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리운 로토루아 외 4편
채성병
지구 자기장이 약해지고 있다 한다
언젠가 남극과 북극이 바뀌리라
푸른 별 지구가 내게 말한다
우주의 섭리를 따르라고
동생은 의사를 그만두고 오클랜드에서 목사가 되었다
첫째 조카딸은 댄스 교사로 완전 뉴요커가 되었고
둘째 조카딸은 호주에서 의사로 눌러앉았고
사진작가인 둘째 동생 작은 놈은 키위 여자랑 결혼했고
어머닌 홀로 계시다 한국어학교 교장 선생인 셋째 여동생과 합쳤고
우리 집안이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추석이 며칠 후인데도 너무 멀어서 아버지 묘지에 성묘도 못가고….
나는 자랑스런 코리아를 지키련다
점점 싫어져 가는 코리아를
아들을 위해
12년 전, 나는 뉴질랜드 영주권을 포기했다
그게 내가 아는 섭리였다
아, 그리운 로토루아
시냇물 흐르는 곳!*
*brook place를 말함. 로토루아에 있는 마을 이름
Last train to Rotorua
어둠 속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깨어나면 상자곽에 갇혀 있었다
벌거벗은 몸엔 달랑 기저귀만 차고
기나긴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로토루아로 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가도 가도 어두운 터널이 계속되었다
보름이 지나서야 상자곽에 붙은 딱지를 보았다
―집중치료실
1년 후
나는 장애3급 판정을 받았다
7년 전의 일이다
아니 7년 전의 꿈 이야기다
그때부터
푸른 별 지구가 고마웠고
만나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윤제림 시인이 찾아왔을 때
나는 막 새로운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다
*로토루아엔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햇빛 찬란히 쏟아지는 날
햇빛 찬란히 쏟아지는 날
갑자기 슬퍼질 때가 있다
한 마리 짐승처럼 눈부신
햇살 아래 숨죽이며 웅크릴 때가 있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 오랜 세월을 술에 쩔어서 살았다
후회는 없지만 잘못 살았다
햇빛 찬란히 쏟아지는 날
한 마리 짐승처럼 몸 둘 바 몰라
눈부신 햇살 아래 울음이 터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햇빛 찬란히 쏟아지는 날
온 세상은 초록으로 반짝이는데
아직도 아름다운 세상은 있다
내 손녀 나린이가 웃는다
세 살배기 계집애의 미소는
너무나 맑다
만석공원 갈대밭엔 너구리 가족이 산다
어두워질 때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내 친구 범이가 죽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간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아직도 아름다운 세상은 있다
처서(處暑) 지나
배롱나무꽃들 화창한 가운데
갑자기 가을이 왔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본다
자두향 같은 여름이 갔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세상은 남루(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 떠난 세상
추억마저 가슴 아픈
쓸쓸함만 남는다
* 채성병(蔡成秉, 1950.12.16∼2019.10.3)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계간지 세계의 문학 봄호에 「무명(無名)」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72년 대학교 4학년 때 세가지 架空의 우울을 내기도 하고 등단 후에는 인천 등지에서 <백지> 동인 등으로 활동하며 1989년 인천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수원으로 이주하여 30여 년을 수원에서 지내다가 2019년 10월에 작고하였다. 발간시집으로는 세가지 架空의 우울(1972, 현대시학사), 녹슨 단추가 달린 주머니 속의 시(1989, 나남), 별을 찾아서(1989, 해냄), 검은 소에 관한 기억(1990, 민음사), 연안부두 가는 길(1994, 책나무), 중독된 땅에서(2001, 다층), 큰 새를 꿈꾸다(2006, 다인아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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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화가 최북(崔北)에게 산수화를 그려 달랬더니,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다. 부탁한 이가 따져 물으니 최북이 붓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 멍청아, 종이 밖은 모두 물이 아니더냐!" 채성병 시인의 생각이 꼭 그러했다.
“작자 미상이지만 마음에 썩 들어 두말 않고 찍은 그림/ 이백년 전일까, 백년쯤 전일까/ 누렇게 바랜 고풍스런 수묵 속의 풍경/ 소나무들 사이에 정자 한 채 한가롭고/ 계곡 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 시원하다/ 물줄기 이하는 여백이니 곧 내 방의 냇가이고/ 물줄기 이상도 여백이니 곧 내 방의 하늘이다”(「수묵 속의 풍경」 부분).
경계를 짓지 않으니 삶이 두루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넉넉지 않았으나, 비루하지 않았다. 누구도 탓하지 않고 어디를 향해서도 성내지 않았다. 편을 가르지 않았고, 싸움의 기술은 아예 가진 게 없었다. 그렇다고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흐리마리하게 살지는 않았다.
거짓과 헛것은 단박에 가려냈다. 글이건 사람이건 ‘가짜’라고 여기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진품과 진경을 만나면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타자에 대한 긍정의 몸짓이나 포옹의 태도는 천상병에 가깝고, 사랑과 평화를 섬기는 방식은 김종삼을 따르고 싶어 했다.
술과 음악이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인천 어느 시장 안의 주막과 ‘말러’의 심포니를 각별히 좋아했다. 순정이 있는 사람들을 공경했고, 순정한 것들 앞에만 고개를 숙였다.
- 윤제림(시인)
“인적 드문 보도블록 사이로/ 삐죽삐죽/ 살아남기 위해 꽃을 피우는 들풀들/ 바람에 날린다/ 짙은 향기 아니더라도/ 아름답구나/ 차마 비껴가는 발길들 틈에서/ 어째 아름답구나/ 어느새 떨어진 해/ 바닷가 지는 노을빛 받아/ 더욱 노란 풀꽃들/ 모질게 아름답구나”(「연안부두 가는 길」 중에서)
인천 연안부두 가는 길의 뱃고동 소리는, 인근 남항에서 쏟아져 나오는 곡물과 해사(海沙) 등등 수송차량들의 낙곡과 분진으로, 대낮인데도 해설피, 얼룩백이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길의 길고 긴 한 구간은 그 과적과 질주의 행렬로 대개는 인적이 드물다. 그 길의 끝쯤엔 시인의 집이 있었다.
시인은 아마도 신포동의 한 대폿집에서 소주를 한 잔 마셨으리라. 신포동에서 연안부두까지는 걸어서는 한 시간인데, 취객의 걸음으로는 한나절이다.
마치 변형된 두운처럼 “차마” “어째” “어느새” “더욱” “모질게” 등 구어에 가까운 부사들을 행의 전면에 연속으로, 어쩌면 강하게 포진시켜놓은 이 시의 진행은, “아름답구나” 세 번 영탄으로 거의 비장한 육성처럼 들린다.
그 보도블록 사이로 삐죽 삐죽 살아남기 위해 꽃을 피우는 들풀들에 감정이입되고 동일시된 연민과 유대는 감상을 넘어 결국은 니체가 말하는 바 그 ‘위대한 긍정’ 아닌가. 인간도 다 그러한 존재니까. 지는 노을빛을 뚫고 그 노란 풀꽃들을 피해 밟으며 휘청휘청 홀로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의 시 한 편」, 현대문학 2014년 5월호 중에서)
―김영승(시인)
채성병 시인, 그는 자유로운 영혼 속에서 별을 찾아가는 시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저 광활한 하늘 속의 어느 별이 되어 있는지…
그가 가고 1년이 지나고 있다. 살아생전에 한 번쯤은 정리해보고 싶었던 작품들을 이 한 권에 그 기운만이라도 담는다. 그가 생전에 펴냈던 시집 7권에서 추린 시편을 각 부로 정하여 시집 발간 역순으로 싣고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남은 시 몇 편을 맨 앞부분에 싣는다.
어수선한 시대, 그가 휘청거리며 걸어갔던 길들이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의식을 부여잡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앞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 앞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등대 삼아 가고 있을 뿐이다. 그의 별이 더 찬란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 김광기(시인, 문학과사람 발행인)
- 시집 <아직도 아름다운 세상은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