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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상흔과 이상향의 지향
- 김왕노 시인의 근작시를 중심으로
박현솔
욕망은 인간 존재가 결핍의 상태에 있으면서 무언가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얻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대표적 견해 외에도 생산적 활동성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모방적 경쟁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금기를 위반하려는 정념으로 보기도 한다. 인간의 삶에서 생존이나 생식, 사회적 성격을 갖는 이 욕망은 인간 존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사랑의 욕망은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각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사랑의 감정과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상대에게 전달되어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일 때 사랑의 감정은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사랑이 상대에게 조금 부족한 것이거나 너무 넘치는 것일 때 그 사랑은 완성되지 못하고 어긋나거나 실패하게 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어떤 상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사랑의 욕망을 갖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무의식의 측면에서 볼 때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서 이상향을 지향하고자 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결핍의 감정을 느낀 한 사람이 어떤 대상을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신의 결핍을 충족하고 행복을 느낀다면 이것은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지향을 통해서 어떤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근원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이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상향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한 개인이 사랑의 욕망을 갖는 근본적 이유와 상통한다.
1990년대는 탈산업화의 사회로 특유의 소비문화가 형성되었고 과학기술과 매체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또 사회 전반의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지만 금융 위기로 인해 IMF의 구조 조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문학에서는 자본주의에 따른 개성과 자유, 개인주의, 감각 등을 주요 주제로 삼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형식적으로는 영상기호와 이미지를 적극 차용하였으며 신세대 시인들과 여성 시인들의 창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산업사회의 기계적 분화와 도시화는 인간의 삶을 파편화하고 사회의 구조에 맞게 유형화하고 도구화시키며 이로 인한 개인의 고통과 상처는 극복되지 못하고 소외감으로 고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90년대의 시대적, 문학사적 흐름 속에서 등단을 하고 다양한 욕망들을 제시하면서 자신만의 시세계를 확보해 나가고 있는 시인으로 김왕노 시인을 꼽을 수가 있다. 김왕노 시인은 첫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에서속세의 도시와 비현실적인 사이버공간, 지구 밖의 세계를 보여주고, 욕망하는 자아와 꿈을 잃어버린 자아를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시집 말 달리자 아버지에서 첫 시집보다 가족사가 많아지면서 시적 세계가 다채로워지고, 사랑에 대한 추억과 결핍에 대한 인식이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세 번째 시집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에서는 사랑의 열정이 넘치는 것에 반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실체가 없는 사랑으로 마음속에 상흔이 남는 형태가 주로 보이며, 네 번째 시집 그리운 파란만장은 사랑에 대한 인식이 점차 성숙해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이 시집에서는 혁명과 이상향 등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다섯 번째 시집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에서는 죽어서야 이룰 수 있는 율희와의 사랑을 통해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아버지의 젊은 시절 무용담과 북벌의 이야기들을 서사적으로 드러내어 시인이 이상향을 지향하게 된 계기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김왕노 시인이 보내온 근작시 8편에는 자신의 과욕으로 인한 욕망의 좌절,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상흔들, 숙명적인 원죄의식과 단죄 의지, 사랑을 지향하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 도피처이면서 이상향인 특정 공간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1.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 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는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이차는 햇살에
한 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 째 뚝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 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 「낙과」 전문
화자는 낙과의 원인을 “미친 돌개바람”보다도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화자의 눈에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는 그냥 낙과가 아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인해 “꿈을 꼭지 째 뚝 따버린 것”이다. 무슨 일이든 “꽃 시절”을 지나 “환희”와 “영광”과 “고통”의 시간을 거쳐야 제대로 된 열매를 맺게 되는데 아직 무르익지 않은 일을 성급하게 마무리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반성하는 시들이 몇 편 더 눈에 띤다.
시인은 「붉은 경로」라는 시에서 자신을 “어느 별에서 왕좌를 노리거나 왕비를 흠모하다 들켜/어둑한 별들을 스쳐 여기 유배되어 왔을 것이다(…)내 딛고 있는 이 별은 불모의 땅이라고 종말의 별이라고/내 떠나온 별을 향해 끝없이 텔레파시를 보낸다(…)아마 나는 계급타파를 꿈꾸었을 것이다/역적모의에 가담하거나 혁명의 전사를 키우며 빛나는 눈동자로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오래 전에 “계급타파”와 “역적모의”와 “혁명”의 꿈을 꾸었지만 그것들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이곳으로 유배를 온 화자는 그 순간들을 후회스럽게 떠올린다.
또한 무모한 꿈을 꾸고 있는 과정에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알 수가 없다는 「폐교」와 「파라다이스 폐차장」이 있다. “나는 폐교다. 교정에 잡풀만 무성히 우거져 도둑공부하고 싶어 창가를 기웃거리는 폐교다(…)꿈의 피딱지가 말라붙은 폐교다. 운동장 모퉁이의 수국에게 하늘을 칠판 삼아 가갸거겨 오요우유를 가르치고 싶은 폐교다.(…)다시 분교나 본교가 되고 싶은 낡고 오래된 폐교다.” (「폐교」)에서 꿈의 완성을 기대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활력과 의욕을 잃어버린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폐차들/시루떡같이 겹겹이 쌓여 있다. 질주의 끝이 이곳이라는 것을/우리는 몰랐다는 것을(…)과속을 할 때마다 헐떡이며 절정에 도달했을 때/그때쯤 그만두어야 하는데/따지면 무얼 그만두어야 하는지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는데/결국은 속도의 끝이 정지라는 것” (「파라다이스 폐차장」)에서 차의 쓸모를 다한 뒤에야 알게 되는 속도의 비밀과 인생의 비밀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러한 삶의 과정들을 모두 지나고 난 후에 알게 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닌 작고 소박한 것들이다.
“채송화 피면 채송화만큼/작은 키로 살자./실바람 불면 실바람만큼/서로에게 불어가자./새벽이면 서로의 잎새에/안개이슬로 맺히자./물보다 낮게 허리 굽히고/고개 숙이면서 흘러가자/작아지므로 커지는 것을/꿈꾸지도 않고/낮아지므로 높아지는 것을/원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작은 당부」)에서도 작은 것에 만족하고 겸손을 잃지 않는 삶이 진정 의미 있는 삶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시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은 욕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욕망이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아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거창하고 대단한 것에만 꿈의 가치를 두기보다 작고 소박한 것들에서 꿈을 발견하고 그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2. 시간은 증오마저 향기를 품게 하는데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뚜렷해지는 기억의 잎맥들
난 꽃잎을 그렸다가
네 얼굴을 그렸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가 죽을 정도로 보고 싶다고 했다가
죽이고 싶도록 사랑한다고 했다가 널 만난 걸 후회한다고 했다가
심한 발작을 일으키는 추억을 다독거렸다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동안에도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가는 지금도 그 백 년 전 꽃잎인가.
물기 머금은 듯 이 향기는
그리고 밤하늘에 무수히 마중 나온 저 별들은
나는 널 사랑하다가 죽어 버리려고 한 날들이 있었다.
너와 나는 서로를 통과해 멀어져 가는 안개라 한 적이 있었다.
서로를 축축이 적시다가는 네게 젖은 나를 뽀얗게 말린다고
바람을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 묻고 싶다. 내 안에 꽃잎의 발자국화석으로
남아있는 너의 흔적들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 「늦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부분
인간이 지닌 모순 중에 하나는 어떤 일을 겪을 당시의 가슴 아팠던 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이 흐릿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대상이나 일들이 새삼 이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무의식에 남아서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상대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 무심히 저지르는 잘못이 있게 마련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마음 지층에 남겨진” 그녀의 “발자국”이 “고열과 생의 무게”로 얻은 “화석”이고 “백 년 전”의 시간적 결과물이라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만도 한데 지금까지도 그녀는 화자의 기억 속에 살아서 심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쯤 되면 화자에게 그녀는 사랑이 아니라 상흔이나 다름없다.
시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 쌓인 상처들을 시로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치유받기를 원하였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 군대에서 받은 상처, 당국으로부터 받은 상처 등 지나온 삶 동안 알게 모르게 받은 상처들을 애써 감춘 채 남성적인 활달함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 오랜 상흔들을 들춰보면서 가끔은 솔직한 심정으로 “떠나지 않는다/밤이 오고 새벽이 와도/추운 기억이 내 안에 살고 있다/모두가 용서하거나/세월 저편으로 떠나보낸 것이 내 안에 잠들고 있다” (「형상기억합금」)고 고백한다.
“나는 차남이었다. 어릴 때부터 너는 소띠라서 일 잘한다 해 나는 소처럼 일했다. 먼 길 심부름도 내 몫이고, 물 길어와 물 항아리를 채우는 것도 내 몫, 장남인 형의 날은 책 속에나 있었고,(…)한밤에 광란 난 동생의 약 사오는 일도 내 몫이었다. 폭우 내리는 밤, 캄캄한 밤, 닫힌 약국의 문을 끝없이 두드리던 것도 내 몫이었다.” (「가족적 사기」)에서 그의 가족들은 밝고 건강한 화자의 에너지를 가족 구성원들을 위해서 유용하게 활용한다. 오랜 시간을 의심 없이 해온 일들이 어느 순간 거짓말에 의한 것임을 알고 화자는 심리적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있었던 일 중에서도 화자의 기억에 상흔으로 남은 일이 있는데 “나는 담요로 문을 가리고/밤새 불온서적을 읽었다./불온하지 않은 불온을/자꾸 불온하다고 나무라는/당국을 무서워하며 읽었다.(…)지금도 있다는 당국/나는 아직도 당국이 무섭다” (「당국」)에서도 몰래 불온서적을 읽던 일들이 강한 심리적 압박이 되어서 무의식중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
또한 군대에서도 일상적인 일들이 나중에 신체적 장애로 작용하는 불운을 맞게 되는데 “스물세 살 때 전방에서 전역해와 강가에 앉았을 때 강물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다. 용화동 타켓을 향해 155미리 곡사포를 쏘는 포병이었으므로 전역해도 귀 속에 새파랗게 살아 있는 포 소리, 강가에 있어도 가슴 여기저기서 아시엠탄 터지는 소리,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 소리, 추억엔 포 소리에 쓰러지는 풀들, 고막 나간 새들, 불임의 벌레들, 그들로 인해 강물소리 들리지 않았지요.” (「마흔에 강물소리를 듣다」)에서 최선을 다한 군 시절의 일들이 이후에 장애로 작용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화자는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모든 상흔들을 내면에 가라앉히고 자신의 삶에 더 집중해서 열정적으로 살아온 것 같다.
인간의 삶에서 매 순간 각자가 적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상황만 주어진다면 얼마나 평안한 삶이 될까. 그러나 인간의 삶은 날마다의 고군분투와 생존의 무게감과 치열한 경쟁을 치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배신감과 강박감과 육체적 장애 등은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삶이 그것 밖에 없다면 허무하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지만 인간에게는 시간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그때의 일들이 추억으로 변해간다. 김왕노 시인 역시 어렵고 힘든 시절을 지나면서 누적된 상흔들을 담담히 극복하고 때로는 그것들을 시의 자양분으로 삼으면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점이 더없이 귀감이 되고 있다.
3. 내 죄의 대가로 불의 잔을 내려달라
나는 서울로 압송하는 전봉준을 꽁꽁 묶었던 오랏줄
일획의 참회하는 뼈저린 글이다.
한 때의 과오로 평생 슬슬 기면서
기를 펴지 못하는 길로 꿈틀거리며 왔을 뿐이다.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봉준아, 봉준아 하면서
산천도 울고 녹두 꽃 뚝뚝 지고 청포장수 울었다는데
나는 피가 안 통할정도로 전봉준을 꽁꽁 묶었던 끄나풀
내 긴 몸으로 내 긴 몸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싶구나.
고부나 삼례쯤에서 자학으로 짓이겨지고 싶구나.
가도 가도 끊어지지 않고 닳지도 않고 허물 벗을 때마다
다시 빛나는 몸으로 살아나는 내 죄의 문양과 죄의 독니
스스로 삼킨 독으로 대역죄인인 나를 벌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대한 미련도 후회도 없이 삼킬 독
하나 나의 몸은 길지만 운명은 생각보다 너무 짧다.
- 「뱀의 전설」 전문
“뱀”과 유사한 “오랏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 시는 뱀의 원죄의식을 통해서 화자의 자의식에 어른거리는 참회를 조심스럽게 끄집어내고 있다. 전봉준이 동학운동에 실패하고 “서울로 압송”될 때 “산천”이 울고 민심이 절망에 빠져있었지만 화자는 권력에 동조한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참회의 방법으로 제 “몸을 사정없이 내”리치거나 “자학으로 짓이겨지”길 바랐지만 다시 살아나는 “죄”를 어쩔 수가 없어서 스스로 “독”을 삼키고 죄의 고리를 끊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죄의식과 참회의 정서가 드러나는 시들로 「그리운 불온」, 「비에 젖다」, 「불온서적」 등이 있다. 「그리운 불온」에서 화자는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그러나 내일이 오면 나는 그 무엇을 또 사칭해야 한다/슬프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이 빤한 방법 앞에 머리 조아리며” (「그리운 불온」) 깊은 참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비에 젖다」에서는 “비에 젖는다(…)젖어서 춥다/내 아들도 춥다/아버지는 긴 살을 가진 넓은 우산도 아니고/세상 속으로 삐죽 내민 처마도 아니고/젖은 몸 말려주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도 아니고/아니어서 나도 춥다” (「비에 젖다」)고 자책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의식과 참회의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불온서적」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내 주거지는 불온서적 안이었다./즐거움으로 탕진한 날도 축제가 끝나 꽃다발이 시들어간 날도/내 청춘을 할례 한 것도/저 꽃들의 순결을 짓밟고 물짐승처럼 웅크려 울던 날도/은하수가로 밀항을 꿈꾸던 날도(…)마음이 정박하면 미친 듯 피어나던 불온의 달맞이꽃/불온의 수태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용두질하던 허기진 욕망” (「불온서적」)에서처럼 모든 욕망이 몰아쳐간 곳에 화자의 죄의식과 참회의 양가적 감정이 존재한다. 그리고 죄의식과 참회의 다음 단계로는 스스로 삼킨 독으로 자신을 징벌하는 최후의 결정이 남아있을 뿐이다.
얼마나 더 슬퍼야 비극의 문장은 끝을 보여주나.
뼈와 살, 가난한 영혼마저 다 타버린다면
나로 인해 아픈 너를 놔두고 한 줌 재가 되면
먼별에서 불시착해온 거리 같고 세월 같은
꿈속에서나 만나는 너야,
차라리 불의 잔을 내려달라.
불의 잔으로 인해 내 긴 인중이 불길에 휩싸일 때
그것이 불의 축제고 즐거운 꿈의 제전이라 하자.
불의 잔을 내려 불온서적을 펼치고
죄에 이르게 한 달변의 내 붉은 혓바닥이여.
효지보다 더 가볍게 타오르고 때로는 핵분열처럼
순간적으로 타오르며 폭발하게 하라.
불의 독배를 들고 태양보다 더 이글거리게 하라.
불로 평정심을 찾던 재의 길로
죄의 길을 벗어나던 불의 쓰나미로
불의 잔으로
세상에 작별의 꽃다발을 미련 없이 던지더라도
불의 어금니에 숨통을 물어뜯기더라도
그리운 불의 잔이여.
불의 취기로 끝없이 방화하며 가자.
불을 거부하는 것은 순수도 진실도 아니라며
불바다가 된 서울로 한반도로 백두대간으로 세계로
거대한 불의 꼬리로 사정없이 후려치며 나아가고 싶구나.
쭉정이 같은 허접쓰레기 같은
이름이 타며 가세하는 불길의 힘으로
<중략>
오! 그리운 독배, 그리운 불의 잔이여.
- 「불의 잔」 부분
이 시에서 “한 줌 재” “불길에 휩싸일 때” “불의 쓰나미” 같은 시어들이 주는 뉘앙스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다비식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서도 죄에 대한 단죄나 징벌의 의식에 불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정화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가 있다. “죄”에 물든 육체와 정신을 새롭게 하려는 의지가 화자 자신에게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화자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모성으로 인해 세상에서 지은 죄가 깨끗하게 정화될 수도 있다
“어머니 주름진 얼굴로 삭아 내린 몸으로 다시 나를 낳으신다. 제발 이렇게 살지 말라고 다시 새롭게 살라고 어머니 다시 나를 낳으신다.(…)착하게 살라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 내 탯줄을 끊어 주실 힘이 없는데도 어머니 촛불 하나 켜놓으시고 정화수 한 사발 떠놓으시고 어머니 다시 나를 낳으신다.” (「어머니 다시 나를 낳으신다」)에서 오염되고 타락한 존재인 화자는 어머니의 기도에 의해서 태초의 순수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즉 화자의 죄의식과 참회와 단죄는 모성성(여성성)에 이르러서 완전한 재생을 경험하게 되고, 이것은 이후에 여성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이상향에 가닿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
김왕노 시인이 갖는 죄의식은 가족들을 위해서 온전히 희생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살았다는 것과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처세술을 익히다보니 그것에 능통하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참회의 마음으로 죽음과 같은 고통도 달게 받겠다는 의지를 가짐으로써 정화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단계들을 거치면서 시인은 스스로의 양심을 누르고 있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와 공동체를 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다.
4. 사랑이여,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네가 너의 희생으로 불새가 되는 꿈 접어도 좋다.
대신 내가 불세출의 꿈을 접고 불새 한 마리가 되는 것
빙벽이 막아선 밤을 녹이며 활활 타오르는 불의 노래 부르는 것
네가 잠든 언 하늘을 쩡쩡 깨뜨리며 밤새 타오르며 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꽃이라면 아득한 벼랑에
꽃으로 서고 새라고 하면 무한창공을 나는 새가 되었다가
난기류의 하늘에 깃털 몇 남기고 사라져도 좋다.
숨통까지 끊어놓는 불길에 휩싸여 그것이 사랑의 길이라며
어두운 밤하늘에 훨훨 날다가 재가 되는 불새가
사랑의 뜨거운 경전이고 깊은 사랑의 뿌리가 된다.
남자가 불세출의 꿈을 접고 제 몸을 아낌없이 태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둠을 태우려 세상에 방화하는 것
그것이 불의 사랑, 불새의 사랑, 불멸의 사랑이다.
- 「불새」 전문
김왕노의 초기시에서 사랑은 성적 이미지를 동반하면서 현대인들의 우울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데 이때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여성성은 안식을 원하는 시인의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고 중기시에서 사랑을 추억하는 단계를 지나 집착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때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환상 속의 사랑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후기시에서는 죽어서야 이룰 수 있는 사랑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사랑의 유형을 보여준다. 이는 현실적인 사랑이 점차적으로 확장되면서 죽음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에서 “불새”는 지상에서 지향하던 “불세출의 꿈을 접고”서야 도달할 수 있는 초월적 사랑을 상징한다. 그리고 불새는 지금 험난한 “사랑의 길”을 가고 있다. 앞에서 분석한 「불의 잔」에서 불은 재생의 의미를 갖는다고 했는데 지상에서의 사랑을 초월하여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는 “불새의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불멸의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화무십일홍이란 말 앞에서 울었다.
너를 그 무엇이라 부르면 그 무엇이 된다기에
너를 꽃이라 불렀으니 십장생인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중에 학이거나 사슴으로 불러야 했는데
나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전엔 몰라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나 십장생을 몰라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단명의 꽃으로 불렀기에 내 단명할 사랑을 예감해 울었다.
사랑이라면 가볍더라도 구름 정도로 오래 흘러가야 하는데
세상에나 겨우 십일이라니 십일 동안 꽃일 너를 사랑해야 한다니
그 십일을 위해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너는 내게 와 꽃이 되다니
꽃에 취하다 보니 꽃그늘을 보지 못했다니 너를 꽃이라 부르고
핏빛 꽃잎 같은 입술을 깨물며 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에메랄드 진주 비취 사파이어 마노
자수정, 남옥, 사금석, 혈석, 카넬리안, 공작석, 오팔, 장미석
루비도 있는데 너를 때 되면 시드는 꽃이라 부르고 울었다.
지는 꽃보다 더 흐느끼고 이별의 사람보다 더 깊고 길게 울었다
- 「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 전문
인간 존재와 언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이 시는 화자가 “화무십일홍”과 꽃의 “단명”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깊이 사고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꽃과 대척점에 놓여있는 “십장생”과 보석들의 시간적 간극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너를 때 되면 시드는 꽃이라 부르고” 사랑이 떠나간 이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상황이 아이러니를 유발하고 있다. 즉 “십일 동안 꽃일 너”와 “그 십일을 위해 너를 꽃이라” 부른 나, 그리고 그 모든 진실을 알아차리고 “열흘”을 운 화자가 사랑이라는 접점에서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자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십일 동안”만 “꽃”이지 않았고 “때 되면 시드는” 사랑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 사랑이 아쉽고 아직 미련이 남아있기에 꽃의 속성에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나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부르며 찾던 사람은 세상 건너편에 서 있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이나 전쟁터에서라도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라도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전문
이 시에서 인간 존재와 언어의 관계는 관념적이지만 화자는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에 주목하고 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처럼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호명해주는 사람의 가치를 당시에는 잘 모르고 있다가 사랑이 떠난 이후에야 그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번엔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려는 듯이 화자가 그 사람을 아름다운 언어로 호명한다. 그리고 마법처럼 그 사랑이 다시 찾아와서 “별로 떠올라” 화답하면 화자는 그 사랑을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다스려서 개인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열린 사랑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원초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사랑은 유한한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인간 욕망의 한계이다. 시인은 다양한 사랑의 유형 중에서 자신의 사랑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개인적인 사랑에서 불멸의 사랑, 관념적인 사랑, 초월적인 사랑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울타리를 열어젖힌 열린 사랑, 타자들에 대한 사랑, 공동체를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려 한다.
5. 활화산이 없어도 사랑이 뜨거운 애련리로
은마야, 가자, 헝겊으로 기운 꿈을 꾸더라도 왕관을 쓰지 않았더라도
총칼을 들지 않아 무기력해도 가자, 애련리로 신분도 명분도 없이 애련리로
솔밭으로 불어가는 바람처럼 지평선이 없더라도, 수평선이 보이지 않더라도
청미래 익어가는 애련리로, 늙은 시인이 별을 깎고 새벽으로 담금질해 시를
만드는 애련리로, 활화산이 없어도 사랑이 뜨거운 애련리로, 머위 잎이 푸른
애련리로, 빗방울에 풀 이파리가 즐거워하는 애련리로 가자, 애련리로
빛나는 모든 진리를 앞세워, 발달된 물질문명은 뒤로 두고 애련리로 가자
옷자락에 묻은 광장의 함성은 털어버리면서 데모대와 진압대가 겨루는
참혹한 풍경은 내려버리고, 우리 빛나는 이마로 애련리로 가자. 머뭇거렸던
물봉선화를 닮은 수줍은 한 시대야, 욕망에 찌든 모든 육체들아, 사랑들아
피신처를 제공했던 모든 담들아 무너뜨리고 애련리 가자, 우리 가고 나면
줄 장미 핀 세월이나 오게, 우리도 애련리로 가 애련리 물소리로 그간
더럽기만 했던 우리 입을 가슴을 씻고 먼 동 틀 때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밤이면 태몽 깊어져 고고성이 메아리 칠 애련리, 우리 사랑이 숨어 살 곳으로
- 「애련리」 부분
경상북도 영천과 충청북도 제천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기도 한 “애련리”는 다른 의미로는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을 지닌다.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신동엽의 「시인정신론」에서 말한 ‘완충지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 “애련리”는 평화롭고, 평등하며, 문명과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는 공간으로 제시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공간을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의 역사의식을 확고히 할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김왕노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북벌’의 이미지는 “애련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시인에게 있어 ‘북벌’은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닌 아버지가 지향한 이상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여러 편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아버지 저승에서 이제 잘 있는지 몰라(…)아버지 그래도 이승에 한번 와서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북벌의 말 한번 달리자니까./가쁜 숨 몰아쉬며 부자지간 진한 혈육으로/장백산으로 발해로 말달리자니까? 아버지/내 숨통이 트여지는 그곳으로 아버지/아버지, 아버지 저승에서도 역발산인 아버지” (「말달리자 아버지, 역발산 아버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현실로 불러내어 자신과 함께 ‘북벌’을 하자는 것에서 생전에 아버지의 언행에서 북벌의 욕망을 발견하고 화자가 무의식중에 북벌의 의지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애련리」와 같은 주제를 가진 시가 있는데 “연해주로 발해로 대륙으로 침략의 꿈 가진다면 불온인가(…)불온의 심지 더 돋우며 몇 초롱의 석유를 태우며/밤을 건너가는 마을이 있다면 막차를 잡어타고서라도 걸어서라도 가고 싶은데/솟대 높이 솟아서 울던 불온의 마을은 어디에/뒤란에 샘이 솟고 불온의 능구렁이 담을 넘는 신화의 그 마을은” (「그리운 불온」)에서 아버지가 꿈꾸던 북벌의 지명인 “연해주” “발해” “대륙”이 나오고 화자의 이상향인 “신화의 그 마을”이 함께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나열된 지명들을 살펴볼 때 화자가 말하는 “마을”은 ‘동학’이 거세게 일어났던 지역으로 추정되며 이는 다음의 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누이야, 때 되면 나도 서울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부릅뜬 눈으로/이 시대를 바라보며 질타의 목소리 우레같이 내지 않겠나.(…)나의 칼 나의 피로 담금질하고 무두질해 낸 장검 하나 움켜쥐고서/앞으로 앞으로만 치닫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지 않겠느냐.” (「사상의 거처」)에서처럼 “그 마을”이 ‘동학’과 “전봉준”과 연관된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시인은 자신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을 이상향으로 암시하기도 하는데 “미, 나, 자, 숙, 선, 란, 영, 경, 정, 임, 옥은 내가 아는 꽃의 이름이다. 내 영혼의 식물도감에 있는 꽃의 이름이다.(…)척박한 내 안에 유일하게 피었다 지는 여러해살이 꽃이다. 정치고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다 끝물이 와버린 세상 세상 저물어도 저물지 않을 꽃이 내 안에 피고 진다. 나는 미, 나, 자, 숙, 선, 란, 영, 경, 정, 임, 옥이 끝없이 피고 지는 불멸의 화원이다.” (「나의 꽃들」)에서 꽃밭은 이상향을 상징하는데 여기에서는 화자 자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화자의 마음속에 늘 사랑이 피어나는 이상향을 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김왕노 시인의 시에서 마르지 않고 샘솟는 사랑은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인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애련리는 지명적인 한계를 넘어서 아버지와 북벌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발달된 물질문명과 광장의 함성과 데모대와 진압대가 겨루는 참혹한 풍경들과 욕망에 찌든 육체들은 버리고 가야 한다. 이것들은 시인이 살아오는 동안에 목격한 갈등과 반목과 대립으로 점철된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신에 이상향에 가지고 가야할 것으로 빛나는 모든 진리와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과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소망과 이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랑으로 연대할 수 있는 넓은 품이 있으면 된다. 이것들은 그동안 시인이 바라고 추구해온 가장 의미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왕노 시인은 한결같은 열정으로 사랑을 노래해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다른 남성 시인들이 추구하는 사랑의 유형을 따라가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선배 시인들이나 비슷한 연배의 시인들은 사랑의 대상이 특정한 사람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이나 이웃, 공동체로 확장되는 특징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왕노 시인은 자신의 사랑을 추구하면서 가족과 이웃, 공동체로 그 사랑의 에너지를 조금씩 흘려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사랑에 거는 기대와 희망이 크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사랑이 채워질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랑을 많이 추구하는 만큼 생채기와 상흔들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간혹 보였다. 이는 사랑이 원숙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진통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에서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북벌을 지향하게 되었고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인간성이 회복되는 곳이 이상향이라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발해와 고구려, 내륙으로 이어지는 역사 회복의 의지가 앞으로 어떻게 변모되어갈지 기대가 된다. 그리고 동학혁명을 이끌어낸 농민들이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시인도 곧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행동하는 양심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을 갖는다. 남성적인 기개와 의지로 역사 속을 가로지르려는 측면과 내면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려는 측면이 균형을 잡아나가는 과정이 그의 시작(詩作) 과정에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자유로운 영혼과 거침없는 표현, 미학적인 측면까지 놓치지 않는 방법론이 지금의 김왕노 시인을 있게 한 근원적인 힘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우주로 확장되는 상상력이 허망한 것이 되지 않는 비법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만의 역사의식과 세계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현솔
제주 성산 출생. 아주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현대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와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이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2005년, 2008년).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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