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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0일(토)
예레미야 45:1-5
어떻게 영적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가?
when?
우리는 이번 한 주간 새벽마다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간 우리들이 묵상했던 말씀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 된 이후, 유다인들이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이주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애굽에 흩어져 정착했던 유다인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예레미야 45장은 유다의 멸망과 그 직후의 이야기를 마감하는 하나의 에피소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장부터 이어지는 46장은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역사 통치라는 주제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중반부는 유다 백성의 멸망과 남은 자들의 바벨론 이주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서기관 바룩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예레미야 45장은 예레미야 44장보다 수십 년 앞선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의 순서상으로는 44장이 먼저이지만, 실제 시간 순서로 따지면 45장이 44장보다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다함께 1절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1절에는, 45장의 배경이 되는 시간이 “여호야김 넷째 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여호야김 넷째 째”와 관련된 기록이 한 군데 더 나옵니다. 예레미야 36장 1절이 그것입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 45장과 예레미야 36장은 시기적으로 여호야김 왕 제4년 즉, 주전 605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때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이전이었습니다.
who?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1절에서, 바룩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바룩은 서기관으로서,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시기로 엮여져 있는 예레미야 36장에서도, 바룩은 서기관으로서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36장 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예레미야 36장에서, 서기관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한 것은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함이었을까요? 금식 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모인 유다 백성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서기관 바룩은 예레미야의 말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 대신 서기관 바룩이 기록한 말씀을 성전에 모인 유다 백성들에게 낭독해야만 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일 년 9개월이 지난 여호야김 왕 제오 년 구월에, 서기관 바룩은 다시 유다 백성들과 고관들에게 예레미야의 모든 말을 낭독했습니다.
그렇다면 서기관 바룩은 누구입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기록하고, 낭독하는 일을 행했을까요?
먼저, 바룩의 이름은 “축복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유다가 멸망되기 전후로 약 20년 동안 예레미야 선지자의 곁을 지킨 동역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해 예언하였다면, 바룩은 예레미야의 서기관으로서 그와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들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바룩은 비록 예레미야처럼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예레미야의 곁에서 그를 늘 도왔던 이등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바룩과 같은 이등영성을 가진 조연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바룩의 가문이 형편없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룩의 가문은 당시 그 어떤 가문보다 존경받을 만큼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바룩의 할아버지 마세야는 높은 지위의 관리를 지냈던 분입니다. 바룩의 아버지 네리야도 예레미야의 서기 역할을 했던 믿음의 아버지였습니다. 또 바룩의 형제 스라야는 시드기야 왕의 병참감을 맡을 만큼 고위직에 있었습니다(렘 51:59).
서기관 바룩은 예레미야의 말을 기록하는 일을 했지만, 그 외에도 예레미야의 믿음직한 동역 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32장에서, 예레미야는 그의 숙부 하나멜의 밭을 산후에 그 매매증서를 바룩에게 주며,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중요한 서류를 바룩에게 믿고 맡길 만큼, 바룩은 예레미야의 믿음직한 동역 자였습니다.
what's problem?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바룩이 어떤 이유로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예언하였지만, 이번에는 동역 자 바룩을 향해 예언했습니다.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2-3절).”
왜 바룩은 깊은 슬픔과 탄식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오늘 본문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예레미야 36장을 참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36장에서, 바룩은 예레미야의 말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였고, 기록된 두루마리 책의 내용을 유다 백성들과 고관들에게 낭독하였습니다. 바룩이 기록하고 낭독했던 두루마리 책이 드디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는 여후디는 두루마리 책을 왕 앞에서 낭독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왕은 칼로 서너 쪽씩 두루마리를 베어 화로 불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신하들이 왕의 행동을 극구 말렸지만,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루마리 책을 모두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서기관 바룩은 화를 면하기 위해 피신해 있어야만 했습니다. 피신해 있는 동안, 바룩에게 큰 영적 침체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던 사명 자에게 큰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들을 감당할 때도 이와 비슷한 영적 침체를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최근에 우리교회가 정부의 방침에 따라 비대면 예배를 드렸지만, 찬송가 소리를 듣고 한 주민이 경찰에 신고해 예배 중간에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오해인 것이 밝혀져 예배는 다시 진행되었지만, 그 주일을 보낸 후 며칠간은 저도 개인적으로 마음이 눌리는 경험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아합 왕 시대에 하나님의 불을 하늘에서부터 내려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했지만, 왕비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무너져 큰 영적 침체를 겪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도, 영적침체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what?
우리가 영적침체를 겪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영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던 바룩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4절)”
하나님은 사명 자를 부르실 때 일만 시키시지 않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사명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알아가야 합니다. 자, 바룩이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을까요? 우리 모두 4절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바룩이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운 것을 헐기도 하시고, 심은 것을 뽑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헐고, 뽑는 것입니다. 바룩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룩은 이러한 말씀을 처음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룩에게 말씀하셨던 헐고, 뽑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을 때에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장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 1:10).”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실 때, 그에게 뽑고 넘어뜨리는 사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서기관 바룩은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전속 서기관으로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예언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바룩이 영적침체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예레미야와 동일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에게는 예레미야가 더 주목 받고, 사역현장에서 한발 더 앞서 있을지 모릅니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서기관으로서, 예레미야를 돕는 제한된 범위의 사역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연극으로 비유해볼까요? 예레미야가 주연배우라면, 바룩은 조연배우입니다. 조연배우는 늘 주연배우의 뒤에서, 주연배우가 더 빛나도록 돕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주연배우이던, 조연배우이던, 그 사명은 같습니다.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감동을 주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예레미야건, 바룩이건, 부르심의 모양은 다를지 모르지만, 부르심의 목적은 같습니다. 타락한 세상 한 가운데서, 헐고, 뽑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 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했듯이, 서기관 바룩 또한 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아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이전에 알았다고 생각했던 진리가 아직 나의 삶에 적용되지 못했을 때 그 진리는 나의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체득된 진리는 나의 가치관을 바꾸고, 나의 언어와 행동을 바꿉니다.
우리가 영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서기관 바룩은 극심한 영적 침체로 인해 일시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바룩은 서기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충분히 존경을 받고, 육신적 안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36장에서, 바룩이 두루마리 책을 고관들에게 낭독하게 된 계기도 왕실에서 일하던 다른 서기관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실에서 일하는 서기관들은 왕에 의해서 고용된 사람들로, 안정된 생활과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룩은 어떻습니까? 예레미야의 전속 서기관으로서, 그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을 예언할 때마다 함께 고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급기야 그는 육체의 고난과 영적 침체의 이중고를 겪게 되자, 자신의 안위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바룩이 대중들에게 존경받던 명문가 출신의 서기관이라는 것을 참조하면, 이러한 바룩의 행동도 큰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바룩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위하여 큰일을 찾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바룩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다 땅에 내리실 재난이었습니다.
이번 주 ‘생명의 삶 묵상 나눔’ 그룹에 어떤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진솔한 묵상을 나누어주셨습니다.
큰 건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일만 되면, 성공한다? 이런 사상에 빠진 분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크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겠지?” “그러면 나는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갈 거야!” 이런 엉뚱한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부교역자이고, 담임으로 청빙 받기를 원하다보니까, 이런 욕심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내가 큰 교회에 가야 하는 이유! 내가 좀 더 알려져야 하는 이유! 큰 곳에 가야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욕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헛되고 헛되더군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렘 45:4)
하나님은 세우기도하고, 뽑기도 하고,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헛된 생각과 꿈을 갖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 바룩도 마찬가지죠. 바룩이 어떤 큰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뭐하라는 걸까요? 그것은 “지금 내게 주어진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에 성실히 사명을 감당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작은 일이 많습니다. 부교역자를 거쳐 온 분들은 아실 겁니다.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소소한 작은 일들이 많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계획하고, 시간과 싸우고, 아이디어 싸움을 합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토요일입니다. 내게 주어진 작은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필사 배달, 주보 접기, 가정예배 순서지 만들기 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주어진 일에 투덜이가 되지 말고, 감사함으로 오늘도 살아가보기를 원합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groups/827856834651605/
여러분, 어떠십니까? 참 훌륭한 목사님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나 자신을 위하여 큰일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야망을 따라 살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살아라!”
“사람은 비전만큼 살고, 기도만큼 이룬다.”
우리가 늘 습관처럼 되뇌는 말이지만, 우리가 비전을 따라 살다보면 현실의 장벽 앞에 부딪쳐, 좌절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겁니다. 방금 전에 나누어 주셨던 어느 목사님처럼,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하고 여쭈어 보는 겁니다. 우리는 매순간, 여쭙는 기도를 드림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what's then?
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전과 사명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탄식하던 바룩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절).”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노략 물을 취하듯이, 하나님은 서기관 바룩이 가는 모든 곳에서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이 되는 여호야김 넷째 해는 주전 605년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때가 주전 586년이기에, 유다 멸망 약 20년 전의 일입니다. 서기관 바룩이 극심한 영적 침체에 빠져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지 20년 뒤에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할 것이고, 그 뒤로 바룩은 예레미야와 함께 애굽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주에 묵상했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애굽에 흩어져 살던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게 되자, 하나님은 애굽에 살던 유다 백성들을 칼과 기근가 전염병으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44장 28절에서, 하나님은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오는 소수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과한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영적 분별력이 생길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렘 44:29).”
고난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땅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침체도 우리에게 연단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막히고,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의 현장에서 새롭게 나에게 다가오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침체를 통해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야망의 사람이었는지, 비전과 사명의 사람이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잘 나갈 때는 드러나지 않던 나의 영적 민낯이 영적수치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가 나의 삶을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는 축복의 때가 될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디데이(D-Day)를 정하고, 군인들을 노르망디로 보냈습니다. 군인들은 날이 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대포를 쏘고, 총을 쏘면서, 군인들이 앞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당시 이 작전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군인들은 나이가 어렸습니다. 무수히 많은 연합군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군인들은 생사가 나뉘는 현장 속에 있었습니다. 동료들은 옆에서 죽어 나가고,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결국 차례대로 죽게 될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군인들은 훗날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열아홉 살이었는데, 그날 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왜 그날,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까요? 어른이 져야 할 짐을 그 하루 동안에 다 졌기 때문입니다.
-출처: 박영선, 「박영선의 욥기 설교」(무근검, 2017);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10월 호), p. 109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그 대가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영적침체에서 허덕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들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앞뒤 안 가리고 살다가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하면 생명을 얻습니다. 노르망디 전쟁에서 살아남은 열아홉 살의 청년들은 어른이 져야 할 짐을 그날 하루 동안에 지고 마침내 어른으로 거듭납니다. 유다와 애굽의 죽음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들은 그 대가로 영적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했던 바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이고, 신앙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침체의 자리에서, 절망의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있어야 할 자리는 말씀을 듣는 자리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생명을 얻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