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제8탄]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설
[김계월은 김두한의 생모로 알려졌으나 김두한의 자서전이나 다른 문헌을 살펴보면 김계월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김두한의 생모는 김계월로 알려진 것이 압도적이므로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설》을 행정기관인 충남 홍성군에서 발행한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이하 책 이라 표기함)”를 기준으로 분석한다. 인터넷 카페라는 점에서 문헌 주석을 생략한다.]
가. 김좌진이 김계월과 조우(遭遇)했다는 그날 김좌진은 국내 서울 계동에 없었다.
책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김좌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이성우 지음. 61~62쪽. 2011”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를 인용한다. 각종 문헌을 종합해 볼 때 이 파견설이 가장 합당하다.
《1917년 음력 6월부터 김좌진의 화폐위조사건의 단서를 발견하고 이를 추적하고 있던 시기였다. 일제의 추적이 시작되자 광복회는 김좌진의 만주파견을 결정했다. 광복회는 사관학교 설치와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본부를 설치하고 부사령을 임명해 국내 조직과 연계해 독립군 양성의 책임을 맡겼다. 만주 부사령은 황해도 의병장 출신인 이석대(본명 이진룡李鎭龍)가 맡았다. 그러나 이진룡이 1917년 5월에 체포되자 그의 후임으로 김좌진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김좌진의 만주파견은 1917년 8월 서울 거점지인 어재하(魚在河)의 거처에서 이루어졌다. 김좌진은 사령관 박상진,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과 송별 모임을 가졌다. 송별 모임에 대해서는 충청도 지부원으로 활동했던 김재풍(金在豊)의 호석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 해괴망측한 이야기들
[김좌진의 역사와 가족사는 해괴망측하리만큼 왜곡•조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⑴충남 홍성군이 발행한 책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①책 215쪽. 계동(桂洞) 처가살이 3개월—해괴망측 그대로이다.
“음. 이제 나도 출동할 시기가 되었다. 총독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어야겠어.”
그해 9월10일 깊은 밤 어둠 속을 헤치고 계동 최부잣집을 향했다. —지난달 8월에 광복회 만주지부 부사령으로 파견된 김좌진이 9월10일 어떻게 서울 계동에 나타났단 말인가!
②책 218쪽. 재빨리 도랑을 손으로 헤치고 금궤를 묻으니 잠시 후 물이 흘러 묻은 흔적이 없어진다. 그러는 순간 경찰들이 그 집 대문을 두드린다. 「어느 놈이 지금 이 집에 들어갔는데 그놈 어디 숨겼소?」 —최부잣집에서 금궤를 강탈하여 도망쳤다는 계동 골목을 일본 경찰이 수색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③책 219쪽. 이 집은 아담한 한식집으로 밖을 살펴보아도 남정네 신발이 눈에 띄지 않는다. 집을 돌면서 방문을 살펴보아도 조용하다. 맨발로 안마루를 소리 없이 기어가 손에 침을 뱉어 구멍을 내고 살펴보니 화장품 냄새와 여자 냄새가 코를 찌른다. 건너방도 문구멍으로 동정을 살피니 사람이 사용하지 않아 탕냄새만 난다.—김좌진이 여인의 집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묘사한 장면이다.
④책 219쪽. 김좌진은 하는 수 없이 안방문을 찢고 손을 넣어 문고리를 벗긴 다음 방문을 슬그머니 연 뒤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서 잠을 자던 주인 여인은 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바람에 잠이 깨어 장승같은 김좌진을 보고 기겁했다. 「쉿! 조용히 하세요.(중략) 당신도 조선민족이요, 백의민족이라면 나 좀 숨겨주시오.」—김좌진이 여인의 방에 뛰어든 광경을 묘사한 장면이다.
⑤책 220쪽. 「저도 배달민족의 딸이요. 옛날 임진왜란 때 논개는 왜장과 함께 진주 촉석루에서 순절했다는데 저도 그렇게는 못할망정 어찌 돕지 못하겠습니까?」—여인의 응수가 고결하리만큼 수준이 높다.
⑥책 220쪽. 동이 트기 전에 주인 여자가 지은 찰밥에 조기까지 구워놓고 동동주를 곁들인 밥상은 허기진 김좌진을 놀라게 했다. 밥 한 그릇 가지고 되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는지 식기에 밥을 푼 것이 아니라 양푼에 밥을 담았다. 굶주린 김좌진이 동동주 한잔에 배를 채우고 상을 치운 주인 여자는 벽장문 앞에 12폭 병풍을 치고 거문고와 지필묵을 내려 병풍 앞에 늘어놓는다. 그때가 동쪽에서 햇빛이 솟을 때였다. 탕! 탕! 대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 당안 일대가 가택수색이 시작된 것이다. 주인 여자는 토방과 마당에 물을 뿌리고 대나무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고무신작을 끌면서 속치마 바람에 대문을 열고 보니 무장한 헌병 두명과 경찰 세명 그리고 동리 반장이 동행했다. 주인 여자는 선수를 쳐서 「어제 저녁 그 강도놈을 지금까지 못잡았습니까? 고생들 많이 하시네요. 들어오시오. 여자 혼자 사는 기생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나는 명월관에 다녀서 인력거가 오기 전에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마당을 쓸고 있는 주인예요. (중략)애국반장이란 놈이 「이집은 의심할 곳이 아닙니다.」라고 대변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인 여자는 「반장님 그게 무슨 소리요? 보고 조사해야 저도 마음이 가볍습니다.」하면서 방문과 골방문까지 전부 열어 놓는다. 왜놈 헌병이 「아. 요로시이. 저도 항상 낮이나 밤이나 명월관에 가고 있습니다.」 「자주 놀러오세요.」 이와 같은 주인 여자의 수완에 수색대원들은 의심없이 떠났다. 이 여자가 김계월(金桂月이다. —김좌진과 김계월의 9월10일 새벽 만남은 이렇게 소설적 묘사로 논개, 찰밥, 조기구이, 양푼, 동동주까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⑵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글 김정헌/그림 정효선. 행복한소통. 2020. 121~122쪽을 인용한다.
좌진은 당분간 김계월의 집에서 숨어지냈다. 다행이도 김계월은 우리민족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여장부였다. “당분간 이곳에 숨어 계세요. 제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독립투쟁에 나선 분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긴급한 연락이 필요하면 저에게 맡겨주세요.” 김계월은 좌진을 안심시켰다. (중략) 어느새 김계월은 좌진의 늠름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얼굴이 붉게 물들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마음이 떨리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좌진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아리따운 여인과 마주 앉으니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도 잊을 정도였다. 김계월의 역할은 광복회원이나 다름없었다. 좌진의 긴급한 연락사항을 한치 오차도 없이 외부로 전달해 주었다. 좌진이 김계월 집에 몸을 숨기고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좌진 동생! 지금 빨리 남대문 남문여관으로 오게! 박상진.” 좌징은 김계월이 전해주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뭔지 모르게 다급한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 김계월을 통해서 서신으로 주고 받았지만 이번에는 직접 만나자는 얘기가 아닌가. (중략) “동생은 지금 당장 만주로 떠나야겠네.”
(중략) 같은책 127쪽. 좌진이 만주지역 부사령으로 책임을 맡아 떠나던 때가 1917년 8월이었다. —저자 김정헌의 책에 기술한 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설이며 만주파견설이다. 저자 김정헌의 기술에 의하면 김좌진은 1919년 8월 만주로 떠나기 전에 김계월과 한 달 이상 동거한 것으로 된다. 김두한의 생년월일에 짜깁기한 느낌이 든다. 전옥진은 9월10일 밤에 최부잣집을 야습한 뒤 경찰에 쫓겨 뛰어든 집에는 여인이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하고, 김정헌은 좌진이 뛰어든 집이 혼자 사는 여자의 집이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와 대문을 닫고 막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라고 했다. 도대체 김좌진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⑶김계월은 누구인가?
⑴홍성군이 발간한 책과 저자 김정헌의 책으로 보면 김좌진이 김계월을 만나 잉태하여 1918년 5월15일생으로 된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셈인데, 8월에 만주로 떠난 김좌진이 9월에 김계월을 만나 한 달 또는 3개월을 동거했다는 설(說)은 누가 분석해도 불가능한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1917년 당시 김계월은 13살이었다. 김두한의 생모라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람중에 한사람일텐데 책에는 생몰이 없다. 김두한도 자서전에서 김계월을 피해가는지 상궁의 딸이라고 운운한다.
⑵김계월은 조선일보 1930년 3월17일자 보도에 따르면 1930년 당시 26살이었으므로 1905년생이 된다. 김좌진과 조우했다는 1917년에는 13살이다. 13살에 임신 가능성도 재고해야할 문제이다.
⑷김계월이 김좌진의 씨로 잉태했을까?
김계월은 김좌진의 정자로 잉태될 수 없었다. 만주에서 서울은 하룻밤에 다녀갈 거리도 아니다. 또 김좌진이 그런 성품도 아니며, 그럴 겨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광복회가 그렇게 어수룩한 조직이 아니었다. 1917년 9월10일 첫날부터 임신이 성사됐다 해도 김두한이 1918년 5월15일생이라는 것이므로 팔삭둥이가 된다. 13세 여아가 8개월만에 정상출산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저자 김정헌은 김좌진이 8월에 만주로 파견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김좌진이 만주로 가기 전에 김계월과 만났다는 얘긴데 이건 더더욱 아니다. 그런 기록이 없다.
따라서 김두한은 김계월이 생모일지는 몰라도 김좌진의 아들도 아니고 혈통도 아니다.
⑸김좌진의 역사를 소설로 폄훼(貶毁)하지 마라!
⑴김좌진은 대한광복회(총사령관: 박상진) 일원이었다.
⑵김좌진은 동화나라 사람이 아니다. 김좌진은 어쨌든지 가노해방을 단행했고, 기흥학회를 조직하고, 호명학교를 설립한데 공적이 있으며,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만주지부 부사령으로 발령받아 만주생활을 시작했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대종교에 입교했고 서일, 최운산, 최진동, 윤자형, 김혁, 현천묵, 안무, 이장녕, 김규식, 이범석, 최해, 정훈, 홍범도와 더불어 청산리독립전쟁을 치르고도, 자유시사변을 뼈아프게 겪고, 서일 총재를 사별로서 먼저 보내고, 신민부를 창설하고도 숱한 시련을 겪다가 한족총연합회로 회생의 기회를 잡았으나 그의 집념은 1930년 1월에 기습적 암살이라는 타살로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이런 홍익인간적 민족주의 인물의 역사와 가족사를 소설적 묘사로 인한 왜곡과 조작, 공적갈취, 유택조작, 사진조작, 사후음해로서 농락해서는 안된다.
다. 대한광복회의 위상 훼손 문제
⑴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 풍기에 있었던 ‘광복단’과 경상북도 대구에 있었던 ‘조선국권회복단’이 뜻을 합해 1915년 조직한 무장독립운동단체로 총사령은 박상진이다. 1916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에 기지를 두기도 했다. 이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 구입에 노력했다. 전국적으로 일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행동강령 아래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거나 친일 지주를 처단했다. 구성원으로는 의병출신자가 많았으며,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과 구체제의 한학 교사, 양반과 상민이 함께 참여했다. 근대공화정치를 지향했으며, 다른 독립운동단체와 달리 지역성을 극복했다. 1918년 조직이 발각되어 박상진 등은 사형을 당했고 조직은 해체되었다. 독립군 양성에 목적을 두고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에 노력했으며 일제의 통치 속에 안주하는 친일부호의 처단 등을 당면 과제로 했다. (출처:다음백과)
⑵광복회 창립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본부조직, 풍기광복단·민단조합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 조직, 달성친목회와 조선국권회복단을 중심으로 한 대구조직과 서북지역 조직이 참여했다. 조직은 본부에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을 두었고, 그 아래에 재무부·선전부를 설치했다. 만주에는 이석대(李奭大)를 부사령으로 임명했으며 이석대가 순국한 이후에는 김좌진(金佐鎭)을 파견했다.(출처:한민족문화대백과)
⑶대한광복회 단원들이 국내 친일부호들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강모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제경찰에 쫓기고, 길림지부 부사령이 체포되어 김좌진을 후임으로 파견하는 시점에서, 일제 종로경찰서를 인근에 둔 종로 계동 한복판에서 최부잣집을 털라는 무모한 작전을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저자 전옥진. 발행인 홍성군수. 2001.”와“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 글 김정헌/그림 정효선. 행복한소통. 2020.”에서 서술한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설은 허무맹랑한 소설에 불과하다. 저자들이 김좌진과 김계월이 조우 관련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썼다해도 그것은 일제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조작한 보도자료나 친일파들의 “김좌진 사후음해”에 해당되는 것으로 분석한다. 이같은 조작•음해자료는 실증자료로 인정한다거나 써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홍성군 지역 더구나 김좌진의 고향 홍성에서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에 대하여 지은이 전옥진은 1917년 9월10일 처음 만나 3개월 처가살이라 하고, 김정헌은 김좌진이 8월 만주로 파견되기 적어도 한 달 이전으로 기술하고 있어 양측 다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대한광복회(사령관:박상진)의 위상을 훼손했다.
라. 결론
⑴김좌진과 김계월이 만났다는 설(說)은 터무니없이 허황되고 실상이 없는 소설적 표기이다.
⑵책을 발간하고 지원한 홍성군과 충청남도는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⑶대한독립군 사내대장부 김좌진과 서울 계동 명월관 기녀 김계월 두 남녀가 만나 김계월이 잉태하여 1918년 5월15일에 태어났다는 김두한은 다음 정황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다.
①김좌진은 1917년 8월에 대한광복회 길림지부 부사령 이석대의 후임으로 파견되었기에 같은 해 9월10일 종로 계동에서 군자금을 강모하려고 최부잣집을 야습할 수 없었으며, 그날 새벽 김계월의 집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②중국 만주 길림에서 서울 계동까지 하룻밤 사이에 오고 갈 거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