속 확장(擴張)되어가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2. 산헤드린 공회의 질의와 베드로의 답변(5~12절)
1) 산헤드린 공회가 모임(5절)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킵니다.(막14:53;눅 22:2).
(산헤드린 공회=대제사장+장로+서기관) *관리=대제사장 동의어로 쓰임
*막14:53“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산헤드린 공회는 그 당시 나라의 원로원이자 최고 법원으로서 극형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산헤드린 공회에 참여한 자들(6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대제사장의 가문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산헤드린공회에서 그들이 의사 결정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3) 사도들을 산해드린 공회 가운데 세우고 질문함(7절)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재판 모습을 보여줍니다. 긴 옷을 입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높은 단상 위에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앉았고, 피고는 낮은 마루 바닥위에 서서 심문을 받는 형태입니다.
이것은 법정의 외적인 분위기로도 피고를 압도하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두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적을 행하느냐?
둘째는 “누구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느냐?
“너희가”는 헬라어로 “휘메이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너희 같은 백성'(people like you)으로서,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을 가리키는 경멸조의 표현입니다.
무슨 권세 - '어떤 종류의 능력이냐'는 뜻으로서
사도들이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통한 악령의 힘을 사용하여 이적을 행한 것(신 13:1-4)이라는 저의를 그들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질문은 종교적으로 위법인 것을 암시하는 유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뉘 이름으로 -어떤 사람의 권위를 배경으로 위법을 행하고 있는지 심문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에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지독히 불경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간교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들이 문제 삼은 것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낫게 된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 일을 행했던 방범과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일을 행한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시비하며 파헤치는 것은,
시기심이 가득한 교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들로부터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아시고 지혜롭게 대처한 바 있었습니다(마 21:23-27).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본 절에서도 대적 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도들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애매한 질문 공세를 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심문당하는 자로서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터무니없는 속셈을 은근히 책망함과 아울러(9절)
이를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10-12절).
4)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답변합니다.(8~12절)
(1)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특별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마10:9-20).
*마10:19~20 “[19]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권세자들을 인정하며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 충만은 이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예의를 깨뜨리지 않고 위협적인 재판정에서라도 담대한 증거를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이 양자를 다 갖추기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질문에 답변합니다(9절)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질문의 주지(主旨)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되묻는 베드로의 담대함을 봅니다.
여기서 '착한 일'로 번역된 혤라어 '유에르게시아'는 '친절하고 선한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 표현 속에 사도가 행했던 일에 대한 변호가 포함되어 있고,
'착한 일에 대하여' 심문하는 자들이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3) 베드로가 증거 합니다.(10~12절)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는 여기서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일곱 가지를 증거합니다.
①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 있는 명령형입니다.
그 대상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증거하는 내용의 중대성과 사실성을 암시합니다.
②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런 일을 행한 죄인들이라고 지적하고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그들이 바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모든 흉한 책략으로 저질렀던 만행을 은닉하려고 하지만,
사도는 그들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폭로하며 힐책하고 있습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너희'가 죄인 취급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을 심판했다는 것입니다.
이 증거야말로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의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담대히 확신에 차서 증거 하였습니다.
④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케 된 것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7절)는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 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이 능력을 베푸셨다는 것이니 저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드는 선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⑤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상의 변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섰느니라'는 '계속 서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 옆에 서 있는 고침 받은 자의 생생한 모습 때문에 저들은 힐책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⑥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이것은 시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전에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된 셈입니다.
⑦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12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 여기서 '구원'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 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 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증언을 통해 사도의 증언에는 위대한 복음 진리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2:14-36;3:15, 16).
3. 산헤드린 공회의 반응(13~18절)
1) 사도의 태도에 대하여 이상히 여김(13~14절)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공회원들은, 사도들이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알았는데 죄인으로서 있으면서도 자신 있게 변론하는 사도의 태도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①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던 사도들이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② 예수와 함께 있던 예수의 제자들임을 알았기 매문입니다.
③ 무엇보다도 이전에 앉은뱅이였던 자가 사도가 말한 것들에 대한 산 증거로서 그들의 목전에 당당히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이 궁지에 몰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예수께서 하신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며 주께서 살아 계셔서 복음을 전하는 그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마 28:18-20).
2) 공회에서 나가라 함(15절)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공회'(쉬네드리온)는 그 재판과 심문이 진행되었던 법정을 말합니다.
공회원들은 사도의 변증에 대해 답변할 마땅한 고소거리를 찾지 못하여 그들끼리 의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밖으로 나가도록 명하였습니다.
“서로 의논”는 공회가 심문하려 했던 피고들이 대담하고 확신에 차서 자신들의 무죄를 변론하고 증거를 내세우자, 이제 피고를 회의실에서 내보낸 후 심의(審議)에 들어간 모습입니다.
공회원들이 주도적으로 회의를 따로 소집하여 계속해서 의논을 거듭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배심원들의 논리와 결정을 거쳐 판결을 내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3) 공회원들도 표적이 있으므로 부인 할 수 없게 됨(16절)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그들이 곤경에 처하게 된 이유를 말해줍니다.
'유명한 표적''은 '알려진 표적'이란 뜻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고침받은 사건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4) 위협하여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함(17~18절)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증거가 있었으므로, 결국 법적으로 심문할 근거를 찾지 못한 그들이 택한 결정은 사도들을 위협하여 더 이상 아무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못한 것은 백성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민심의 동향에 민감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구주라는 것과 친히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도록 증거가 보여주고,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의해서 그런 예수를 죽인 죄가 그들에게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정은 자기들의 교세만을 고수하고자 하는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그 양심이 마비되었는가를 시사해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직 자기들의 교권(敎權)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4. 사도들의 대답(19절)
1)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도들의 단호한 태도는 실로 대담한 도전입니다.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용기가 생긴 근거는
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가 일으킴을 받는 표적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② '하나님 앞에서'라는 사도들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다는 신전 의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2)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타협할 수 없는 사도들의 확고 부동한 입장을 공회 앞에 재천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할 때
자신들이 보고 듣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건 각오를 한 것입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21~22절)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공회원들은 의회의 결정이 피고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거부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은 속수 무책이되자 고작 우격다짐 식으로 협박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벌할 도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사도들을 징벌할 방도가 도무지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택한 것은 다시 위협하는 일뿐이었습니다.
'다시 위협하였다'(프로사페일레오)는 것은 '더욱더 위협하였다'는 의미인데, 공회의 일차경고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재차 가중한 위협을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공회가 이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누가가 밝힌 대로
'백성을 인하여'입니다.
이는 기적이 가져온 효과를 보여줍니다.
즉 사도들이 행한 표적을 목격한 군중들의 열기는 대단했으니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때문에 공회는 사도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과
백성의 반응 사이에서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고 환심(歡心)을 사기 위해 늘 애쓰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공회는 어쩔 수 없이 사도들을 다시 위협하여 석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하나님과 진리보다는 자기들의 교권 유지를 위해 대중을 더 무서워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누가는 고침받은 앉은뱅이의 연령을 '사십 세이상'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고침받은 자가 날 때부터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3:1)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앉은뱅이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도 못하다가 전혀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모든백성은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