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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국가기관 불법대선 개입규탄과 국민주권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강론 : 박상병 신부(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찬미 예수님 (찬미 예수님) 안녕들 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안녕들 하십니까? 안녕들 못하십니까? (안녕 못해요~) 예.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전국적으로 많은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중학생, 초등학생도 이 대열에 합류를 하였습니다. 이 대자보들을 읽어보면 그동안 오해 받아왔던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역사와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국가 기관의 불법 선거 개입부터 시작해서, 각종 공공 기관과 의료 민영화에 대한 진지한 우려, 강정, 밀양, 쌍용차 사태, 역사 왜곡, 해고 노동자에 대한 처우, 청년 실업 문제와 이 모든 이들에 대한 정부의 무대응과 소국민과의 소통의 부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자보의 글들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안녕하지 못한가를 절감하게 되었고, 그래서 잘들 지내는지, 안녕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평범한 인사말에 대해, 무심결에 늘 해왔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이 상황은,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그냥 대충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매우 어렵고 힘든 때임을 가늠케 해 주 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평안하냐?”(마태 28,9)고 물어 오신 인사가 얼마나 엄청난 말씀이었는지를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평안하냐?”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데, 군인들이 그분을 죽였는데, 제자들이 배반했는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신것만 같고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평안하지 못합니다. 스물 네 분의 넋을 위로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분향소조차 대한문에서 갖은 핍박 끝에 평택으로 옮겨졌고, 밀양의 어르신들이 목숨을 끊으셨는데, 강정에서 평화를 지키려던 수사님과 활동가들이 제주교도소에 수감되어 계신데, 장기 농성 중인 수많은 사업장들은 아예 언론에서 다루지도 않고 있는데, 민영화에 반대하여 파업 중이던 철도 노조원들이 피신을 했다가 범죄자처럼 검거가 되고, 10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해도 ‘우리의 불통은 자랑스러운 불통’이라면서 최루액과 물대포로 응답하는데, 이 아픔의 시대에 우리가 어찌 평안하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드러난 것만 해도 2,200만 개가 넘는 국가 기관의 불법 선거 개입에 대해, 엄정하게 수사해 달라고 촉구하는 것조차 눈치를 주고 면박을 주고 너의 조국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사법부에서 대로 조사하려하면 경질시키고 징계를 주고, 보다 못한 종교계가 예언적인 직분을 다하기 위해 일어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제의 강론 중 발언에 대해 전체 취지에 대한 수용과 진지한 반성은 없이 내용 중 일부만을 문제 삼아 침소봉대하고, 수많은 언론들은 그 의미를 왜곡하여 보도하고, 일부 국민들로 하여금, 그 보도를 신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며 참여하셨던, 브라질의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께서는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었을 때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내가 가난을 만드는 사회 구조에 대해 묻자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불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대해서 잘못된 것을 말할 때, 늘 주요 언론과 방송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도를 하고, 혼란과 분열만을 부추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평안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이 성탄시기에 이렇게 평안하지 않은 마음들을 모아 미사를 드려야 하는 이 현실이 너무도 아픕니다. 그러나 아픈 마음 바로 옆에 감사하는 마음 역시 잘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 옆에, 내 앞에, 나와 같은 마음을 지난 이가 있음을, 그도 나와 같은 이유로 아파하고 있기에, 우리가 함께 있기에 주님, 감사드립니다. 우리 가운데에 당신께서 계심을 믿습니다. 혼자서만 아파하지 않고 내 곁에 있는 이에게 ‘평안하냐’는 당신의 인사를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마음들을 모아 이렇게 당신께 우리의 아픈 마음을, 이 시대의 아픔을, 훼손된 진실을, 짓밟혀진 권리를, 이들 안에서 더 많이 아파하시는 당신의 마음까지 모두 제물로 봉헌합니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 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8항)고, 복음화에 있어서 부정과 싸우고 정의를 구체적으로 수립해야 하는 것을 창조 계획과 구원 사업과 분리시키지 말라(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선교)고 늘 가르쳐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교 시절 말씀하신 것처럼, “만일 우리가 정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불의를 피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2005. 3. 6. 부활절 강론) 그렇다며 오늘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평생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구세주를 만난 ‘한나’라는 예언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빛이시다’라는 뜻의 ‘프누엘’의 딸로서, ‘행복’이라는 뜻의 ‘아세르’ 지파 출신입니다. 그리고 ‘한나’는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의미입니다. 이름들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이시기에, 모든 것을 밝혀주시기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로우십니다. 이 한나 예언자는 남편과 일곱 해를 지냈지만, 구 열두 배인 여든넷이 될 때까지 홀로 살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속량을, 곧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수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자기 방에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기다렸고, 간절히 기다렸고, 하느님께 청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신앙 생활은 단지 나 개인만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그 구원을 나와 교회 안에만 가두기 위해서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무덤을 찾아 온 여인에게 ‘평안하냐’라고 물으심과 동시에 지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며 인사를 하셨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는 성경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과연 제자들은 그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유다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 평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성령과 함께 더 이상 다락방에 숨어 있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 자신 있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그러한 공포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으며 두려움 따위는 벗어버리고, 스승처럼 죽음을 각오하면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왜 세상에 박해와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세상에, 내가 살고, 너가 살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를 포함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말합니다. ‘교회가 걸어가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은 사람’(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이다. 세상 속에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존재로서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교회는 응당 그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첫 번째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뭍힐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의 역사에 개입해 주시기를 기다리며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 세상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구세주께서는, 이 성전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함께 아버지께 청하고 계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상의 역사에 개입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황님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 드립니다. “주님,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수수방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느님을 대신해서 무엇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간절히 청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개입하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아듣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주교님 시절이셨던 2003년 하신 강론 말씀을 되뇌어봅니다. “고통을 돌보는 사람들아 있는가 하면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두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2003, 강론) 우리는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 중 ‘고통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를’ 청원합니다, 지금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이고 병들고 헐벗고 감옥에 갇힌 사람이 바로 당신이시라는(마태 25,31-46) 것을 깨닫고, 당신을 강정에서, 밀양에서, 평택에서, 법정에서, 감옥에서, 훼손되고 감추어진 진실 안에서 알아 뵙기를 청합니다. “주님, 청하건데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무엇보다도 세상 속의 사람, 그리고 우리가 지금 기념하고 축제를 즐기는 이 성탄시기, 즉 사람이 되신 말씀이 세상 속의 아파하는 사람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이 세상이 놓치지 않고 바라보실 희망합니다. 끝으로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이느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또 다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를 통하여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쭈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이미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쁘게 세상으로 들어가 그 말씀을 전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 이제 스스로 평안한가만 묻지 않고 제 이웃이 평안한지 물으며 살게 하소서. 당신께서 물어 오신 그 인사를 이웃에게도 묻게 하소서. 그 이웃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시 국 선 언 문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이사 5,7)
당신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고난을 살피시기 위해 찾아오신(탈출 4,31) 구세주의 거룩한 성탄 축제를 기념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마태 2,16-18)와도 같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억압과 박해를 좌시하고 묵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75항)이 천명하듯 “정치 공동체의 법적 기초의 설정, 국가의 통치, 여러 기관들의 영역과 한계의 규제, 위정자 선출 등에 있어서, 모든 국민이 아무런 차별 없이, 언제나 더 잘,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국민들의 자유 투표의 권리는 지난 18대 대선 당시, 국가 기관의 불법적 개입으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유린되었다. 국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인 국민 투표권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여론을 접할 권리를 상실한 채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에 우리는, 정부가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에 대한 엄정하고 투명한 조사와 더불어 그 밖의 여러 의혹들에 대해서도 적법한 절차를 통하여 공개함은 물론, 그동안 이 사실을 부인해오고 정당한 수사와 적법한 사법 절차에 대해 부당하게 행사했던 압력과 훼방의 사실에 대해 참회하고 국민들에게 진정한 마음으로 사과할 것을 촉구한다.
하나, 공공의 복리와 관련된 사업에 대하여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던 선거 전의 공약과는 달리, 정부는 철도와 의료, 상하수도에 거대 자본들의 참여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여러 부문에서 민영화를 시작하고 있다는 국민적 의혹에 직면해 있다. 이에 우리는, 정부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최소한의 복지의 기회마저 박탈하고 국가가 관리해야 마땅할 공공의 사업을 거대 자본의 이익으로 환원하는, 공공 기관의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제도적, 법률적 장치를 통해 제정할 것을 촉구한다.
하나, 가톨릭 사회교리가 그 당위성을 인정하듯(간추린 사회교리, 304항), ‘불가피하거나 어쩌면 필수적인 수단으로, 노동자들이 고용주나 국가, 여론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더 나은 노동 조건이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얻고자 집단으로 결속하여 용역을 제공하기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파업권에 대하여 오로지 불법으로만 규정하고, 특히 철도 민영화의 반대를 요구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무력으로 강제 진압하려 한 점과 이로 인해 전국적 규모의 파업을 초래한 점에 대하여, 경찰이 노동자와 국민들에게 사과할 것과 정부가 조속히 노조 측과의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하나, 노동자이셨던 예수님(요한 바오로 2세, 노동하는 인간, 6항)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과 예언자적인 개별 신앙인들의 분명한 시각, 그리고 교회가 인내를 가지고 주변 문화와 대화한(국제 신학위원회, 오늘의 신학: 전망, 원칙, 기준, 55항) 결론으로 얻어진 바, “노동이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노동하는 인간, 12항; 간추린 사회교리, 277항)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는 현재 벌어진 양대 노총 총파업이라는 초유의 사태와 관련하여, 정부가 자본의 편에만 설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파업의 이유와 목적, 중대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중재에 나설 것과,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향후 국가 정책에 적극 반영할 것을 촉구한다.
하나, 우리는 정부가 대선 전에 공약했던 대로 쌍용자동차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할 것을 간곡히 촉구하는 바이며, 국민적 여론을 무시한 채 강행하고 있는 제주 강정의 군사 기지 건설을 중단하고 범국민적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하나, 지난 11월 25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천명한 바와 같이, 핵기술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을 희석시키고자 ‘원자력발전’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핵발전’은, 이미 이웃나라들에서 겪은 재앙을 통하여 이미 그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 받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질서에도 크게 어긋나는 일이므로 조속히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며, 불량부품 사용으로 인해 가동마저 지연된 핵발전소의 전력 송전을 위한 밀양 송전탑 건설을 중단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 또한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에 바탕을 둔 숭고한 노력을, 언론을 통하여 많은 국민들이 지역 이기주의의 소산으로 이해하도록 곡해하고 있는 활동을 중단할 것과, 밀양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하나, 우리는 정부가 국민들의 목소리를 열린 마음으로 듣고 대화에 나설 것을 엄중히 촉구하는 바이다. 공의회의 사목헌장이 천명하듯, “위정자들은 가정, 사회 단체, 문화 단체, 중간 단체나 조직 등을 방해하거나 그들의 정당한 효과적 활동을 금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기꺼이 질서 있게 촉진하도록 힘쓸” 의무가 있다.(사목헌장 75) 최근 국민들이 각종 집회와 대자보 등을 통하여 발언하고 있는, 국가와 사회를 향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은 물론, 정당하고 적법한 집회에 대한 과잉 진압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하나, 마지막으로 우리는, 국가기관의 대선 불법개입과 관련하여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종교 집회 중 행한 사제의 발언 내용 중 일부만을 부각시켜, 천주교회와 양립할 수 없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로 그를 몰아간 점에 대하여, 과거 한국 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커다란 박해를 받았던 한국 천주교회의 전체 위상을 훼손한 바에 대해 사과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 아울러 이른 바 ‘종북몰이’를 통하여 일부 국민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킴은 물론, 일부 신자들을 자극하여 마치 한국 천주교회가 분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한 점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며, 그렇게 할수록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무마하고자 했던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개입에 대한 국민적 의혹은 더욱 짙어간다는 사실을 엄숙히 천명하는 바이다.
가난한 이들 중 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는, 위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우리의 기도와 선언과 행동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선언한다.
2013년 12월 30일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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