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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 이적활동 행적- 국보법폐지, 간첩 송두율 석방위원 대표, 한총련 합법호위 대표,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장, 국보법철폐 주한미군철수 연방제 통일 주장한 전국연합대표 함세웅 신부 양력 경성부에서 태어나 어릴 때 서울 용산구의 용산성당에 다니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입문하였다. 유년기에 겪은 한국 전쟁 중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60년에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군 복무 후 1965년부터 1973년까지는 로마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귀국한 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성당에 부임하였다. 1974년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주교 등 각계 인사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대거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창립을 주관하고, 이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3]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에 모두 참여하고 제4공화국에서 두 차례 투옥되었다. 1979년 10·26 사건 때도 수감 중이었다가,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된 뒤에 석방되었다. 1987년 6월항쟁 때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장위동성당, 상도동성당, 제기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냈다.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시위에 대한 언론의 왜곡을 비판하면서 대통령 이명박의 경청을 요구하여, 촛불 시위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교통사고로 어린이 사망 1984년 9월 14일 낮 12시 30분 경 서울 성동구 자양동 강변도로에서 스텔라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던 도중 무단횡단하던 안재연(당시 7세, 남)를 치어 그자리에서 사망케 했다.[5] 그는 운전 중 안재연을 발견 급정거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고가 발생했다. 함세웅 신부 망언 박대통령 시해한 김재규 부장은 저는 개인적 은인 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은인인데 김재규 부장을 살리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책이며 당대 우리 시대의 한계라며 안중근 같은 의인이라고 극찬 (박근혜 후보가)반민주적이었던 아버지 미화는 “자기 아버지의 정체성을 전혀 모르는 그저 그 아버지의 그 딸일 뿐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기계일 뿐”이라며 “박근혜 개인 보다는 박근혜 증후군이 나타나는 우리 현실이 슬프고 부끄럽다”고 했다. 털어놓았다.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자인 함세웅 신부가 9월 5일 민주당 천막당사 찾아가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불법이고 선거는 원천 무효"라며 촛불시위에 동참해 국정원해체 동조 뜻 밝혀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왼쪽)가 5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민주당 임시 천막당사를 찾아 인사말을 한 뒤 김한길 대표의 손을 잡아 번쩍 들어올리고 있다. 2013.8.5 kane@yna.co.kr 함세웅신부 은퇴 미사 참석한 곽노현 교육감
정동영 후보 방문한 함세웅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