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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칼럼] 일제의 만행과 의병대장 전성범의 발자취 재조명
이영노 | 기사입력 2015/02/06 [10:20]
[전 대 열=전북대 초빙교수] 조선말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외세를 막기에는 너무 힘이 없었지만 조선민중은 삽과 곡괭이 죽창을 나눠들고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조정에는 이완용 등 오적도 있었지만 민영환 등 자결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지방에서도 을사늑약 이후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으며 그 앞에는 존경받는 양반유생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많이 배운 이들이 정세의 흐름도 빨리 알았지만 그만큼 역사적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면암 최익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선비로 경기도 사람이면서도 전라도 태인에 내려가 임병찬의 도움으로 의병대를 조직 전북일대와 충청 경상도까지 용명을 떨쳤다. 그가 기병했다는 사발통문이 돌자 각 지역의 유생들이 대거 합류했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한 사람이 함양출신 전성범(全聖範)이다.
그는 중군장이 되어 진안 금산 용담 장수 영동지역을 누비며 일본군을 격파했다. 최익현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가 19일간의 단식 끝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신이 부산부두에 도착할 때부터 충남 예산 선영에 도착할 때까지 철도연변은 상복을 입은 백성들의 행렬로 흰 구름처럼 너울거렸다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전성범은 비록 최익현이 순국했을지라도 일본군과의 싸움은 멈출 수 없다는 판단으로 박춘실 문태수 유종환과 함께 덕유산 적성산 천반산 성수산 등 진안 장수 금산 무주 등지를 누비며 일본군 300여 명을 사상시켰다는 기록을 보면 기습작전을 적절하게 활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험한 산세를 등지고 지형지물에 익숙한 향민들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후일 만주에서 벌어졌던 홍범도의 봉오동 대첩, 김좌진 이범석의 청산리 대승과 일맥상통하는 바 있다.
이들의 빛나는 전공(戰功)을 아로새기기 위해서 무주군민들은 1909년 공적비를 세웠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무주에서 공적비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성범 등 의병들의 투쟁이 백성을 감복시켰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비는 일본경찰의 손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1910년 의병대는 규모를 크게 늘려 서울로 진격하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8월29일 일본의 강제로 조선은 없어지고 조선총독부가 조선정부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의병대는 더욱 심신을 가다듬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충심 하나로 뭉쳤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을 치고 통곡한들 빼앗긴 나라를 되돌려 받을 길은 아득하다.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힘으로 격파하는 일이다.
마음만은 하늘을 꿰뚫고도 남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1911년 1월 장수 계북면 협곡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전성범은 증원 보강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추격대에 다시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받으며 7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끝내 의병대의 조직과 활약상에 대한 심문에 응하지 않다가 마침내 세상을 떴다.
1911년 3월7일이다.
일제에 강점된 후 불과 7개월도 채 못 되었다. 이는 전성범장군이 1982년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1990년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한 다음 묘소를 새로 조성하고 공적비 제막식을 거행하면서 1995년도에 발표한 준비위원회의 리프렛 자료에 나타난 것일 뿐이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유폐되어 있을 때 ‘단식’을 투쟁방법으로 택할 수 있었지만 감옥에 수감된 이후에는 전면단식은 불가능하다. 행여 불상사가 날 것을 염려한 형무소 당국은 강제급식이라는 비상수단을 아무 때라도 사용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긴급조치로 수감되었을 때 영등포교도소에서 정치범 33명이 일제히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던 일던 사건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강제급식을 당했다.
따라서 전성범 의병대장이 단식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후인들의 추측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것은 근자에 새로 발견된 전성범 재판기록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국기기록원에 보관된 서류에 따르면 ‘명치44년형상제21호’ 고등법원 판결은 3월2일 재판장 암야신평(岩野新平)등 5인의 판사가 서명 날인했다.
1심에서 이미 교수형 선고를 받고 항소한 건인데 이를 기각한다는 내용이다.
사형을 확정한 것이다.
일제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강의규 등 의사를 조선독립 운동자를 사형선고가 내리는 즉시 상소조차 못하게 하고 즉시 교수형을 집행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 왔다.
전성범은 을사늑약 이후 계속적으로 의병대를 이끌어가며 신출귀몰하는 작전을 수행해왔던 경상도 함양의 양반출신이다.
조선총독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조선백성을 공포 속에 몰아넣어야만 무서워서 반항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의병대 수괴 중의 수괴인 전성범장군을 전격적으로 처단하여 조선민중을 벌벌 떨게 해야 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 뒤에 이어진 105인 사건도 조선총독부의 공포 위협작전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더구나 3월2일 판결인데 3월7일 사망했다고 하면서 7일간 단식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성범 의병대장의 투쟁과 ‘사형집행’과의 상관관계는 정부에서 당시의 문서를 면밀하게 재조명하여 역사를 밝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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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대장 전성범의 발자취를 재조명하자
조선말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외세를 막기에는 너무 힘이 없었지만 조선민중은 삽과 곡괭이 죽창을 나눠들고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조정에는 이완용 등 오적도 있었지만 민영환 등 자결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지방에서도 을사늑약 이후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으며 그 앞에는 존경받는 양반유생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많이 배운 이들이 정세의 흐름도 빨리 알았지만 그만큼 역사적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면암 최익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선비로 경기도 사람이면서도 전라도 태인에 내려가 임병찬의 도움으로 의병대를 조직 전북일대와 충청 경상도까지 용명을 떨쳤다. 그가 기병했다는 사발통문이 돌자 각 지역의 유생들이 대거 합류했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한 사람이 함양출신 전성범(全聖範)이다.
그는 중군장이 되어 진안 금산 용담 장수 영동지역을 누비며 일본군을 격파했다. 최익현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가 19일간의 단식 끝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신이 부산부두에 도착할 때부터 충남 예산 선영에 도착할 때까지 철도연변은 상복을 입은 백성들의 행렬로 흰 구름처럼 너울거렸다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전성범은 비록 최익현이 순국했을지라도 일본군과의 싸움은 멈출 수 없다는 판단으로 박춘실 문태수 유종환과 함께 덕유산 적성산 천반산 성수산 등 진안 장수 금산 무주 등지를 누비며 일본군 300여 명을 사상시켰다는 기록을 보면 기습작전을 적절하게 활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험한 산세를 등지고 지형지물에 익숙한 향민들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후일 만주에서 벌어졌던 홍범도의 봉오동 대첩, 김좌진 이범석의 청산리 대승과 일맥상통하는 바 있다. 이들의 빛나는 전공(戰功)을 아로새기기 위해서 무주군민들은 1909년 공적비를 세웠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무주에서 공적비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성범 등 의병들의 투쟁이 백성을 감복시켰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비는 일본경찰의 손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1910년 의병대는 규모를 크게 늘려 서울로 진격하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으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8월29일 일본의 강제로 조선은 없어지고 조선총독부가 조선정부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의병대는 더욱 심신을 가다듬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충심 하나로 뭉쳤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땅을 치고 통곡한들 빼앗긴 나라를 되돌려 받을 길은 아득하다.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힘으로 격파하는 일이다. 마음만은 하늘을 꿰뚫고도 남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1911년 1월 장수 계북면 협곡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전성범은 증원 보강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추격대에 다시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받으며 7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끝내 의병대의 조직과 활약상에 대한 심문에 응하지 않다가 마침내 세상을 떴다. 1911년 3월7일이다.
일제에 강점된 후 불과 7개월도 채 못 되었다. 이는 전성범장군이 1982년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1990년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한 다음 묘소를 새로 조성하고 공적비 제막식을 거행하면서 1995년도에 발표한 준비위원회의 리프렛 자료에 나타난 것일 뿐이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유폐되어 있을 때 ‘단식’을 투쟁방법으로 택할 수 있었지만 감옥에 수감된 이후에는 전면단식은 불가능하다. 행여 불상사가 날 것을 염려한 형무소 당국은 강제급식이라는 비상수단을 아무 때라도 사용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긴급조치로 수감되었을 때 영등포교도소에서 정치범 33명이 일제히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던 일던 사건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강제급식을 당했다. 따라서 전성범 의병대장이 단식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후인들의 추측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것은 근자에 새로 발견된 전성범 재판기록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국기기록원에 보관된 서류에 따르면 ‘명치44년형상제21호’ 고등법원 판결은 3월2일 재판장 암야신평(岩野新平)등 5인의 판사가 서명 날인했다. 1심에서 이미 교수형 선고를 받고 항소한 건인데 이를 기각한다는 내용이다. 사형을 확정한 것이다.
일제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강의규의사 등 조선독립 운동자를 사형선고가 내리는 즉시 상소조차 못하게 하고 즉시 교수형을 집행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 왔다. 전성범은 을사늑약 이후 계속적으로 의병대를 이끌어가며 신출귀몰하는 작전을 수행해왔던 경상도 함양의 양반출신이다.
조선총독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조선백성을 공포 속에 몰아넣어야만 무서워서 반항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의병대 수괴 중의 수괴인 전성범장군을 전격적으로 처단하여 조선민중을 벌벌 떨게 해야 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 뒤에 이어진 105인 사건도 조선총독부의 공포 위협작전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더구나 3월2일 판결인데 3월7일 사망했다고 하면서 7일간 단식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성범 의병대장의 투쟁과 ‘사형집행’과의 상관관계는 정부에서 당시의 문서를 면밀하게 재조명하여 역사를 밝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전대열 大記者 news@ej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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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범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전성범은 1870년 6월 13일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5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킬 때 가담하여 중군장을 맡았고, 1907년 7월 거창 일대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안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의병 50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당하는 참패를 겪었다. 이후 진주 의병장 유종환과 연합하여 용담, 금산, 영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1909년 2월 안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4월에는 거차에서 접전을 벌였다.
1911년 1월 양악(陽岳, 현재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뒤 탈옥을 시도했으나 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11년 4월 5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전성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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