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극복하고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당에 선교
吳昶興(오창흥:대만 중원대학교수)
1.서론
대진경교류행중국비에는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당에 건넜던 당시의 고난이 기술되어 있다. “아시리아의 아라본이라는 덕이 있는 사람이 청운의 꿈을 가지고 비와 바람에도 지지 않고 고난과 위험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정관 9년에 성경(眞經)을 장안에 옮겨왔다.” 비(碑)에 쓰여 진 이 짧은 글로도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선교사들이 서 아시아로부터 동쪽으로 건너갔던 고난의 경위를 상상할 수 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었던 모펫트(moffet)는 그 분야의 제일인자이고 그의 저서 “아시아의 그리스도교사 상권”은 아시리아동방교회의 아시아에서의 선교를 연구하는 데에 꼭 참고해야 할 대표작이다. 모펫트의 최대의 공헌은 아시리아동방교회의 기원에 대하여 “토마스설” “앗다이설” “아르메니아설”의 3가지의 설을 세워 이것에 의한 아시리아동방교회의 역사가 예수의 사도와 같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오늘까지 발전했다고 하는 설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근대의 학자가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의 교회의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부터 아시리아동방교회가 널리 알려지게끔 되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서는 토마스 이테스(Thomas Yeates 1768-1869)가 1818년에 저술한 인도교회사가 있다. 이것은 가장 빠른 시기에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아시아에서의 선교에 대하여 설명한 글이라 보여 중국의 대진경교와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서로 역사적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기술 되어 있다. 이테스의 저작은 모펫트의 “아시아그리스도교사”보다도 170년 이상이나 전에 쓰여진 것이다.
본문에서는 대진경교류행중국비의 “비와 바람에도 지지 않고 고난과 위험을 뒤돌아보지 않은”의 어구에서 아시리아동방교회가 중국에 건너간 노정을 고찰하고 그들의 실크로드에 있어서 궤적을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2.지리적인 범위
아시리아동방교회는 대진경교로서의 중국에 들어가는 이전은 주로 중앙아시아를 주된 활동의 범위로 하고 있었다. 후에 아시리아동방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도론을 지지 했기 때문에 서방교회보다 이단으로 간주되고 또 페르시아와 로마의 2대제국의 대립의 영향도 있고 중앙아시아와 그보다 더욱 먼 동방을 그들의 선교활동의 거점으로 했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의 황제로부터 “波斯敎”, 파사는 페르시아 후엔 “大秦敎”라 칭하게 되고 당시에 이미 아시아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일을 알 수 있다. 당시중국과 서양세계의 사이의 교역은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토지를 통하여 행해지고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고대의 중국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와 결부시키는 중요한 교역로였다. 중국 장안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뻗은 이 길은 근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실크로드라고 이름 지어졌다. 실크로드의 기원은 고대세계의 중심이었던 문명이 서로 교류를 행하였던 것에서 시작된다. 고대의 제국은 머나먼 지역과의 교역을 하기 위하여 이교역로를 형성하여 갔다. 중국은 동쪽문명의 중심으로서 오랫동안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의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페르시아의 사산조는 226년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동서 간에서 세력을 떨쳤던 대국이었다. 서쪽에는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인 로마제국이 군림하여 있고 이들의 3대제국이 각각의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완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거리의 무역활동도 안전하게 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크로드는 이들의 지역의 주된 대국과 그들에 속하는 소국사이를 맺는 경로이고 이들 교역로의 총칭이다. 실크로드에서는 상인과 여행객 뿐 아니라 종교인도 이 길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의 넓혀나갔다. 그리스도교, 조르아스타교, 마니교, 힌두교, 불교 등은 전부 실크로드를 통하여 각각의 거점을 설치하면서 종교의 세력을 확대시켰다. 메르브, 사마르칸드, 카슈갈, 호탄 등의 지역에서는 다른 종교가 공존하는 현상 마저도 보였다. 이런 것으로 봐서 중국과 외래문화는 쌍방 간의 교류뿐 만아니라 다방면의 교류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아시리아동방교회가 중국으로 건너기 이전은 중국의 조선기술은 아직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대진경교류행중국비의 “청운을 타고 비와 바람에도지지 않고 곤란과 위험을 돌아보지 않고 성경을 옮겨왔다.”고 하는 글에서도 당시의 교류가 주고 육로를 통하여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류는 교역과 포교뿐 아니라 외교와 군사적인 행동으로도 보여졌다.
당시의 당왕조는 항로에 의한 교류에 대하여서는 소극적이었지만 명왕조와 같이 쇄국하여 문호를 철폐하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역으로 외부에 대해서는 개방적이어서 당시는 廣州의 市舶司 右威衛中郞將의 周慶立이 奇器異巧를만들고 황제에 헌상했다.(시박사 우위위중랑장의 주경립이 기이하고 이상한 기구)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감선사(監選使), 殿中侍御史의 柳택이 서간을 바쳐서 진언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현종이 주경립을 처형했다고 하는 역사도 있다.
아마도 이것이 원인으로 及烈(급열)은 중국에 남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진경교류행중국비”에 “승 수라함과 대덕급열 그리고 서국의 귀족 세속외의 고승들은 교회의 규정을 정비하고 신앙의 계승을 유지했다”고 쓰여 있듯이 급열이 재차 중국을 방문한 것은 이로 아시리아동방교회와 조정과의 관계를 수복하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원20년(732)에 재차 조공하고 현종으로부터 자의(紫衣)의 가사(袈裟) 또 반물(反物) 50필을 받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시리아동방교회가 아득히 먼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에 건너간 두 가지의 루트는 육상의 실크로드와 항로였다. 초기는 주로 육로를 통하고 후에 항로를 빈번히 이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