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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두타행의 수행고리
(Dhutaṅganiddesa)
[두타행의 의미]
Ⅰ [두타행의 의의] 이제 [59] 그 탐욕의 여읨과 만족 등의 덕성으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행을 청정하게 하고 그 덕성을 성취하기 위해 계행을 수용한 수행자는 두타행을 성취해야 한다. 이와 같이 탐욕의 여읨, 만족을 앎, 버리고 없애는 삶, 멀리 여읨, 쌓아 모이지 않음, 용맹정진, 부양하기 쉬움 등의 공거수로 티끌이 씻어진 계행이야말로 지극히 청정해질 것이고, 그의 서원도 성취될 것이다. 이와 같은 허물이 없는 계행은 서원의 덕성으로 정화된 일체의 올바른 행위가 옛 스승들의 세 가지 고귀한 혈통413)에 확립되어 네 번째414)로 수행의 즐거움이라고 불리는 고귀한 혈통을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두타행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두타행의 종류와 판별]
2. Ⅱ [두타행의 종류와 판별] 세존께서는 세상의 자양을 버리고 몸과 목숨을 바쳐서라도 차제적 실천만을 닦고자하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에게 열세 가지 두타행의 수행고리415)를 허락했다. 곧, ① 분소의를
413) ariyavaṁsattaya : 한역에서 삼성종(三聖種)이라고 한다. 옷에 대한 만족(衣服知足 : civarasantuṭṭhi), 탁발음식에 대한 만족(食物知足 : piṇḍpātasantuṭṭhi), 처소에 대한 만족(住所知足 : senāsanasantuṭṭhi)을 말한다.
414) catuttha : 네 번째 고귀한 혈통을 뜻하며, 한역에서는 수습락(修習樂 : bhāvanārāmatā)이라고 한다.
415) terasa dhutaṅgāni : 한역에서는 13두타지(十三頭陀支)라고 한다.
입는 수행고리 ② 세벌 옷을 지니는 수행고리 ③ 탁발음식을 먹는 수행고리 ④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 ⑤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 ⑥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 ⑦ 제 시간 후에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 ⑧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⑨ 나무 아래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⑩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⑪ 시체를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⑫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 ⑬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416)가 있다.
3. 그것에 대해서는
“ ① 의미의 관점에서 ② 특징의 관점에서
③ 수행의 관점에서 ④ 규정의 관점에서
⑤ 구별의 관점에서 ⑥ 파괴의 관점에서
⑦ 각각의 공덕의 관점에서
⑧ 착하고 건전한 것 등의 삼개조의 관점에서
⑨ 두타행 등의 분별의 관점에서
⑩ 총괄적이나 개별적 관점에서,
그 판별을 알아야 한다.”418)
4. 1 [의미의 관점에서] 그 가운데 [60] ‘의미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416) seyyathidaṁ, paṁsukūlikaṅgaṁ tecīvarikaṅgaṁ, piṇḍapātikaṅgaṁ, sapadānacārikaṅgaṁ, ekāsanikaṅgaṁ, pattapiṇḍikaṅgaṁ, khaiupacchāttikaṅgaṁ, āraññikaṅgaṁ, rukkhamūlikaṅgaṁ, abbhokāsikaṅgaṁ, sosānikaṅgaṁ, yathāsanthatikaṅgaṁ, nesajjikaṅganti : 1. 분소의지(糞掃衣支 : paṁsukūlikaṅgaṁ) 2. 단삼의지(但三衣支 : tecīvarikaṅgaṁ), 3. 상걸식지(常乞食支 : piṇḍapātikaṅgaṁ), 4. 차제걸식지(次第乞食支 : sapadānacārikaṅgaṁ), 5. 일좌식지(一座食支 : ekāsanikaṅgaṁ, ) 6. 일발식지(一鉢食支 : pattapiṇḍikaṅgaṁ, ), 7. 식후불식지(時後不食支 : khaiupacchāttikaṅgaṁ,) 8. 아란야주지(阿蘭若住支 : āraññikaṅgaṁ ) 9. 수하주지(樹下住支 : rukkhamūlikaṅgaṁ ) 10. 노지주지(露地住支 : abbhokāsikaṅgaṁ ) 11. 총간주지(塚間住支 : sosānikaṅgaṁ ) 12. 수처주지(隨處住支 : yathāsanthatikaṅgaṁ ) 13. 상좌불와지(常座不臥支 : nesajjikaṅganti )
417) atthato lakkhaṇādīhi ǀ samādānavidhānato ǀ pabhedato bhedato ca ǀ tassa tassānisaṁsato ǁ
418) kusalattikato ceva ǀ dhutādīnaṁ vibhāgato ǀ samāsabyāsato cāpi ǀ viññātabbo vinicchayo ǁ
1) 길거리나 시체를 버리는 곳이나 쓰레기더미 등의 어떠한 장소이든지 흙먼지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각각의 장소의 흙먼지더미419)와 같다고 해서 분소의라고 한다. 혹은 흙먼지처럼 멸시받는 상태에 이른다고 또는 멸시받는 상태로 간다고 분소의라고 한다.420) 이와 같은 어원을 갖는 분소의를 입는 것이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이다. 그것에 습관이 된 자가 분소의를 입는 자이다. 분소의를 입는 자의 수행고리가 ‘분소의만을 입는 수행고리’이다. 수행고리라는 것은 원인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소의를 입는 자가 그것을 지닌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동일한 방식으로 대의 상의 하의라고 부르는 세벌 옷421)을 착용하는 습관이 있는 자가 세벌 옷을 입는 자이고 세벌 옷을 입는 자의 수행고리가 ‘세벌 옷을 입는 수행고리’이다.
5. 3) 그리고 ‘탁발음식’이라고 칭하는 자양덩이가 떨어진 것으로 발우에 받은 음식인데, 타인들이 보시한 음식덩이가 발우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422) 그 탁발음식을 각각의 집 근처에서 모이고 구하는 자가 탁발자이다. 혹은 음식을 위해 걷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자가 탁발자이
419) paṁsukūla : 분소의의 어원적 설명이다. 그러나 분소의(糞掃衣)라는 한역은 의역이 아니라 음역이다.
420) atha vā paṁsu viya kucchitabhāvaṁ ulatī’ti paṁsukūlaṁ, kucchitabhāvaṁ gacchatī’ti vuttaṁ hoti : 유사언어학적 해석이다.
421) ticīvara : 승단에서 개인의 소유를 허용한 삼의(三衣) 곧, 세벌 가사(袈裟)이다. ① saṅghāti : 한역음사는 승가리(僧伽梨)로 세벌 옷 가운데 가장 크므로 대의(大衣)라고 한다. 베 조각들을 거듭 이어서 만들므로 중의(重衣), 조(條)의 수가 가장 많으므로 잡쇄의(雜碎衣)라고 함. 직사각형의 베 조각들을 세로로 나란히 꿰맨 것을 1조(條)로하여, 9조 내지 25조를 가로로 나란히 꿰맨 것. 설법할 때, 걸식할러 갈 때, 왕궁에 갈 때 입는다.
② uttarāsaṅga : 한역음사는 울다리승(鬱多羅僧)으로 윗도리로 입기 때문에 상의(上衣)·상착의(上著衣)라고 하며, 세벌 옷 가운데 그 가치가 중간이므로 중가의(中價衣)라고 한다. 대중이 모인 의식 때 입으므로 입중의(入衆衣)라고 한다. 직사각형의 베 조각들을 세로로 나란히 꿰맨 것을 1조(條)로하여, 7조를 가로로 나란히 꿰맨 것, 의식을 행할 때 입는다.
③ antaravāsaka : 한역음사는 안타회(安陀會)로 하의(下衣)·내의(內衣) ·중숙의(中宿衣)라고 한다. 직사각형의 베 조각들을 세로로 나란히 꿰맨 것을 1조(條)로 하여, 5조를 가로로 나란히 꿰맨 것이라서 오조가사(五條袈裟)라고도 하는데, 작업하거나 잠잘 때나 길을 갈 때나 사원의 실내에서 입는다.
422) parehi dinnānaṁ piṇḍānaṁ patte nipatananti vu ttaṁ hoti : 유사언어학적 해석이다.
다423) 걷는다는 것은 다닌다는 것이고 걸식자야말로 탁발자이다. 탁발자의 수행고리가 ‘발우에 받은 음식을 먹는 수행고리’이다.
6. 4) 분할이라는 것은 단절인데, 분할은 떠난 것은 분할을 여읜 것으로 부단절이라는 뜻이다. 분할은 여읜 것과 상응하는 것이 차례대로424) ‘단절 없이 집집마다’라는 뜻이다. 차례대로 다니는 것이 습관인 자가 차례대로 걸식하는 자이고, 차례대로 걸식하는 자가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자이다. 그의 수행고리가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이다.
7. 5)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이 한 자리의 식사이다. 그것에 습관이 된 자가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자이다. 그의 수행고리가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이다. 6) 두 번째 그릇을 거절하는 까닭에 오직 한 발우 속의 음식이 발우음식이다. 지금 발우음식을 받을 때 발우음식이라고 지각하고 발우음식을 받는 것이 습관인 자가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자이다. 그의 수행고리가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이다.
8. 7) ‘제 시간’은 제한을 나타내는 부사이다. 먹은 다음에 [61] 음식을 얻을 때를 식후라고 하는데, 식후에 먹는 것을 후식이라고 한다. 그 식후에 먹는 것에서 후식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후식을 습관화한 사람을 식후에 먹는 자라고 한다. 식후에 먹지 않는 자는 제 시간 이후에는 먹지 않는 자이다.425) 이것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잔여의 음식을 거절하는 까닭에 그것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런데 《앗타까타》426)에서는 이와 같이 “‘제 시간’은 한 마리의 새이다. 그 새는 부리고 과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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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piṇḍāya vā patituṁ vatametassāti piṇḍapātī : 유사언어학적 해석이다.
424) saha apadānena sapadānaṁ : 차제(次第)의 어원학적 해석이다.
425) na pacchābhattiko khalupacchābhattiko : ‘제 시간 이후에 먹지 않는 수행고리’에 대한 설명이다.
426) Aṭṭhakatha : 한역에서는 의소(義疏)라고 한다. 스리랑카에 전해져왔던 고대 주석서를 말한다.
물고는 그것을 떨어지면 다시 다른 것을 먹지 않는다. 그도 그와 같다면, 제 시간 이후에 먹지 않는 자이다.”라고427) 설했다. 그의 수행고리가 ‘제 시간 이후에 먹지 않는 수행고리’이다.
9. 8)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것이 습관화된 자가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자이다. 그의 수행고리가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428)이다. 9) 나무 아래서 지내는 것이 습관화된 자가 나무 아래서 지내는 자이다. 나무 아래서 지내는 자의 수행고리가 ‘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고리’이다. 10) 노천에서 지내는 자와 11)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자의 수행고리도 동일한 방식이다.
10. 12) 주어진 처소인 것이 주어진 처소대로인 것인데, ‘이것을 그대가 얻는다.’라고 이와 같이 최초로 지정된 처소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한 주어진 처소대로 지내는 것이 습관화된 자가 처소대로 지내는 자이다. 그의 수행고리가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429)이다. 13) 눕는 것을 거부하고 앉아서 지내는 것이 습관화된 자가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자이다. 그의 수행고리는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이다.
11.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각각 수용의 관점에서 오염을 떨쳐버리는 까닭에 수행승이 두타행의 수행고리이다. 혹은 오염을 떨쳐버리는 까닭에 두타라는 이르을 얻었다는 것에 대한 앎이 이것들의 수행고리이므로 두타행의 수행고리이다. 혹은 그것들은 반대가 되는 것을 떨쳐버렸기 때문에 두타행이고 행도이기 때문에 두타행의 수행고리이다. 이와 같이 여기까지 의미로부터 판별을 식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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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khalūti eko sakuṇo. so mukhena phalaṁ gahetvā tasmiṁ patite puna aññaṁ nakhādati. tādiso ayanti khalupacchābhattiko’ti
428) āraññikaṅga : 한역에서는 아란야처(阿蘭若處)라고 하는데, 『해탈도론』에서는 무사처좌(無事處座)라고 되어 있다.
429) yathāsanthatikaṅga : 한역에서는 수처주지(隨處住支)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우득처(遇得處)이다.
12. 2. [특징의 관점에서] ‘특징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이들 모든 것들은 수용의 의지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앗타까타》에서는 이와 같이 “수용하는 자는 그 사람이다. 그것을 통해 수용하는 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의 원리들이다.”라고430) 설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은 일체의 탐욕을 분쇄하는 것을 기능으로, 무탐을 일으키는 것을 현상으로, 욕만의 여읨 등의 고귀한 원리를 토대로 삼는다. [62] 여기까지 의미로부터 판별을 식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3. 3~7. [수용·규정·구별·파괴·각각의 공덕의 관점에서] 수용·규정 등의 다섯 가지 관점이란 이와 같다. 일체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세존께서 살아계실 때는 세존로부터 직접 수용해야 한다. 완전히 열반에 드신 후에는 위대한 제자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번뇌를 부순님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돌아오지 않는 님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한번 돌아오는 님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흐름에 든님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삼장법사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이장법사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일장법사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일송출법사431)로부터, 그분도 안 계실 때는 탑묘의 주변을 청소한 뒤에 웅크리고 앉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부처님의 앞에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하고 나서 수용해야 한다. 또한 스스로도 물론 수용할 수 있다. 여기서 쩨띠야빱바따 산사에서 살던 두 형제장로 가운데 형이 두타행에서 탐욕의 여읨에 관한 이야기433)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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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yo samādiuayi, so puggalo. yena samādiyati, cittacetasikā ete dhammā. Yā samādān acetanā, taṁ dhutaṅgaṁ. yaṁ paṭikkhipati, taṁ vatthū’ti
431) ekasaṅgīika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일송출법사(一誦出法師)는 《디가니까야》를 비롯한 5부 《니까야》 가운데 하나를 송출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432) aṭṭhakathācariya : 의소법사(義疏法師), 삼장에 대한 주석인 《앗타까타》 곧, 의소(義疏)에 달통한 자를 뜻한다.
433) dhutaṅgappicchatāya vatthu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장로인 형은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를 닦으며 지내더라도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밤에 침상에서 그가 눕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번개가 칠 때 그 불빛으로 동생이 보고 ‘형은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자인가?’라고 물었다. 장로 형은 두타행에서 욕망을 여의었기 때문에 곧바로 누웠다가 후에 다시 새롭게 그 두타행을 수지했다.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공통적인 논의이다. 이제 하나하나의 수용·규정·구별·파괴·공덕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
14. [1]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 [수용]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는 곧 “나는 재가자가 주는 옷을 배척한다.” 또는 “나는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15. [규정] 이와 같이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수용한 자가 시체 버리는 곳에 있던 천 조각, 가게 앞에 버려진 천 조삭, 길거리에 놓은 천 조각, 쓰레기더미의 천 조각, 출산시 태아를 감쌌던 천 조각, 목욕시에 사용한 천 조각, 목욕나루의 천 조각, 다녀온 뒤에 버린 천 조각, 불타다 남은 천 조각, 소가 씹던 천 조각, 흰개미가 쓴 천 조각, 들쥐가 갉아 먹은 천 조각, 모퉁이가 떨어진 천 조각, 가장자리가 떨어진 천 조각, 방치된 깃발의 천 조각, 개미탑에 사용한 옷, 여행자에게 얻은 옷, 바람에 날려 온 옷, 천신이 선물한 옷, 바닷가에 버려진 옷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어떠한 천 조각을 취해서 헤진 약한 부분을 버리고 질긴 부분을 씻어서 옷을 만들어 예전의 재가자가 보시한 옷을 버리고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16. 그 가운데 ‘시체 버리는 곳에 있던 천 조각’이란 시체버리는 곳에 떨어져 있던 천 조각이다. ‘가게 앞에 버려진 천 조각’이란 가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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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 samaṇacīvara : 한역에서는 사문의(沙門衣)인데, 『해탈도론』에는 외도의(外道衣)라고 되어있다.
앞에 버려진 천 조각이다. ‘길거리에 놓인 천 조각’이란 공덕을 쌓으려는 자가 창문을 통해 길거리에 버린 천 조각이다. ‘쓰레기더미의 천조각’이란 쓰레기장에 [63] 버려진 천 조각이다. ‘출산시 태아를 감쌌던 천 조각’이란 태아의 티끌을 닦아내고 버린 천 조각이다. 대신 띳싸435)의 어머니는 백 냥의 가치가 있는 천으로 태아의 티끌을 닦아낸 뒤에 ‘분소의를 입는 자가 가져갈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딸라벨리막가436) 길에 버리게 했다. 수행승들은 낡은 부분을 수선하기 위해 가져갔다.
17. ‘목욕시에 사용한 천 조각’이란 귀신을 쫓는 자들이 환자를 머리와 함께 씻어내고 불길한 천 조각이라고 버리고 간 천 조각이다. ‘목욕 나루의 천 조각’이란 목욕나루터에 버려진 천 조각이다. ‘다녀온 뒤에 버린 천 조각’이란 시체 버리는 곳에 다녀온 뒤에 목욕하고 버린 천 조각이다. ‘불타다 남은 천조각’이란 불이 탄부분이 있는 천 조각이다. ‘소가 씹던 천 조각’등 이하는 분명하다. ‘방치된 깃발의 천 조각’이란 배를 타면서 깃발을 세우고 배에 올라타는데, 그것이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 취할 수 있는 깃발의 천 조각이나, 또한 전쟁터에 깃발을 꽂아 세워두는데, 양쪽의 군대가 물러나면, 취할 수 있는 깃발의 천 조각이다.
18. ‘개미탑에서 사용한 옷’이란 개미집을 둘러싸고 제사를 지낸 옷이다. ‘수행자가 지닌 옷’이란 수행승의 소유물이다. ‘관정시에 사용한 옷’이란 왕이 관정할 때 버린 옷이다. ‘신통으로 만들어진 옷’이란 ‘오라, 수행승이여!라고 부처님께서 준 옷이다. ’여행자에게 얻은 옷‘이란 여행 도중에 떨어져 있는 옷이다. 단, 소유주가 새김을 잃고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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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Tissa :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i) 왕의 대신이었다. 둣타가마니가 쌋다띳싸(Saddhātissa)에게서 도피할 때, 띳싸가 그를 도와서 도피기간 중에 자신의 음식을 제공했다. 그의 어머니의 출산시의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436) Tālaveḷimagga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스리랑카 동남부의 수도마하가마(Mahāgama)의 도로, 또는 아누라다뿌라 시의 도로라고 하는 자도 있다.
면, 잠시 보관하다가 취해야 한다. ‘바람에 날려 온 옷’이란 바람에 날려 멀리 떨어진 옷이다. 단, 소유주가 찾지 못했다면, 취할 수 있다. ‘천신이 선물한 옷’이란 장로 아누룻다437)에게 천신들이 선물한 옷이다.438) ‘바닷가에 버려진 옷’이란 바다의 파도에 밀려 육지에 올라온 옷이다.
19. 또한 ‘우리가 참모임에 보시한다’라고 주어진 것이나 천 조각을 탁발다니며 얻은 것은 분소의가 아니다. 수행승들에게 주어진 것일지라도 안거의 끝에 취하도록 보시되거나439) 특정한 처소에 보시된 옷440)은 분소의가 아니다. 그렇게 얻어지지 않고 보시된 것만이 분소의다. 그 가운데 보시자가 수행승의 발아래 놓은 것으로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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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Anuruddha :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하늘눈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dibbacakkhukānaṁ aggo)’이다. Ppn. I. 85에 따르면, 아누룻다는 부처님의 사촌으로 아미또다나(Amitodana)의 아들이자 마하나마의 형제였다. 부처님의 소식을 듣고 마하나마가 그에게 출가를 제안했으나 궁중의 화려한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제안을 받아들여 조카인 밧디야(Bhaddiya)와 함께 출가했다. 그들은 아난다, 바구(Bhagu), 낌빌라(Kimbila), 데바닷따, 그리고 우빨리와 함께 아누삐야(Anupira) 마을의 망고나무 숲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 뵙고 출가했다. 그는 출가하자마자 첫 번째 우기가 닥치기 전에 하늘눈[天眼]을 얻었다.
438) devadattiyanti anuruddhattherassa viya devatāhi dinnakaṁ : DhpA. Ⅱ. 173-175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라자가하 시의 벨루 숲에 계실 때, 장로 아누룻다와 관련된 이야기(Anuruddhattheravatthu)이다. 어느 날 장로 아누룻다(Anurudddha)는 옷이 낡아서 쓰레기더미 등지에서 옷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장로의 세 번째 전생의 한 부인이 잘리니(Jālinī)라는 여신으로 서른셋 하늘나라에 태어났다. 그녀는 장로가 옷을 찾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세 벌의 13완척 길이와 4완척 넓이 천상의 옷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장로가 찾는 쓰레기더미에 그것들을 집어넣고 가장자리만 보이도록 했다. 장로는 계속 옷감을 찾다가 그 천상의 옷감의 가장자리를 발견하고 잡아당겼다. 그는 그 천상의 옷감을 보고 ‘굉장한 쓰레기 더미군!’하고 감탄했다. 그가 옷을 만들자 부처님과 오백 명의 수행승들과 여든 명의 위대한 장로들이 승원에 와서 아루룻다의 옷-만들기를 도왔다. 여신 잘리니가 마을에 왔다가 부처님과 제자들과 위대한 장로들이 장로 아누룻다의 옷-만들기를 도와주고 있는 것을 알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수행승들을 위하여 ‘쌀죽과 다른 음식을 만들어 승원으로 가라.’라고 말했다. 식사 도중에 장로 마하 목갈라나가 큰 장미 사과를 가져왔는데 오백 명이 먹고도 남았다. 많은 갖가지 음식들이 수행승들이 먹고도 남았다.
439) vassaggena gāhetvā vā dīyati : 안거의 끝에 재가자가 옷을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남청1권125은 ‘최상랍자(最上臘者)에게 취해져서 [비구대장에게] 보시된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440) senāsanacīvara : 특정한 처소에 재가자가 지정하여 공급하는 옷을 말한다.
수행승이 분소의를 입는 수행승의 손에 놓아서 주면, 그것은 일방의 청정한 것이라고 한다. 수행승의 손에 놓아서 보시한 것으로 그러나 발아래 놓아두면, 그것도 일방으로 청정한 것이다. 수행승의 발아래 놓은 것을 그가 또한 동일하게 그렇게 주면, 그것은 [64] 양방으로 청정한 것이다. 손에 놓아져 얻어진 것이 또한 손에 놓이면, 그것은 엄격한 옷이 아니다. 이와 같이 분소의의 구별을 알고 분소의를 입는 자가 옷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규정이다.
20. [구별] 그런데 이것이 구별이다. 엄격한·중간적·느슨한 세 종류의 분소의를 입는 자가 있다. 그 가운데 시체를 버리는 곳의 천 조각만을 취하면, 엄격한 것이다. ‘출가자가 가져 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버린 것을 취하면, 중간적인 것이다. 발아래 놓아서 주어진 것을 취하면, 느슨한 것이다. [파괴] 이들 세 종류 가운데, 누구라도 자기의 기호에 따라 재가가가 보시한 것을 수용하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이와 관련된 파괴이다.
21. [공덕] 그리고 이것이 공덕이다. ① “출가는 분소의를 기초생활 수단으로 삼는다.”라는 441) 말씀으로부터 기초생활수단에 일치하는 행도가 현존하고, ② 첫 번째 고귀한 혈통442)을 확립하고, ③ 유지보존으로 인한 고통이 없고, ④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⑤ 도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⑥ 수용하는데 갈애가 없고, ⑦ 수행자에게 알맞은 필수자구를 사용하고 ⑧ “값나가지 않아 얻기 쉽고 또한 그것들은 허물이 없는 것이다.”라고443) 세존께서 찬탄하신 필수자구가 존재하고, ⑨ 청정한 믿음이 생기고, ⑩ 탐욕의 여읨 등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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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paṁsukūlacīvaraṁ nissāya pabbajjā : Vin. I. 59; 96.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四依 : cattāro nissayā) 가운데 하나이다.
442) paṭhama ariyavaṁsa : 세 가지 고귀한 혈통 곧, 옷에 대한 만족(衣腹知足 : civarasantuṭṭhi), 탁발음식에 대한 만족(食物知足 : piṇḍapātasantuṭṭhi), 처소에 대한 만족(住所知足 : senāsanasantuṭṭhi) 가운데 옷에 대한 만족(衣腹知足 : civarasantuṭṭhi)을 의미한다.
443) appāni ceva sulabhāni ca tāni ca anavajjāni’ti : AN. Ⅱ. 26
를 얻고, ⑪ 올바른 실천을 성숙시키고, ⑫ 미래세대에 모범이 되는 것이다.
22. 악마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해
분소의를 입는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빛난다.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처럼.444)
세상의 스승께서도
까씨의 옷 등의 값비싼 옷을 버리고
분소의를 입었거늘
누가 그것을 입지 못하랴!445)
그러므로 수행승이라면,
자신의 서원을 기억하면서
수행자에게 알맞은
분소의에 기뻐해야 한다.446)
이것이 곧,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 규정 구별 파괴공덕에 대한 해명이다.
[세벌 옷만 지니는 수행고리]
23. [2] [세벌 옷만 지니는 수행고리] [수용] 그 다음에는 세벌 옷만 지니는 수행고리는 “나는 네 번째 옷은 거절한다.” 또는 “세 벌 옷을 지니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다디 가운데 어떤 것이로 수용된 [65] 것이다. [규정] 그런데 세벌 옷만을 지니는 자가 옷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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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 mārasenavighātāya ǀ paṁsukūladharo yati ǀ sannaddhakavaco yuddhe ǀ khattiyo viya sobhati ǁ
445) pahāya kāsikādīni ǀ varavatthāni dhāritaṁ ǀ yaṁ lokagarunā ko taṁ ǀ paṁsukūlaṁ na dhāraya ǁ
446) tasmā hi attano bhikkhu ǀ paṭiññaṁ samanussaraṁ ǀ yogācārānukūlamhi ǀ paṁsukūle rato siyāti ǁ
얻고, 몸이 편찮아서 만들 수 없거나, 전문가를 얻지 못하든가, 바늘 등의 어떠한 것도 입수하지 못하면, 그 동안까지 방치할 수 있다. 방치했다고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염색이 된 시점부터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두타행의 원적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24.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염색할 때 먼저 내의나 상의를 염색하는데, 그 옷을 허리에 두르고 다른 옷을 염색해야 하고,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대의를 염색해야 한다. 그러나 대의를 허리에 둘러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가 마을 안에 처소에 있을 때의 의무이다. 그런데, 한적한 숲에서는 두 종류를 한 번에 씻고 물들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보면 가사를 끌어당겨 걸칠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앉아 있어야 한다. 중간인 자는 염색 방에 이른바 염색용 가사를 갖고 있다. 그것을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걸치고 염색일을 할 수 있다. 느슨한 자는 함께 사는 수행승의 옷을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걸치고 염색 일을 할 수 있다. 그곳에 있는 침상의 덮개도 그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가져가는 것은 불가하다. 함께 사는 수행승들의 옷도 때때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세벌 옷만을 지니는 두타행자는 어깨가사를 네 번째 옷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의 폭은 한 뻠,447) 길이는 세 완척448)이어야 한다. [파괴] 그러나 이들 세 가지 옷 가운데 네 번째 옷을 수용하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것과 관련된 파괴이다.
25. [공덕] 그런데 이것이 공덕이다. ① 세벌 옷만 지니는 수행승은 몸을 보호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그는 날개를 지닌 새처럼 그것을 지니고 간다.449) ② 세속적인 활동이 적고, ③ 옷을 보관하는 것이 필요 없고, ④ 간소한 삶을 살고, ⑤ 여분의 옷에 대한 탐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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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 vidatthi : 한 뼘(張手 : 23cm)가 1/2 완척(腕尺)이다.
448) hattha : 한 완척(腕尺)이 2 뼘 남짓(46-56cm)이다.
449) tenassa pakkhino viya samādāyeva gamanaṁ : MN. I. 180
버리고, ⑥ 허락된 것 가운데서도 적량을 유지하고, ⑦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고, ⑧ 욕망을 여의는 등의 결과를 성취한다.
36. 여분의 [66] 옷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현자로서 보관을 피하고
만족을 알고 안락의 맛을 아는
수행자는 세벌 옷만을 수용한다.450)
날개를 지니고 가는 새처럼
그래서 최상의 수행자는 옷을 지니니,
안락을 원하는 자는
옷의 절제에 기뻐해야 한다.451)
이것이 곧, 세벌 옷만을 지니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 공덕에 대한 해명이다.
[탁발음식만을 먹는 수행고리]
27. [3] [탁발음식만을 먹는 수행고리] [수용] 그 다음에는 탁발음식만을 먹는 수행고리는 “나는 여분으로 얻은 것을 배척한다.” 또는 “탁발음식만을 먹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탁발음식만을 먹는 자는 “승차식,452) 별청식,453) 초대식,454) 표찰식,455) 십오일식,456) 포살식,457) 월초일식,458) 도래자식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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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atirekavatthataṇhaṁ pahāya ǀ sannidhivivajjito dhiro ǀ santosasukharasannu ǀ ticivaradharo bhavati yagi ǁ
451) tasma sapattacarano ǀ pakkhiva sacivaro’va yogivaro ǀ sukhamanuvicaritukamo ǀ civaraniyame ratim kayira’ti ǁ
452) saṅghabhatta : 한역에서는 승차식(僧次食)이라고 한다. 재가자가 특정한 수행승을 지정하지 않고 참모임에 고루 차례에 따라 보시하는 음식을 말한다.
453) uddesabhatta : 한역에서는 별청식(別請食)이라고 한다. 재가자가 특정한 수행승을 지정하여 보시하는 음식이다.
454) njmantana : 한역에서는 청식(請食)이라고 한다. 초대받아 식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출발자식,460) 환자식,461) 간병자식,462) 정사식,4630 촌병식,464) 시분식465)”이라는 열네 가지 음식을 맛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만약 “승차식을 드십시오.”라는 등으로 말하지 않고, “저희 집에서 참모임이 식사를 드십니다. 당신께서도 식사를 드십시오.”라고 말해서 주어진 것이면, 그것을 먹을 수 있다. 참모임으로부터 표찰로 주어진 것이 음식이 아니거나466) 정사에서 요리된 음식은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그것의 규정이다.
28. [구별] 그런데 그것은 구별에 따라 세 가지이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앞에서나 뒤에서 가져온 음식을 취하고, 문밖에 서서 발우를 가져가는 자들에게 준다. 그는 또한 식사를 끝낸 곳에서 가져다 준 시식도 취한다. 그러나 그날에 앉아서 시식을 취하지 않는다. 중간인자는 그날 앉아서 취한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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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salākabhatta : 한역에서는 행주식(行籌食)이라고 한다. 산가지표찰로 받는 음식이다. 탁발음식이 모자랄 경우에 산가지표찰을 발행했다.
456) pakkhika : 한역의 십오일식(十五日食)을 말한다. 달이 차는 보름간과 달이 기우는 보름간에 하는 식사로 그 기간 중에 월초일식과 포살일을 빼고 어느 날을 정해서 할 수 있는 식사를 말한다.
457) uposathika : 한역의 포살식(包薩食)을 말한다. 각 보름기간의 마지막 날에 곧, 한달의 보름이나 그믐에 하는 식사로 재가신자에게는 단식일이지만 수행승들에게는 단식일이 아니고 의무계율을 송출하는 날이다.
458) pātipadika : 한역의 월초일식(月初日食)을 말한다. 한 달 기간의 첫째 날의 식사로 이때 한 달은 만월(滿月)에서 다음 만월까지 또는 한 신월(新月)에서 다음 신월까지의 기간 중에 초일(初日)을 말한다.
459) āgantukabhatta : 한역의 도래자식(到來者食)으로 오는 자에게 주는 음식을 말한다.
460) gamikabhatta : 한역의 출발자식(出發者食)으로 가는 자에게 주는 음식이다.
461) gilānabhatta : 한역의 병자식(病者食)으로 Vin. I. 142에 따르면, 안거시에조차 칠일 이내에 가능한 일이면, 환자의 간호가 허용되었다.
462) gilānupaṭṭhākabhatta : 한역의 간병자식(看病者食)으로 Vin. I. 303에서 환자를 돌보기에 적합한 다섯 가지 고리를 갖춘 간병인을 위한 음식이다.
463) vihārabhatta : 한역의 사식(寺食)으로 정사를 지정하여 보시하는 음식이다.
464) dhurabhatta : 한역의 촌변식(村邊食)으로 마을의 앞에 두어 보시하는 음식이다.
465) vārakabhatta : 한역의 시분식(時分食)으로 마을 사람들이 시절의 변화에 따라 보시하는 음식이다.
466) nirāmisasalākāpi : 표찰로 주어지는 것이 의약일 때를 말한다.
느슨한 자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시식을 허용한다. 그들 양자는 엄격한 자가 얻는 것처럼 홀로 지내는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마을에 고귀한 혈통에 대한 설법이 있었다. 엄격한 자가 다른 자들에게 말했다. “벗들이여, 가르침을 들으러 갑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존자여, 어떤 사람이 나를 초청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자는 “존자여, 저는 내일 한 사람에게 공양을 받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이들 두 사람은 포기했다. 다른 자는 실로 아침 일찍 탁발을 다니다가 가서 가르침의 맛을 경험했다. [67] [파괴] 이러한 세 사람이라도 승차식 등의 여분의 음식을 수용하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 경우의 파괴이다.
29. [공덕] 그런데 공덕은 이와 같다. ① “출가는 탁발음식만을 먹는 것을 기초생활수단으로 삼는다.”라는467) 말씀으로부터 기초생활수단에 일치하는 행도가 현존하고, ② 두 번째 고귀한 혈통468)을 확립하기, ③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④ “값나가지 않아 얻기 쉽고 또한 그것들은 허물이 없는 것이다.”라고469) 세존께서 찬탄하신 필수 자구가 존재하고, ⑤ 나태를 물리치고, ⑥ 청정한 생활을 유지하고, ⑦ 중학죄법을 준수하고, ⑧ 타인에 의해 연명하지 않고, ⑨ 타인을 도와 이롭게 하고, ⑩ 자만을 버리고, ⑪ 맛에 대한 갈애를 없애고, 별중(別衆)으로 식사하는 것470)과 연속적으로 식사하는 것471)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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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 piṇḍiyālopabhojanaṁ nissāya pabbajjā’ti : Vin. Ⅱ. 58, 59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四依 : cattāro nissayā) 가운데 하나이다.
468) paṭhama ariyavaṁsa : 세 가지 고귀한 혈통 곧, 옷에 대한 만족(衣腹知足 : civarasantuṭṭhi), 탁발음식에 대한 만족(食物知足 : piṇḍapātasantuṭṭhi), 처소에 대한 만족(住所知足 : senāsanasantuṭṭhi) 가운데 옷에 대한 만족(衣腹知足 : civarasantuṭṭhi)을 의미한다.
469) appāni ceva sulabhāni ca tāni ca anavajjāni’ti : AN. Ⅱ. 26
470) ganabhojana : 속죄죄법 제 32조(Pāc. 32; Vin. Ⅲ. 74)에 속한다. 별중(별중)으로 식사하는 것으란 네 명 이상의 수행승이 한 당파가 되어 행동하면, 참모임의 파괴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까티나옷을 만드는 경우에는 식후에 옷감의 보시가 있으므로 별중으로 식사에 초대받아도 좋다.
471) paramparabhojana : 속죄죄법 제 32조(Pāc. 33; Vin. Ⅲ. 77)에 속한다. 연속해서 식사하면, 속죄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루에 여러 번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고 있다.
대한 실천의 학습계율을 위반하지 않고, 탐욕의 여읨 등에 수순하는 삶을 살고, 올바른 실천을 성숙시키고, 미래세대에 대한 연민을 갖는 것이다.
30. 탁발음식 덩이에 만족하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사방으로 가는 자는
음식에 대한 탐욕을 끊는다.472)
나태한 삶을 제거하고
생활을 정화시킨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탁발행을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473)
이와 같이 설했기 때문이다.
“탁발하러 다니며 음식을 얻고474)
자신을 부양하되475) 타인을 부양하지 않고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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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승이 한 집에서 공양을 얻어먹고 거듭 다른 집에서 공양을 얻어먹으면, 앞서 고양을 베푼 사람이 자신의 공양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다른 집에서 공양을 받는 것이라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므로 하루에 거듭 식사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까티나옷이 만들어질 때는 여러번 먹는 것이 허용된다.
472) piṇḍiyālopasantuṭṭho ǀ aparāyattajīviko ǀ pahīnāhāraloluppa hoti cātuddiso yati ǁ
473) vinodayati kosajjaṁ ǀ ājīva’ssa visujjhati ǀ tasmā hi nātimaññeyya ǀ bhikkhācariyāya sumedhaso ǁ
474) piṇḍapātikassa bhikkhuno : Prd. Ⅰ. 201에 따르면, 탁발하는 것은 두타행(頭陀行)의 하나이다. 마하 깟싸빠의 탁발은 그가 두타행자임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탁발을 행할 때는 최상으로 욕심을 여의고 가정을 애민히 여기면서 다음과 같이 탁발해야 한다 : Dhp. 49 : ‘색깔과 향기를 지는 꽃을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 따서 나르듯, 성자는 마을에서 유행한다.(yathāpi bhamaro pupphaṁ ǀ vaṇṇagandhaṁ aheṭhayaṁ ǀ paḷeti rasamādāya ǀ evaṁ gāme munī care ǁ )’
475) attabharassa : Prd. Ⅰ. 201에 따르면, 자기 자신 혼자만을 네 가지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비난할 수 없는 것으로 부양하는 것을 뜻한다. AN. Ⅱ. 26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옷 중에는 넝마 옷이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남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음식 중에는 탁발음식 한 덩이가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남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칭찬과 칭송에 의존하지 않는다면,477)
신들은 그러한 수행승을 부러워한다.”478)
이것이 탁발음식을 먹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 규정 구별 파괴 공덕의 해석이다.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
31. [4]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는 “나는 탐욕스럽게 다니는 것을 배척한다.” 또는 “나는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다 기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자는 마을의 입구에 서서 위험이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 길거리나 마을에 위험이 있다면, 그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집문 앞에서나 길거리에서나 마을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마을이 아니라고 지각하고 떠나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얻는다면, 그곳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된다. 또한 그 수행승은 아침 일찍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이하면, 불편한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68] 수 있다. 만약 베푸는 사람이 정사에서나, 온 사람이 길거리에서나 그의 발우를 취해서 탁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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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소 가운데는 나무 아래가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남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의약품 가운데는 썩은 오줌이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남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 남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수행승들은 이러한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삶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476) anaññapasino : 자기 자신 이외에 부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을 말하며 부양하기 쉽다는 뜻이다.
477) no ce saddasilokanissito : Prd. I. 204에 따르면, 칭찬과 칭송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최상의 겸손함을 갖춘 것을 말한다. 칭찬은 상대가 있는 앞에서 말로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하고 칭송은 상대가 부재중에 칭찬하는 것이다.
478) piṇḍapātikassa bhikkhuno ǀ attabharassa anaññaposino ǀ devā pihayani tādino ǀ no ce saddasilokanissito’ti ǁ Ud. 31
음식을 준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또한 그 길을 가는 자는 탁발할 때 도착한 마을에서 건너뛰지 말고 걸어 다녀야 한다. 거기서 얻지 못하거나 조금 얻어도 마을을 차례대로 걸어 다녀야 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32.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앞에서 가져온 음식도 뒤에서 가져온 음식도, 돌아온 후에 가져와 주는 음식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 앞에서 발우를 건네준다, 이 두타행의 수행고리에서 마하 깟싸빠479) 장로와 같은 사람은 없다. 그가 발우를 건네주는 장소를 명심해야 한다. 중간인 자는 앞에서 가져온 음식도 뒤에서 가져온 음식도, 돌아온 후에 가져와 주는 음식도 취하고, 집 앞에서도 발우를 건네준다. 그러나 음식을 기다리며 앉아 있지는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이 엄격한 탁발행자를 따른다. 느슨한 자는 그날 앉아서 기다린다. [파괴] 이러한 세 사람도 탐욕스럽게 거님이 생기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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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Maha kassapa :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두타를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dhutavadanam aggo)’이다. Ppn. Ⅱ. 476에 따르면, 마하 깟싸빠는 부처님의 제가 가운데 가장 웃어른으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수행하는 두타설자(두타설자 : dhutavadin)로서 이름이 높았다. 한역에서 마하가섭(마하가섭)이라고 한다. 마가다 국의 마하띳타(Mahatittha) 마을에서 바라문 까삘라(kapila)와 어머니 쑤마나데비(Sumanadevi)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삡빨리(Pippali)라고 불렸다. 그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이 만족시키는 밧다 까삘라니(Bhadda kapilani)라는 처녀를 싸갈라(Sagala)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상대자라고 만인이 인정해야 한다.’는 편지를 서로 주고 받가가 편지를 들켜 빼앗겼다. 양가의 부모는 마침내 그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 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다. 삡빨리는 엄청 난 부자였다. 그는 60여 개의 호수를 소유했고, 일꾼들은 인근 40여 개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쟁기질하는 논에 갔다가 벌레가 새에 쪼여 먹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직감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동시에 아내 밧다도 까마귀들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후 깟싸빠(Kassapa)는 벨루바나(Velrvana)의 향실에서 부처님을 뵙고 먼저 제가가 되었고 밧다는 제따바나 숲(Jetavana) 근처의 띳티야라마(Titthiyārāma)에서 재가신도로 살다가 빠자빠띠 고따미(Pajāpatī Gotamī)의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33. [공덕] 이러한 것이 공덕이다. ① 가정480)에게 항상 새로워 달과 같고, ② 가정의 간탐을 끊어주고, ③ 평등한 연민을 일으키고, ④ 재가와 친근해지는 위험이 없고, ⑤ 초대에 환희하지 않고, ⑥ 식사의 제공을 바라지 않고, ⑦ 욕망을 여의는 것 등에 수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34. 달과 같이 가정에 항상 새롭고
간탐을 여의고 일체에 평등하게 연민하니
재가와 친근해지는 위험을 벗어났으니
세상에서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승이다.481)
그래서 탐욕스럽게 거님을 버리고
눈을 아래로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보고
지상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희구하며
현자라면 차례대로 탁발행을 해야 한다. 482)
이것이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 공덕의 해석이다.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
35. [5]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69]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는 “나는 여러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을 배척한다.” 또는 “나는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행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자는 식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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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 kula : 보시하는 단월가(檀越家)를 말한다.
481) candūpamdo niccanavo kulesu ǀ amaccharī sabbasamānukampo ǀ kulūpakādīnavavi ppamutto ǀ hotīdha bhikkhu sapadānacārī ǁ
482) loluppacārañca pahāua tasmā ǀ okkhittacakkhu yugamattadassī ǀ ākankhamāno bhuvi sericāraṁ ǀ careyya dhīro sapadānacāranti ǁ
자리에 앉을 때 장로의 자리에 앉지 말고, “나는 이 자리에 앉겠다.”라고 적당한 자리를 관찰한 후에 앉아야 한다. 만약에 식사가 끝나기 전에 궤범사나 친교사가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의무를 다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삼장법사인 쭐라 아바야483) 장로는 “자리를 지키거나 음식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지 않았을 자가 의무를 다할 수 있지만, 다시 식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484) 말했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36.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적거나 많거나 음식에 손을 댔을 때는 그 밖에 다른 것은 취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들이 “장로께서는 아무 것도 드시지 않았다.”라고 버터 등을 가져오면 약으로 먹을 수는 있지만, 음식으로는 먹을 수 없다. 중간인 자는 발우에 음식이 소진되지 않는 한, 다른 것을 취할 수 있다. 그는 음식에 의한 제한자라고 불린다. 느슨한 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한, 먹을 수 있다. 그는 발우 씻는 물을 얻지 못하는 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의한 제한자이다.485) [파괴] 이러한 세 사람도 여러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37. [공덕] 이러한 것이 공덕이다. 질병이 적고, 고뇌가 없고, 경쾌하고, 강건하고, 평안하고, 잔여의 음식을 취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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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 Cūla Abhaya : 스리랑카의 삼장법사로 Vism. 96/3 : 53에는 마하비하라 사원의 장로로 등장한다.
484) āsanaṁ vā rakkheyya bhojanaṁ vā, ayañca vippakatabhojano, tasmā vattaṁ karotu, bhojanaṁ pana mā bhuñjatū’ti : 이 말은 두타행의 수행고리가 파괴되지 않도록 자리를 보호하고, 식사가 끝나지 않았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거나, 또는 두타행의 수행고리가 파괴되지 않았다면, 궤범사나 친교사가 오면, 그 의무를 다할 수 있지만, 한번 일어선 후에는 다시 식사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485) bhojanapariyantika … udakapariyantika … āsanapariyantika : 『해탈도론』에서는 식변(食邊), 수변(水邊), 좌변(座邊)이라고 되어 있다.
허물이 없고,486) ⑦ 맛에 대한 갈애를 제거하고, ⑧ 욕망을 여의는 것 등에 수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38. 한 자리에서의 식사에 기뻐하는 행자
식사 때문에 질병이 그를 침범하지 못한다.
맛에 대한 탐욕을 여읜 자는
자신의 일을 져버리지 않는다.487)
이와 같이 평안한 삶의 원인으로서
버리고 없애는 맑은 삶에서 즐거움을 찾으니
청정한 정신으로 행자는
한 자리에서의 식사를 즐겨야 한다.488)
이것이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 ·공덕의 해석이다.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
39. [6]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하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는 [70] “나는 두 번째 그릇을 배척한다.” 또는 “나는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자는 쌀죽을 먹을 때, 그릇에 넣은 반찬을 얻는 경우, 반찬을 먼저 먹거나 쌀죽을 먼저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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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 anatirittapaccaya anapatti : 잔여식(殘餘食)을 다시 먹지 않는 조건으로 무죄라는 뜻이다. 제 시간 이후에 먹지 않는 수행고리를 참조하라. 잔여의 음식을 다시 먹는 죄에 대해서는 속죄죄법 제35조(Pac. 35; Vin. Ⅳ. 82)를 참조하라. 한 자리에서 음식을 취하는 자(一座食)는 여러 자리에서 음식을 취하는 일(多座食)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잔여식(非殘餘食)을 재식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487) ekāsanabhojane rataṁ, ǀ na yatiṁ bhojanapaccayā rujā ǀ visahanti rase aloupo ǀ parihāpeti na kammamattano ǁ
488) iti phāsuvihārakāreṇe ǀ sucisallekharatūpasevite ǀ janayetha visuddhamānaso ǀ ratimekāsanabhojane yatī’ti ǁ
만약 쌀죽에 반찬을 넣으면, 부패한 물고기 등의 반찬이 떨어지면, 쌀죽이 혐오스러워진다. 혐오스럽지 않게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이 반찬에 관해서 설한 것이다. 그런데 꿀이나 사탕 등의 혐오스럽지 않은 것은 넣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발우에만 넣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그릇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나뭇잎조차도 불가하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40.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사탕수수대를 씹을 때를 제외하고 찌꺼기라도 버릴 수 없다. 밥덩이, 물고기, 육고기, 과자도 분리해서 삼켜서는 안 된다. 중간인 자는 한 손으로 분리하여 먹을 수 있다. 그는 손-수행자489)라고 한다. 그런데 느슨한 자는 발우 가운데 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손이나 이빨로 분리하여 먹을 수 있어, 발우-수행자라고 한다. [파괴] 이러한 세 사람도 두 번째 그릇을 수용하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41. [공덕] 이러한 것이 공덕이다. ① 여러 가지 맛에 대한 갈애를 제거하고, ② 여분의 욕망을 포기하게 하고, ③ 음식의 유용한 적량을 알고, ④ 작은 그릇 등을 소지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⑤ 산만하게 식사하는 일이 없고, ⑥ 욕망을 여의는 것 등에 수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42. 여러 그릇으로 인한 산만을 버리고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잘 서계(誓戒)를 지키는 님은
맛의 갈애의 뿌리를 파낸 자와 같다.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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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 hatthayogin : 핫타요가 수행자와 철자가 같으나, 여기서는 손을 사용하는 수행자라는 뜻이다.
490) nānābhājanavikkhepaṁ, ǀ hitvā okkhittalocano, ǀ khaṇanto viya mūlāni ǀ rasataṇhāya subbato ǁ
만족을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
마음에 희열을 지니고
하나의 발우로 먹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누가 음식을 먹겠는가?491)
이것이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공덕의 해석이다.
[제 시간 이후에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
43. [7] [제 시간 이후에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제 시간 이후에 [71]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는 “나는 남은 음식을 배척한다.” 또는 “나는 제 시간 이후에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다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도니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제 시간 이후에 식사하지 않는 자는 식사를 끝낸 후에 다시 음식을 준비하게 해서 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44.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첫 번째 음식덩이에 대하여 충분한 것이 없더라도 삼켜질 때 다른 것을 배척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충족하여 첫 번째 음식덩이를 키는 것으로 끝내고, 두 번째 음식덩이는 먹지 않는다. 중간인 자는 음식이 충족하여 끝내고도 그것을 먹는다. [파괴] 그런데 이러한 세 사람도 충족하여 끝내고도 준비하게 하여 식사하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것데 대한 파괴이다.
45. [공덕] 그런데 이러한 공덕이 있다. ① 여분의 음식을 남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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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sarūpaṁ viya santuṭṭhiṁ ǀ dhārayanto sumānaso ǀ paribhuñjeyya āhāraṁ ǀ ko añño pattapiṇḍikoti ǁ
잘못을 여의고, ② 과식을 하지 않고, ③ 음식을 보관하지 않고, ④ 다시 찾는 것이 없고, ⑤ 욕망을 여의는 것 등에 수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46. 구하는데 낙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자는 저장하지 않는다.
제 시간 이후에 먹지 않는
수행자는 실로 과실을 피한다.492)
그러므로 허물을 벗어버리고자 하면
수행자는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 찬탄하는
만족의 덕성 등을 성숙시키는
이러한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섬겨야 한다.”493)
이것이 제 시간 이후에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공덕의 해석이다.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47. [8]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는 “나는 마을의 처소를 배척한다.” 또는 “나는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다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자는 마을의 처소를 버리고 한적한 숲에서 일출을 맞이해야 한다.
48. 그 가운데 마을의 처소는 마을자체 뿐만 아니라 그 인근이다. 마르은 어떠한 마을이든지 한 채의 집으로 이루어졌거나, 여러 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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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 pariyesanāya khedaṁ ǀ na yāti na karoti sannidhiṁ dhīro ǀ orarikattaṁ pajahati ǀ khalupacchābhattiko yogī ǁ
493) tasmā sugatapasatthaṁ ǀ santosaguṇādivuḍḍhisañjananaṁ. ǀ dose vidhunitukāmo ǀ bhajeyya yogī dhutaṅgamidanti ǁ
집으로 이루어졌거나, 담을 둘렀거나, 담을 두르지 않았거나, 사람이 살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거나, 적어도 어떠한 [72] 카라반이든지 넉 달 이상 체류한 곳이다. 마을 부근이란 만약에 아누라다뿌라처럼 두 개의 경계표가 있다면, 그 경계표의 사이에 서서 보통의 힘을 지닌 사람이 돌을 던졌을 때 떨어진 곳까지이다.494) 율사들은 그 범위는 젊은이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팔을 펴서 돌을 던지면, 던져진 돌이 떨어진 장소의 안쪽이라고 말한다. 경사(經師)들은 까마귀를 쫒아버리기 위해 던져진 돌이 떨어진 장소의 안쪽이라고 말한다. 담으로 둘러싸이지 않은 마을에서는 가장 변방의 집 문 앞에서 서서 여인이 그릇의 물을 던져서 그것이 떨어지는 곳이 집의 부근이다. 그곳에서 앞서 말한 방식으로 한번 돌이 떨어진 곳의 안쪽이 마을이고, 두 번째가 마을의 부근이다.
49. 그런데 율장의 법문에 따르면 한적한 숲은 “마을과 마을의 부근을 제외하고 모든 곳이 한적한 숲이다.”라고495) 언급되어 있다. 논장의 법문에 따르면, “경계표 밖으로 나가면 모든 곳이 한적한 숲이다.”라고496)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경장의 법문에 따르면, “한적한 숲의 처소는 오백궁497) 떨어진 곳이다.”라는498)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표준궁499)으로, 담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경우 경계표에서, 담으로 둘러싸이지 않은 마을의 경우 최초의 돌이 떨어지는 곳에서, 정사를 둘러싼 담까지 측정하여 한계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50. 그러나 만약에 정사가 담으로 둘러싸이지 않았다면, 가장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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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 abbhantarime indakhīle ṭhitassa thāmamajjhimassa purisassa leḍḍupāto : Vin. Ⅲ. 46
495) ṭhapetvā gāmañca gāmūpacārañca sabbametaṁ araññan’ti : Vin. Ⅲ. 46
496) nikkhamitvā bati indakhīlā sabbametaṁ araññan’ti : Vibh. 251
497) pañcadhanusatikaṁ : 1궁(弓)[길이의 단위 일궁(一弓 : dhanu) = 일심(一尋 : vyāma) =사주(四肘 : hattha; ratana) = 약 1.8m이므로 오백궁은 900m정도이다.
498) āraññakaṁ nāma senāsanaṁ pañcadhanusatikaṁ pacchiman’ti : Smp. 301
499) ācariyadhanu : 원래 사범궁(師範弓)이라는 말인데, 표준이 되는 활을 말하는 것이므로 역자는 표준궁이라고 번역한다. 곧, 일궁(一弓 : dhanu) = 1.8m를 말한다.
에 있는 처소나 식당이나 상설집회당이나 보리수나 탑묘나 비록 처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것을 경계로 삼아 측정해야 한다고 율장의 《앗타까타》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의 《앗타까타》에는 “정사에도 마을에서처럼 부근을 공제하고 양자 모두 돌이 떨어진 안쪽으로 측정해야 한다.”라고500) 언급되어 있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범위이다.
51. 만약에 가까이에 마을이 있어, 정사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더라도, 산이나 강 등으로 차단되어 곧바로 갈 수가 없는 경우나, 그곳에 자연적인 길이 있거나, 배로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오백궁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가까운 마을에서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성취하기 위해 여기저기 길을 폐쇄하는 자는 두타행을 훔치는 도둑이다.
52. 그런데 만약에 한적한 숲속에 사는 수행승이 친교사나 궤범사가 병이 들어, 한적한 숲에서 적당한 것을 얻지 못하면, 마을의 처소로 모셔서 [73] 간호해야 한다. 그런데 아침 일찍 나와서 두타행의 수행고리에 알맞은 곳에서 여명을 맞이해야 한다. 만약에 여명의 시간에 그들의 질병이 심해지면, 그들을 위해 조치를 취해야한다. 두타행의 수행고리의 청정에 개의치 않아도 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53.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언제나 숲속에서 여명을 맞이해야 한다. 중간인 자는 우기의 4개월간 마을에서 살 수 있다. 느슨한 자는 겨울에도 마을에서 살 수 있다. [파괴] 이러한 세 사람이 한정된 기간에 한적한 숲속을 나와서 마을의 처소에서 법문을 들을 때 여명이 밝아오더라도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부수는 것은 아니다. 듣고 나서 돌아오는 도중에 여명이 밝아오더라도 그것을 부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에 설법사가 일어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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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vihārassapi gāmasseva upacāraṁ nīharitvā ubhinnaṁ leḍḍdupātānaṁ antarā minitabban’ti : MA. Ⅱ. 217
에도 ‘우리는 잠시 누웠다가 가리라.’라고 생각했는데, 잠이 들어서 여명을 맞거나 자신이 좋을 대로 마을의 처소에서 여명을 맞는다면,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부수는 것이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54. [공덕] 그런데 이러한 공덕이 있다. ① 한적한 숲속에 사는 수행승은 한적한 숲에 대한 지각에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얻지 못한 삼매를 얻을 수 있고, 이미 얻은 삼매를 수호할 수 있다.501)
여분의 음식을 남기는 잘못을 여의고, 스승께서는 또한 ‘그래서 나기따여, 수행승이 한적한 숲속에 사는 것을 기뻐한다.’라고502) 흡족해 하셨다. 그리고 ② 멀리 떨어진 처소에서 살면, 부적절한 형상 등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고, ③ 공포를 떠나고, ④ 목숨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⑤ 멀리 여읨의 안락을 맛보고, ⑥ 분소의를 입는 것 등과도 어울리게 된다.
55. 멀리 여의어 속박이 없고
멀리 떠난 처소를 즐기니,
숲속에 삶으로
수호자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503)
홀로 한적한 숲에 살면서
수행자가 안락을 얻으니,
제석천을 포함한 천신들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504)
분소의를 착용하니
갑옷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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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 āraññiko bhikkhu araññasaññaṁ manasikaronto bhabbo aladdhaṁ vā samādhiṁ paṭiladdhuṁ laddhaṁ vā rakkhituṁ : MN. 121 참조
502) tenāhaṁ nāgita tassa bhikkhuno attamano homi araññavihārenā’ti : AN.Ⅲ.343
503) pavivitto asaṁsaṭṭho pantasenāsane rato ǀ ārādhayanto nāthassa ǀ vanavāsena mānasaṁ ǁ
504) eko araññe nivasaṁ ǀ yaṁ sukhaṁ labhate yati ǀ rasaṁ tassa na vindanti ǀ apidevā sa-indakā ǁ
한적한 숲의 전장에 나간 것과 같다.
여분의 두타행으로도 무장했다.505)
악마와 그의 군대를
머지않아 함께 정복할 수 있으니
슬기로운 자라면
한적한 숲속의 삶을 기뻐해야 한다.”506)
이것이 한가한 숲속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공덕의 해석이다.
[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고리]
56. [9] [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74] 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고리는 “나는 지붕 아래를 배척한다.” 그 두 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그 나무 아래서 지내는 자는 경계 근처의 나무, 탑묘의 나무, 정사의 중앙에 서 있는 나무와 같은 이러한 나무를 피하고 정사의 변방에 서 있는 나무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57.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마음에 든 나무를 선택해서 돌보도록 허락하지 않고 발로 낙엽을 치우고 지낸다. 중간인 자는 그 장소에 마침 와 있는 사람들에게 돌보도록 허락한다. 느슨한 자는 정인(淨人)507)이나 사미(沙彌)508)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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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 paṁsukūlañca esova ǀ kavacaṁ viya dharayaṁ ǀ arannasangamagato ǀ avasesadhutayudho ǁ
506) samattho nacirasseva ǀ jetuṁ māraṁ savāhiniṁ ǀ tasmā araññavāsanhi ǀ ratiṁ kayirātha paṇḍito’ti ǁ
507) ārāmuka : 사남(寺男)이라고도 한다. 출가하지 않고 절에서 잡무(雜務)를 보는 사람을 말한다.
불러서 청소하게 하고 평탄하게 하고 모래를 뿌리고 담을 둘러싸고 문을 만들고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나무 아래서 지내는 자는 특별한 날509)에는 그곳에 앉지 않고 달리 지붕 아래에 앉을 수 있다. [파괴]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이라도 지붕 아래서 지내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부수어진다. “고의로 지붕 아래서 여명을 맞자마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부수어진다.”라고 《앙굿따라니까야》의 송출자는 설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58. [공덕] 그런데 이러한 공덕이 있다. ① “출가는 나무 아래서 처소를 기초생활수단으로 삼는다.”라는510) 말씀으로부터 기초생활수단에 일치하는 행도가 현존하고, ② “값나가지 않아 얻기 쉽고 또한 그것들은 허물이 없는 것이다.”라고511) 세존께서 찬탄하신 필수자구가 존재하고, ③ 자주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의 지각을 일으키고, ④ 처소에 대한 간탐과 건축의 즐길512)이 없고, ⑤ 천신들과 함께 살고, ⑥ 탐욕의 여읨등에 수순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59. 최승자이신 부처님꼐서 찬탄하셨으니
기초생활수단이라고 설한 것이다.
멀리 여읜 자의 처소로
나무 아래와 같은 곳이 있을까?513)
멀리 여읜 나무 아래 지내며
잘 서계를 지키는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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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 samanuddesa : ‘수행승의 후보자’로서 사미(사미 : sāmaṇera)와 동의어이다.
509) mahādivasa : 포살일(布薩日) 등의 특별한 날을 말한다.
510) rukkhamūlasenāsanaṁ nissāya pabbajjā’ti : Vin. I. 58, 59.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四依 : cattāro nissayā) 가운데 하나이다.
511) appāni ceva salabhāni ca tāni ca anavajjāni’ti : AN. Ⅱ. 26
512) kammārāmatā: 보청(普請 : navakammārāmatā; 건축을 위해 널리 시주를 청하는 것을 즐김을 말한다.
513) vaṇṇito buddhaseṭṭhena ǀ nissayoti ca bhāsito ǀ nivaso pavivittassa ǀ rukkhamūlasamo kuto ǁ
거처에 대한 간탐이 제거되니,
천신들이 보호하리라.514)
붉은 색, [75] 그리고 녹색,
그리고 황색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사귀들을 보면서
영원의 지각을 제거시킨다.515)
그러므로 부처님의 유상인
수행을 즐기는 자의 주처인
멀리 떨어진 나무 아래를
눈 있는 자,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516)
이것이 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 공덕의 해석이다.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60. [10]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는 “나는 지붕 아래와 나무 아래를 배척한다.” 또는 “나는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그는 법문을 듣거나 포살을 위해 포살당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들어간 후에 비가 오면, 비오는 동안에는 나가지 않고 비가 그치면 나가도 된다. 식당이나 화실(화실)에 들어가서, 임무를 다하는 것, 식당에서 장로 수행승들이게 음식을 여쭈는 것, 교수하거나 학습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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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āvāsamavvherahare ǀ devatā paripālite ǀ pavivitte vasanto hi ǀ rukkhamūlamhi subbato ǁ
515) abhirattāni nīlāni ǀ paṇḍūni patitāni ca ǀ passanto tarupaṇṇāni ǀ niccasaññaṁ panūdati ǁ
516) tasmā hi buddhadāyajjaṁ ǀ bhāvanābhiratālayaṁ ǀ vivittaṁ nātimaññeyya ǀ rukkhamūlaṁ vicakkhaṇo’ti ǁ
때 지붕 아래로 들어가는 것, 밖에 여기저기 놓인 침상과 의자 등을 안에 들여다 놓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에 길을 가면서 연장자의 필수자구를 가지고 가는데, 비가 내리면 길가에 있는 휴게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만약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것이 없으면, ‘휴게당으로 들어가겠다.’라고 성급히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연스런 걸음걸이로 들어가서 비가 그칠 때까지 있다가 갈 수 있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자에게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
61.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나무나 산이나 집의 근처에서 지내서는 안 된다. 노천에서만 가건물을 치고 지낼 수 있다. 중간인 자는 나무나 산이나 집의 근처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낼 수 있다. 느슨한 자는 은폐되지 않은 장사면이나 나뭇가지로 만든 움막이나 풀 먹인 천으로 만든 움막이나 밭지기 등이 버린 곳에 서 있던 움막도 가능하다. [파괴] 그런데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도 체류하기 위해 지붕 아래나 나무 아래로 들어가는 찰나에 [76] 두타행은 파괴된다. 고의로 그곳에서 여명을 맞는 찰나에 두타행은 파괴된다라고 앙굿따라니까야의 송출자들은 말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62. [공덕] 그런데 이러한 공덕이 있다. 거처에 대한 장애가 끊어지고, 해태와 혼침이 제거되고, ‘수행승들은 사슴처럼 집착을 여의고 집 없이 지낸다.’517)라고 칭찬에 어울리고, 집착이 없고, 사방으로 다니고, 탐욕의 여읨 등에 수순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63. 집없는 자에게 어울리고
얻기 어려운 것 아니다.
하늘에는 별들의 보석이 펼쳐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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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migā viya asaṅgacārino, aniketā viharanti bhikkhavo’ti : SN. I. 199
달빛이 비추어 빛나니.518)
노천에 지내는 수행승은
사슴 같은 마음으로
해태와 혼침을 몰아내니
수행락을 누리며 앉는다.519)
머지 않아 그는 발견하리
멀리 여읨의 쾌미를!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라면,
노천에서 지냄을 기뻐해야 하리라.520)
이것이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공덕의 해석이다.
61. [11]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는 ‘나는 시체 버리는 곳이 아닌 곳은 배척한다. 나는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 라고 그 두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그런데 그 시체 버리는 고셍서 지내는 자는 사람들이 마을을 세우고 ‘이곳이 시체 버리는 곳이다.’라고 선언하더라도 그곳에 살아서는 안 된다. 죽은 시체가 화장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체 버리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최초로 화장이 이루어진 후에 십이년 동안 방치되었더라도, 그것은 시체 버리는 곳이라고 불린다.
65. 그런데 그곳에 지내는 자가 경행대와 가건물 등을 설치하고 침상과 의자를 마련하고 음용수와 용수를 준비하고 가름침을 설하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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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anagāriyabhāvassa ǀ anurūpe adullabhe ǀ tārāmaṇivitānamhi ǀ candadīpappabhāsite ǁ
519) abbhokāse vasaṁ bhikkhu ǀ migabhūtena cetasā ǀ thinamiddhaṁ vinodetvā ǀ bhāvanārāmataṁ sito ǁ
520) pavivekarasassādaṁ ǀ nacirasseva vindati ǀ yasmā tasmā hi sappañño ǀ abbhokāsarato siyā’ti ǁ
지내서는 안 된다. 이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험이 생겨나면 제거하기 위해서 참모임의 장로에게나 왕의 일꾼에게 알리고, 불방일하게 지내야 한다. 경행할 때는 눈을 반쯤 뜨고 화장터를 쳐다보면서 [77] 걸어야 한다. 시체 버려진 곳을 걸을 때도 큰 길을 버리고 작은 길로 가야 한다. 시체 버리는 곳을 걸을 때도 큰 길을 버리고 작은 길로 가야 한다. 낮 동안에 지정학적 대상을 확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밤에 공포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비인521)들이 밤중에 거듭해서 울부짖으며 돌아다니더라도, 아무 것도 던져서는 안 된다. 하루라도 시체 버리는 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밤의 중야를 시체 버리는 곳에서 보내고 밤의 후야에 떠날 수 있다면 《앙굿따라니까》의 송추자들은 말한다. 비인들이 좋아하는 참깨가루, 콩밥, 물고기, 육고기, 우유, 기름, 사탕 등의 단단하거나 부드러운 음식이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 재가 신자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66.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항상 불태워지고 항상 시체가 버려지고 항상 곡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지내야 한다. 중간인 자는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느슨한 자는 앞서 말한 방식대로 시체 버리는 곳의 특징을 충족시키는 곳에서 지내면 된다. [파괴] 그런데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도 시체 버리는 곳이 아닌 곳에서 체류하는 찰나에 두타행은 파괴된다. 시체 버리는 곳에 가지 않는 날에 두타행은 파괴된다라고 《앙굿따라니까야》의 송출자들은 말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67. [공덕] 그런데 이러한 공덕이 있다. ① 죽음에 대한 새김을 얻고, ② 불방일하게 지내고, ③ 부정(不淨)의 인상을 얻고, ④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제거하고, ⑤ 자주 신체의 현존을 보고, ⑥ 외경이 지극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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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amanussa : 비인(非人)에는 천신·야차·나찰·다나바·건달바·긴나라· 마호라가(deva·rakkhasa·dānava·kinnara·mahoraga) 등이 있다. 다나바에 대해서는 Vism. 366/11 : 97을 참조하라.
⑦ 건강의 도취 등522)을 버리고, ⑧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⑨ 비인들로부터 존중받고, ⑩ 탐욕의 여읨 등에 수순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68.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자는
실로 죽음에 대한 새김을 얻으니,
잠에 떨어지더라도
방일의 허물이 그를 접촉하지 못한다.
그는 많은 시체를 보기 때문에
마음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523)
크나큰 외경에 도달하여
도취에 다가가지 않고
또한 적정(寂靜)을 구하면서
올바로 노력한다.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는
많은 덕성을 가져오므로
열반으로 향하는
마음을 지닌 자라면 섬겨야 한다.524)
이것이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 파괴·공덕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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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ārogyamadādi : AN. I. 138에 따르면, 부처님은 인간의 늙음, 질병, 죽음을 무상한 세계에서 선행을 일깨우는 세 명의 천사라고 보고 있따. 부처님은 보살이었을 때 그 세명의 천사 때문에 부처님의 청년시절의 유복한 삶이었던 젊음의 도취, 건강의 도취, 생명의 도취가 모두 사라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523) sosānikañhi maraṇānusatippabhāvā ǀ niddāgatampi na phusanti pamādadosā ǀ sampassato ca kuṇapāni bahūni tassa ǀ kāmānubhānvavasagampi na hoti cittaṁ ǁ
524) saṁvegameti vipulaṁ na madaṁ upeti ǀ sammā atho ghaṭati nibbutimesamāno ǀ sosānikaṅgamitinekaguṇavahattā ǀ nibbānaninnahadayena nisevitabban’ti ǁ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
69. [12]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78]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는 “나는 처소에 대한 탐욕을 배척한다.” 또는 “나는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디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자는 “이것이 그대에게 배정된 것이요.”라고 수취한 처소가 어떠한 곳이든지 만족해야 하고, 다른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70. [구별] 그런데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자신이 얻은 처소에 대하여 ‘먼 곳인가?’라든가 ‘너무 가까운 곳인가?’라든가 ‘비인이나 뱀 등으로 성가신 곳인가?’라든가 ‘더운 곳인가?’라든가 ‘추운 곳인가?’라든가 물어서는 안 된다. 중간인자는 물을 수 있으나 가서 살펴볼 수는 없다. 느슨한 자는 가서 살펴보고 그것이 이러한 세 사람도 처소에 대한 탐욕이 일어나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71. [공덕] 그런데 이러한 공덕이 있다. “얻은 것에 만족해야 한다.”라고525) 설한 교계를 준수하고, 동료수행자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저열하고 수승한 곳에 대한 분별을 버리고, 만족과 혐오를 여의고, 지나친 욕심의 문을 닫고, 탐욕의 여읨 등에 수순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72. 얻은 것에 만족하고
처소대로 지내는 수행자는
차별 없이 안락하게
풀이 깔려도 눕는다.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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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yaṁ laddhaṁ tena tuṭṭhabban’ti : Vin. Ⅳ. 259; Jāt. I. 476
526) yaṁ laddhaṁ tena santuṭṭho ǀ yathāsanthatiko yati ǀ nibbikappo sukhaṁ seti ǀ tiṇasantharakesupi ǁ
수승한 곳에 염착하지 않고,
열등한 곳을 얻어도 화내지 않는다.
신참동료수행자의
안녕과 더불어 연민한다.527)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고귀한 자들이 언제나 실천했고
성자이신 목우왕528)께서 찬탄한
처소대로 지내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529)
이것이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 ·공덕의 해석이다.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
73. [13]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 [수용] 그리고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는 “나는 누워 지내는 것을 배척한다.” 또는 “나는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를 수용한다.”라는 그 두 말마다 가운데 어떤 것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수용이다. [규정]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자는 밤의 삼야 가운데 일야는 일어나 경행을 할 수 있다. 네 가지 행동양식 가운데 눕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규정이다.
74. [구별] 그런데 [79] 구별에 따라 이것도 세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엄격한 자는 기댈 수 있는 받침, 웅크리고 앉는데 쓰는 천, 묶은 천을 사용할 수 없다. 중간인 자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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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 na so rajjati seṭṭhamhi hinaṁ laddhā na kuppati sabrahmacārinavake hitenaanukampati
528) Munipuṅga
529) tasmā ariyasatāciṇṇaṁ munipuṅgavavaṇṇitaṁ anuyuñjetha medhāvi yathāsanthatarāmatan’ti
사용할 수 있다. 느슨한 자는 기댈 수 있는 받침, 웅크리고 있는데 쓰는 천, 묶는 천, 배게, 오지의자(五支倚子)와 칠지의자(七支倚子)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오지의자란 등을 기댈 수 있는 받침이 달린 의자이고, 칠지의자란 등을 기댈 수 있는 받침과 양팔을 기댈 수 있는 받침이 달린 의자이다. 그것은 삐타 아바야530) 장로를 위해서 사람들이 만들었는데, 장로는 돌아오지 않는 님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파괴] 그러나 이러한 세 사람도 눕는 찰나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파괴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파괴이다.
75. [공덕] 그런데 이러한 공덕이 있다. ① “잠자는 것을 즐기고 빈둥대는 것을 즐기고 졸리는 것을 즐긴다.”라고531) 설한 마음의 속박을 끊고, ② 일체의 명상주제에 전념할 수 있고, ③ 위의 자세에 신뢰가 가고, ④ 용맹정진에 알맞게 되고, ⑤ 올바른 행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76. 가부좌를 틀고
윗몸을 바르게 하고
앉는 수행자는
악마의 심장을 뒤흔든다.532)
횡와와 수면의 낙을 버리고
용맹정진하며
앉는 것을 기뻐하는 수행승은
고행의 숲을 밝힌다.533)
자양 없는 희열과 행복
그것에 도달하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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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Pīṭha Abhaya : 『청정도론』의 이곳에만 등장하는 장로의 이름이다.
531) seyyasukhaṁ passasukhaṁ middhasukhaṁ anuyutto viharatī’ti : MN. I. 102
532) ābhujitvāna pallaṅkaṁ ǀ paṇidhāya ujuṁ tanuṁ ǀ nisīdanto vikampeti ǀ mārassa hadayaṁ yati ǁ
533) seyyasukhaṁ middhasukhaṁ ǀ hitvā āraddhavirīyo ǀ nisajjābhirato bhikkhu ǀ sobhayanto tapavanaṁ ǁ
현자는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서계에 전념해야 한다.534)
이것이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에 대한 수용·규정·구별·파괴 ·공덕의 해석이다.
[두타행의 수행고리에 대한 부수적 논의]
77. Ⅲ. [두타행의 수행고리에 대한 부수적 논의] 이와 같이
① 착하고 건전한 것 등의 삼개조의 관점에서
② 두타행 등의 구별의 관점에서
③ 총괄적으로나 개별적 관점에서
그 판별을 알아야 한다.535)
78. 8. [착하고 건전한 것 등의 삼개조의 관점에서] ‘착하고 건전한 것 등의 삼개조536)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모든 두타행은 학인·범부·번뇌를 부순 님에 따라서 착하고 건전한 것이나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것일 수는 있어도, 악하고 불건전한 [80]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삿된 욕망을 품고 악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한적한 숲에 사는 자가 있다.”라는537) 말씀이 있다고 “악하고 불건전한 두타행도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에게 이와 같이 반론해야 한다. 우리가 ‘한적한 숲에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으로 살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자는 누구든지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자이다. 그는 악한 욕망을 지닌 자일수도 있고 욕망을 여읜 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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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nirāmisaṁ pītisukhaṁ ǀ yasmā samadhigacchati ǀ tasmā samanuyuñjeyya ǀ dhīronesajjikaṁ vatan’ti ǁ
535) kusalattikato ceva ǀ dhutādīnaṁ vibhāgato ǀ samāsabyāsato cāpi ǀ viññātabbo vinicchayo’ti ǁ 이 게송은 제2장의 서두에도 나온 시이다.
536) kusalattika : 착하고 건전한 것(善)·악하고 불건전한 것(惡)·윤리적으로 중립적인 것(無記)를 말한다.
537) pāpivvho icchapākato āraññiko hotī’ti : AN. Ⅲ. 219
그러나 각각의 수용을 통해 오염을 제거하는 까닭에 두타행을 행하는 수행승의 수행고리이거나, 오염을 제거하는 까닭에 두타행이라고 통칭해서 얻은 지식이 그 수행고리이기 때문에 두타행의 수행고리이다. 혹은 반대를 제거했기 때문에 두타이고, 행도인 까닭에 수행고리이므로 두타행의 수행고리라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는 어떠한 것도 결코 제거되는 것이 없다. 그것을 수행고리로 삼아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어떠한 것도 제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수행고리로 삼아서는 두타행의 수행고리라고 말할 수 없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은 옷에 대한 탐욕 등을 제거하지 못하고, 행도의 수행고리도 아니다. 그러므로 “악하고 불건전한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 말한 것이다.
79. 두타행의 수행고리가 착하고 건전한 것 등의 삼개조와는 상관이 없다는 자들에게는 의미상으로 두타행의 수행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538)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제거하기 때문에 두타행의 수행고리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두타행의 덕성을 수용한다.”라는539) 말씀과 모순이 그들에게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착하고 건전한 것 등의 삼개조에 따른 해설이다.
80. 9 [두타행의 구별의 관점에서] ‘두타행의 구별의 관점’이란 이와 같다. ① 두타행을 알아야 하고,540) ② 두타행을 설하는 자를 알아야 하고, ③ 두타행의 원리를 알아야 하고, ④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알아야 하고, ⑤ 누구에게 두타행의 수행고리의 실천이 적합한지가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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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 yesampi kusalattikavinimuttaṁ dhutangaṁ, tesaṁ atthato dhutaṅgameva natthi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아누라다뿌라 시의 아바야기리비하라(Abhayagirivihāra : 無畏山寺) 파들의 주장과 관련된 진술이다. 그들은 두타행은 착하고 건전한 것 등의 삼개조와는 상관이 없는 단순히 명칭-시설(nāmapaññatti)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궁극적의미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오염의 제거는 무의미해진다.
539) dhutaguṇe samādāya vattatī’ti : Vin. Ⅲ. 15
540) dhuto veditabbo : 여기서부터 Vism. 81의 아래에서 9행까지는 M게. I. 161에서 병행한다.
81. 거기서 1) ‘두타행’이란 이와 같다. 오염을 제거하는 자나 오염을 제거하는 원리이다. 2) 그런데 ‘두타행을 설하는 자’란 이와 같다. 두타행을 행하지만 두타행을 말하지 않는 자가 있고, 두타행을 행하지 않지만 두타행을 말하는 자가 있고, 두타행을 행하기도 하고 두타행을 말하기도 하는 자가 있다.
82. 그 가운데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통해서 자신의 오염을 제거했으나 남에게 두타행의 수행고리로 훈계하지 않거나 교계하지 않는 자는 장로 박꿀라451)처럼 두타행을 행하지만 두타행을 말하지 않는 자이다. 두타행의 [81] 수행고리를 통해서 자신의 오염을 제거하지 못했으나 남에게 두타행의 수행고리로 훈계하거나 교계하는 자는 우빠난다542) 장로처럼 두타행을 행하지 않지만 두타행을 말하는 자이다. 이와 같이 “싸까야의 후예인 우빠난다는 두타행을 행하지 않지만 두타행을 말하는 자이다.”라고543) 언급한 것과 같다. 두 가지 모두 갖지 못한 자는 랄루다인544)과 같은 자인데, 그는 두타행을 행하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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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Bakkula, Bākula, Vakkula :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잘 병들지 않는 님 가운데 제일(appābādhānaṁ aggo)’이다. 꼬쌈비 국의 재무대신의 아들이었다. 야무나 강에서 유모가 목욕을 시키다가 강물에 빠졌는데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그 물고기는 한 어부에게 잡혀서 바라나씨의 재무대신의 아내에게 팔렸다. 그녀가 배를 째니 어린 아기가 다친데도 없이 살아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애지중지 키웠다. 나중에 그녀는 그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되어 부모에게 그를 키울 것을 요청했다. 왕은 양쪽 가족에 모두 속한다는 의미에서 ‘박꿀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부유한 삶을 살다가 80세에 부처님을 만나 출가한지 8일만에 거룩한 님이 되었다.
542) Upananda : Dhp. 158은 그를 훈계한 시이다. DhpA. Ⅲ. 139-141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싸끼야 족 출신의 우빠난다와 관련된 이야기(Upanandasakyaputtattheravatthu)이다. 장로 우빠난다(Upananda)는 설법하는 화술이 뛰어나 그의 적은 것에 만족하라는 등의 설법을 듣고 많은 수행승들이 그에게 많은 옷을 공양하고 두타행을 받아 지녔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남겨 놓은 많은 필수자구를 가로챘다.
543) tayidaṁ āyasmā upanando sakyaputto na dhuto dhutavādo’ti
545) Lāḷudāyin : Mrp. Ⅱ. 344에 따르면, 그는 한동안 부처님의 시자였다. 그는 나중에 시자의 임무를 맡은 아난다에게 질투를 품었는데, 나중에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두타행을 말하지도 않는 자이다. 이와 같이 “이 존자 랄루다인은 두타행을 행하지도 않고 두타행을 말하지도 않는 자이다.”라고545) 언급한 것과 같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갖춘 자는 가르침의 장군546)과 같은데, 그는 두타행을 행하기도 하고 두타행을 말하기도 하는 자이다. 이와 같이 “이 존자 싸리뿟따는 두타행을 행하기도 하고 두타행을 말하기도 하는 자이다.”라고547) 언급한 것과 같다.
83. 3) ‘두타행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란 이와 같다. 두타행의 원리란 탐욕의 여읨, 만족을 아는 것, 버리고 없애는 삶, 멀리 여읨, 그러한 삶의 가치548)라는 이러한 두타행의 수행고리가 지닌 의도와 함께 하는 다섯 가지 원리를 말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욕망을 여의고’라는549) 등의 말씀이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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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pA. Ⅲ. 344-348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장로 랄루다인과 관련된 이야기(Lāḷudāyttheravatthu)이다. 싸밧티 시에서 수많은 고귀한 재가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보시를 하고 식후에는 버터, 기름, 꿀, 당밀, 옷과 필수자구를 들고 승원으로 가서 법문을 들었다. 법문을 듣고 갈 때 장로 싸리뿟따와 장로 목갈라나의 덕행을 칭찬했다. 장로 랄루다인(Lāḷudāyin)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그까짓 법문을 듣고 칭찬하지만, 나의 법문을 듣는다면 무엇이라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을 듣고 사람들은 ‘이분도 가르침을 설하니 우리는 이 분의 가르침도 들어봐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대중들은 그 장로에게 가서 법문을 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 날, 그들은 ‘존자여, 오늘은 법문을 듣는 날입니다.’라고 말하고 수행승들의 무리에 공양을 올리고, ‘존자여, 오늘 법문을 설해 주십시오.’라고 법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로 랄루다인은 자리에 앉아 손에 색칠한 부채를 부치며 앞뒤로 흔들 뿐, 한마디 법문도 하지 못했다.
545) tayidaṁ āyasma lāḷudāyī neva dhuto na dhutavādo’ti
546) Dhannasenāpati : 가르침의 장군(法將)이라는 뜻으로, 싸리뿟따를 말한다. 이 책(Viam. 41/1 : 117의 주석을 보라.
547) tayidaṁ āyasmā sāriputto dhuto ceva dhutavādo cā’ti :
548) idamatthitā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이러한 착하고 건전한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출가자의 앎은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 등에서 성립되는데, 그러한 것을 수단으로 가르침을 배워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지탱하는 그 앎이 ‘그러한 삶의 가치’이다.
549) appicchataṁyeva nissāyā’ti : AN. Ⅲ. 219; 여기서 생략된 구절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참으로 욕망을 여의고 참으로 만족하고 참으로 버리고 없애고 참으로 멀리 여의고 그러한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한적한 숲에 사는 자가 있다.’
84. 그 가운데 ‘탐욕의 여읨’과 ‘만족을 아는 것’은 탐욕을 여의는 것이다. ‘버리고 없애는 삶’과 ‘멀리 여읨’은 탐욕을 여의는 것과 어리석음을 여의는 두 가지 원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삶의 가치’는 곧 앎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 무탐을 통해서 배척해야 할 것 가운데 탐욕을, 무치를 통해서 위험을 덮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제거한다. 또한 무탐을 통해 허용된 것들의 수용을 통해 생겨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의 탐낙을, 무치를 통해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너무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일어나는 고행에의 탐닉을 제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리가 두타행의 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5. 4) ‘두타행의 수행고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란 이와 같다. 열세 가지 두타행의 수행고리 곧,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 세벌 옷만 지니는 수행고리,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고리,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 하나의 발우로 식사하는 수행고리, 제 시간 후에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나무 아래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시체를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처소에 맞추어 지내는 수행고리, 항상 눕지 않고 지내는 수행고리가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는 의미와 특징 등에 따라 이미 설한 것과 같다.
86. 5) ‘누구에게 두타행의 수행고리의 실천이 적합한가?’란 이와 같다. 탐욕적 성향이 있는 자와 우치적 성향이 있는 자에게 적합하다. 왜 그러한가? 두타행의 수행고리의 실천은 괴로운 행도일 뿐만 아니라 버리고 없애는 삶이기 때문이다. 괴로운 행도를 통하여 탐욕이 지멸하고 버리고 없애는 삶을 통해서 불방일자에게 어리석음이 제거된다.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와 나무 아래서 지내는 수행고리의 실천은 분노적 성향이 있는 자에 적합한 것이다. 그 경우 타인과 부딪히지 않아서 분노가 지멸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타행 등이 분별에 의한 해석이다.
87. 10. [총괄적이나 개별적 관점에서] ‘총괄적이나 개별적 관점’이란 [82] 이와 같다. 우선 총괄적 관점이란 이와 같다. 이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세 가지 대표적인 수행고리와 다섯 가지 단독적인 수행고리로 모두 여덟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4)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 5)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 10)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의 이러한 세 가지가 대표적인 수행고리이고, 차례로 집집마다 탁발하는 수행고리를 지키는 자는 3)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고리도 지킬 것이다.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를 지키는 자는 6)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고리와 7) 제 시간 이후에 먹지 않는 수행고리를 지킬 필요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이 세 가지 대표적인 수행고리와 8)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1)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 2) 세벌 옷만을 지니는 수행고리, 13) 항상 눕지 않는 수행고리, 11)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의 이러한 다섯 가지 단독적인 수행고리를 합하면, 여덟 가지이다.
88. 또한 두 가지 옷과 관계된 것, 다섯 가지 탁발음식과 관계된 것, 다섯 가지 처소와 관계된 것, 한 가지 정진과 관계된 것으로 이와 같이 네 종류로도 분류된다. 그 가운데 항상 눕지 않는 수행고리가 정진과 관계된 것이고, 다른 것은 자명하다. 다시 이 모든 것은 의존을 통해서 두 종류로 나뉜다. 필수자구에 의존하는 것이 열두 가지이고, 정진에 의존하는 것이 한 가지이다. 실천해야 할 것과 실천해서는 안 될 것을 통해서 두 종류로 나뉜다.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실천할 때 명상주제가 성숙하면, 그것들은 실천되어야 하고, 실천할 때 퇴전한다면, 그것들은 실천되지 말아야 한다. 실천하거나, 실천하지 않거나 성숙할 뿐 퇴전 하지 않는다면, 미래세대를 애민히 여겨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거나
실천하지 않거나 성숙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실천해야 한다.
89. 이와 같이 실천해야 할 것과 실천해서는 안 될 것을 통해서 두 종류로 나뉘지만, 모두가 의지를 통해서 하나의 종류가 된다. 수용의 도로 보면, 하나의 두타행의 수행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앗타까타》에는 ‘두타행의 수행고리는 바로 의지를 말한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90. ‘개별적 관점’이란 이와 같다. 수행승들에게는 열세 가지, 수행녀들에게는 여덟 가지, 사미들에게는 열두 가지, 정학녀와 사미니에게는 일곱 가지, 재가남자신도와 재가여자신도에게는 두 가지가 있어서 마흔 두 가지가 된다.
91. 그런데 만약에 노천 가운데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가 갖추어진 시체 버리는 곳이 있다면, 한 수행승이 일시에 모든 두타행의 수행고리를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녀들에게는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수행고리, 제 시간 이후에 식사하지 않는 수행고리의 두 가지는 학습계율을 통해서 배척될 수 있는 것이고,550)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와 나무아래서 지내는 [83] 수행고리와 시체 버리는 곳에서 지내는 수행고리의 세 가지는 실행되지가 어려운 것이다. 수행녀들은 도반이 없이 지낼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곳에서 함께 지낼 의욕을 가진 도반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에 얻을 수 있더라도, 무리와 함께 사는 것(衆合住)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렇게 되면 두타행을 실천해야 하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수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다섯 가지 수행고리를 제외하고 수행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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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bhikkhunīnaṁ pana āraññikaṅgaṁ khalupacchabhāttikaṅgañca dvepi sikkhāpadeneva paṭikkhittāni : 한적한 숲에서 지내는 것은 비구니계율의 제3승단잔류죄(Vin. Ⅳ. 230)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비구니에게는 잔식이 아닌 것을 먹는 학습계율 – 비구계 가운데 제36속죄죄 – 이 없다. 그러므로 두 가지 계율을 비구니들은 배척할 수 있다.
에게는 여덟 가지 수행고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92. 이미 언급한 대로의 것 가운데 세벌 옷만을 수용하는 수행고리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열두 가지 수행고리는 사미들에게 해당하고, 다른 모든 일곱 가지 수행고리는 정학녀들과 사미니에게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으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재가남자신도와 재가여자신도들에게는,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수행고리와 탁발음식만을 먹는 수행고리의 두 가지는 적당하고 또한 수행가능하기 때문에, 두 가지 두타행의 수행고리가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개별적으로 말하면 마흔 두 가지가 된다. 이것이 총괄적이나 개별적인 해석이다.
93. 이상으로 ‘계행이나 정초한 지혜로운 사람은’이라는 시로써 계행 삼매 지혜의 제목으로 설한 청정도론에서 탐욕을 여의는 것과 만족을 아는 것 등의 덕성들을 통해서 이미 설명한 여러 종류의 계행을 정화시키는, 그리고 그 덕성들을 성취하기 위해 수용해야 하는, 두타행의 수행고리에 대한 논의가 끝났다.
이로써
선량한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에서
두타행의 수행고리라고 불리는
제2장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