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일본 속 우리 고대사⑨ ‘오미쿠지’의 원조는 한반도 거쳐간 ‘육효점(六爻占)’
일본인들은 점 치기를 즐겨 해서 시간만 나면 신사나 사찰을 찾아 기도하고
산통을 흔들어 오미쿠지를 뽑는다. 한 사람이 커다란 산통을 흔들어 오미쿠지를 뽑고 있다.
(왼쪽사진) 읽고 난 오미쿠지는 옆에 있는 나뭇가지나 특설대에 매달아 액땜을 한다.
일본인만큼 ‘점(占)’을 좋아하는 국민도 드물 성싶다. 도쿄(東京) 번화가 신주쿠(新宿)의 대형 백화점 1층에도 버젓이 점집이 자리 잡고 있을 정도다. 백화점 1층은 자릿세가 엄청나 주로 유명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브랜드가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점집이 얼마나 장사가 잘되는지 두어 곳의 점집이 이들 화장품 가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서 있다. 그뿐 아니다. 저녁이면 백화점 앞 인도에도 자그만 좌판에 촛불을 켜고 앉아 손님을 맞는 남녀 점쟁이가 줄을 선다.
신사에도 점집이 있다. 신사 정문을 들어서면 처마에 큼직한 간판을 단 작은 전각에서 흰 두루마기에 붉은 통치마를 입은 젊은 무녀(巫女) 몇 명이 앉아 점을 치러 온 손님 맞기에 바쁘다. 그 옆에는 어김없이 ‘산통(算筒)’ 서너 개를 놓아둔 좌판이 있다. 산통은 주역에서 비롯한 육효점(六爻占)을 볼 때 쓰는 도구다.
일본의 산통은 보통 여덟모 난 나무통이다. 산통에는 1에서 8까지 숫자를 매긴 산가지가 담겨 있다. 보통 100∼200엔을 내고 산통을 흔들어 젓가락처럼 생긴 산가지 하나를
뽑아 무녀에게 건네면 해당 숫자에 맞는 ‘오미쿠지(おみくじ)’를 꺼내준다. 오미쿠지는 사랑이나 취업 등 갖가지 운세를 적어 놓은 작은 종이쪽지다.
점을 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한국 못지않게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리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틈을 내어 신사나 절을 찾아 신(神)이나 부처님께 간절히 취업을 빈다. 대학생은 물론 고교생이나 여성도 줄을 잇는다. 제각기 소망은 다르겠지만 여성들은 특히 결혼 상대를 만나기를 소망하며 ‘사랑점(戀みくじ)’ 점괘를 뽑느라 산통 앞으로 몰린다. 오미쿠지를
읽고 나면 인근 나뭇가지나 따로 마련한 자리에 묶어두고 신이나 부처님에게 인생의 길흉화복을 기원한다. 자신의 액운을 제거하거나 소망을 기원하는 문화다. 요즘에는 더러 산통 대신 오미쿠지 자판기도 등장했다.
일본 신사에서는 오미쿠지 외에 ‘에마(繪馬)’라는 작은 네모 혹은 마름모꼴 혹은 동그란 나무판을 판다. 이 에마에 붓으로 자신의 소망을 적어 신사 경내의 신당이나 에마 수집대에 걸면 신령이 취업이나 진학, 행복한 결혼, 상업 번창과 부귀영화를 도와준다고 한다. 신사나 사찰에서는 액막이 부적의
일종인 각종 활과 화살 등도 판매한다. 이를 사다 집안에 걸어두면 마귀를 내쫓고 가정의 행복이 온다는 믿음이 있다. 각 신사가 받드는 제신(祭神)의 가호로 액운을 없애준다는 화살 명칭도 제각각이다. 마귀를 파괴해 없애준다는 뜻의 ‘하마야’가 있는가 하면, 천신의 화살이라고 부르는 ‘덴진야’도 있다. 특히 액운이 든 해에는 이 활을 사서 신관이나 스님에게 가호의 기도를 요청해도 된다. 수험생들은 ‘입학 성취’의 기도를 받기도 한다. 이 액막이 화살을 사 자동차에 걸어놓고 교통 안전을 기원하는 이도 있다.
일본
가정에서는 이처럼 대부분 신이나 부처님을 믿는다. 그런데 불교는 물론 신도 역시 고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 오늘날 한국에는 신도(神道)를 믿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하다. 일제하에서도 대종교(大倧敎) 등의 이름으로 명맥을 잇던 고조선의 천신신앙, 즉 단군 신도는 오히려 해방 후로는 그 존재가 희미해졌다. 근세에 들어와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면서 일제하에서 탄압을 받았던 기독교가 해방 후 왕성하게 전파된 것과 사뭇 다르다. 반면 일본에서는 기독교 교회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나라(奈良) 시대(710~784)부터 큰 신궁 안에 신궁사(神宮寺)라는 불교 사찰이 함께 자리하면서 이른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모습으로 신도와 불교를 함께 신앙했다. 그러다 메이지(明治)유신 당시 군국주의 정권이 신도와 불교를 공권력으로 갈라놓는 이른바 ‘신불분리령’(1868.3.17)을 내리고 무력으로 신궁사를 파괴하는 작태를 저질렀다.<본지 3월호 참조> 황국 신도(皇國神道) 국가를 내세운 국수적 군국주의자들이 한반도에서 전래한 불교를 탄압하기 위한 횡포였다.
그러나 신불습합 정신은 뿌리가 워낙 깊어 오늘날에도 일본 가정에서 더러 목격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가정에서는 불상과 조상님을 모시는 ‘부쓰단(ぶつだん, 佛壇)’을 반드시 설치했다. 이 부쓰단을 설치한 가정에서는 대부분 ‘가미다나(かみだな, 神棚)’라는 신도의 제단을 함께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쓰단이나 가미다나는 거실 한쪽 벽에 선반을 달고 그 위에 설치한 자그마한 제단이다. 신도의 부적이나 불상, 조상님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고 때마다 제사를 지낸다. 부쓰단이나 가미다나에는 소형 향로·꽃병·촛대·차탕기·불반기(밥그릇)
등을 간소하게 차려놓는다.
정월 초하룻날과 ‘오봉(おぼん, 8월 13~15일, 일본의 추석)’에는 조상신에게 드리는 제사인 ‘센조마쓰리(せんぞまつり)’를 정성스럽게 거행한다. 특히 정월 초하루에는 가미다나에 ‘오세찌 료오리(おせちりょうり)’라는 설날 음식을 준비해 신년 신(토시가 미사마, としかみさま)에게 바친다. 오세치 료오리로는 신주(神酒)와 둥글게 빚은 찹쌀떡인 ‘가가 미모치(かがみもち)’ 등이 있다. 제사가 끝나면 ‘하쯔모우데(초もうで)’라고 하여 신사나 사찰에 들러 참배하며 1년간의 행복을 기원한다.
달력조차
없던 야마토(大和) 왕실
오미쿠지를 널리 전파한 료겐대사의 생가 대문. 로겐대사는 912년 오우미(近江·지금의
오쓰 일대) 땅 히가시아사이(東淺井)의 명문 모노노베(物部)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모노노베 가문은 고대 일본 조정에서 소가(蘇我) 씨와 함께 권력을 나눠 가졌던 가문이다.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아베 마사미치(阿部正路) 교수는 “오미쿠지는 기도하여 신의 뜻을 물어 선악길흉을 알고자 하는 점이다. 여러 개의 대나무로 만든 산가지를 산통에 넣고 흔들어 바닥의 작은 구멍에서 한 개를 뽑아 결정하는 제비뽑기”(<일본의 신령님을 아는 사전(日本の神樣を知る事典)> 2002)라고 했다. 이 산통의 원조 역시 고대 한반도다. ‘육효점(六爻占)’이 일본으로 건너가 산통의 원조가 됐다. 문헌적 근거는 7세기 초인 603년 10월의 기록이다. 당시 백제계 스이코(推古,
재위 592∼628)천황의 아스카(飛鳥) 조정으로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 달력과 천문지리와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의 책을 가져왔다”(<一代要記> <扶桑略記> <元亨釋書>)는 내용이 여러 고대 기사에서 확인된다.
관륵 스님은 학문에 정통한 고승으로 스이코 천황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당시 왜에서는 왕실에조차 달력이 없어 해가 뜨면 새 날이고 해가지면 밤이며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어둠의 세월’이었기 때문에 스님이 가져온 달력은 삶의 새로운 빛이 되었다. 그런데 관륵 스님은 달력 말고도 둔갑방술 관련 책도 가져왔다.
‘방술’이란 인생과 운명을 점치는 점복(占卜)을 말한다. 스이코 천황은 총명한 젊은이 3~4명을 뽑아 관륵 스님에게 보내 문하에 두고 가르쳐달라고 소망했다.
특히 스이코 천황의 생질이자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聖德, 574~642)가 관륵의 드높은 학문을 존중해 간청하자 스님은 거절하지 못하고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치게 되었다고 옛 문서에 명기돼 있다.
관륵은 세 명의 제자 가운데 타마후루(玉陳)에게는 역법(曆法) 을, 코소(高聰)에게는 천문(天文)·둔갑(遁甲)을, 히타테(日立)에게는 방술을 지도했다. 천문·지리야말로 장차 왜의 국가 기틀이 되는 최초의 법령 제정이며 국토 발전에 관계가 큰 소중한 학문인 만큼 관륵은 제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배우게
했다.
어느 날 관륵이 스이코천황에게, 22년 뒤인 “스이코 32년(624) 4월 사문(沙門·승려)이 조부(할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이 생긴다”(<扶桑略記>)고 예언했다. 과연 영묘하게도 꼭 22년 만인 624년 관륵의 예언대로 사건이 발생했다.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스이코 천황 32년조에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밝혀놓았다.
스이코 32년 4월 3일 한 승려가 과연 도끼로 조부를 살해했다. 여왕은 우대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를 불러 “출가한 자는 오로지
삼보에 귀의해 계율을 지켜야 하거늘 하물며 아무 주저함도 없이 쉽사리 악역(惡逆)의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랴. 듣자 하니 승려가 조부를 도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모든 절의 승니(僧尼, 남녀 승려)를 모아 제대로 조사하시오. 사실이라면 그들을 모두 엄중하게 처벌하시오”라고 명했다. 그러자 관륵이 여왕에게 상주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인도로부터 한(漢)으로 전해졌고, 300년이 지나 백제국에 전해졌으며, 백제왕은 왜왕에게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왜의 불교는 아직 100년도 채 안 되는 72년입니다.
때문에 승니들이 아직도 법리에 익숙하지 못해 악역의 죄를 범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승니가 다만 두려워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나이다. 악역의 죄를 저지른 자 외에는 부디 모두 용서하시고 죄를 묻지 말아주십시오. 그것이 부처님의 공덕이옵니다.”
스이코 천황은 관륵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 열흘 뒤인 4월 13일 여왕은 “도를 닦는 사람도 법을 범할 수 있도다. 이러하거니 과연 무엇으로 속인(俗人)을 가르칠 것일런가? 금후로는 승정(僧正)과 승도(僧都) 등을 임명해 승니들을 통괄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이어 여왕은 4월 17일 관륵 스님을 승정에 임명하고, 덕적(德積)을 승도(僧都)로, 법두(法頭)에는 아운련(阿雲連)을 임명했다. 이때 사찰은 46개소였고 남승 816명, 여승 569명이었다.(<扶桑略記>) 백제 고승 관륵에 의해 왜에 최초로 승려의 직제가 생긴 것이다.
왜 왕실에서 율령(律令)국가로서의 법률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스이코 천황의 아스카 왕실에서 관륵에 의해(飛鳥御原律令)서였으나 당시의 조문은 전하지 않는다. 뒷날 다시 반포된 것이 700년의 ‘다이호리쓰료(大寶律令, 율 6권, 령 11권)’이지만
이 역시 극히 일부 조문(令集解 등)만 전한다. 뒤이어 등장한 율령은 718년 만들어진 ‘요로리쓰료(養老律令)’다. 이 율령을 만드는 데 공헌한 법학자이자 고등관료는 백제계 왕족 야코노 마미(陽胡眞身)다. 이 야코노마미가 바로 관륵 문하에서 역법을 배운 백제인 타마후루(玉陳)의 손자다.
요로리쓰료 제14편인 ‘고과령(考課令)’을 들춰보면 “방술은 점후의복(占候醫卜)”이라고 밝혀져 있다. 오늘날에도 사주를 보고 질병이 낫는다 혹은 못 고친다고 하듯 고대 한반도에서는 몸의 병도 점을 쳐 다스렸다. 이 방
이 관륵 스님에 의해 일본에 전파되어 뒷날 법령에까지 들게 된 셈이다. 이렇듯 해서 관륵 스님이 가르친 방술은 ‘산통점괘’로 21세기 현대 일본에까지 이어진다.
고승 관륵을 왜 왕실로 보낸 사람은 백제 무왕(武王, 600~641) 이었다. 당시 무왕은 선대(先代)인 성왕(재위 523~553)과 위덕왕(재위 554~558)에 이어 일본 땅에서 불교를 융성하게 하기 위해 학문을 지원하는 한 방편으로 존경받던 학승 관륵 스님을 왜 조정에 파견했던 것이다. 관륵 스님은 불교국가가 된 왜에서 최초로 최고위 승직인 승정이 되었다.
‘오미쿠지’를 널리 퍼뜨린 신라계 쓰노다이시(角大師)
오미쿠지 외에 ‘에마(繪馬)’라는 작은 나무판도 일본인들의 점 도구다.
에마에 붓으로 소망을 적어 신사 경내의 수집대에 걸어둔다.
신사나 사찰에서는 액막이 부적의 일종인 각종 활과 화살 등도 판매한다.
관륵 스님은 오늘날 일본에서 불교 전래뿐 아니라 천문학의 비조(鼻祖)로도 추앙받는다. 1993년 일본 도쿄천문대 교수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郞) 박사는 그 무렵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에 관륵 스님의 이름인 ‘칸로쿠(Kanroku)’라는 이름을 붙여 국제 천문연맹(IAU)에 등록했다. 그만큼 관륵 스님은 불교 포교는 물론 천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일본 문화 형성에 기여해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다.
지난 1월 18일 필자는 일본 교토(京都) 동북쪽 히에이산(848m) 정상의 명찰 엔랴쿠지(延曆寺) 경내 북서쪽 후미진 계곡에 조용히 안긴 작은 사당 ‘소이도(走井堂)’를 찾아갔다. 소이도는 관륵 스님이 왜에 전해준 육효점 산통을 뒷날 세속적으로 널리 전파시킨 주인공 료겐(良源, 慈惠大師 912~985) 대승정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일본 신사나 사찰마다 설치돼있는 점집의 오미쿠지를 고안해 낸 사람이 바로 료겐이다. 그런데 료겐은 신라인의 후손이다. 일찍이 백제 고승이 전한 점술법을 300년 뒤 세상에 널리 전파시킨 사람이
신라계 인물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료겐의 사당인 소이도 앞에는 ‘액막이대사(厄除け大師), 오미쿠지대사(おみくじ大師) 규호지(求法寺)’라는 긴 표제의 해설판이 세워져 있다. 이 해설판에는 “료겐 대승정은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씌어있다. 옆에는 ‘뿔대사(角大師)의 유래’라는 두 뿔이 솟고 뼈대만 남은 인체 모습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그 옆에 선 비석에는 오미쿠지의 유래와 뿔대사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서기 984년 전국에 몹쓸 병마가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신음하며 죽어갔다. 이에 료겐 대사께서는 병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조용히 큰 거울 앞에서 합장하고 기도했다. 그러자 얼마 후 대사의 몸뚱이가 저절로 거울 속으로 들어가 점점 점점 변신하더니 뼈만 남은 도깨비(夜叉)로 바뀌었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 중 아자리(밀교의 비법 전수자)가 재빨리 그 모습을 붓으로 그렸다. 그러자 대사는 제자들에게 서둘러 자신의 뼈만 남은 도깨비 모습을 나무판에 새겨 판본을 만들게 하였고, 대사는 이 ‘야차 그림’을 찍어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찰(부적)을 집에 갖다 붙이자 집 안에
숨었던 병마들이 겁을 먹고 모두 사라졌다. 그 이후 1000여 년 동안 사람들은 대사의 부적을 ‘뿔대사’로 추앙하며 호부(護符)로 삼았고 이후 병마와 온갖 액을 퇴치해주는 영험한 ‘오미쿠지’로 전국에서 받들게 되었다.”
1 규슈(九州) ‘가와라다케(香春岳)’의 ‘가와라진자(香春神社)’ 어귀에 서 있는
돌비석에는 “신라 국가신께서 이 고장 가와라(河原)로 건너오셔서 가와라신(香春神)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내용이 음각으로 또렷이 새겨져 있다. 2 백제의 관륵 스님이 전한
오미쿠지를 세속에 널리 전파한 료겐대사가 뿔대사로 변한 이야기를 전하는 돌비석.
오미쿠지의 유래를 설명한다. 3 오미쿠지 발상지를 알리는 비석.
료겐 대사의 드높은 학덕은 그의 저서 <고쿠라쿠구힌 오조기(極樂淨土九品往生義)>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 저술은 대사가 쓴 일본 최초의 관음경(觀音經) 주석서로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대사의 전기인 <시케이다이조쇼덴(慈惠大僧正傳)>은 에도(江戶)시대(1603∼1867)에 간행된 고문서 총서인 <군죠루이주(群書類從)>에 들어 있다. 료겐 대사를 칸산다이시(元三大師)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스님이 음력 정월(元旦) 초삼일에 입적한 데서 근거해 일본 왕실이 내린 사성(賜姓)이다.
교토국립박물관의 가게야마 하루키(景山春樹) 박사는 료겐 대승정의 발자취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료겐은 912년 오우미(近江·지금의 오쓰 일대) 땅의 히가시아 사이(東淺井)의 명문 모노노베(物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2살에 히에이산 서탑보당원(西塔寶幢院)에 입산함으로써 고승직에 오를 수 있는 ‘일산대중(一山大衆)’에 들어섰다. 일산대중의 길은 중앙 또는 지방의 명문가 출신 자제에게만 한정됐다. 료겐은 55세인 966년 히에이산의 대가람 엔랴쿠지의 제18대 천태종(天台宗)
좌주(座主·최고위 승려)가 되었으며, 985년 음력 1월 3일 입적하기까지 19년 동안 교학(敎學)의 번성과 대가람의 부흥 등 실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렇기에 후세의 전기에서 그를 가리켜 ‘권자(權者·신 또는 부처가 인간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라고 찬양했다.”(<比叡山と宗敎その歷史> 1970)
모노노베 가문은 신라인(<新撰姓氏錄> 815)이며, 일본 왕실에 백제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토종 신도(神道)를 일으켜 받들었다. 토종 신도라는 천신신앙의 발자취는 신라 천일창 왕자의 고조선
신도인 ‘곰신단(熊神籬)’에서 이어져왔다고 본다.
오미쿠지를 고안해낸 료겐 대사의 히에이산 터전은 오늘날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으로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찰이다. 10세기의 고승 료겐은 8세기 말 히에이산에 일본 최초로 천태종 가람을 일으킨 덴쿄다이시(傳敎大師) 사이초(最澄, 767∼822)의 큰 뜻을 받들면서 뒷날 ‘요가와 대강당’을 세우는 등 가람을 크게 발전시켜 명성을 얻었다. 가게야마 하루키 박사는 “료겐은 강당의 완성과 동시에 각지로부터 우수한 학생을 불러 모아 해마다 춘하추동 네 번 몸소 이곳에서
대승(大乘)경전을 강설하고 법화강문(法華八講의 論議)의 법식에 따라 시문(試問)했는데 이를 ‘4계강’이라고 불렀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잠시 히에이산 대가람의 뿌리를 이룬 초창자 덴쿄다이시 사이초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사이초는 803년 4월 16일간 무천황(재위 781∼806)의 칙허를 받아 승려로서는 최초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구다라스(百濟洲·지금의 오사카부)의 ‘나니와쓰(難破津)’에서 배를 타고 찾아간 곳은 당나라가 아닌 규슈(九州) ‘가와라다케(香春岳)’의 ‘가와라진자(香春神社)’라는
신라신을 받들던 사당이었다. 사이초는 당나라 유학을 마다하고 “이곳에서 1년 3개월 동안 ‘신라명신(新羅明神)’을 모시다 804년 7월 6일 신라배를 얻어 타고 드디어 당나라로 떠났다”고 옛 기록(<叡山大師傳>)은 전한다.
이 무렵 일본의 학승이나 사절은 항해 선진국이었던 신라배를 빌려 타고 당나라나 신라를 오갔다는 것이 고문헌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규슈대 불교사학과 다무라 엔쵸(田村圓澄) 교수는 “유학승들은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도 신라를 경유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일정기간 신라의
왕도 경주에 체류했을 것이다. 때문에 신라불교가 일본으로 전해지는 길도 열렸다”(<古代日本佛敎と朝鮮佛敎> 1985)고 주장했다.
사이초는 유학을 무사히 마치고 9년째인 814년 다시 규슈의 가와라 다케 사당으로 찾아가 이번에는 그 스스로 ‘가와라 신궁사(香春神宮寺)’라는 사당 겸 사찰을 창건하고 신라명신을 함께 모셨다. 신령님과 부처님을 합사하는 이른바 ‘신불습합’이라는 왕실제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신궁사’다. 신(神)과 불(佛)은 일심동체라는 종교관에서였다.
지금도
이 사당터 어귀에는 고대부터 ‘신라국가신(新羅國神)’을 모신다는 큼직한 돌비석이 서 있어 세인의 눈길을 모은다. 비석에는 “예전 신라 국가신께서 이 고장 가와라(河原)로 건너오셔서 가와라신(香春神)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내용이 음각으로 또렷이 새겨져 있다.
필자는 2009년 7월 중순 규슈 내륙 산간지대의 가와라 신사를 직접 방문해 아카조메 다다토미(赤染忠臣) 궁사를 만났다. 그는 담담하게 “신라 국가신의 발자취는 고대 역사문서(<豊前國風土記>逸文)에 신라 국가신(辛國息長大比賣大自命)이라고
상세하게 전합니다. 신라국신께서는 스진천황(崇神, 기원전 90~기원전 30) 당시 이곳 저희 사당터인 가와라산 제1악(岳)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잘 모시고 있습니다. 이 사당이 처음 선 것은 겐메이 천황(元明, 재위 707~715) 2년(708)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카조메 궁사는 이어 “신라국신의 이름 표기 중에 신라를 ‘가라쿠니(辛國)’라고 썼는데 일본 고대 문헌에서는 모두 신라 국호를 이와 똑같이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카조메 궁사는 나아가 고문서(<太宰管內誌>)를 근거로 자신이
“고대부터 신라국신 제사를 모신 신관 가문인 아카조메(赤染) 가문의 직계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대대로 신라명신(新羅明神) 받들던 신라계 고승들
▶1 당나라 유학을 마친 사이초 대사는 교토로 가지 않고 가와라로 돌아와 가와라진자 경내에 ‘가와라신궁사’를 창건했다. 사이초 대사가 창건한 신궁사 자리에는 지금은 다른 전각이 서 있다. 이 전각도 수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연륜을 자랑한다.
2 신라국신을 모시는 규슈 가와라다케의 가와라진자 본전.
신라 국가신을 모신 가와라진자(福岡田川郡 香春町 香春 1308)에 대해서는 여러 저명 사학자가 예전부터 큰 관심을 갖고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후쿠오카(福岡)의 ‘JR하카타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산속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승용차가 없다면 초행길에 오지의 산골 도로를 찾아가기에는 매우 힘겹다.
고대 일본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을 받든 고승으로 유명한 것은 사이초를 정점으로 그의 제자였던 역시 신라계 고승 엔닌(圓仁, 慈覺大師 794∼864)과 또한 신라계 고승 엔친(圓珍, 智證大師 814∼891), 그리고 이들보다 100여 년 후의 인물로 앞에서 소개한 료겐 대사가 그들이다.
이들 고승은 모두 일본 땅의 신라인 후손이다. 엔랴쿠지로 유명한 히에이산 일대는 한마디로 고대 신라 고승들의 터전인 셈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신라명신을 모신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창설자 덴쿄다이시 사이초의
문하를 계승했던 것이다.
왕명으로 당나라 유학길에 신라국신의 터전인 규슈 오지의 가와라(河原)로 찾아갔던 고승 사이초. 더구나 그는 귀국해서도 왕도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京都)로 돌아가지 않고 가와라로 돌아와 ‘가와라 신궁사’를 창건했다.
이 지역의 지명은 현재는 가와라(香春)로 쓰지만 예전에는 가와라(河原)였다. 이 지명에 대해 저명한 고대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는 여러 고대문헌을 인용해 “가와라는 고대 신라어 ‘가구 펄’에서 왔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가구펄은 ‘강벌(河原)’로, ‘강가의 벌판’을 뜻한다고 보았다. 규슈에서는 ‘바루(原)’라는 글자가 붙은 지명이 이르는 곳마다 있을 정도로 매우 많은데, 바루는 우리말 ‘벌(原)’이 전화된 것으로 본다. 그 대표적 유적이 ‘사이토바루(西都原, 1910년대에 발굴된 고대 한국고분지대)’이다.
가와라 신사에서 왼쪽으로 셋째 산인 제3악은 현재는 폐광했지만 고대부터 ‘구리광산’으로 유명했다. 이 산에서는 또한 시멘트 생산도 널리 알려졌으나 역시 현재는 쇠퇴했다. 구리광산의 발자취에 대해 도쿄여대 사학과
히라노 쿠니오(平野邦雄) 교수는 “가와라신(香春神)은 신라국신이며 하타씨(秦氏)가 제사를 모신 동산신(銅産神)이었다”(‘秦氏硏究’(1) <史學雜誌> 70권 4호)고 지적했다.
‘가와라 신궁사’를 세운 덴쿄다이시 사이초는 히에이산 동쪽 기슭 마을에서 신라인 오토모(大友) 가문 ‘미쓰노 오비토모모에’(三 津首百枝, 8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미쓰노 오비토고야(三津首廣野)’다. 오우미 땅 ‘사카모토(坂本)’에 자리잡은 지금의 ‘쇼겐지(生源寺)’라는 사찰이 그의 생가다. 이 지역은 신라인 호족
집단 오토모 가문이 오랜 역사를 이어온 터전이다.
주목할 사실은 “오토모 가문에서는 고대로부터 이 고장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받들었다”(太政官牒 ‘天台座主記’ 866)는 고문서 내용이다. 그러나 엔랴쿠지 언덕길의 큼직한 그림 간판 중에서 어린 사이초가 ‘쇼겐지’에서 탄생하는 그림에는 황당하게도 사이초가 ‘중국인’으로 씌어 있다. 일본인들의 상투적인 역사왜곡이다.
현대 사학계에서 덴쿄다이시 사이초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입증한 사람은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1917∼83) 교수다. 이노우에 교수는 고대 일본 고승들은 거의 모두 한반도 출신임을 고증했다. “고승들은 조선인 출신으로 도지(道慈)를 비롯해 치코(智光)·게이(慶俊)·킨조(勤操)·도조(道昭)·기엔(義淵)·교키(行基)·료헨(良弁)·지쿤(慈訓)·고묘(護命)·교효(行表)·사이초(最澄)·엔친(圓珍) 등이다”(‘王仁の後裔 氏族と佛敎’ 1943). 이 논문은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의 도쿄대 사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으로 사학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석좌교수. 일본 센슈대학 대학원 국문학과 문학박사. 한국외국어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단국대 대학원 일본역사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왕인학회장, 한일천손문화연구소장. 저서로 <일본문화사신론> <일본 속의 백제>(총3권) <메이지 유신의 대해부>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만든 일본국보> 외 다수다.
(월간중앙 201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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