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섬
강 연 희
태풍 ‘송다’가 지나갔다. 어떤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광풍과 폭우가 섬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칠 줄 모르는 호우에 섬이 떠내려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태풍이 올 때면 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바람을 끌어안고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섬이다. 바람이 없는 제주를 생각할 수 없다. 절기마다 세기와 방향과 온기가 다른 바람이 분다. 바람은 늘 섬을 휘감는다. 섬을 떠나서 육지에서의 정체되고 건조한 삶을 마주할 때면 비로소 제주의 바람이 그리워진다. 기나긴 세월을 함께한 바람이다. 뼛속까지 제주인인가보다. 저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제주까지 달려온 것일까. 제주까지 달려온 바람이 육지를 거쳐 북쪽으로 내달음치는 것 같다. 영등할망이라 불리는 영등신으로부터 바람이 시작된 것인가. 영등신은 음력 이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제주에 머문다. 섬 전체를 둘러보며 혹독한 겨울을 쫓아 보내고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불러들인다. 겨울의 꼬리를 잘라내고 봄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땅과 바다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려주는 바다의 여신이다. 바람을 내어주어 풍요를 기원하는 바람의 여신이다. 영등신은 죽은 것을 살려내고 살아 있는 것을 번성하게 하는 의로운 여신이다. 모성 본능이 있는 여신이라 넉넉한 품을 내보이는 터이다. 제주에서는 영등할망이 머무는 동안에 여러 가지 금기가 행해진다. 영등신은 삶 가까이에서 친숙하게 모셔져 왔다. 영등할망을 반갑게 맞이하는 환영제와 정중히 보내드리는 의미를 담은 송별제인 영등굿을 지내는 풍습이 섬 곳곳에 남아 있다. 해상 활동이나 농사 같은 생업에서 손을 놓는다. 혼례식도 하지 않았고 제사가 있는 집에서는 영등할망 몫으로 밥 한 그릇을 따로 올렸다고 한다. 영등신이 머무는 기간의 날씨에 따라 한 해의 풍작과 흉작의 예보로 받아들여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도 했다. 어릴 적 기억이 아슴푸레 떠오른다. 어머니는 햇볕이 좋은 때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을 열고 해거름 전에 닫았다. 영등할망이 머무는 영등달(음력이월)에는 잿빛 하늘에 비바람이 잦아서 항아리 뚜껑을 열지 않았다. 일 년 동안 정성으로 보듬는 장독대에는 된장, 간장, 고추장 항아리와 멜젓, 자리젓, 마늘장아찌 항아리가 놓여 있다. 김장 김치와 통째로 염장한 고등어와 마른미역, 다시마, 소금을 보관하는 항아리도 있었다. 일 년 동안 끼니를 마련할 때 쓰이는 보물 같은 원재료이다. 장독대에는 원재료가 곰삭는 시간과 항아리 뚜껑을 여닫는 횟수 보다 녹진한 어머니의 정성이 무르익었다. 장독마다 가족을 향한 끈끈한 모성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 시절에는 호청을 끼운 요와 이불을 사용했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이불 호청을 위해 어머니의 다듬잇방망이의 분주한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규칙적이고 셈여림이 깃든 다듬이소리에는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이 젖어 있어 처량하게 들렸다. 가슴 속에 사무친 여인의 한을 다듬이소리로 허공을 갈랐다. 영등달에는 구름 뒤로 해가 숨은 날이 많고 비바람이 거센 날씨 때문에 호청 빨래를 하지 않아서 다듬이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제주는 일 년에 몇 차례 외로운 섬이 된다. 태풍이 빈번한 여름철과 폭설이 내리는 겨울철에 절해고도가 되는 게 숙명이다. 강풍과 돌풍의 영향으로 하늘길과 바닷길이 막혀 침묵하는 섬이 된다. 뭍을 향한 그리움만 가슴에 사무친다. 바다 너머로 내달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품곤 했다. 뭍이 아니어서 어찌할 수 없는 섬의 한계를 느끼곤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외로움과 그리움을 가슴속에 꼭꼭 담아 두었다. 태풍은 태초로부터 시작해서 현재는 물론 아득한 미래에도 끊임없이 다가올 것이다. 지구 온난화가 낳은 기후 변화로 자연재해가 극심하다. 인간이 막을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위력이 기록적이고 기세등등하다. 자연재해는 자연훼손을 일삼는 인간에게 자연이 내리는 준엄한 경고가 아닐까. 제주 사람들은 태풍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은 냇가의 담장에도 흔적을 남겼다. 냇가의 담장은 현무암의 크고 작은 구멍마다 빗물을 축축이 머금어 더욱 까맣다. 검은 현무암은 제주 사람들의 아픈 가슴을 보여주는 듯하다. 흑색의 돌담과 습기를 품은 나무들의 짙푸른 초록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초록의 나무에서 비릿한 향기를 들이마신다. 비릿한 향기는 말차末茶를 마실 때의 향이다. 온 몸에 숲의 향기가 스민다. 나무는 태풍에 견뎌내기 위한 자연 치유로 발산하는 항균 물질을 욕심껏 내뿜은 모양이다. 사람을 위해 이로운 성분을 말이다. 흠뻑 젖은 흙 내음이 신산하다. 자연이 내어주는 선물이다. 태풍이 지나간 냇가 바닥에는 생명력이 강한 잡초들이 시새우며 자랐다. 잡초들은 물길에 휩쓸려 길게 누웠다. 냇가의 물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머무름 없이 바다를 향해 내달린다. 붙잡을 수 없는 세월처럼 무심하다. 냇가는 폭우가 내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바닥을 드러낸다. 건천은 현무암으로 형성된 제주 하천의 독특한 모습이다. 민낯의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냇가를 볼 때마다 꾸밈없이 살아가는 제주 사람을 떠올린다. 투박하지만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제주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기고 물이 흐르는 대로 세월을 싣고 살아간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바람은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이동하며 변화를 이끌어낸다. 변화는 사람들의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사유의 깊이를 만드는 힘이 된다. 오늘 보다는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한다. 인생은 제주의 거친 맞바람을 마주하고 걸어가는 일이다. 예측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은 혹독한 바람으로 다가온다. 삶은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앞에서 고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지혜를 찾아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감내하기 힘든 바람을 이겨낼 때마다 조금씩 너른 품을 지니게 된다. 오늘도 제주에서는 신명나게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그 속에는 슬픔과 기쁨, 빛과 어둠이 함께 담겨 있다. 바람과 함께 바다도 하늘도 땅도 춤을 춘다. 이제 바람이 오면 오는대로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겠다. 내 마음도 바람과 함께 흔들리다가 제자리를 찾아오겠지. 어디에선가 바람이 섬을 휘감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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