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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교회주의자 김교신(金敎臣,1901~1945)
➀ 김교신 약력
1901.4.18. 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 김영희 와 어머니 양신 사이에서 장자로 출생
1912. 4세 연상인 한매와 혼인, 2남6여
1916. 함흥공립보통학교 졸업
1919. 함흥공립농업학교 졸업
1919.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 입학
1920.4. 도쿄 우시고메구 성결교회의 노방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신
1920.6. 세례받음
1921.5. 출석교회 온건파 시미즈목사가 반대파의 술책으로 축출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충격을 받아 무교회주의 기독교 창시자인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7년간 성서강연 참석
1922.4.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敎) 영문학과 입학
1927.3.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 졸업
1927.4. 귀국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재직
1927.6. 우찌무라문하동창생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과 함께 조국 구원의 유일의 길로 믿고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
1928.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사 재직
1929. 남강 이승훈과 교류
1930.5. 성서조선 제16호 주필로 단독 간행
1930.6. 서울 경성성서연구회 개최
1933.7. 산상수훈연구 발간
1935.12. 제자 류달영을 통해 “최용신 소전” 성서조선사에서 발행, “무레사네”(물에산에) 동아리 조직 청년학도들과 함께 고적, 능묘, 명소탐방
1939.12. 제자 류달영을 통해 “최용신 양 소전” 성서조선사에서 발행
1940.3. 복음전도를 위해 양정중학교 사임
1940.4. 함석헌과 함께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 공저 출간
1940.9. 제일고등보통학교(현,경기고)에서 교사 재직중 불온인물로 낙인 찍혀 추방
1941.10. 개성 송도중학교 교사 재직,
1942. 성서조선 권두언 “조와”가 반일이유로 서대문형무소 구속 수감, 잡지 폐간
1943.3.29. 출소, 전국각지순회 신앙동지 격려
1944.7. 함경남도 흥남 일본질소비료회사 주택계장으로 입사, 서본궁공장에서 강제징용당한 조선노무자 5천명의 복리증진, 교육, 주택, 처우개선에 주도적 참여
1945.4.25. 발진티푸스로 사망
2010.8.15.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포장 추서
➁ 김교신의 생애와 신학사상
1901년 4월18일, 김교신은 함경남도 함흥 염포리에서 부친 김영희와 모친 양신 사이에서 장자로 출생하였습니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속에서 한학을 수학한 김교신은 1912년, 4세 연상인 함흥 주북 한씨 가문 “한매”(韓梅)와 결혼하였으며, 두사람 사이에는 정손, 정민 등 2남과 진술, 정혜 등 6여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1916년, 김교신은 함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19년 3월에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김교신은 3월3일, 함흥지역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수일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만들어 소학교 예배당에 보내었습니다. 비밀리에 진행된 이 일이 발각되어 숙부 김충희씨가 가택수사를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불온서적과 권총이 발견되어 김교신까지 조사를 받게 되었지만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습니다. 1919년,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한 김교신은 당대 최고의 영문학자 사이또오(齊藤秀三郞) 문하생으로 들어가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였고,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런던타임즈를 구독하였습니다.
1920년 4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도쿄 우시고메구 성결교회에서 “송전”학생의 노방전도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신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야라이현 영혼성결교회에 출석한 김교신은 6월, 시미즈 순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11월, 교회내의 온건파 시미즈 담임목사가 개혁파의 술책으로 축출되는 과정을 지켜본 김교신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교신은 6개월간 교회를 다니지 않은채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1921년 5월, 결국 교회를 떠난 김교신은 당시 무교회주의 기독교 창시자인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7년간 성서강연에 참석하는 등 성서학습을 하였습니다. 우찌무라는 당시 “성서연구회”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김교신은 우찌무라의 정신과 영혼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김교신은 우찌무라 간조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자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일본 그리스도교의 자주성과 독립적 지위를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교신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당시 김교신이 소속한 성서연구회에는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 등 조선인 유학생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김교신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체계적인 성서연구에 집중하였습니다. 1921년,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한 김교신은 1922년 4월,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敎) 영문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1923년, 지리박물학과로 전과를 한 김교신은 육촌 조부로서 일본 베이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고 보성의숙(현,고려대) 교수를 지낸 김운집(金達集)의 사진을 책상앞에 놓고, 그분을 자신의 모델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1927년 3월, 김교신은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교신은 그해 4월,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3월28일, 우찌무라 기노조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877년, 당대 최고의 삿포로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881년에 졸업하였습니다. 삿포로농업학교 2학년 재학중 우찌무라 간조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1876년,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삿포로농업학교의 교수로 재직중인 매사추세스농대학장 “윌리엄 클락”의 영적 영향을 받은 우찌무라 간조는 188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1885년 9월, 암허스트대학에서 서양과학, 성경역사, 철학을 배우며 서양철학의 권위자 “쥴리우스 실리” 교수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한 우찌무라 간조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사로 재직중 천황숭배를 거부하여 교사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그후 만조보 기자인 동시에 월간 성서지연구(1900~1930)를 간행하면서 가정성경공부와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기자직에서도 퇴직당한 우찌무라 간조는 정부의 시녀역할에만 충실한 일본 기독교를 불신하며 독립전도사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회 본연의 자세를 상실하고 일본제국주의와 패권주의에 집착하는 일본 기독교에 실망한 우찌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기성교회를 떠나 신앙생활을 시작한 우찌무라 간조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앙인의 교제와 영적 생명과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본질중심의 교회를 주창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신앙에 있어서 제도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와 런던의 거대한 교회당을 바라보며 부러워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소유하지 않았고, 유형의 건물이 없지만 가장 좋은 교회를 가진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진정한 애국심은 나라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국가를 하나님의 정의와 도덕위에 세우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거짓과 죄악위에 세운 나라는 군비와 재력과 힘에 충실하여도 결국 망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제국주의적 전쟁야욕을 멈추고 그들의 나라에서 철수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천황은 왕이 아니라 국민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그에게 경배하는 행위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우찌무라 간조의 사상은 일본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분노케 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일본군경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이었고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김교신은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행적과 말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지성이 갖는 위대한 진정성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자리다툼과 재물욕으로 치닫는 기성교회와 달리 무교회는 욕심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 특별한 삶을 누릴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927년 6월,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생이며 동문인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과 함께 그리스도교가 조국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으로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였습니다. 김교신은 바벨론과 앗수르제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은 그들이 강대국이었던 원인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았던 원인이 더 큰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조선이 일본제국의 지배속에 있는 것 또한 조선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서조선은 조선을 구하는 모든 길이 성서에 있다는 것과 성서에 기초한 기독교와 나라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김교신에게 있어서 성서와 조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기독교 정신과 민족의 독립을 기원하는 민족애와 조선을 성서의 기초위에 세우겠다는 기독정신이었습니다. 김교신은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일본어 수업을 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교육하였습니다. 성서조선에서 문제가 되었던 조와의 글에서 혹한에 살아남은 두 마리의 개구리를 보고 아! 전멸은 면했구나!라고 말함으로서 일본제국주의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1928년, 김교신은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 박물교사로 전근하여 성서조선 주필 정상훈을 도와 성서조선발간에 더욱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1929년, 김교신은 오산학교의 설립자이며 민족교육자인 “남강 이승훈”과 교류하였습니다. 이승훈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가운데 기독교 대표로 참석하였고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민족의 자랑스러운 애국계몽가였습니다. 김교신은 기독교 원로인 “김정식”(金貞植)으로 부터 촉망을 받았고, 동양학의 석학이며 오산학교 교장인 “류영한”(柳永模)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교주인 우찌무라 사후에 김교신은 일본 기독지성인의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을만큼 영향력 있는 무교회주의자였습니다. 김교신은 세계적인 명문사학, 도쿄대학교 “야나이하라 다다오” 총장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퇴임후 그를 서울 정릉 성서집회, 주강사로 초빙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최고의 문학도, “춘원 이광수”가 신앙문제로 김교신에게 깊은 상담을 청하였을 정도로 김교신의 기독교적 영향력은 놀라울 정도로 지대하였습니다. 청년생활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김주식”(金周恒) 또한 김교신과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김교신의 신앙과 생활과 철학이 당시 지도자들의 눈에 모범적이고 탁월하였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 5월, 성서조선 제16호 주필로서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통한 무교회주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서거한 후 김교신은 6월호 성서조선에 남강 이승훈 특집호를 발간하였을 정도로 남강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6월, 서울 “경성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10년간 동계성서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무교회주의자들은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김교신에게 교회를 임대해 주거나 사용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득불 김교신의 가정에서 가정집회 형식으로 개최하였으며 이러한 연유로 10~20명 밖에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집회의 성격 또한 성서연구와 기독교 진리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기 때문에 1대1 교육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교신의 성서집회는 루터, 캘빈, 마이어, 벵겔, 만국비평주해, 슈트라크 빌렐베크, 바우어의 희랍어대사전, 홀렌베르크의 히브리어문전 등 신학교 그 이상의 수준으로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갔습니다. 1933년 7월, 김교신은 기독교의 중심진리에 대한 한국적, 고전적 기독교 저작으로서 1931년 1월에서 1932년 2월까지의 성서조선 연재물을 집대성한 “산상수훈연구”를 발간하였습니다. 성서조선은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 나환자들의 위안이었습니다, 성서조선을 통해 하늘의 복음과 깊은 동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함으로서 나환자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들이 보낸 신앙간증의 편지와 원고는 성서조선에 매회 게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김교신의 제자인 동시에 김교신 사후의 사돈 관계인 성천(星泉) 류달영(1911~2002)은 수원농림고등학교(현,서울대학교농업생명과학대학)와 미국 미네소타대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대표적 농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서울대 농과대학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성천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1935년 12월, 김교신은 제자 류달영을 통하여 함경도 농촌계몽운동가 여성리더 “최용신”(1905~1935)의 삶과 생활을 기록한 “최용신 소전”이라는 책을 성서조선사에서 발행하였습니다. 1939년 12월에도 “최용신양 소전”을 발간하여 계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려 하였습니다. 1935년, 양정보통고등학교 재직시 김교신은 “무레사네”(물에산에)라는 동아리서클을 조직하여 주일마다 청년학도들과 함께 서울 근교의 고적과 능묘와 명소를 탐방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청년들에게 한국의 국토와 자연과 역사와 언어와 문화와 자랑스러운 한국인과 역사유적에 관하여 깊은 관심과 사랑을 고취시키고 이러한 역사의 근간을 회복하도록 청년정신을 일깨우려 하였습니다.
1940년, 김교신은 오직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양정중학교를 사임하였습니다. 4월, 함석헌과 함께 “우찌무라 간조와 조선”을 간행하였으며, 9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선배인 제일고등보통학교 교장 이와무라의 요청으로 제일고등보통학교(현,경기고교)에서 다시 교사직을 갖게 되었지만 불온인물로 경계되어 12월에 강제로 퇴직하였습니다. 이와무라 교장은 김교신의 애국심과 교육적 사상을 한일 모든 인류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로 평가하였습니다. 1941년 10월, 개성 송도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김교신은 학생들에게 민족의 혼을 깨우고, 도덕의 기초를 세우며, 기독 진리를 구현하여 민족정신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민족 백년대계를 기대하였습니다. 1942년 3월30일, 성서조선은 매호마다 일본 총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매호마다 문제가 되어 폐간이 유보되다가 결국 158호 권두언 “조와”(弔蛙: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가 발단이 되어 “성서조선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전국 수백명의 정기구독자와 편집동지들이 검거되었습니다. 조와라는 글은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의 확신을 표현한 것으로 민족해방을 갈급해 하는 조선민족의 기원을 담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위탁하신 섭리사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김교신은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결국 성서조선사건으로 주필인 김교신을 비롯하여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등 13인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해야 했습니다. 김교신은 일제말기인 1945년까지 끝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으며 일제의 국어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국어로 수업하였습니다. 김교신은 서대문형무소 복역시 검사의 취조에서 일본천황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못박았습니다. 또한 황국신민서는 망국신민서가 될 것이며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린아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으로 결국엔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여 모진 고문을 이겨야 했습니다.
1943년 3월29일, 불기소처분으로 서대문형무소를 출옥한 김교신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흩어진 신앙동지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습니다. 1944년 7월, 함경남도 흥남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주택계장으로 입사한 김교신은 일제 강제징용을 당하여 서본궁공장에서 일하는 조선노무자 5천명의 인권과 복리와 교육과 주택과 처우개선에 전심전력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민족해방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국의 신앙동지 구독자청년들을 질소비료공장에서 근무하게 함으로서 전쟁에 강제동원되는 일을 피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김교신은 1945년 4월25일, 공장 노무자들 사이에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김교신의 10개월간의 직장생활이 얼마나 모범적이었으면일본제국주의 회사는 그의 죽음을 순직으로 처리하고 회사장으로 장례를 치루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김교신의 희생적 삶에 감동하며 장례 행렬에 줄을 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5년이 흐른 2010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는 김교신에게 독립유공자 표창과 건국포장을 하였습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무엇인가? 김교신은 조선에서 장로교회에 출석하였고 교회구성원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였습니다. 1936년, 김교신은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 성경중심주의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기독교를 관통하는 핵심주제였습니다. 김교신은 회당교회를 거부하였습니다. 교회의 목사와 각교파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교권 등 성직제도를 부인하였습니다. 또한 교회가 행하는 세례식과 성찬식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성서해석권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한국민족에게 위탁하신 섭리사적 고유사명을 밝히지 않는 신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김교신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는 외세적 기독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김교신은 일본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국가라는 것을 이용해 밀려 들어온 세계열강들의 선교를 순수하게만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교파들이 친일적 입장이었던 시대적 상황속에서 진정한 기독교의 의미를 찾고자 김교신은 노력하였습니다. 김교신은 생명의 위협속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일본어 교육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교 교사로서 지속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성숙된 신앙적 삶에 있었습니다. 김교신은 진실하였고, 신앙중심의 생활과 복음중심의 생활에서 일탈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인지되었고 감동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교신은 일본제국주의 회사에서 한국인의 노무와 인권을 위해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망하였을 때 일본회사와 일본인은 회사장으로 장례를 치러줄 만큼 위대한 삶의 여정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김교신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만 그 섭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국인의 가슴으로 성경을 대한다는 입장에서 “민족적”이고, 교회라는 체제적이고 명료화된 고착에서 벗어나 민중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민중적”이며, 한국적 토양위에서 새롭게 성장해 가야한다는 측면에서 “토착적”이었습니다.
김교신은 유형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교회들은 그들의 성경공부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가 성경공부를 위해 교회를 찾았을 때 한국의 모든 교회들은 그를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김교신의 사상속에 기성교회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살기위해 친일행적을 하기는 쉬워도 죽기위해 반일행적을 하기에는 두려움이 많았던 기성교회의 비겁함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슴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기독교 역사속에서 유형교회는 무형교회의 현시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교회속에는 깨끗함과 더러움이 함께 공존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의 교회가 완전하지 않고, 온전히 구원받은 사람들로만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교신은 성서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신구약성경 성경신학의 중요한 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김교신의 문제는 구약을 유대의 경전이요 기독교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서 스스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김교신이 평신도로서 신학적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구속사적 원리와 구약해석의 부재에서 오는 한계점은 그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성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교권주의와 물량주의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굴절된 역사적 시각은 분명 회개의 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김교신을 통하여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회복하고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질을 찾아가는 구원의 과정이 되도록 하는 길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