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 타계한 작가 신봉승씨는 500년 조선왕조의 가치와 교훈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사진은 지난 2007년 본지와의 인터뷰 모습. |
“역사를 안다는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역사를 알고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를 인식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인식이 투철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2007년 1월 본지 인터뷰 내용 중)
신봉승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은 ‘한국 사극의 개척자’로 불린다.
1977∼1985년까지 9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했고 이를 바탕으로 1983∼1990년 방영된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을 집필해 새로운 정통사극의 틀을 세웠다.
우리나라 정사(正史)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며 역사문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도내 출향인사로는 선두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극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평론,희곡 등 문학 장르를 모두 아우르면서 한국 문학의 지평을 확대해왔다.
1933년 강원도 명주군(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에서 태어난 신봉승 작가는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고 관심도 많았다. 강릉농업고에 입학했지만 우연히 강릉사범학교 교지에서 발견한 최인희·황금찬 시인의 이름에 무작정 전학을 갈 정도였다.
강릉사범학교에서 두 스승을 사사하면서 문학적 역량이 크게 성장한 신봉승 작가는 고3 시절 조병화 시인의 추천으로 문학잡지에 시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 신봉승 작가의 스승인 故조병화(사진 왼쪽) 시인이 제자를 위해 남긴 친필 문구. 조 시인은 신 작가에 대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조선의 역사’라고 말했다. |
그 후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해 조 시인의 강의를 듣던 그는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고 강릉으로 돌아가 교사로 일했다. 스승인 조 시인이 경희대로 자리를 옮기자 경희대 국문과로 편입하기도 했다.
신 작가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방부에 현상 응모한 시나리오 ‘두고 온 산하’가 당선되면서 영화계로 진출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원고 청탁이 들어오지 않자 다시 강릉에서 교편을 잡는다. 교사생활을 하던 중 지역 방송국과 인연이 돼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고 이를 계기로 국립극장 영화과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후 극작가가 된 그는 신성일·엄앵란이 주연을 맡은 청춘물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 작가 반열에 오른다. 그러다 당시 동양방송(TBC)의 권고로 사극을 쓰기 시작,첫 작품이 연산군의 일대기를 다룬 ‘사모곡’이었다.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지만 언론으로부터 고증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신 작가는 이에 자극을 받아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해 가면서 역사 공부에 매달렸다.
신 작가는 역사에 근거해 민족문제와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많은 공을 쏟았다.
역사에세이 ‘양식과 오만(1993)’,‘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1996)’,‘직언(2004)’,‘조선의 마음(2005)’과 시집 ‘초당동 소나무 떼(1990)’,‘초당동 아라리(1993)’,‘연산군 시집(1987)’ 등 150여권이 넘는 그의 저서는 모두 역사인식의 현대화를 통해 국가정신 확립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그의 문학적 갈증은 스스로를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68세가 되던 해 첫 희곡 ‘파몽기’를 집필해 국립극장 정규공연으로 올렸다. 이후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일대기를 쓴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와 ‘이동인의 나라’,사도세자의 비극을 담은 ‘노망과 광기’,얼룩진 현대사를 소재로 한 ‘달빛과 피아노’ 등을 발표했다. 이같은 희곡 작품을 모아 80세가 되던 2012년 첫 희곡집 ‘노망과 광기’를 세상에 내놨다.
신 작가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 사회에 보탬이 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되길 노력해왔다. 주제의식이 강한 문학작품을 영화화해 영화계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최근에는 전국을 찾아 강연에 나서 ‘지식인들의 국가 정체성 확립’을 강조해 깊은 울림을 주기도 했다.
지역 문단을 활성화하고 문인을 기리기 위한 노력에도 아낌이 없었다. 2014년에는 은사이자 속초 출신인 문단 최고령 황금찬(98) 시인의 문학관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최근에는 국립한국문학관 강릉 유치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 시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던 그는 스승인 故조병화 시인의 말처럼 수많은 작품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로 우리 곁에 영원히 남게 됐다. 안영옥·오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