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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겸수(敎觀兼修)---선교병수(禪敎倂修),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주장으로, ‘교(敎)’는 교리와 형식을 말하고, ‘관(觀)’은 참선과 수양을 의미해서, 교리체계인 고학(敎學)으로 이로(理路)를 탐구하는 교(敎)와 실천수행법인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교관겸수사상은 고려시대 천태종을 중심으로 실천됐으며, 지눌(知訥)의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의 뚜렷한 전통으로 전승됐다. 원효 대사의 회통불교와 맥을 같이 한다.---→정혜(定慧), 정혜쌍수(定慧雙修) 참조.
*교담미(僑曇彌)---부처님의 이모이기도 하고, 양모이기도 한 마하 파자파티(산스크리트어 Mahapajapati, 大愛道尼)의 원래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가우타미(Gautamī)로서, 이를 음역해서 교담미(僑曇彌) 혹은 구담미(瞿曇彌)라고 부르기도 한다.---→마하 파자파티(산스크리트어 Mahapajapati, 大愛道尼) 참조.
*교리행과(敎理行果)---교리행과(敎理行果)에서 교(敎)는 언어ㆍ문자로써 말하는 교설, 이(理)는 교의내용인 도리, 행(行)은 그 도리에 따라 실천하는 수행, 과(果)는 수행의 결과로 체득하는 결과, 곧 깨닫는 것, 교는 이를 나타내고, 이는 행을 일으키고, 행은 과를 얻는 순서로 어떤 종의(宗義)에도 통용되며, 그 중 교 · 리 · 행(敎 · 理 · 行)은 문 · 사 · 수(聞 · 思 · 修)에 배대된다. 비슷한 말에 신해행증(信解行證), 신해수증(信解修證)이 있다.---→신해행증(信解行證), 신해수증(信解修證) 참조.
*교문(敎門)---부처님 가르침은,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넘기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涅槃)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을 가진 진리이다.
그런데 흔히 불교에서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라고 한다. 서산대사의 일갈로도 유명한 이 경계는 불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제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말씀과 글로써 가르침을 교(敎)라 한다. 따라서 팔만 사천 법문, 즉 대장경이 곧 교문이다. 교문(敎門)이란 말과 글로써 가르쳐 깨달아 알게 한다는 뜻이니 이런 법문(法門)을 이르는 말이 교문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교(敎)라고 하는데, 그 말과 글로 된 내용을 통해 부처님 법을 배우는 것을 교문이라 한다. 교학(敎學)으로 이로(理路)를 탐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교문이라 말하며,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불법을 전하는 것을 선문(禪門)이라 한다.
그런데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간화선이 근간을 이루는 선문에서는 위의 명제는 무시되곤 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간화선의 영역에서 말과 글로써 논리를 세워 이치를 설명하는 교학은 배척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면 이 선(禪)과 교(敎)는 양립할 수 없는 대립의 영역일까. 이것이 불문에 던져지는 과제이다.
*교범파제(憍梵波提, Gavāṃpati)---교범발제(憍梵鉢提), 가범파제(伽梵波提)라고도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등장하는 아라한, 사리불의 제자, 계율을 잘 알아 ‘해율제일(解律第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법화경> 서품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항상 온화하고 우아하며 한적한 곳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할 줄 아는 호부장자(豪富長者)였다. 교범파제는 전생에 비구였는데, 남의 조 밭에서 이삭 하나를 따서 영글었는지 영글지 않았는가를 보다가 몇 알을 땅에 떨어뜨려서 이로 인해 500년 동안 소가 돼 그 빚을 갚다가 사람의 몸을 받았다고 한다.
*교상(敎相)---가르침의 모습, 설해 놓은 경전의 내용, 부처님께서 한평생 동안 설한 모든 가르침의 실상을 말한다. 단, 밀교에서는 교법에 대한 해석을 교상이라 한다.
*교상판석(敎相判釋)---교상판석에서 ‘교상(敎相)’이란 가르침의 모습, 즉 붓다가 한평생 설한 모든 가르침의 실상을 말하고, ‘판석(判釋)’에서 ‘판(判)’은 부판(部判), 쪼개어 판단한다는 뜻이며, ‘석(釋)’은 해석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상판석(敎相判釋)이란 붓다께서 일생동안 설하고 가르진 다양한 경전(經典)을 시대별로 혹은 그 뜻의 깊고 얕음에 따라, 그 경의 성격에 따라 분류 정리를 해서 경전의 의미와 내용 등을 체계화해서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말한다. 즉, 방대해 종잡기 어려운 팔만대장경의 사상을 가르침의 수준, 가르침의 형식 등으로 분별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인 것을 말한다.
즉, 경에 설한 형식, 방법, 순서, 또는 그 의미와 내용 등을 따라 붓다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분류해 체계화함으로써 붓다의 참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것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초기불교(원시불교) 다음에 부파불교가 발달하는 한편, 그 뒤를 이어 대승불교가 흥기했는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에는 이러한 인도불교의 발전단계와 상관없이 초기불교경전과 부파불교 논서, 그리고 대승불교경전들이 순서 없이 마구 뒤섞여 한꺼번에 들어왔다. 따라서 다양한 경전 간에 모호한 차이도 있고, 상호모순 돼 보이는 교설도 있었다. 이러한 것이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불교가 외국의 낯선 문화라서 난해한데다가 경전마저 뒤섞여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고, 어느 것이 최고 가르침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중국인 나름으로 그들 입장에서 불교경전을 분류해서 체계를 세운 것이 남북조시대에 시작된 교상판석이다. 줄여서 교판(敎判)이라 약칭하기도 하는데, 경전성립순서는 무시한 채 경전성격에 따라 분류를 했다. 따라서 교상판석은 중국불교 특징이기도 하고, 교상판석의 목적이 자신들이 추종하는 종파(宗派)의 교의를 선양하고, 자기네 경전이 최고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따라서 교상판석이 종파성립의 필수요건처럼 되기도 해서 여러 형태의 교판이 있었고, 이러한 데에서 억지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 그런 한계점이 있었다.
아무튼 복잡한 불교이론체계를 중국 나름의 입장에서 교학적으로 정리해 교판(敎判)을 잘 세운 대표적인 이가 천태종의 지의(智顗, 538~597) 대사와 화엄종의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었다.
이들에 의해 천태종의 오시 팔교(五時八敎)과
화엄종의 오교 십종(五敎十宗)이 이루어졌다.
화엄-아함-방등-반야-법화ㆍ열반으로 정리된 천태종의 5시교판,
소승교-대승시교(始敎)-대승종교(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로 정리된 화엄교판(敎判)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천태종 오시팔교에서 5시란 붓다 일생 동안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눈 것이니,
첫째는 화엄시(華嚴時)로서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직후 불교 최고의 진리인 <화엄경>을 21일간 설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녹야원시(麗野苑時)로서 <화엄경>을 설하신 후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비구들을 위해 소승교를 설한 것을 말한다. 이후 12년간 주로 소승교만을 설해, 이때의 설법을 결집한 것이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해서 이 시기를 아함시(阿含時)라고도 한다.
셋째는 방등시(方等時)로서 아함시 후 8년간 대 ‧ 소승의 법을 함께 설해 영리한 근기(根機)나 둔한 근기나 간에 고르게 이해시키는 시기를 말한다. 이때 <유마경> ․ <능가경> ․ <능엄삼매경> ․ <금강경> ․ <승만경> 등을 설했다는 것이다.
넷째 반야시(般若時)로서 방등시 후 22년간 모든 <반야경>을 설하셨는데, 주로 공사상(空思想) 등을 설법하신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마지막 법화ㆍ열반시(法華涅槃時)로서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시기를 말한다. <법화경>은 8년간 설법했으며, <열반경>은 붓다가 열반에 드시는 최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설법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을 했지만 이 모두는 사실과 다른 완전한 허구이다. <아함경>보다 먼저 <화엄경>을 설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리고 8교란 붓다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의 방식을 달리했으므로 그 교화 방법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화의사교(化儀四敎)는 돈교(頓敎), 점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이고, 붓다가 설한 설법의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눈 화법사교(化法四敎)는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를 말해 이 둘은 8교라 한다.
그리고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오교십종(五敎十宗)으로 교판을 단행했다. 붓다가 행한 모든 교설을 화엄종 입장에서 분류 ․ 비판한 교상판석(敎相判釋)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불교교리)을 설법의 형식과 내용상으로 얕고 높음에 따라 우열을 판단해 5교(五敎: 다섯 가르침)와 10종(十宗: 열 가지 종파 또는 종지)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 중 5교는 당나라시대 화엄종을 창시한 두순(杜順)의 교판을 현수 법장(賢首法藏)이 발전 ․ 체계화해 화엄종을 확립했다.
이상의 교상판석에 있어서 원교(圓敎)를 불교의 최고 위치에 두었다는 특징이 있다. 지의 대사는 원교를 <법화경>과 <화엄경>이라 하고, 현수 대사는 <법화경>을 돈교에 <화엄경>만을 원교라고 주장했는데, 천태 ․ 화엄 양 종파에서 원교를 불교 최고의 원리로 삼은 것은 같다.
위와 같은 천태 지의 대사나, 현수 법장 모두 당시로는 획기적 노력으로 교상판석을 이루었으나 요즘과 같은 문헌학적인 연구가 전무했던 당시이므로 과학적 근거 없이 종파별로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때문에 지금에 와서 보면 오히려 문헌조작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으며, 잘못된 것이라 비판되고 있다.
천태 대사의 교판에서 <화엄경>을 가장 먼저 설했다는 것도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고, <법화경>을 맨 나중에 설했다는 것도 잘못됐으며, 현수 대사가 분류한 오교 역시 아무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화엄경> ‧ <법화경> 모두 부처님이 설하신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이들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교상판석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언어는 일반적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기술하는 수단이다.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의미를 발생시킨다. 화엄에서 말하는 대상이란 사물의 본질로서 이치를 지시한다. 그럼으로써 교설 사이에 내재된 의미를 몇 가지의 단계로 구별하고, 사회적인 관습과 같은 의미체계를 만든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 혹은 의리분제(義理分齊)라고 부른다.
교리의 이치를 판별하고 해석해 화엄의 우위를 드러내는 방법론이다. 각 교설이 가지는 이치로서 대상을 분별해 그것의 의미와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분제(分齊)는 교설 상에 내재된 의리(義理)를 구별해 각자의 영역을 차별화시키는 작업이다. 차별이란 대상의 한계를 지어서 분별한다는 뜻으로, A는 A가 가리키는 이외의 대상의 배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가리키는 대상과 일대일 대응관계를 가지면서,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배제하는 작용을 한다. 이런 뜻에서 대상과의 상응관계를 전통적으로 대응이론이라 불렀고, 타자를 배제하는 작용을 ‘아포하론(The apoha theory)’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종파불교에서 소위 자신의 교설이 가지는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확립된 교판론이란, 실제로는 교설 간의 차별성을 구별해내는 ‘의미체계’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화엄철학에서 채용된 이런 교판론을 보조(普照) 선사는 간화선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화엄의 가르침이 아무리 수승하다곤 하지만, 결국은 사람들에게 앎의 장애를 일으키는 사구(死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 의미에 결과적으로 갇혀버리고, 본래적인 진리를 체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오시교판(五時敎判=오시팔교), 오교십종(五敎十宗) 참조.
*교선일치(敎禪一致)---교종과 선종의 사상과 수행을 일치시키려는 주장. 교선일치 사상은 중국 당나라 중기 화엄종의 제4조인 청량 징관(淸凉澄觀, 738~839)으로부터 시작돼 제5조인 규봉 종밀(圭峰宗密)에 이르러 명백하게 나타난다. 송나라 때에 와서는 선종과 교종이 융합을 이루었다. 송나라 이후에는 대중적인 염불과 선을 융합시킨 염불선이 성행했다.
*교수사(敎授師)---교수아사리(敎授阿闍梨)라고도 한다. 계(戒)를 받는 이를 인도해 수계하는 계단(戒壇)에 대한 여러 가지 작법(作法-요령)을 가르쳐주는 스님.
*교외별전(敎外別傳)---선종(禪宗)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말한다[이심전심(以心傳心)].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불교의 진수는 어떤 경전의 문구에도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말한다. 부처님이 언어로써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교내(敎內)의 법이라면, 교외(敎外)의 법은 부처님의 마음을 직접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표월지(標月指: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진리를 달에 비유한다면 교(敎)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으며, 이에 반해 선(禪)은 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불교의 진수는 어떤 경전문구에도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했다. 이는 정법안장(正法眼藏),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의 말과 더불어 선(禪)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그리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불교의 진수가 비밀리에 따로 전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밀리에 따로 은밀하고 내밀한 전수법에 의해서 전해진 적이 없다. 부처님은 깨달아 아신 모든 것을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근기와 지식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공개리에, 백일하에 투명하게 전해주셨지, 어느 누구에게도 은밀한 속삼임을 들려주신 적이 없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해서 다자탑전반분좌(多子塔前畔分座), 영산회상염화미소(靈山會上搛花微笑), 니련선하곽시쌍부(泥蓮河畔槨示雙趺)가 조사선에서 교외별전이 된 근거라는 것이다.---→염화미소(拈華微笑) 참조.
*교장총록(敎藏總錄)---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중심이 돼 고승들이 쓴 장 ․ 소(章ㆍ疏)를 모아 편찬한 불경 해석서이다. 원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고, 줄여서 교장(敎藏)이라 한다. <교장총록>은 서역 ․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의 정본(正本) 이외 주석서인 장 ․ 소(章ㆍ疏)만을 수집해 편찬했으므로 정식 대장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장경(續藏經)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초조대장경이 완간된 뒤 고려 문종(文宗) 대에서 선종(宣宗) 대까지 25년의 기간을 두고 초조대장경에 누락된 국내는 물론 송(宋) ․ 요(遼) ․ 일본(日本) 등지까지 산재한 주석서를 최대한으로 수집한 대단한 불경 해석서였으나 몽고 침략 때 모두 소실돼 현재 전하지 않는다.
*교전아난 선전가섭(敎傳阿難禪傳迦葉)---교학은 아난(아난다)에게 전하고, 선은 가섭에게 전했다는 말이다. 아난은 부처님 법문을 가장 많이 들었지만 선을 통해 마음을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 법맥은 가섭에게 전해진 것이다. 아난의 입을 통해 경전이 형성됐지만, 20여 년을 더 수행한 후에 가섭으로부터 법맥을 이어받아 2대조사가 됐다. 가섭은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통해서 부처님의 마음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에 ‘선시불심 교시불어(禪是佛心敎是佛語)’란 말이 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만으로는 부처님 마음을 깨칠 수 없고, 선을 통해서 부처님 마음을 깨칠 수 있다는 말이다.
*교종(敎宗)---불교에서 교종이란 경전(붓다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종파들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입된 초기에 해당하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중기까지는 주로 대승불교가 교종중심으로 발전했고, 중국에 있어서도 당(唐)나라시대까지는 교종 일색이었다.
이 시대에는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만이 불교신행의 근거였고, 법보(法寶)인 경전을 신행의 의지처로 삼았으므로 학문적 소양이 있어야만 접근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주로 상류층의 지적 여가이자 교양영역으로 평가를 받았고, 왕실중심으로는 국가안녕과 왕실번영을 기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서민들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귀족불교 내지는 의식행사 중심의 호국불교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보니 주요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교파가 생겨나게 됐는데, 경전 중에서도 <화엄경>이 최고 경전이라 해서 이를 소의경전으로 한 화엄종이 생겨났고, <법화경>이 부처님의 진실한 의중(意中)과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라 해서 이를 소의경전으로 한 법화종, 천태종 등이 생겨났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禪宗)이 들어오면서 교종은 그 세력이 위축됐다.
*교진여(憍陳如)---빠알리어 안나 콘단냐(aññā-koṇḍañña)이다. 붓다가 성도(成道)한 후 초전법륜(初轉法輪) 당시 불제자가 돼 제일 먼저 깨달음을 얻어 다섯 비구의 우두머리가 됐다.---→꼰단냐(Kondanna) 참조.
*구거(九居)---구유정거(九有情居)의 약칭. 중생이 머물고자 원하는 곳이 9가지임을 말한다.
① 욕계의 인천(人天) ― 중생의 몸이 여러 가지고 생각도 서로 다른 곳.
② 범상천(梵象天) ― 몸은 다르나 생각이 같은 곳.
③ 극광정천(極光淨天) ― 몸은 같으나 생각이 다른 곳.
④ 변정천(遍淨天) ― 몸도 생각도 같은 곳.
⑤ 무상천(無想天) ― 생각도 없고 그 생각하는 대상도 없는 곳.
⑥ 공무변처(空無邊處) ― 끝없는 허공의 자재함을 좋아하는 중생이 사는 곳.
⑦ 식무변처(識無邊處) ― 생각을 여읜 곳.
⑧ 무소유처(無所有處) ― 적정(寂靜)하고 무상(無想)한 정(定)에 주(住)하는 곳.
⑨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 식처(識處)의 유상(有想)을 여의고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무상(無想)도 여읜 곳.
*구게왕국(Guge, 古格王國)---구게왕국은 9세기 티베트 토번(吐蕃)왕국이 분열된 뒤 성립된 지방 정권으로 비교적 세력이 강성한 국가였다고 한다. 토번 마지막 왕 랑다마(郎達瑪)가 죽은 뒤 벌어진 수차례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지더니마(吉德尼瑪) 왕자가 아리(阿里) 지역(티베트 서쪽 끝단)으로 도피해 새로 세운 왕국이었다.
지더니마는 후에 아리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세 아들들에게 나눠줬는데, 이들 나라가 라다크왕국, 푸란왕국, 그리고 구게왕국이다. 중심지는 히말라야 산맥 북서부 지금의 티베트와 라다크 중간 지대, 지금은 중국 땅 자다현(Zadha, 札達縣, 해발 3500m) 지역으로 퇼링(Tholing)이라고도 한다.
구게왕국은 지더니마의 셋째 아들인 더짜오(德朝)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서장왕신기(西藏王臣記)>에 따르면 구게왕국은 700여 년간 16명의 왕이 차례로 통치했으며, 강성했을 때는 서쪽으로 캐시미르 일대와 지금의 파키스탄 일부까지도 지배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왕국은 인도, 네팔, 티베트를 잇는 국제 교역의 중심에 서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산에 토굴을 파고 살았으며, 이런 독특한 지형에 적응해 살면서도 그들이 꽃피운 불교미술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 특히 1203년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할 당시, 잔존 세력들이 이 구게왕국으로 도망 왔다고 한다.
이렇게 700년을 이어오던 왕국은 1635년 라다크 군대의 침공을 받고 패망했다고 하는데, 금은보화를 노린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망했다고도 한다.
*구결(九結)---9종의 결박이란 뜻. ‘결(結)’은 번뇌를 뜻한다. 중생을 결박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데 방해하는 9종의 번뇌이다. 말은 결박이지만 사회적 제약도 아니고, 타인에 의한 제약도 아니다. 스스로 자초하는 결박인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 중생은 자유와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박을 갈구하며 사는 것 같다. 구결(九結)은 다음과 같다. 아래 내용은 <아비달마품류족론>에 의한 것이다.
1. 애결(愛結): 탐(貪), 애욕.
2. 에결(恚結): 진(瞋), 성냄.
3. 만결(慢結): 만(慢), 자만.
4. 무명결(無明結): 치(癡), 무지. 지혜가 없는 것.
5. 견결(見結): 편견,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의 3견(三見).
6. 취결(取結): 집착,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2취(二取)
7. 의결(疑結): 의심, 진리[諦]에 대해 망설이는 것.
8. 질결(嫉結): 질투, 마음이 질투하고 꺼리는 것.
9. 간결(慳結): 인색, 마음이 비루하고 인색한 것.
*구경(究竟, 산스크리트어 uttara)---독특한 불교용어로서 주로 궁극의, 완전한, 최종의 극치, 그리고 최상, 최고의 경지를 이룩함, 궁극에 도달함 등의 의미가 있다. 예컨대 최극무상(最極無上)의 진리를 불(佛)이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내어 구경법신(究竟法身)이라고 하고, 불교의 지고최종(至高最終)의 목적인 대반열반(大般涅槃)을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다.
① 끝에까지 이르는, 완전한 성취, 완성.
② 지극(至極), 궁극, 최후·완결.
③ 이르다, 도달하다, 궁극에까지 도달하다,
④ 철저하게 체득하다,
⑤ 성취·달성·실현하는 일, 완성,
⑥ 최후에 이른 곳, 최후의 목적,
⑦ 구경위(究竟位)의 준말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지위 등을 일컫는다. 그 외에도 마침내, 결국, 결과 등의 뜻이 있다.---→구경위(究竟位) 참조.
*구경각(究竟覺, 산스크리트 uttara vitarka)---보살의 수행이 원만해서 궁극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경지를 이른다. 즉 붓다와 같은 완전한 깨달음, 곧 부처의 상태를 이룬 것이나 부처가 되는 자리를 뜻한다.
구경각을 가리키는 다른 낱말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보리(菩提) 또는 각(覺), 묘각(妙覺), 묘각지(妙覺地), 묘각해지(妙覺海地), 적멸심(寂滅心), 적멸심 묘각지(寂滅心妙覺地), 반야(般若), 마하반야(摩訶般若) 등이 있다.
여러 불교 종파와 경전에서는 구경각을 깨우치게 되는 선정(禪定)도 거론하는데, 예컨대 <화엄경>과 화엄종의 교의에 따르면,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면 비로소 구경각을 깨우쳐 부처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금강경>에 따르면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의거해, <수능엄경>에 따르면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의거해 구경각을 깨치게 된다고 했다.
대승불교의 주요 논서 중 하나인 <대승기신론>에서는 수행을 통해 증득한 깨달음의 경지의 차이를 불각(不覺)·상사각(相似覺)·수분각(隨分覺)·구경각(究竟覺)의 4각(四覺)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묘각(妙覺)은 온갖 번뇌(煩惱)를 끊어버린 부처의 지위로 불교의 구경각(究竟覺)을 가리킨다. 묘각은 대승불교의 보살 수행계위 중 마지막의 불과(佛果)를 가리키는데, <화엄경>에 나오는 41위(四十一位)나 <영락경>에 나오는 52위(五十二位)의 마지막 지위에 해당한다.
특히 <영락경>에 나오는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迴向)·10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52위는 <화엄경>의 10주·10행·10회·10지·불지(佛地)의 41위에 기반 해 성립된 보살 수행계위로서, 대승불교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보살 수행계위이다. 이들 수행계위에 대한 교의에 따르면, 등각보살 즉 등각의 지위에 있는 수행자가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 무명(無明), 즉 최초[元品]의 무명, 무시무명(無始無明)인 원품무명(元品無明),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끊고 묘각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했다.
묘각(妙覺)은 묘각지(妙覺地)라고도 하며, 또는 묘각 바다의 지위라는 뜻에서 묘각해지(妙覺海地)라고도 한다. 또한 적멸심(寂滅心) 또는 적멸심 묘각지(寂滅心妙覺地)라고도 한다.---→사각(四覺) 참조.
*구경무아(究竟無我)---<금강경> 제17분이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이다. 여기서 무아법에 통달이 돼야 그제야 비로소 보살이라 이름 하는 것이라 했다. 구경무아 해야 보살이 된다는 말이다. ‘구경무아(究竟無我)’란 필경 ‘나’라는 존재는 결코 없다는 뜻이다. ‘구(究)’란 연구하고 탐구한다는 말이고, 끝이라는 뜻의 경(竟)자이니, 탐구해서 끝까지 들어가 보니 무아(無我)이더라 그런 말이다. <화엄경>에 부처님이 천백억 화신이나 32응신으로 나타나고, 관세음보살 기도를 열심히 하면 관세음보살이 감응하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아니까 천백억으로 바뀌고 무아니까 32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무아가 돼야 관세음보살이 감응을 한다. 중생은 무아가 안 되니까 그게 안 되는 것이다. 무아가 되면 중생이 아무리 많아도 다 구제할 수 있다. 무아가 안 되니까 자기 식구 하나 간수 못하고 내 몸 하나 간수 못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몸이라는 것이 원수 덩어리다. 마음이 복잡하다. 그 복잡한 마음을 만드는 원인 대부분이 이 몸 때문이다. 따라서 구경무아가 돼야 성불할 수 있다.
*구경위(究竟位)---유식(唯識) 수도 5위(修道5位), 즉 유식불교에서 있어서 수행 5단계[5위(位)]의 하나로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지위(경지)를 말한다.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고 진리를 증득해 최종의 불과(佛果)에 도달한 지위이다. 이를 구경각(究竟覺)을 이룬 경지라 한다.
따라서 구경위(究竟位)는 진여를 성취한 단계, 구경의 경지, 대해탈과 대보리의 지혜를 성취하고 무주상열반(無住相涅槃)인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궁극적인 불도수행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경지이다.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서 체성이 원만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무루(無漏)라 하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어 부사의(不思議)라 하고, 더 이상 멸진해야 할 번뇌가 없기에 항상 상주한다고 하고, 모든 유정들을 안락하게 하므로 안락신이라 하고, 영원히 다시 묶이지 않으므로 해탈신이라 하고, 최고의 적묵(寂黙)을 이루었기에 대성인이라 하고, 한량없는 공덕의 법으로 장엄됐기에 법신이라 한다.
*구경일승(究竟一乘)---구경이란 곧 가없고 끊어짐이 없음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곧 불승(佛乘)이다. 성문승과 연각승이 모두 가르침에 들어가는 까닭에 삼승은 곧 일승이다. 일승을 얻은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곧 열반의 세계이다. 열반의 세계는 곧 여래의 법신과 다름이 없다. 여래는 곧 법신이다. 구경법신(究竟法身)이란 곧 구경일승(究竟一乘)이다. 따라서 구경일승이란 완벽한 일승을 말한다.
*구경지(究竟地)---제10지(地). 이것은 보살의 계위 제10지로, 최후의 계위(階位)이다. 이 계위에서 보살은 대법신(大法身)을 얻어 자재력(自在力)을 갖춘다. 이 계위를 지나 등각(等覺) 묘각(妙覺)에 이르면 성불하게 된다.
「선종정맥에서는 돈오(頓悟)라 하면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했다. 돈오한 동시에 돈수(頓修)여서 후수(後修)가 필요 없다.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얼음이 본래 물임을 안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얼음이 녹아서 물로 완전히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을 말한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이니 제8아뢰야 무심(無心)을 물에다 비유한 것이다.
한편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깨달음(悟)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얼음이 그대로 있으니, 따뜻한 기운을 빌려 얼음을 녹이듯이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망상을 다 끊어야 하니 거기에 점수가 필요하고 그래야 성불한다는 것이다. 육조의 선종정맥에서 주장하는 돈오돈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깨달음(悟)이라 하면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망념이 끊어진 자체, 무심의 경계 이것도 벗어남을 말한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돼 물이라고 하는 자체도 볼 수 없는 이 구경지(究竟地)를 깨달음이라고 한다.」- 백일법문
*구공(俱空)---삼공(三空)의 하나. 삼공은 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구공(俱空)을 말한다.
• 아공(我空) ― 연기에 의해 지 ․ 수 ․ 화 ․ 풍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임시적으로 결합된 가짜 ‘나’를 두고 실재한다고 고집하는 아집(我執)을 부정하는 것이다.
• 법공(法空) ― 객관세계의 일체법이 공함을 모르고 여기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을 깨뜨리는 것이다.
• 구공(俱空) ― 이러한 아공, 법공마저도 버리고 초월해서 공(空)하다는 생각까지도 비워 마음자리의 본성에 계합(契合)함을 말한다. 필경공(畢竟空)과 비슷한 말이다. 즉, 구공(俱空)은 제법(諸法)의 본성에 계합하는 것을 뜻한다. 아공ㆍ법공을 다 초월해 공(空)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서, 안과 밖이 모두가 공하고, 청정하다고 해서 비로소 마음자리의 본성에 계합한 것을 말한다. 유(有)라고도 할 수 없고 무(無)라고도 할 수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ㆍ불생불멸의 경지가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상계가 바로 진리(절대계)의 모습이고, 현상계와 절대계는 둘이 아니라서 아공과 법공을 다 이해한, 그래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를 말한다. 곧 진리의 궁극처, 궁극의 진리, 아집(我執)ㆍ법집(法執)ㆍ무집착(無執着)까지 놓아버 린 궁극의 공(空)을 말한다. 혜명 수보리 존자는 구공의 경지인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가장 잘 체득한 분이기에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렀다. 이러한 구공의 경지에 이른 분이 부처님이다.---→삼공(三空), 필경공(畢竟空) 참조.
*구구상투(句句相投)---→‘기기상응(機機相應) 구구상투(句句相投)’ 참조.
*구극(究極)---진리의 가장 오묘하고 깊은 경지를 말한다. 진리의 마지막 경지까지 도달해 더 이상의 것이 없는, 최고라는 의미이다. 로서, 궁극(窮極)과 같은 의미이다.---→궁극(窮極) 참조.
*구나발마(求那跋摩, Gunavarman, 367~431)---공덕개(功德鎧)라고도 한다. 고대 불교가 성행하던 계빈국(罽賓國, 현 카슈미르) 왕족 출신으로, 일찍이 출가에 경ㆍ율ㆍ논 삼장에 밝았다. 구나발마는 30세 때 계빈 왕이 후사 없이 타계하자, 사람들은 종실인 그에게 계위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사양하고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얼마 후 홀연히 사자국(獅子國, 현 스리랑카)에서 배를 타고 사파국(闍婆國, 현 수마트라나 자바)에 이르러 전교를 했다. 그리고 다시 424년 해로로 중국 남송(南宋)에 왔다. 그 후 기원사(祇洹寺) 등지에서 역경(譯經)에 전념해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사분비구니갈마법(四分比丘尼羯磨法)>, <우바새오계상경(優婆塞五戒相經)> 등 다수의 역서를 남겼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산스크리트어 Gunabhadra, 394~468)---중부인도출신 승려. 구나발타라는 범어 구나바드라(Gunabhadra)의 음사이고, 공덕현(功德賢)이라고도 한다. 바라문족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천문ㆍ수학ㆍ의술ㆍ주술(呪術), 오명론(五明論) 등에 정통했으며, <아비담잡심론(阿毘曇雜心論)>을 읽고 불교에 귀의, 대승불교를 공부했으며, 435년에 스리랑카를 경유 해로로 남송(南宋=劉宋)으로 와서 경전번역에 종사했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승만경(勝鬘經)>, <능가경(楞伽經)>, <대법고경(大法鼓經)>, <화엄경(華嚴經)> 등 중요한 불경을 번역했다.
※오명론(五明論)---내명(內明)ㆍ인명(因明)ㆍ성명(聲明)ㆍ의방명(醫方明)ㆍ공교명(工巧明)의 다섯 학문을 합친 말이다. 내명(內明)은 불교학이고, 인명(因明)은 불교논리학이며, 성명(聲明)은 문법과 음률에 관한 학문이고, 의방명(醫方明)은 불교의학, 공교명(工巧明)은 건축학이다. <오명론>은 위(魏)의 명제(明帝) 때에 파두마국(波頭摩國)의 삼장율사(三藏律師) 양나발타라(攘那跋陀羅)가 사나야사(闍那耶舍)와 같이 한역했다. 여기서 명(明)은 학문이란 뜻이다.
*구념심행(口念心行)---입으로 염하고 마음으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육조단경>에 “마하반야바라밀을 구념심행(口念心行)하라.”는 말이 나온다. 또 <선가귀감 52>에 “염불(念佛)이라 하는 것은 입으로 하면 송불(誦佛)이고, 마음으로 할 때 비로소 염불이 된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에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라고 했다. 즉, 구념심행이란 입으로 염하고 마음으로 실행해서 마음과 입이 합치돼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염불을 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마하반야바라밀” 혹은 “관세음보살”을 외우면서, 마음은 집에도 갔다가 작년에 놀러갔던 바닷가에도 갔다가, 또 과거로도 갔다가 미래로도 갔다가, 이러면 그것은 진정한 염불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든 관세음보살을 염하든 자기가 염하고 있는 소리를 자기가 들어야 된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구담(瞿曇)---고타마(산스크리트어 Gautama)의 음역, 즉 석가모니 종족의 성씨(姓氏)을 말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를 구담씨라고도 한다.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구담승가제바는 4세기 말 인도 계빈국(현 카슈미르지역) 출신으로 중국식 이름으로는 중천(衆天)이라고 하는데, 전진(前秦)시대에 중국에 와서 혜원(慧遠), 축불념(竺佛念) 등과 함께 주로 논서를 번역했다.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불전을 강의하며 중국어를 공부하는 도중, 기존 <아함경> 번역이 미비한 점을 발견하고 <중아함경(中阿含經)>과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등도 번역했다.
*구도사생(九道四生)---원효 대사가 지은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에 나오는 말인데, 아홉 곳에서 머무는 중생과 네 가지 종류의 목숨 가진 것을 말한다.
구도(九道)는 오직 원효 대사 혼자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구도는 욕계(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색계 4곳+무색계 4곳을 말하는데, 육도 중에서 오도를 하나(욕계)의 세계로 본 것이다. 이와 같이 원효 대사는 자의적으로 말을 만들어 쓰기도 잘했다. 그리고 사생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을 말한다. 원효 대사는 이 구도 사생이 모두 득도(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원효 대사가 말하는 구도를 구류중생(九類衆生)을 의미한다는 사람도 있다.---→구류중생(九類衆生) 참조.
*구두선(口頭禪)---입에 붙은 선(禪)이라는 말이다. 참선은 오직 실답게 공부하고 깨칠 따름이지, 아무런 글도 말도 지식 따위는 필요치 않은데, 실다운 깨침은 없으면서 입으로만 선이니 도니 법이니 하는 것을 구두선이라 한다. 즉, 수행은 하지 않고, 선(禪)에 대해 장황하게 말만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조사어록에 담겨있는 구절의 참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언구(言句)에 현혹돼 마치 깨달음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것을 말한다. 입으로만 수행하는 선이라고 매도하는 선어(禪語)인데, 이 구두선 폐해 때문에 야호선(野狐禪)이니 앵무새선이니 하는 유사한 선어들도 나왔고, 공염불이란 말도 나왔다.---→문자선(文字禪) 참조.
*구래부동명위불(久來不動名爲佛)---의상(義湘) 대사 <법성게(法性偈)> 마지막 구절이다. ‘옛적부터 동함 없는 그 이름 부처일세!’ 그렇게 읊은 것이다. 사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변함없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뜻이다.
“거기 앉은 사람이 누구냐? 부처다. 언제부터? 옛날부터. 옛날부터 꼼짝도 안하고, 뭐 수행한 적도 없고, 절에 쫓아다닌 적도 없고, 법성게 배운 적도 없이 그대로 아무것도 안한 그 상태 그대로 이름이 부처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저 먼 과거 생으로부터 오면서 십 원 한번 시주한 적도 없지만, 부동(不動)이라, 옴짝하지도 않고 움직인 적도 한번 없는데 그대로 부처라는 것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그때 여래가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온 법계의 모든 사람들을 두루 살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이 모든 사람들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그런데 어리석고 미혹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 바로 본래부처임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곧 부처임”을 말하는 것이다.
*구루(산스크리트어 Guru)---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스승을 일컫는 말로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한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생님을 통칭하는 용어이고, 서구사회에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철학과 종교지도자들을 지칭한다.
*구루 그란트 사히브(Guru Granth Sahib)---줄여서 ‘그란트사히브’라고도 한다. 시크교의 5대 구루(영적 스승)인 아르잔 데브가 선대 구루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시크교 경전이다.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가(讚歌)를 모았으며, 편찬 직후인 1604년 인도 북부 펀자브주 암리차르에 위치한 시크교 성지 황금사원에 안치됐다.
16세기 초 2대 구루 안가드가 시크교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의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처음 작성됐다. 이후 1604년에 아르잔 데브가 집대성했고, 9대 구루 테그 바하두르가 찬가 116편을 추가 작성해 1430편의 찬가로 최종 완성됐다. 이어 1708년 10대 구루 고빈드 싱이 사망하기 전 모든 시크교도들에게 <그란트사히브>를 구루로 받아들이라고 천명하면서 영원한 시크교의 구루가 됐다.
시크교 구루의 설교뿐 아니라 힌두교, 이슬람교의 교리도 담겨 있다. 언어가 단순명료하고 정확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시크교도들에게 구루의 화신으로 숭배되며 구루와 동일한 신성한 존재로 간주된다. 실제로 마지막 구루였던 고빈드 싱 이후로 구루의 권한을 계승해 시크교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구루요가(Guru Yoga)---‘구루(Gur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의 스승(mentor)을 의미하며, 구루요가는 스승과 하나 되기 위한 명상이다. 즉, 명상으로 스승을 심상화(心象化)하는 수행법이 구루요가이다. 스승이 내 속으로 들어오기를 청하고, 그의 신성한 모습을 시각적으로 상상하며, 그와 하나로 결합하는 수행으로서, 상상 속에서 스승과 결합하면, 나와 스승은 더 이상 둘이 아니다. 내가 스승이 되고, 내가 붓다가 된다.
이상으로 볼 때, 구루요가란 참된 스승을 찾아서 스승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진리의 가르침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즉 구루(스승)의 본성과 하나가 되기 위한 수행법으로 이 수행을 통해서 스승의 깨달은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계합되는 방법을 얻는다. 티베트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진수는 ‘구루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류동거일법계 자라장리살진주(九類同居一法界 紫羅帳裏撒珍珠)---<화엄경>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 나오는 말이다. 아홉 가지 종류의 중생들이 한 법계에 함께 살아간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더없이 아름답고 존귀하며 소중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과 생명들과 온갖 천지만물과 삼라만상이 모두가 같은 법계에 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들을 아름다운 비단 위에 뿌려 놓은 듯하다.”라는 뜻인데, 이 세상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도 모두가 더없이 아름답고 더없이 존귀하고 더없이 소중한 것이라는 말이다. 거기에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무슨 분별이 있겠는가. 그래서 세상은 지금 이대로 모두가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고, 그 모습은 지극히 아름답게 장엄돼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품에 등장하는 세상의 주인들은 우주만유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다 열거해 세상의 주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비스님
불교는 여하한 명목으로든 살상을 금하고, 따라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담을 쌓아놓은 것을 보면 큰 돌은 큰 돌대로 작은 돌은 작은 돌대로 각자 맡은 역할을 모두 잘 하고 있다. 작은 돌이 필요한 곳에는 큰 돌을 깨서 작게 만들어 쓴다. 그 작은 돌이 없으면 큰 돌은 그 자리를 지탱할 수가 없다. 큰 돌 작은 돌이 각기 자기 역할을 다하기에 튼튼한 담이 된다.
이와 같이 사람도 못나고 잘난 사람이 따로 없다. 못난 사람도 그 사람은 그 위치에서 그가 해야 할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작은 돌을 작다고 빼어버리면 담이 무너지듯, 못난 사람이 없으면 잘난 사람 자리도 지탱하기 어렵다.
아홉 종류의 생명들도 그 모습 그대로 소중한 가치가 있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불상(佛像)이 소중한 것이라고 해서 일체 사물들로 모두 불상을 만든다면 어찌 되겠는가. 불상은 탁자 위에 올려놓아야 빛을 낸다. 탁자가 없는 불상은 존재 가치가 없다. 탁자나 불상이나 동등하기 때문이다.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다. 온갖 생명들은 모두가 소중하고 모두가 아름답다.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이 값지다. 하나하나가 모두 비단 위에 진주를 쏟아놓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
*구류중생(九類衆生)---중생(衆生)은 인간에만 국한될 수는 없고, 정확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며, 요새 말로는 생물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생물 중에서도 식물은 제외되며 동물만을 지칭한다(우리말 짐승이 중생에서 전화된 것임).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중생, 즉 ‘사뜨바(sattva)’를 9종류로 나누어, 크게 세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첫 카테고리는 태어나는 방식에 관한 분류로 4종류가 들어간다.
1) 난생(卵生) - 알에서 태어나는 것임.
2) 태생(胎生) - 자궁의 태반에서 태어나는 것임.
3) 습생(濕生) - 물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물고기, 모기 등의 곤충류가 이에 속함.
4) 화생(化生) - 아무 근거 없이 갑자기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 도깨비나 신, 귀신 그리고 지옥의 존재와 같은 것임.
두 번째 카테고리는 형태의 유무에 관한 분류로서 다음 두 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색(有色) - 형태를 가진 모든 생물.
2) 무색(無色) - 형태가 없는 신(神), 귀신과 같은 것들.
세 번째 카테고리는 지각의 유무로 분류되는 것으로서 마지막 3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상(有想) - 오관(五官)의 지각을 가진 존재.
2) 무상(無想) - 물리적 오관(五官)의 지각을 갖지 않는 천상의 존재들.
3)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 - 지각을 가졌다고도 안 가졌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고(至高)의 신(神)들.
이렇게 해서 일체중생의 종류를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아홉 가지로 분류한 것을 구류중생이라 한다.
*구리태자(拘利太子, 산스크리트어 Koliputra)---붓다의 숙부 가비라성 곡반왕(斛飯王)의 맏아들로서 붓다에겐 사촌 동생이다. 붓다 성도 후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교화한 다섯 비구의 한 사람으로 마하나마(Mahanama) 혹은 마남구리(摩男拘利)라고도 하며, 구리태자(俱利太子)라고도 한다. 오백나한의 한 사람으로 마하남(摩訶男, Mahanama) 존자라고도 한다. 석가족의 마지막 왕 마하나마(Mahanama)와 이름과 같다. ---→‘다섯 비구(五比丘)’ 참조.
*구마라다(鳩摩羅多, 鳩摩羅陀, 산스크리트어 Kumarālabdha, ?~AD 22)---북인도 덕차시라(德叉尸羅, takṣaśila) 출신, 혹은 대월지국(大月氏國) 출신이라고도 하는 학승으로, 인도불교 19대 조사(祖師)이고, 경량부(經量部)의 논사(論師)였다.
8가지 신통력이 있어서 제2 붓다로 불리기도 했다. 브라만 출신으로 출가해서 승가야사(僧伽耶舍)에게 배우고, 여러 논(論)을 지어 포교에도 힘썼다. 일찍이 경전의 깊은 뜻을 연구, 하루에 3만 2000개의 말을 외어 썼다고 하며, 경전의 깊은 뜻을 연구해 <일출론(日出論)>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성실론(成實論)>을 지은 하리발마(訶梨跋摩)와 사야다(闍夜多)에게 법을 전했다고 한다.
*구마라습(鳩摩羅什, 쿠마라지바/Kumārajīva, 344~413)---중국명 동수(童壽)이다. 아버지는 인도인 구마라염(鳩摩羅炎)이며, 어머니는 구자국(龜玆國) 왕의 누이 기바(耆婆)였다. 태어난 곳은 구자국(쿠차)으로서 현재 중국 신강성 위그루 자치구에 속하는 곳이다.
아버지가 카슈미르 출신으로 대학승인 쿠마라야나(Kumārāyana)였는데, 구차국에 전도하러 왔다가 왕실의 꼬임에 빠져 환속해 공주와 결혼하고 구마라습을 낳았고, 구마라습을 출가시켜 삼장법사로 키웠다.
구마라습은 7세에 출가했으며, 북인도 계빈국(罽賓國-현 카슈미르)으로 가서 소승불교를 배웠다. 귀국 도중 카슈가르에서 대승불교, 특히 중관학(中觀學)을 배웠고, 구자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대승불교선양에 전념했으며, 그의 명성은 서역제국은 물론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이에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은 구마라습을 데려올 욕심으로 383년 여광(呂光)을 시켜 구자국을 치게 했다. 그리하여 여광이 구마라습을 데리고 귀국 길에 올랐으나 그 사이 전진(前秦)이 패망했으므로 여광은 고장(姑臧)이란 곳에 머무르면서 독립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니 구마라습도 여광에게 붙들려 그대로 양주에서 12년간을 머물렀다. 고생을 했지마는 다행하게도 이때 한자(漢字)와 중국어에 통달하게 됐다. 여광(呂光) 이후, 여소(呂紹)ㆍ여찬(呂纂)을 지나 여융(呂隆)에 이르러 후진(後秦) 황제 요흥(姚興)에게 항복하게 되자, 구마라습은 요흥의 영접(迎接)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갔다. 그때가 서기 401년이었다. 요흥은 구마라습을 국사로 예우하고 경(經)ㆍ논(論)을 번역하게 했다. 요흥의 뜻에 따라 중국여성과 혼인, 환속한 이후 그는 경전 한역에 전념하면서,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 <아미타경>, <범망경> 등 여러 대승경전과 <중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성실론> 등 논서를 비롯해 경전과 논서 70부 384권을 역출함으로써 중국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위대한 역경승이었다. 그의 번역은 간결하고 유려한 달의적(達意的) 번역이어서 오늘날까지 많이 읽히고 있으며, 특히 대승 논부는 이때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졌고, 그는 격의불교(格義佛敎)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구마라습은 당의 현장(玄奘)과 함께 2대 역성(譯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譯經家)로 꼽기도 한다. 구마라습 문하에는 3천여 명이 있었으며, 도생(道生)ㆍ승조(僧肇)ㆍ도융(道融)을 비롯한 많은 고승이 배출됐다.
*9만(九慢)---<구사론(俱舍論)>에 나오는데, 만(慢)을 7만(七慢: 일곱 가지 거만) 또는 9만(九慢: 아홉 가지 거만)으로 나누는데, 9만은 다음과 같다.
①아승만(我勝慢) ― 나는 그보다 잘 났다는 자만감.
②아등만(我等慢) ― 나는 그와 대등하다는 생각.
③아열만(我劣慢) ― 나는 그만 못하다는 열등감.
④유승아만(有勝我慢) ― 남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
⑤유등아만(有等我慢) ― 남이 나와 대등하다는 생각.
⑥유열아만(有劣我慢) ― 남이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
⑦무승아만(無勝我慢) ―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생각.
⑧무등아만(無等我慢) ― 남이 나와 대등한 것이 없다는 생각.
⑨무열아만(無劣我慢) ― 남이 나만 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
이런 아홉 가지 잘못된 편견이 9만이다. 모든 사물의 장단점을 보지 못하고 단편만 보는 것으로 이런 편견은 깨달음을 얻는데 장애가 됨을 경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만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사만(四慢)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밖에 칠만(七慢)도 있다.---→사만(四慢), 칠만(七慢) 참조.
*구명시식(救命施食)---→구병시식(救病施食) 참조.
*구법승(求法僧)---인도(天竺國)로의 구법여행은 대략 AD 3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구법승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주자행(朱子行)을 비롯해 여러 순례승들이 서역을 찾아 나섰다. 주자행은 AD 260년 무렵 <도행반야경>의 원본을 구하기 위해 서역의 우전국(于闐國-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서쪽, 지금의 和田 지역)으로 갔다가 거기서 <방광반야경>을 구해 282년 그의 제자 법요(法饒)를 시켜 중국(낙양)에 전했으며, 그는 거기서 80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보운(寶雲)이 397년 서역을 향했으며, 지맹(智猛)은 404년 동지 15명과 더불어 인도로 향했고, 지엄(智嚴)은 427년 인도로 향했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 이름이 전해진 스님의 숫자만 해도 169명에 이르고, 의정(義淨) 스님의 저서인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올라 있는 스님만도 57명이다. 이 중에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스님도 올라있다. 이 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구법여행을 떠났다.
당시 인도로 여행하는 길은 바다로 가는 길과 육로로 가는 두 길이 있었다. 육로로 가는 길도 티베트-미얀마를 경유하는 길과 실크로드를 따라 가는 길이 있었다. 주로 실크로드 길을 택했는데, 타림분지-파미르고원을 넘어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을 거쳐 인도로 가는 험한 길이었다. 법현 스님은 그의 <불국기(佛國記)>에서 실크로드의 험악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악귀(惡鬼)와 열풍(熱風)이 많다. 이와 만나면 모두 죽어남은 것이라고 없다. 위엔 날아다니는 새가 없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이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방향조차 감 잡을 수 없다. 다만 사람이 죽어 썩은 뼈를 표식으로 삼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현장 스님도 실크로드의 험악함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사막의 모래는 흘러 날아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 바람 따라 이루어진다. 사람의 지나간 자취를 찾을 수 없어 길을 잃는 일이 허다하다. 사방이 망망대해 같아서 갈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물이 적고 열풍이 많다. 바람이 일어나면 사람과 짐승이 정신이 희미해져 병에 걸린다. 이로써 목숨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이 당시 인도로의 여행은 언제 어디서 죽을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죽음의 길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구법승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법승은 끊이지 않았다. 이들 구법승이 남긴 여행기가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구법승의 여행기>
① 법현(法顯, 317~420) – 불국기(佛國記). 역유천축기전(歷遊天竺記傳)
② 현장(玄奘, 602~664)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서유기).
③ 혜초(慧超, 704~787) - 신라 승,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④ 의정(義淨, 635~713) -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①, ②, ③을 3대 여행기라 하고, ④까지를 4대 여행기라 한다.
• 법현(法顯)은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왔다. 법현은 동진(東晉)시대 인물로 항상 중국에 율장이 부조함을 개탄하다가 혜경(慧景), 도정(道整), 혜달(慧達) 등과 뜻을 모아 AD399년 장안을 출발했다. 돈황(燉煌)을 거쳐 타크라마칸 사막을 건너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인도로 들어갔다. 인도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순례하고, 계율과 범어를 배우고, 인도를 비롯한 30여개국을 여행한 후 413년 배로 귀국했다.
• 현장(玄奘)은 당나라시대 12세에 출가해 여러 경론을 배웠으나 그 내용들에 서로 모순이 있어 의심스러움으로 현지에 가서 직접 배우고자 629년 출발했다. 그리하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633년 인도에 도착했다. 그 역시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 참배하고, 나란타대학에서 계현(戒賢) 법사로부터 유가론, 인명론, 구사론 들을 3년 동안 학습했다. 그는 17년 동안 130여개국을 순례하고 645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처님 진신사리 150과와 대ㆍ소승의 경ㆍ율ㆍ논 520질 657부 등 많은 경론과 불상을 가져왔다.
• 의정(義淨)은 역시 당나라 스님으로 671년 37세 나이로 바닷길로 인도에 가서 30여개국을 여행하며 여러 성지를 둘러봤다. 그리고 나란타대학에서 대ㆍ소승의 깊은 이치를 공부했다. 그는 불학(佛學) 연구뿐만 아니라 천축 의약을 연구해 의학 분야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20여년을 인도에 머물다가 694년 범본 경ㆍ율ㆍ론 삼장 400부를 가지고 해로로 귀국했다. 이후 역경에 종사하며 <화엄경> 등 56부 230권을 번역했다고 한다. 의정(義淨)은 그의 저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641년 부터 691년까지 무려 50여 년 동안 57 명의 스님들이 구법하기 위해 인도를 순방한 사적(事蹟)을 선후를 가려서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당시의 인도 및 동남아시아 등지의 사정도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문화교류사에 귀중한 자료이다.
• 혜초(慧超)는 신라 승려이긴 하지만 언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신라 경덕왕 때 중국에 건너가 밀교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서 불도를 배웠다. 그는 금강지의 권유를 받아 723년(19세), 어린 나이로 바닷길로 수마트라와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로 가서 부처님 유적을 둘러보고 나란타대학에서 수학한 후, 오천축국(五天竺國)과 페르샤, 아라비아까지 순례했다. 귀국은 실크로드를 따라 733년에 중국에 돌아왔다. 10여년동안의 여행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해 담았다. 중국에 와서 오대산(五臺山)에 있었으며, 금강지의 역장(譯場)에서 많은 불경을 번역했다.
1906~09년 사이에 프랑스의 학자 펠리오(Pelliot)가 중국 간쑤 성[甘肅省] 지방을 탐사하다가 돈황(敦煌) 명사산 천불동(鳴沙山千佛洞)의 석실(石室)에서 앞뒤가 떨어진 책 2권(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구병시식(救病施食)---구병시식(救病施食)은 다른 말로 구명시식(救命施食)이라고도 한다. 구병시식이나 구명시식은 같은 의미로 "병을 낫기 위해 음식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즉, 병든 환자가 병을 완전히 치유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불ㆍ보살의 신묘한 가피력으로 축귀(逐鬼)하는 것을 구병시식이라 부른다. 병에 걸린 사람을 위해 사찰에서 행하는 일종의 제례의식으로서 시식(施食)이란 지옥에서 굶주린 고통 받는 가엾은 고혼들에게 공양물을 베풀어 그들의 원한을 달래는 일이다.
사람이 병이 들어 병원치료로서도 잘 났지 않을 때나 접신 빙의(憑依-귀신 들리는 것)가 돼 원인 모를 여러 가지 증세의 병들로 앓거나 그로 인해 집안이 이상하게 뭔가 잘못 돼가는 이러한 경우에 조상 천도재(薦度齋)와 더불어 별도의 의식을 행해서 이 고통에서 헤어나게 하는 의식을 말한다. 즉, 귀신병이라고 하는 빙의현상에 의해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불교의식이다. 그러나 이 구병시식은 아무나 치루는 의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을 다루는 의식이므로 그만한 법력이 있어서 치루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효험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미신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효과가 있는 경우도 있다.---→빙의(憑依), 천도재(薦度齋) 참조.
*구부경(九部經)---아래 구분교(九分敎, 빠알리어 navaṅga-sāsana)를 말한다.
*구분교(九分敎, 빠알리어 navaṅga-sāsana)---구부경(九部經)이라고도 한다. 붓다의 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처음엔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기억해 전승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도 어떤 통일성을 갖추어 정비할 필요성이 요구됐고, 그 결과 기억하기 편리하도록 분류했다. 그것이 구분교(九分敎) 혹은 십이분교(十二分敎)라는 분류이다. 이 분류는 제자들이 기억한 부처님의 법문을 형식상으로 정리해 기억하기 편리하게 하는 동시에 경전으로서의 체계를 정비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즉, 경전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아홉 가지로 분류한 것이니 부처님의 여러 가지 가르침이란 말이기도 하다. 구분교(9分敎)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법화경>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구분교는 남전경장(니까야)에만 나오고 북전경전(아함경)에는 십이분교(12分敎)가 나온다.---→십이분경(十二分經) 참조.
① 수다라(修多羅, 산스크리트어 sūtra 팔리어 sutta) ― 경(經) 혹은 계경(契經)이라 번역. 산문체로 설한 것.
② 가타(伽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 게(偈)라고도 음사. 게송(偈頌)·풍송(諷頌)·고기송(孤起頌)이라고도 함.
③ 본사(本事, 산스크리트어 itivṛttaka) ― 불제자의 과거 인연을 설한 부분. <법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이 여기에 해당함.
④ 본생담(本生譚,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jātaka) ― 붓다의 전생 이야기.
⑤ 미증유(未曾有, 산스크리트어 adbhuta) ― 붓다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설한 부분. 희귀한 공덕·기적에 관한 교설임.
⑥ 인연담(因緣譚, 산스크리트어 nidāna) ― 붓다를 만나 설법을 듣게 된 인연을 설한 부분. 서품(序品)이 여기에 해당함.
⑦ 비유(譬喩, 산스크리트어 avadāna) ― 비유로써 가르침을 설한 부분. 불제자에 관한 과거세(過去世) 이야기. 이야기가 교훈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⑧ 기야(祇夜, 산스크리트어 geya 팔리어 geyya) - 응송(應頌)·중송(重頌)이라 번역. 산문체로 된 내용을 다시 운문체로 설한 것.
⑨ 우파제사(優婆提舍, 산스크리트어 upadeṣa) ― 논의(論議)라고 번역. 교리에 대해 문답한 부분. 경(經)의 해설과 주해(註解).
※여시어(如是語) - 산스크리트어 iti vuttaka 를 번역한 말로 이제불다가(伊帝弗多迦)라 음역되기도 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전 첫 머리에 보면 여시아문(evam maya-srutam) 즉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라는 말은 곧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 말 속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므로 그대로 믿고 의심치 않는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여시어(如是語)는 정형문구(定型文句)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12분교에는 9분교에 없는 베달라(방광), 우다나(자설), 수기(授記) 세 가지가 추가 된다. 십이분교(12分敎)는 북전(北傳)의 문헌(산스크리트어 및 한역 경론)에만 나오고, 구분교는 남전경장(니까야)에 나온다.
⑩ 방광(方廣) : 베달라(vedalla, 毘陀羅) ―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중층적으로 기뻐하며 질문하는 교리 문답. 정형구(定型句)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⑪ 자설(自說) : 우다나(udāna) ― 부처님이 감흥적(感興的)으로 서술한 시(詩).
⑫ 수기(授記) 혹은 화가라(和伽羅) ― 산스크리트어 베야까라나(vyākaraṇa)의 음사. 수기(授記)라고 번역. 기설(記說)이라고도 한다. 경의 말뜻을 문답식으로 해석하고, 부처가 제자에게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한 부분.
*구비(九譬)---<법화경>의 9가지 비유를 말한다. 소승의 가르침에서는 성문승 혹은 연각승, 보살승을 증득해 번뇌를 여의고 열반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했으나, 대승의 진리를 펴는 <법화경>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각자에게 있는 불성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통해서 확신해서 느끼고 그것을 환히 보고 깨닫는 성불(成佛)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중생들이 잘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매우 실감나고 격조 높은 비유를 많이 담고 있다. 즉, 법을 말하고, 비유(譬喩)를 들어 경전을 뒷받침하도록 비유를 들고 있다. 그 중 이름난 아홉 가지 비유를 구비라고 한다.
구유(九譬)는 법화칠유(法華七喩)에 ⑧착정비유(鑿井譬喩), ⑨부소비유(父少譬喩), 둘을 더한 것이다.
① ‘비유품(譬喩品)’에 나오는 화택유(火宅喩).---→삼거가(三車家) 참조.
② ‘신해품(信解品)’에 나오는 궁자 비유(窮子譬喩).
③ 약초유품(藥草喩品)에 나오는 약초비유.
④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오는 화성비유.
⑤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 나오는 계주비유(繫珠譬喩).
⑥ ‘안락행품(安樂行品)’에 나오는 왕계비유(王繫譬喩).
⑦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나오는 의사비유(醫師譬喩).
이상은 칠유와 같다.---→‘법화칠유(法華七喩)’ 참조.
⑧ ‘법사품(法師品)’에 착정비유(鑿井譬喩)가 나온다. 우물을 팔 때 깊이에 따라 마른 흙에서 차츰 젖은 흙으로, 다시 물기가 많은 흙이 나오는 것을 보면 물이 가깝다는 것을 알게 돼 결국 물을 찾아낸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점차 일승에 이르는 단계를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착정비유’ 대신 ‘맹인비유(盲人譬喩)’를 넣는 경우도 있다. 맹인비유(盲人譬喩)는 선천적인 맹인이 약초로 시력을 얻고 나서 점차 이전의 무지를 각성해 진실한 여래의 지혜를 얻는다는 비유이다.
⑨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 부소비유(父少譬喩)가 나온다. 부처님이 성도하고 교화한 지 40여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땅으로부터 수많은 보살들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언제 이렇게 많은 보살들을 교화했느냐"는 감탄으로, 스물다섯의 젊은이가 백 살 된 노인을 보고 아들이라 하고, 백 살 된 노인 또한 그 젊은이를 보고 아버지라 한다면 믿지 않는 것처럼 이 경의 가르침이 몹시 심오함을 비유한 것이다.
*구사론(俱舍論)---원명이 아비달마구사론(산스크리트어 Abhidharmakosa-sastra, 阿毘達磨俱舍論)이다. 즉, 아비달마구사론이란 ‘아비달마코샤(anhidharmakośa)'를 음역한 것이다. 그리고 아비달마구사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이라고도 한다.
<청정도론>은 남방 상좌부불교 부동의 준거가 되는 주석서이고, <구사론>은 경량부적인 견해를 수용한 설일체유부의 논서로서 소위 소승불교의 대표적 논서이다.
AD 4세기 경 세친(世親, 바수반두, 320~400?)이 설일체유부의 교의체계를 간결하게 요약 해설한 백과사전식 논서인데, 설일체유부 교의를 체계화함에 있어서 비바사사(주석가)의 설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부파 특히 경량부설까지도 참조해 비판적 태도로 저술한 점에 특색이 있다. 세친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 속한 인물이었으며, 훗날 대승불교 유식파로 전향하기 전 지은 것이 <구사론>이다. 고ㆍ집ㆍ멸ㆍ도 사성제(四聖諦)를 큰 축으로 해서 불교의 방대한 교설을 정리했으며, 계(界), 근(根), 세간(世間), 업(業), 수면(隨眠), 현성(賢聖), 지(智), 정(定), 파아(破我)의 9품으로 구성돼 있다.
<구사론>은 불교철학 또는 불교의 교상(敎相)과 교학체계를 배우는데 있어서 반드시 이해해야할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논서이다. 이것은 'dharma' 즉 '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 혹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를 뜻하고, 그것을 담아서 전승(傳承)한 것이 아가마(아함)이다. 그리고 이 아가마에 담긴 'dharma'를 자료로 삼아 그것에 대해서(abhi-) 철학적으로 연구해 체계화시킨 '대법(對法)'으로서 불교사에서 가장 잘 정돈된 교학체계서이다.
후대에 발달된 중관학(中觀學)이나 유식학(唯識學)도 <구사론>을 바탕으로 다르마를 다른 관점과 입장에서 재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사론>을 무시하고는 중관(中觀)이나 유식(唯識)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대승의 교학체계인 유식학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을 중관의 공사상(空思想)에 의해 비판을 한 다음에 그것을 대승적으로 변용시킨 대승의 아비달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학자들은 옛날부터 '구사 팔년(俱舍八年) 유식 삼년(唯識三年)'이라는 말이 시사 하듯이 전통적으로 유식학에 뜻을 둔 불교학자는 아비달마불교의 꽃이자 열매인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을 먼저 공부하는 것이 순서였다.
인도 승려 진제(眞諦, 파라마르타/Paramartha, 499~569)는 중국 남조(南朝) 양 무제(武帝)의 초청을 받아 중국으로 와서 한역한 것이 <아비달마구사석론(阿毘達磨俱舍釋論)>이다. 이를 줄여서 <구사석론(俱舍釋論)>이라 한다. 그리고 그 후 당나라 때 현장(玄奘)이 이를 다시 번역해서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라 했고, 줄여서 <구사론>이라 했다. 그래서 진제의 번역을 구구사(舊俱舍)라 하고, 현장의 번역을 신구사(新俱舍)라 한다.
이 책은 명실상부 부파불교의 교학을 대표하는 명저로서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교리 문제에서 매우 권위 있는 저서로 중시돼왔고, 부파교학의 표준입문서로 활용돼왔다. <구사론>이 불교학의 기초이론으로서 오랫동안 평가돼온 것은 그 교의가 정연한 체계로 논술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불교술어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600개의 게송(偈頌)과 각 송에 대해 세친 자신이 붙인 8,000연의 산문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사론>은 기본적으로 아비달마7론이나 <대비바사론>을 근거로 하면서도, 이전의 논서와는 그 체계를 달리하는 <아비담심론>과 이를 개량 증보한 <아비담심경론>ㆍ<잡아비담심론>의 조직과 내용을 토대로 해 작성된 논서이다.” - 권오민
그리고 <구사론>은 설일체유부의 7대 아비달마 논서[7론(七論)]에 대한 입문서이자 체계적 요약서로서, 철학 ‧ 우주론 ‧ 윤리학 ‧ 구원론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로마가톨릭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견돼왔다. 남방불교의 <청정도론>에 대비되는 북방불교의 아비달마를 집대성한 대표적 논서이고,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이 남아있다.
<구사론>이 저술돼 반포된 직후 한편으로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설을 비판하고자 설일체유부의 정통학설을 밝힌 논서로서 세 종류가 현존한다. 현장(玄奬)의 한역(漢譯)으로만 존재하는 카슈미르 정통유부의 종장 중현(衆賢, Sanghabhadra)이 지은<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俚論)>과<아비달마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 그리고 아비달마의 등불이라는 뜻의 작자 미상인 <아비달마디파(Abhidharmadipa)>가 바로 그것이다.
<구사론>은 소위 말하는 소승불교의 근본이론서이기도 하지만 북방의 스님들도 ‘구사8, 유식3’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구사론 공부에 8년을 바치라고 했다. 옛날에 이력종장(履歷宗匠)이 되기 위해서는 15년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8년을 <구사론>을 공부하고, 3년은 대승 아비달마라 불리는 유식공부를 하고, 나머지 4년을 대승 경론을 공부하라는 말이다. 그만큼 아비달마는 법을 이해하는 핵심중의 핵심으로 옛날 중국의 큰스님들도 강조한 바 있다.
※이력종장(履歷宗匠)---스님이 되면 강원에서 불경을 배워야 하는데, 정한 바 경전을 모두 배운 사람, 즉 정해진 경전을 다 배운 종사를 말한다. 이론에 밝은 큰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구산(九山 秀蓮, 1909∼1983)---현대한국불교 수행자들의 사표. 송광사, 백양사, 해인사, 동화사 금당선원 등에서 수십 년 안거를 행한 선사다. 53년 통영 미래사를 창건, 62년 동화사 주지, 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설한 후 초대방장을 맡았다. 73년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한 이래 79년 미국 LA 고려사, 82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 미국 카멜 대각사를 개원하는 등 해외포교에 진력해 큰 성과를 남겼다. 이와 함께 69년 불일회를 창립해 총재에 취임한 후 국내 대중포교 현대화에도 큰 획을 그었다. 효봉 스님 법맥을 이은 구산 스님은 한국 선불교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고, 송광사 중창불사를 이뤄냈다. 그의 저서 <관(觀), 존재 그 완성으로 가는 길>은 존재란 무엇이고 영혼이란 무엇인가. 이 같은 의문에 답을 제시하고 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신라말기 부패해가는 귀족중심의 교종(敎宗)에 대항해 일어난 선종 사찰을 의미한다. 이들은 달마선법을 계승해 깊은 산속에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수행 도량을 일으켰다. 특히 신라 말, 고려 초에 흥기한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기풍인 선법을 획기적으로 진작시킨 아홉 사찰(구산선문)은 아래와 같다.
1. 가지산문(迦智山門) ― 도의(道義) ― 장흥 보림사
2. 동리산문(桐裏山門) ― 혜철(慧徹) ― 곡성 태안사
3. 실상산문(實相山門) ― 홍척(洪陟) ― 남원 실상사
4. 봉림산문(鳳林山門) ― 현욱(玄昱) ― 창원 봉림사
5. 사자산문(師子山門) ― 도윤(道允) ― 영월 법흥사
6. 성주산문(聖住山門) ― 낭혜(朗慧) ― 보령 성주사
7. 사굴산문(闍崛山門) ― 범일(梵日) ― 강릉 굴산사
8. 희양산문(曦陽山門) ― 도헌(道憲) ― 문경 봉암사
9. 수미산문(須彌山門) ― 이엄(利嚴) ― 해주 광조사
*구상(九想)---구상(九相)이라고도 한다. 옛날 수도자들은 인생의 무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 백골관 혹은 부정관(不淨觀)이란 수행방법을 썼다. 수도자들은 산이나 묘지로 찾아가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송장 곁에 가서 자리를 잡는다. 썩은 냄새가 나는 송장을 마주 내려다보고 앉아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데, 썩어가는 시체를 보는 데에도 그 순서가 있으니 이것을 구상(九想)이라 한다.
① 장상(脹想) - 죽은 자의 육체가 부풀어 팽창한 모습.
② 청어상(青瘀想) - 곪고 엉기는 검푸르게 변한 모습.
③ 괴상(壞想) - 시체가 썩어 뼈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모습.
④ 혈도상(血塗想) - 파괴된 시신이 이후 혈육으로 땅이 얼룩져 있는 모습.
⑤ 농란상(膿爛想) - 부패돼 고름으로 문드러지는 모습.
⑥ 담상(噉想) - 조수(鳥獸)가 와서 시신을 먹는 모습.
⑦ 산상(散想) - 조수가 먹은 이후 시신이 나눠지고 깨어져 흩어진 모습.
⑧ 골상(骨想) - 혈육이 없어지고 마침내 백골이 뒤죽박죽 돼 있는 모습.
⑨ 소상(燒想) - 백골 또는 불에 탄 재가 돼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
이쯤 되면 시체가 곧 나요, 내가 곧 그 시체이다. 시체가 욕심낼 것이 무엇이며, 자랑할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인간의 실체일진대 당신이 자랑하는 학벌, 재산 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상과 같이 시신이 아홉 가지 모습으로 썩어 한줌의 재로 변하는 과정이 구상이다. - <중아함경(中阿含經)>
*구상차제(九相次第)---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이 인과업보(因果業報)의 법칙에 따라 생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부질없는 생각 때문에 삶과 죽음 그리고 고통의 바다를 유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잘못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괴로움을 받기까지의 인과(因果)의 연쇄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구상차제라는 9단계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기신론>에서의 아뢰야식은 유식학파에서 말하는 단순한 장식(藏識)의 의미가 아니라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서 각(覺)과 불각(不覺)의 두 뜻을 지니며 일체법을 섭수하고 일체법을 낳는 근본이 되는 식이다. 여기서 불각은 다시 근본불각인 무명(無明)과, 무명에서 비롯한 지말불각인 삼세육추(三細六麤)로 나눠지는데, 이 삼세육추가 바로 구상차제이다.
따라서 구상차제(九相次第)란 근본불각인 무명에서 시작된 미혹함이 지말불각인 삼세육추라는 아홉 가지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진여라는 본마음에서 한없이 미끄러져 내려와 육도윤회를 거듭해온 연기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삼세육추(三細六麤)란 세 가지의 미세한 마음작용과 여섯 가지 거친 마음작용을 말한다. 삼세육추 가운데 최초의 무명업상(無明業相)이 가장 미세한 것이며, 이하로 점차로 거칠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삼세육추가 나오게 되는 원인인 근본무명은 무엇을 깨닫지 못해서 불각이라 하는지 <기신론>의 구절을 인용해 보자.
「불각이라는 것은 이른바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념이 있게 된다. 그러나 망념은 자체의 모습이 없어서 본각을 떠나 있지는 않다.」라고 하고 있다. 즉, 불각은 진여 혹은 진리가 절대적이고 평등해 생각 이전의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 근본불각에 의해 진여는 평등한 것에서 조금씩이나마 움직여간다. 그리하여 지말불각인 삼세육추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이다.---→삼세육추(三細六麤) 참조.
*구생기(俱生起)---태어남과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 따라서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또는 번뇌를 말한다. 후천적인 분별에 의한 번뇌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번뇌. 이에 반해,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것(번뇌)을 분별기(分別起)라고 한다.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성욕, 식욕 등과 같은 선천적이며 원천적인 번뇌를 말하며, 이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소멸하게 되며, 동시에 성불의 경지에 오르면 완전히 정화되는 아주 끈질긴 번뇌이다. 출가자의 신행에 가장 큰 장애요소이다. 반대말 - 후천적인 번뇌[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구생연(俱生緣, 빠알리어 사하쟈따 빠짜야/sahajata-paccaya)---함께 일어나는 조건이라는 말인데, ‘구(俱)’란 두 가지 것이 얽혀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 일컫는, 거기에는 마음의 주체가 되는 심왕(心王)과 그에 종속돼 있는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 마음부수)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광고를 보다가, “아! 이 게 그 로렉스 시계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심왕], 동시에 “그 시계 좋다, 가지고 싶다.” 하는 욕심이 일어난다[심소]. 이때 ‘롤렉스시계구나.’ 하는 것은 심왕이고, 좋다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심소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혼자서는 일어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심왕은 마음부수(심소)와 함께 일어난다. 이와 같이 함께 일어나는 관계를 구생연(俱生緣)이라 한다.
*구수(具壽)---존경할만한 선배를 가리킨다. 구족계를 수지하고 도과를 증득해 자리이타행을 갖춘 연장자인 수행자를 장로(長老)라고 부른다. 그 외에 상좌(上座), 대덕(大德), 수좌(首座), 존자(尊者), 구수(具壽)가 모두 비슷한 말이다.
※구수자(具壽者)---연장자란 말인데, 후배 비구가 선배 비구를 부르는 말이다.
*구시나가라---→쿠시나가라(Kuśinagara, 拘尸那揭羅/구시나갈라) 참조.
*구시화문(口是禍門)---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인데, 말을 한 번 잘못 뱉으면 큰 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TV 중계를 하는 토론에 나온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향해, “나 당신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한 마디를 던졌다. 이 한 마디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박 후보의 승리에 보탬을 줬는가 하면, 이로 인해 이 후보는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이 게 바로 구시화문의 현상이다.
*98수면(九十八隨眠)---여기서 수면(隨眠)은 번뇌를 뜻한다. 그래서 98근본번뇌(九十八根本煩惱)라고도 한다. 근본번뇌를 3계(三界)와 5부(五部)의 측면에서 세분했을 때 얻어지는 98가지의 근본번뇌들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번뇌의 근본번뇌를 육수면이라 하는데,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견(見)이다. 여기서 견(見)을 다시 오견(五見)으로 세분해서 합치면 10수면이 된다. 10수면(근본번뇌)를 3계(三界)와 5부(五部)의 측면에서 세분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 98수면이다. 이와 같이 근본번뇌를 3계와 5부로 분별해 98수면을 세우는 것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번뇌론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10수면을 3계로 나누고, 다시 5부로 나누는 것이므로 10×3×5=150가지의 수면이 돼야 하지만, 10수면 가운데 3계 모두에 존재하지는 않는 수면이 있고, 또한 5부 모두를 갖추지 않은 수면도 있기 때문에 98가지가 된다. 그리고 98수면과 수번뇌인 10전(十纏)을 합한 것이 108번뇌이다.
※3계란 욕계 ‧ 색계 ‧ 무색계를 말하고, 5부란 견고소단(見苦所斷) ‧ 견집소단(見集所斷) ‧ 견멸소단(見滅所斷) ‧ 견도소단(見道所斷) ‧ 수도소단(修道所斷)을 말한다.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학설이다.---→5부(五部), 10수면(十隨眠), 10전(十纏) 참조.
*구업(口業)---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 삼업(三業)의 하나이다. 업(業)은 인간이 짓는 행위를 말하며, 그 종류에 신업, 구업, 의업이 있고, 빛깔로는 선업(善業), 악업(惡業), 무기업(無記業-아무 뜻 없이 하는 행위)이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신중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구업이다. 그래서 <천수경> 첫머리에 구업을 청정케 하려는 주문인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을 놓아 더욱 강조한 듯하다.
구업의 종류를 분별하자면, 거짓말(妄語)과 바른 말(正語), 이간질하는 말(兩舌)과 참되고 화합시키는 말(眞語), 남을 악담하는 말(惡語)과 사랑스런 말(愛語), 이익을 쫓아 아첨하는 말(綺語)과 실속 있는 진실된 말(實語)을 열거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삼업 중에서도 구업은 입만 열면 이뤄지고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해 마구 내뱉는 구습(口習)으로 인해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아주 일어난다. 오늘날 정제되지 않은, 마구 내뱉는 조악(粗惡)한 말들의 홍수가 이 사회를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
말이란 우리의 생각과 감정, 뜻이나 사상 등을 나타낼 때 쓰이는 보편적 수단이다. 말은 또한 사람과 사람간의 의사소통의 편리한 수단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는 말에 비견될 만한 것이 없다. 오늘날 문명시대에 온갖 언론매체, 인터넷, 스마트폰, SNS, 영상, 편지 등의 다양한 의사 전달 수단이 개발돼 응용되고는 있지만 뜻과 함께 정(情)을 담고 직접 바로 상대에게 건넬 수 있는 수단으로 말 이상의 효용성을 지닌 다른 것은 없다.
그런데 말이란 “씨”가 있어 “성공의 열쇠”가 되는가 하면 “화(禍)를 키우는 종자”가 되기도 하므로 “양날을 가진 칼”이기에 어김이 없는바 말을 여하히 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인생을 성공적으로 운용하느냐 파멸로 몰아가느냐의 관건이 된다 할 수 있다.
말에는 말하는 이의 인격과 품성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말 몇 마디 해보면 금방 그 사람의 인격과 교양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거칠고 상스런 말을 쓰는 사람의 인격이 고상하고 원만할 리가 없다. 말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된 구업(口業)은 생사윤회하는 괴로움의 원인이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큰 장애물이 된다.
그래서 말과 관련한 경구(警句)는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그만큼 말의 무게와 가치를 강조한 속담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게 말하는 것이 제일이니 이는 곧 성인의 말이로다. 험담하지 않고 사랑으로 말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거짓 없이 진실한 말이 세 번 째이며, 법답지 않음을 피하는 법다운 말이 네 번 째니라.” - <잡아함경>
그러니 팔정도의 하나로 정어(正語, 빠알리어 Samma-vaca)가 들어 있다. 정어는 올바른 언어논리, 올바른 언어생활, 반야의 언어논리, 바르고 올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어논리가 그릇되거나 왜곡돼선 안 된다. 남을 비웃고, 비방하고, 이중적인 말을 하지 말고, 순수하면서도 부드럽고, 분명하면서도 때에 맞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정어는 팔정도의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로 닦아진 고결한 마음을 나타내는 첫 번째 상(相)이다. 그리고 올바른 언어를 바탕으로 올바른 행위[정업(正業)])가 이루어지고, 올바른 행위를 바탕으로 올바른 생활[정명(正命)]이 실현되는 법이다.
*구업(九業)---불교에서 말하는 9가지 업. 삼계(三界) 중에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각기 존재하는 작업(作業)ㆍ무작업(無作業)ㆍ비작비무작업(非作非無作業)과 무색계에 존재하는 무작업ㆍ비작비무작업ㆍ무루업(無漏業)을 합쳐 9업이라 한다.
• 작업(作業) - ‘업을 짓는 행위’를 일컫는다. 뜻을 결정한 뒤에 외부로 표현되는 신(身)ㆍ구(口) 2업, 곧 언어ㆍ동작을 말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라고 해서 표업(表業)이라고도 한다.
• 무작업(無作業) -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표업(表業) 혹은 작업(作業)이라고 하는데 비해, 짓고 난 후에도 간직하고 있는, 항상 쫓아다니며 일어나는 습관처럼 밖에 나타나지 않고 업이 상속되는 업으로 무표업(無表業)이라고도 한다.
• 비작비무작업(非作非無作業) - 의업(意業)인 마음, 정신작용을 말한다.
• 무루업(無漏業) -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난 언어ㆍ동작ㆍ의념(意念)을 말한다.
※의념(意念)---의념은 마음의 힘을 활용해 특정한 영상이나 물체에 집중하는 능력을 말한다. 넓게는 사람의 사유 활동을 말하지만 좁게는 텔레파시 같은 것이 의념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 ‘생각’이란 말로 쓰인다.
*구오연(具五緣)---중국 수나라 시대에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는 선(禪)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갖추어야 할 5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그 다섯 항목 중 하나가 구오연이다. 구오연은 참선수행을 하기 위한 기초조건으로서 어떤 뜻을 세우더라도 이 기초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해서 수행방편 처음에 이것을 세우라고 했다.
1) 지계청정(持戒淸淨) - 계율을 지켜서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한다.
2) 의식구족(衣食具足) - 옷가지 약간과 최소한의 음식을 갖추어야 한다.
3) 한거정처(閑居靜處) - 시끄럽지 않은 조용한 수행 공간을 정한다.
4) 식제연무(息諸緣務) - 일상 업무, 친인척 등 모든 생활 인연들에서 일단 떠나야 한다.
5) 득선지식(得善知識) - 수행을 지도해 줄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25방편(方便) 참조.
*구요(九曜, navagraha)---9집(執)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달력[구집력(九執曆)]에 중국 도교적 색체가 가미된 역법(曆法)이다.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을 신으로 섬기는 밀교신앙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구요란 일(日), 월(月) 두 신(神)과 화성(火星)ㆍ수성(水星)ㆍ목성(木星)ㆍ금성(金星)ㆍ토성(土星)의 오성(五星)을 합한 칠정(七政), 및 사요(四曜) 중에서 나후(羅喉, Rahu)ㆍ계도(計都, Ketu)의 두 성(星)을 합한 구요에서 온 것이다. 나후ㆍ계도에 자기(紫氣)ㆍ월패(月孛)를 합해 사요라 하며, 칠정과 사요를 아울러서 십일요(十一曜)라 하는데, 조선 태조 때 건설한 구요당(九曜堂)에는 구요를 인격화해서 그 형상을 모시는 한편, 당내에는 별도로 십일요의 상(像)도 봉안돼 있었다고 한다.
9성(星)에 근거해 인간의 길흉을 점쳤다고 하며, 구요(九曜)가 험악한 해에는 충돌을 하게 되면 심하게 싸우는 불길한 운수가 온다고 봤다. 여기서 요(曜)란 일월성신(日月星辰: 해와 달과 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의미하는 말이다.
*구원실성(久遠實成)---대개 사람들은 부처님이 젊은 나이에 출가해서 수행해,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밑에서 성불했다고만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사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랜 옛날(久遠)에 이미 성불했다. 그 이래, 이 사바세계에 와서 다른 무량한 국토에서 중생을 무수히 교화했다. 이처럼 부처님 수명은 무량하고 상주(常住)이며 불멸하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아득한 구원에 성불했다.’ 이것을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부처님이 금세(今世)에 비로소 성불했다고 하는 것을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고 한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처님은 입멸하지 않았는가, 부처님의 수명도 역시 유한하지 않은가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의문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래수량품’에서는, 금세에 비로소 성불해 입멸하는 시성정각의 부처님은 방편(方便) 부처이고, 상주불멸 하는 구원실성의 부처님이야말로 진실한 부처라고 밝혔다.
<법화경(法華經)>의 중심사상은 개권현실(開權顯實), 구원성실(久遠實成), 회삼귀일(會三歸一)인데, 이를 다시 진리(眞理)를 밝히는 부분과 보살(菩薩)의 실천행(實踐行)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진리를 밝히는 부분은 개권현실과 구원실성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 개권현실의 ‘권(權)’은 방편(方便) 또는 적절한 수단'을 뜻하고 ‘실(實)’은 진실(眞實)을 뜻하는 말로서 방편(權)을 열어 중생들로 하여금 진실(實)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 구원실성은 부처님이 멀고 먼 옛날에 성불했다는 말이다. 석가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멀고 먼 아주 오랜 옛날, ― 즉 삼천진점겁(三千塵點劫) 전에 부처님이 계셨다. 그 부처님의 이름은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고, 그 나라는 호성(好成)이며, 그 시대를 대상(大相)이라 한다. 대통지승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실 때, 온 우주가 부처님의 지혜로 밝아지고, 그 깨달음의 빛으로 여섯 방향으로 진동했다[육종진동(六種震動)]고 한다.
여기서 실(實)은 바로 부처님을 뜻하는 말로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성을 지닌 초월적 존재인 부처님은 한없는 과거로부터 한없는 미래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법화경(法華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16에 나타나는, 역사적 석가의 성불에 대응해 석가불(釋迦佛)의 영원불멸을 설하고 있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인 한량없는 무한한 세월 이전에 이미 성불했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사실 구원실성 했으나 방편으로 금생에 성불한 것처럼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불이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을 개(開)ㆍ시(示)ㆍ오(悟)ㆍ입(入)하기 위한 근본원(根本願)을 가지고 태자의 몸으로 화현한 것은 방편이라는 것이다.
• 회삼귀일(會三歸一)은 개삼현일(開三顯一)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삼(三)은 보살(菩薩) ‧ 성문(聲聞) ‧ 연각(緣覺)의 삼승(三乘)을 나타내는 말이고, 일(一)은 일승(一乘) 즉 불승(佛乘)을 나타내는 말로서 보살 ‧ 성문 ‧ 연각 등 삼승의 방편에 의해서 진실인 일승 즉 불승으로 들어가도록 한다는 뜻으로 <법화경> 방편품(方便品)과 비유품(譬喩品), 신해품(信解品) 등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사람들은 내(석존)가 젊은 나이에 출가해서 수행해,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밑에서 성불했다고 많이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사실은 오백진점겁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오랜 옛날(久遠)에 이미 성불했다. 그 이래, 이 사바세계와 다른 무량한 국토에서 중생을 무수히 교화했다. 이처럼 내 수명은 무량하고 상주(常住)이며 불멸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석존은 아득한 구원에 성불했다.’는 것을 구원설실(久遠實成)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석존이 금세(今世)에 비로소 성불했다고 하는 것을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석존이 80세에 입멸했다. 그러니 부처의 수명도 역시 유한하지 않은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당연한 의문이다.
그런데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수량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수량품은, 금세에 비로소 성불해 입멸하는 시성정각의 석존은 방편의 부처이고, 상주불멸 하는 구원실성의 석존이야말로 진실한 부처라고 밝힌 것이다. 부처님의 생명은 진실로 영원하지만, 중생의 구도심을 높이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유한한 모습을 나타내고, 또 방편으로서 입멸한 것이다. 이것이 수량품의 답이다.
*구유(九有)---구유(九有)는 구거(九居), 구지(九地), 구중생거(九衆生居)라고도 하며 삼계 유정중생이 사는 아홉 곳을 말한다. 즉, 욕계(欲界)의 인간계(人間界), 범중천(梵衆天), 극광정천(極光淨天), 편정천(遍淨天), 무상천(無想天),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등이다.
*구유인(俱有因, 산스크리트어 sahabhu-hetu)---육인(六因)의 하나. 서로 간에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는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다. 즉, 구유인은 서로에 대해 결과가 되는 법으로 어떤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결과와 동시 병존하는 원인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이 되고 과(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공간적인 의존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팡이 세 개를 서로 의지해 세웠을 경우 각각의 지팡이는 다른 지팡이의 구유인이 된다는 말이다. 두 개 이상의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관계일 때의 그 원인을 말한다.
밥상과 그 다리는 서로가 서로에 의존해 동시에 존재하듯이 '구유'라고 하는 말은 결과와 동시 병존한다는 뜻이다. 곧 구유인이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사론>에서는 구유인을 상인들이 서로에 의지해 험난한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고, 상응인(相應因)을 각기 평등한 입장에서 함께 식사하고 사업을 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즉, 서로 조화해서 동일 목적으로 향하는 원인, 결과와 동시에 생기하는 원인을 상응인이라고 한다.---→육인(六因), 상응인(相應因) 참조.
*구자국(龜玆國)---→쿠차(庫車, 龜玆, 屈支 Kucha) 참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우리나라 선종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화두로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이는 <열반경>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 한 불성사상에 입각하면 “개에게도 틀림없이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없다고 했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는 문제이다. 이를 ‘조주무자(趙州無字)’라고도 한다. 이 화두를 참선하는 방편으로 제시한 이는 송나라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로서, 당시의 승려와 속인들에게 권고해 실천하게 했다. <대혜어록> 30권 중 25∼30권까지는 주로 이 화두를 공부하는 방편을 지도한 서신 문답을 모은 것이다. 중국 선의 특징은 격외소식(格外消息)이라 해 경전의 상식을 뛰어넘어서 법거량(法擧量)을 해왔다.
당나라 때 한 수행승이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이에 조주 선사의 답은,
“없다(無).”고 했다.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이에 조주 선사는,
“업식성(業識性-중생심,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니라.”라고 했다.
업식성이란 업을 짓는 성품으로서 차별의식과 분별의식을 가리킨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남자다 여자다 등 흑백논리로 따지는 마음을 업식성 또는 중생심이라 한다. 조주 선사가 수행승에게 ‘없다’고 한 것은, 그대가 만일 개가 짐승이라고 해서 불성이 없을 것이라고, 혹은 영리한 짐승이라 불성이 있을 것이라고 분별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결국 어리석은 중생심으로서 깨달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고 하는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분별심은 망상으로서 깨달음을 막는 장애이기 때문이다. 분별은 선택을 요구하고, 선택은 집착을 낳는다. 집착은 중생심으로서 괴로움과 번뇌를 낳는다. 깨달음은 분별 망상과 집착을 여의는 데에 있다.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싸움질 좀 그만해라! 있으면 어쩔 것이고, 없으면 어쩔 것이냐. 부질없는 망상 집어치워라! 그래도 떨쳐버릴 수 없다면 그 속에 들어가 보거라. 일단 들어가면 60일 정도 있어야 나온다. 누구든 개새끼가 돼 나온다. 이 얼마나 통렬하게 비꼬는 말인가.
개에게 불성이 있다, 없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다, 없다’고 하는 분별심을 먼저 버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분별심을 가지고 있는 한 성불할 수 없다. 조주 선사는 유무상대(有無相對)의 ‘무(無)’를 뛰어넘은 깨달음의 절대 경지를 ‘무(無)’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개에게 불성이 있고, 없고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쓸데없는데 시간 보내지 말고 네가 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다른 풀이.
<열반경>에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했는데 왜 없다고 말씀하실까?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조주 스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을까? 조주 스님은 <열반경>의 가르침을 거스르며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을까? 하고 그 연유에 몰두해 계속 집중하되 나중에는 “무(無)”라는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산란됨 없이 집중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때, 무(無)는 참구(參究)하는 단서가 됨으로써 바로 공안이 되는 것이다.
참선 수행자는 가부좌 틀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은 후 이와 같은 화두를 들고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 몇 달, 몇 년을 노력한다. 화두를 풀기 위해 머리를 굴려서는 안 된다. 단지 의문만 강화시키면 된다.
조주 스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 무(無)라고 했을까? 조주 스님은 왜 무(無)라고 했을까? 왜 무(無)라고 했을까? … 이것이 참선하는 방법이다.
앞이 꽉 막혀 있다. 출구가 없다. 너무 궁금하고 참으로 의심스러운 ‘화두’만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조주가 내린 ‘무(無)’라는 답을 ‘있음’에 대립되는 ‘없음’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있음’이라고 이해해도 안 되며,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라고 이해해도 안 된다. 조주의 ‘무’자에 대해 생각을 집어넣을 수가 없다. 이것이 화두이다. 그러나 의심만 떠올리며 집요하게 물어 들어가다가 은산철벽과 같던 화두가 와르르 무너질 때, 캄캄하던 앞이 탁 깨질 때 깨달음이 열린다. 우리나라의 선사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의문을 해결해 견성(見性)을 했다고 한다.
*구잡비유집경(舊雜譬喩集經)---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에서 강거국(康居國) 출신 강승회(康僧會, ? ~ 280)가 한역했다. <구잡비유경>ㆍ<구비유경>이라고도 하며, 별칭으로 <잡비유경>ㆍ<잡비유집경>ㆍ<잡비집경>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제자들의 위업과 덕에 대한 인연 이야기를 담아 놓은 비유담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이야기도 있다.
<보시의 크기>
옛날 어떤 부인이 불법에 귀의해 계행을 잘 지켰다. 어느 날 부처님이 그 집에 가서 걸식을 청하자 부인은 곧 발우에 밥을 담고는 물러나 예배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말했다. “하나를 심으면 열이 생기고, 열을 심으면 백이 생기며, 백을 심으면 천이 생긴다. 이렇게 많이 생기고 억이 생기니 결국은 깨달음을 얻게 되느니라.”
불법을 믿지 않는 남편은 뒤에서 잠자코 부처님의 축원을 듣고 있다가 물었다.
“부처님은 어찌 그리 허풍이 심하십니까? 한 발우의 밥을 보시하면서 어떻게 그런 복을 받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까?” 이에 부처님은 말했다.
“너는 지금 어디서 왔는가.” “저는 성 안에서 왔습니다.”
“성 안에서 자라는 큰 나무를 본적이 있는가.”
“물론이죠. 높이는 40리에 해마다 수만 섬의 열매를 땁니다.”
“그 씨는 얼마나 큰가.” “겨자만 합니다.” “한 되쯤 심었던가.”
“그저 씨 하나를 심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말했다. “겨자만한 열매 하나를 심어 어떻게 그 높이가 40리나 되며 수십만 개의 열매가 열릴 수 있는가. 생각이 없는 땅이지만 그 갚음이 그러한데, 하물며 기뻐하면서 한 발우의 밥을 보시하는 복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느니라.”
*구정육(九淨肉)---비구승이나 수행승은 육식을 금하지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나 부득이 한 경우에 허락받고 먹을 수 있는 아홉 가지 정육(淨肉)을 말한다. 이는 계율에서아래와 같이 육식할 수 있는 예외의 규정을 두고 있다. 즉, 병든 비구에 한해서는 삼정육, 오정육, 구정육 등을 허락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삼종정육(三種淨肉) - 삼정육(三淨肉)이라고도 함.
① 자신을 위해서 죽이는 것을 직접 보지 않은 짐승의 고기(不見)
② 남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전해 듣지 않은 것(不耳)
③ 자신을 위해 살생했을 것이란 의심이 가지 않는 것(不疑)
• 오종정육(五種淨肉 - 위 3정육 포함)
④ 수명이 다해 자연히 죽은 오수(鳥獸)의 고기
⑤ 맹수나 오수가 먹다 남은 고기
• 구종정육(九種淨肉 - 위 5정육 포함)
⑥ 자신을 위해서 죽이지 않은 고기
⑦ 자연히 죽은 지 여러 날이 돼 말라붙은 고기
⑧ 미리 약속함이 없이 우연히 먹게 된 고기
⑨ 당시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인 고기
*구제(救濟)----구제(救濟)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거나 어려움에서 건저 내는 일이다. 도움을 주는 데는 단기적인 것이 있고, 장기적인 방법이 있다. 가령 지하철 계단에서 웅크리고 적선을 바라는 거지에게 돈을 주는 일는 진정한 도움이 아니라 그저 단기적인 동냥이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예건대 야학을 열어서 못 배운 자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행위는 아주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구제 방법이다. 이런 사업에 단 돈 몇 푼이라도 지원하면 이에 동참하는 아주 훌륭한 구제 행위가 된다. 불교는 단기적인 것보다 근본적인 구제를 지향한다.
다만 관세음보살이 나를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세음보살을 생각함이 절실함이 힘이 돼서 스스로 나로 하여금 난관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구제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아무런 신심도 없으면서 바라기만 해서는 구제 받을 수 없다. 부처님 가피(加被)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구조주의란 사물의 의미가 구조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그 구조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적 경향을 말한다. 넓게 보면 구조주의는 근대성(modernity)에 대해 비판적이다.
근대성의 폐해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간중심주의’이다. 인간중심주의를 철학적으로 이야기 하면 자아라는 주체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 과장된 가치부여이다. 근대적 주체 중심주의, 근대적 주체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것이 구조주의이다.
그런데 구조주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모던니티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 주체중심주의는 비판하면서 모던니티의 강한 성격인 합리주의는 계승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모던니티의 주체성은 계승하면서 합리주의는 비판한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근대 철학의 합리주의를 공격하고 주체성의 철학을 더 발전시키는 반면, 구조주의는 주체성의 철학을 공격하고 근대 합리주의 인식론을 극단화한다. 그래서 실존주의아 구조주의는 합리주의와 주체중심주의 두 요소 중 각각 하나를 긍정하고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구조주의는 세상을 보는 방법론으로 올바른 방법론은 없다. 다만 관점과 해석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구조주의의 상대어들 중 하나는 본질주의이다. 구조주의는 차이에 의해서 인식되며 동시적, 상관적으로 발생한다. 언어 역시, 차이에 의한 하나의 체계, 구조라고 한다.
따라서 구조주의란, 사회, 문화, 경제 등에서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담론을 규정하는, 숨어있는 또는 무의식적인 언어의 구조를 강조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사상계를 중심으로 성장한 사상적 흐름이다.
구조주의는 표면적 의미 아래에서 그런 의미를 미리 규정하는 숨어 있는 구조적 법칙을 파고들어가는 것에 중점을 둔다. 구조주의자들에게서 언어는 결코 투명하지 않다. 의미는 항상 은폐되고 왜곡된다. 구조주의는 그 특성상, 전통적 또는 분석적 언어학보다 비판적으로 문제에 대해 접근하며, 그것들 보다 훨씬 넓은 의미에서 기호의 기능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을 넘어 인류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미학, 그리고 정치이론 등 다양한 학문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건대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인류학에 적용할 경우, 구조주의를 이용해 신화와 상징, 예술, 친족관계, 경제 등을 분석, 그것에 은폐된 사회현상의 보편법칙을 탐구하고자 시도한다.
구조주의는 어떤 중심이 있다는 사고를 부정한다. 실존주의나 전통철학은 '나'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했으나, 구조주의에서는 자아(自我)를 명증하게 알 수 없기에 “나 자신은 타인이다”라는 말을 쓰며 타인이 나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구조주의에서는 “나는 나다”라는 자기동일성이 부정된다.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부정되면서 구조주의에서는 언어가 중요하게 된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한다고 주장한다. 즉, 타자가 형성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나의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결국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들이 나에게 주입한 언어에 불과하기에 나 자신은 빈 껍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구조주의는 무의식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또한 서양문명이 서양 중심으로 인류의 모든 문명을 해석해 왔던 사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래서 서양문명이 인류의 중심문명도 아니고 최고로 발달한 문명도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야생사회에도 현대사회 못지않은 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역사와 문화라는 것은 우열의 비교가 아니라 단지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구조주의는 별다른 이념적 지향점이 없다. 구조주의는 어떠한 현실적인 요구도 주장함이 없이 오직 사실들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방식을 제공하려할 뿐이다.
이 체계에서 가치와 의미는 개별자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바로 그 차이와 대립 작용 자체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즉, 차이에 의해서만 의미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개인의 특성은 그가 가진 본질이 아니라, 구조의 전체 배열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효과와 결과라는 것이다. 각 개인, 곧 주체는 그가 속하고 있으며 그를 만들어낸 구조가 발생시킨 효과이자 결과이다. 주체는 구조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주의 후기, 후기 구조주의가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에 연결됨으로써 불교와 가까워진다.
*구족(具足)---빠짐없이 고루 갖추었다는 뜻.
*구족계(具足戒, 산스크리트어 upasapanna)---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을 말한다. 모든 계가 완전히 구비됐다고 해서 구족계(具足戒)라 한다. 즉 교단에서 비구,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는 계가 구족계로서, 불교 율전인 <사분율(四分律)>에는 비구는 250계가 있으며, 비구니는 346계가 있다.
불교에서 ‘출가’란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는 뜻이며, 구족계를 받게 되면 정식 승려가 된다. 비구계(比丘戒) ․ 비구니계(比丘尼戒)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구족계를 받으려면 20세 이상 70세 미만이고, 승려로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어야 하고, 죄과가 없는 이로서, 사미계(沙彌戒) 또는 사미니계(沙彌尼戒)를 받은 뒤 3년이 경과해야 한다. 구족계를 받는 장소는 통도사 계단, 해인사 계단, 범어사 계단과 같이 계단(戒壇)이 있는 곳이라야 한다.---→계단(戒壇) 참조.
*구족원상(具足圓相)---원상(圓相), 즉 동그라미는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처음도 끝도 없는 영원함과 완전한 깨달음을 상징한다. 선적(禪的) 개념으로서의 원(圓)을 기하학적 도형인 원(圓)에 결부시킨 것이 원상이다
그런데 원의 기하학적 정의는 무엇이며, 또 원상이 마음의 본성을 찾는 선(禪)의 상징으로 선택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기하학적으로 볼 때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점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원호상에서의 점의 무한한 선회는 영원성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호는 중심의 한 점으로부터 거리가 같은 점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원호 상의 무수한 점은 모두 중심에 통섭되는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원은 크기가 크거나 작다고 하더라도 항상 원으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특성을 지니며, 원호 안에 내포된 모든 것은 원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전체성의 사상과 직접 연결돼 있다. 이처럼 원이 가지고 있는 일련의 속성들은 선종에서 말하는 원상(圓相)의 개념과 부합되는 점이 많다.
선(禪)의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일원상(一圓相)은 “조금도 부족함과 결함이 없는 보편성과 구족(具足)의 타당성을 지닌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을 말한다.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원족(圓足)ㆍ원돈(圓頓)ㆍ원통(圓通)ㆍ원묘(圓妙)ㆍ원만(圓滿) 등의 개념이 있다. 원족은 하나를 거론함에 일체의 모든 것이 스스로 수용됨을 뜻하고,
원돈은 처음과 끝의 구별도 없거니와 수행의 단계를 거친 것이 아닌 순간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원통은 불ㆍ보살이 깨달은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원통의 원(圓)은 본성이 만물에 두루 미치고 있는 것을 말하며, 통(通)은 뛰어난 행동이 거리낌이 없음을 뜻한다.
원묘는 피차의 구별이 없는 일체불이의 절대 평등상태를 일컫는 것이며,
원만은 모든 법을 두루 갖추어서 잘못되거나 흠이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원호상의 무수한 점들이 중심의 한 점에 통섭돼 있다는 점, 이것이 하나를 거론함에도 일체의 모든 것이 스스로 수용되는 원족(圓足)의 개념과 연결된 것이다. 또한 시작도 마침도 없고, 처음과 끝의 구별이 없는 원호의 기하학적 특성은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순간의 깨달음, 즉 원돈(圓頓)의 개념과 결부돼 있다. 그리고 크거나 작은 것을 불문하고 모든 원이 가지고 있는 포괄성, 그리고 전체성의 상징성은 본성이 만물에 두루 미치는 것을 뜻하는 원통의 개념과 연결돼 있다. -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한편 원은 그 모양이 만월(滿月)과 비슷해 만월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보리심(菩提心)을 흔히 만월에 비유하는데, 그것은 밝고 깨끗하며, 광명을 천지에 두루 비치어도 분별됨이 없는 것이 보름달과 같기 때문이다. 달은 원통의 개념과 상응하고, 원통의 개념은 또한 원상의 이미지로 환원된다.
원상은 선(禪)의 추상적 개념인 원상(圓相)을 원의 형태로써 상징화, 시각화 한 것으로, 예배의 대상이나 장엄용으로 제작된 사찰의 여타 그림들과 구별된다. 원상은 오묘한 불법 진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징표이기 때문에 원상이 갖는 의의는 원의 형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런 원상이 구족하다는 말이 구족원상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이란 말이기도 하다. 원만구족이란 다른 말로 하면 원전무결(完全無缺)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 우주만유의 바탕이자 근본이 원만구족하다, 완전무결하다는 뜻이다.
*구종식(九種食)---9가지 음식. 처음 하나는 육체를 단련하는 음식이고, 나머지 8가지는 심신을 북돋우거나 수련하는 것으로 ‘식(食)’이라 하지만 음식은 아니다.
1) 단식(段食) - 씹어서 먹는 먹을거리. 사람이나 짐승이 먹는 음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2) 촉식(觸食) -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는 감촉에 의해서 몸과 마음을 기르는 것.
3) 사식(思食) - 사상이나 희망에 의해 몸을 충족시키는 것.
4) 식식(識食) - 마음의 힘으로 능히 몸을 부지하는 것.
5) 선열식(禪悅食) - 수행하는 수행자가 그 힘으로 몸을 지탱하는 것.
6) 법희식(法喜食) - 불법에 의해 몸과 마음을 기르는 것.
7) 원식(願食) - 소원에 의해 목숨을 이어가는 것.
8) 염식(念食) - 수행하는 사람이 지혜를 증익(增益)하는 것.
9) 해탈식(解脫食) - 불도를 증득한 이가 열반의 즐거움을 얻어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
*구중(九衆)---부처님의 제자를 9종으로 나눈 것. ①비구(比丘), ②비구니(比丘尼), ③사미(沙彌), ④사미니(沙彌尼), ⑤식차마나(式叉摩那), ⑥우바새(優婆塞), ⑦우바리(優婆夷)의 7중(衆)에 ⑧출가자(出家者-팔계재를 받아 지키는 사람)와 ⑨출가니(出家尼-팔계재를 받아 지키는 여자)를 더한 것을 말하는데, 출가자ㆍ출가니와 비구ㆍ비구니와의 구별은 확실하지 않다.
*구지(九地)---중생의 마음과 생존상태를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삼계(三界)로 나누고, 3계(界)를 다시 9종으로 나눈 것. 즉, 욕계를 1지(地)로 하고, 색계와 무색계는 각기 4지(地)로 나누었다.
1) 욕계 오취지(欲界五趣地) - 욕계 안에 있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천상의 5취(趣)를 합해 1지(地)로 하고, 이들이 섞여 사는 곳이라 해서 욕계 오취지(欲界五趣地) 혹은 오취 잡거지(五趣雜居地)라 한다.
※취(趣)---중생이 번뇌로 인해 악업을 짓고, 그 업인으로 끌려가서 사는 곳.
2) 이생 희락지(離生喜樂地) - 욕계를 떠남으로써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색계 초선천(初禪天)을 말함.
3) 정생 희락지(定生喜樂地) - 선정(禪定)으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색계 제2선천(第二禪天)을 말함.
4) 이희 묘락지(離喜妙樂地) - 제2선천의 기쁨을 떠남으로써 묘한 즐거움을 느끼는 색계 제3선천(第三禪天)을 말함.
5) 사념 청정지(捨念淸淨地) - 마음이 평온해 생각이 청정한 색계 제4선천(第四禪天)의 경지를 말함.
6) 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 - 허공은 무한하다고 체득하는 무색계 제1천의 경지를 말함.
7) 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 - 마음작용은 무한하다고 체득하는 무색계 제2천의 경지를 말함.
8)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 -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체득하는 무색계 제3천의 경지를 말함.
9)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 -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무색계 제4천의 경지를 말함. 욕계 ․ 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무색계 제4천의 경지이다.
*구지수지(俱肢竪指)---원오 극근(圜悟克勤, 1063~1135)의 저서 <벽암록(碧巖錄)>과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의 저서 <무문관(無門關)>에 나오는 공안의 하나. 중국 5대10국 시대에 구지(俱肢) 스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지俱指金華) 스님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니지만 열심히 닦고 수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의 마음 안에는 지금의 번뇌와 미래의 깨달음이 둘로 나뉘어 있었고,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둘’로 나누어 보는 마음 때문에 궁극의 이치를 깨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분별 때문에 자신은 ‘깨닫지 못한 자’가 돼 스스로 고통 받고 괴로워하다가 스승 천룡(天龍) 선사가 아무런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는[一指頭禪] 순간 그 이원의 분별심이 문득 사라진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둘’이라는 망상이 구지 안에서 사라지자 ‘깨닫지 못한 자’도 없고 ‘깨달음’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보리도 없고, 앎도 없고 모름도 없고, 구할 것도 없고 찾을 것도 없는 실상을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이다.
구지 스님은 그의 스승 천룡(天龍) 스님에게 배운 대로 누가 무어라고 말을 걸면 손가락 하나만 불쑥 들 뿐이었다. 그런데 시중드는 동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외인이 찾아들어 동자에게 묻기를, “스님께서 어떤 법을 중요하게 설하시던가?” 라고 했다.
그런데 동자 역시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후에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칼로 동자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동자는 아파 통곡하며 달아날 때 스님이 동자를 불렀다. 그러자 동자, 머리를 돌렸다. 이때 스님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동자 문득 깨쳤다고 한다.
이후에도 누가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하면 불쑥 손가락 하나, “안녕히 계십시오!” 해도 불쑥 손가락 하나. 누가 “선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도 불쑥 손가락 하나. 이렇게 불쑥 내세운 손가락 하나에 온 우주가 포함돼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치와 해답이 이 손가락 하나에서 전개된다. 구지 스님은 세상을 마지막 떠날 때도 “나는 천룡(天龍) 일지두(一指頭)의 선(禪)을 배워서 평생 썼어도 못다 썼다…”며 손가락 하나를 불쑥 세우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아주 통쾌하게 생을 마감했다.
*9차제정(九次第定)---<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이론으로 차제정(次第定)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순차적인 수행단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차원이 높아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팔선정(八禪定) 혹은 팔등지(八等地)라고 하는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 ․ 공무변처선(空無邊處禪) ․ 식무변처선(識無邊處禪) ․ 무소유처선(無所有處禪) ․ 비상비비상처선(非想非非想處禪)의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팔선정을 닦은 후 다시 그 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행단계인 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불렀다. 부처님은 구차제정이라는 선정을 통해 중생들 세계는 중생들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중생들 세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三界)는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중생세계 모습이라는 것이다.
― 9차제정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초선(제1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제이선에 들면 생각 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고,
제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제사선에 들면 입출식(入出息)이 그치고, → 4선정을 닦으면 색계18천에 태어난다.
(제5선)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제6선)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고,
(제7선)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제8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4무색선정을 닦으면 무색계4천에 태어남(여기까지가 8등지임)
8등지에 멸진정(滅盡定)을 더한 것이 9차제정이다. 멸진정을 상수멸정(想受滅定) 혹은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즉 열반에 이른 것이다. 이 수행과정이 9차제정이다.
멸진정은 모든 번뇌가 다한 경지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나함(阿那含)의 경지이다. 이 경지에 들면 다시는 이 사바세계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 여기까지가 9차제정이다. 그 다음 마지막 단계가 아라한(阿羅漢)의 단계이다.
그런데 여기 질문이 있단다. 근세 최고의 선승이라는 성철(性徹) 스님은 구차제정 중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까? 어떤 단계에 이르렀다면 본인은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이 걸작이다. 그거야 성철 스님한테 물어 봐야지, 내가 성철 스님이 아닌데, 알 수 있나.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정말 의미 있게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인데, 부처님이 아니고는 누구의 경지가 어디인가를 얘기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구차제정이라는 절차는 정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공허한 희론(戱論)일까?---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사무색처(四無色處), 멸진정(滅盡定) 참조.
*구천(九天)---하늘을 총 9개의 방위로 나누어 이르는 이름이다. 중앙은 균천(均天), 동쪽은 창천(蒼天), 북동쪽은 변천(變天), 북쪽은 현천(玄天), 북서쪽은 유천(幽天), 서쪽은 호천(昊天), 남서쪽은 주천(朱天), 남쪽은 염천(炎天), 남동쪽은 양천(陽天)이다.
*구천(九泉)---구원(九原)과 같은 뜻으로 지하(地下)를 의미한다. 황천(黃泉)이라고도 하고, 음부(陰府)ㆍ명도(冥途)ㆍ유도(幽都)ㆍ염라국(閻羅國)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저승이라고도 한다. 구천(九泉)ㆍ황천(黃泉)이라 할 때는 물이 있는 땅속, 깊은 밑바닥, 지옥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저승은 사람이 이승에서 생을 다해 죽어서 가는 곳을 통칭하는 것이므로 구천과 저승의 차이는 없다고 하겠다. 굳이 차이를 둔다면 구천은 저승의 하위 개념으로 두면 되겠다. 영혼이 구천을 떠돈다는 말은 극락에 가지 못하고 떠돈다는 의미이다. 한곳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 저리 헤매는 것을 말한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을 보면 억울하게 죽거나 원한이 맺힌 귀신들이다.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집을 나와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처럼 불행히도 안식을 찾을만한 곳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편 영혼이 구천을 떠돈다 할 때, 죽은 혼이 하늘을 돌아다닌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데, 원칙적으로 구천ㆍ황천은 하늘이 아니고 지하이다.
*구품수혹(九品修惑)---상상품(上上品) · 상중품(上中品) · 상하품(上下品), 중상품(中上品) · 중중품(中中品) · 중하품(中下品), 하상품(下上品) · 하중품(下中品) · 하하품(下下品)의 수혹을 말하는데, 먼저 상상품을 끊기 위해서는 이생(二生), 즉 두 차례 태어나야 하고, 다시 상중품ㆍ상하품ㆍ중상품을 끊기 위해서는 각각 일생(一生)씩이 요구되며, 중중품ㆍ중하품을 끊기 위해서는 이 둘을 합쳐서 일생이 요구되고, 나머지 하상품ㆍ하중품ㆍ하하품을 끊기 위해서도 역시 또 한 생이 요구된다.
• 사다함(斯陀含)은 6생(六生)에 걸쳐 6품까지를 끊은 성문이므로 나머지 3품을 끊기 위해 한 생만 거치면 된다. 따라서 이로 인해 사다함을 일왕래(一往來), 즉 '한번 다녀간다.'고 하는 것이다.
• 아나함(阿那含)은 성문의 세번 째 지위로서 불래(不來) 혹은 불환(不還)이라 한역한다. 즉 인간 세상에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계의 9품수혹 중 6품을 끊고 사다함이 된 성문이 나머지 3품을 끊기 위해 다시 태어나 일생(一生)동안 다 끊어 아나함이 되고서는, 색계의 제4선천(第四禪天)의 일부인 오나함천(五那含天=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견견천, 색구경천)에 가서 태어나게 된다.
• 아라한(阿羅漢)은 성문의 마지막 지위로서 수행이 최고 극치에 이른 성인이다. 아라한은 '무적(無賊) · 불생(不生) · 응공(應供)'이라 번역하는데, 무적이라 함은 번뇌의 도적이 깨끗이 없어졌다는 뜻이고, 불생이라 함은 다시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며, 응공이라 함은 인간세계와 하늘계에서 어떠한 공양이라도 받아도 타당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아라한이 끊어야 할 번뇌는 색계와 무색계의 수도혹(修道惑)으로서 탐(貪) · 치(痴) · 만(慢) 등 세 가지가 주구성분이 된다. 이미 아나함의 과위를 얻은 이가 오나함천에 태어나 살피니, 아직 상계의 수도혹이 남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냥 끊기는 너무 미세하여 색계의 것을 넷으로, 무색계의 것도 넷으로 하여 총 여덟 가지로 나누고, 이들 여덟 가지 몫을 다시 각각 아홉 등분으로 나누어 모두 72품으로 하는데, 이 중에서 71품까지를 끊으면 아라한향(雅羅漢向)이라 하고 72품을 다 끊어야 아라한이라 하는 것이다.
*구품왕생(九品往生)---<무량수경>은 삼배(三輩)를 말하고, <관무량수경>은 구품(九品)을 말한다. 삼배는 상배(上輩)ㆍ중배(中輩)ㆍ하배(下輩)를 말하는 것이고, 구품은 크게 상품(上品)ㆍ중품(中品)ㆍ하품(下品)을 말하고, 상품은 다시 상품상생ㆍ상품중생ㆍ상품하생으로, 중품은 중품상생ㆍ중품중생ㆍ중품하생으로, 하품은 하품상생ㆍ하품중생ㆍ하품하생으로 나누어 총 구품이 된다. 그리고 이들이 각각 극락에 가는 방법을 밝힌 것이 구품왕생이다.
① 상품상생(上品上生)은 지성심(至誠心), 신심(信心),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을 일으키고, 자비심이 커서 살생하지 않고, 5계ㆍ8계ㆍ10계 등의 계율을 다 지키는 사람으로, 모든 행동이 올바르며, 대승경전을 지성으로 읽고 외우고, 부처님과 부처님 교법ㆍ승가ㆍ계행ㆍ보시 등의 계행을 지켜 그 공덕을 회향(廻向)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
상품상생의 경지에 오른 분은 부처님 제자 가운데에서도 다만 사리불(舍利弗) 존자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② 상품중생(上品中生)은 대승경전을 배우고 읽고 외우지는 않더라도 그 뜻을 깨달은 사람으로, 인과의 이치를 깊이 믿고 대승을 비방하지 않으므로 극락왕생을 하게 된다.
③ 상품하생(上品下生)은 인과의 이치를 믿고 대승을 비방하지 않는 사람으로, 아미타불을 믿어서 보리심을 내고 이 공덕을 회향해 극락왕생하게 된다.
④ 중품상생(中品上生)은 소승의 오계와 팔계를 지키고 수행에 필요한 여러 계행을 닦으면서 오역을 범하지 않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고, 허물이 없어 이 공덕을 회향해 극락왕생한다.
⑤ 중품중생(中品中生)은 일주야(一晝夜) 동안 계를 지킨 소승하선(小乘下善)의 범부가 그 공덕을 회향해 죽을 때에 불ㆍ보살의 내영을 받고 정토에 왕생해 반겁(半劫)을 지내고 아라한과를 얻는다.
⑥ 중품하생(中品下生)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세간의 공덕을 지키는 범부가 임종할 때 선지식을 만나 아미타불의 48대원과 그 정토의 훌륭한 일들을 듣고, 정토에 왕생해 일 소겁(一小劫)을 지나서 아라한과를 얻게 된다.
⑦ 하품상생(下品上生)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지만, 임종 때 선지식을 만나 그 가르침을 받아 합장하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하면 그 공덕으로 50억겁(億劫) 동안 생사(生死) 윤회할 죄를 덜고, 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⑧ 하품중생(下品中生)은 모든 계행을 범한 어리석은 사람으로, 승단에 속한 물건을 훔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허무맹랑한 법을 설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임종할 때 선지식을 만나 아미타불의 10가지 위덕과 신통력, 계ㆍ정ㆍ혜 등을 찬탄하는 것을 들으면 무거운 죄를 벗고 왕생한다.
⑨ 하품하생(下品下生)은 오역(五逆), 십악(十惡) 등 온갖 중한 죄를 범해 가지가지 악한 짓을 저질러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임종할 때 선지식을 만나 여러 가지 미묘한 법을 듣고 염불하는 방법을 배우나 고통이 심해 염불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부르면 이 공덕으로 80억겁의 무거운 죄가 소멸돼 극락에 왕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량수경>의 하배(下輩)와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下品下生)이다. 오탁악세와 말법(末法)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근기가 하열(下劣)하고 둔하며 의심이 많고 의지는 약해 <무량수경>의 상배ㆍ중배, <관무량수경>의 상품ㆍ중품은 닦기 힘들다. 그렇다면 <무량수경>의 하배(下輩)와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은 무엇인가. 경전을 보자.
<무량수경>의 하배(下輩) ― 근기가 하열한 하배자(下輩者)라 하는 것은, 시방세계의 여러 천신과 인간들 중에서 설령 여러 가지 공덕을 쌓지는 못하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고 생각을 오직 한 곳에 모아 다만 열 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부르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원(願)을 세우는 이나, 혹은 심오한 법문을 듣고 환희심으로 믿고 의지해 의혹을 일으키지 않고, 다만 한번이라도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외우며 지극한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우는 이들을 말한다.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下品下生) ― 하품하생은 늘 악업을 짓는 중생으로서, 오역죄와 십악 등 가지가지의 악업을 지어 그 무거운 죄업의 과보로, 응당 지옥ㆍ아귀ㆍ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 동안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을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도 목숨이 다하려 할 때 선지식을 만나게 돼 선지식이 그를 위해 여러 가지로 안위(安慰)해 주고 미묘한 법문을 들려주어 지성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도록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는 괴로움이 극심해 부처님을 생각할 경황이 없다. 그래서 선지식은 다시 그에게 “그대가 만약 부처님을 생각할 수가 없다면 다만 아미타불을 부르도록 해라.” 고 타이른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지성으로 소리가 끊기지 않고 아미타불을 열 번만 온전히 부르면, 그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염불하는 동안에 80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무거운 죄업을 없앨 수 있다. 그리고 목숨을 마칠 때는 마치 태양과 같은 찬란한 황금의 연꽃이 그 사람 앞에 나타나, 그는 순식간에 바로 극락세계의 보배 연못 연꽃 속에 태어난.
위 경문에서 오역죄(五逆罪)와 정법(正法)을 비방한 사람은 염불을 열 번 해도 정토에 왕생하지 못한다고 하는 예외를 두었지만, <무량수경>보다 늦게 설해진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에는 정법 비방을 제외하고 오역죄를 지은 사람도 임종 시에 참회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었다.
*구품인(九品印)---→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 참조.
*구품중생(九品衆生)---아홉 가지 부류로 중생을 나눈 것. 서방 극락 세계에 왕생할 중생들의 수행 단계를 아홉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구품왕생(九品往生) 참조.
*구하(九夏)---더운 여름철의 90일 동안을 구하라 한다.
*구해탈(俱解脫)---‘구(俱)’란 두 가지 것이 얽혀 있다는 의미이다. 지혜에 의한 해탈인 혜해탈(慧解脫)과 또 하나 정(定)에 의한 해탈이 합쳐지는 것이다. 특히 정(定) 중에서도 최고도의 정까지도 체험한 정해탈(定解脫)이 합쳐졌을 때에 구해탈이라 한다. 번뇌에 의한 장애나 선정에 의한 해탈 장애, 즉 평범한 사람의 선정 한계를 극복할 때에 나타나는 해탈이다.
지혜의 힘에 의해 이 세상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문제나 타인문제마저도 해결할 수 있는 경지가 되며, 나아가 선정도 깊어져서, 그리하여 차츰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고, 본래세계에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게 되는 데까지 간다. 그리고 드디어 멸진정(滅盡定)이라고 불리는 최고도 선정까지 들어가면, 이른바 대우주생명과 일체가 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대우주와 일체가 돼 녹아 들어가는 듯한 선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른바 「불타의 깨달음」을 얻는 경우를 가리켜 구해탈이라 한다. 좀 어려운 말로는 수행자가 무색정(無色定)을 얻어 해탈했을 때를 구해탈(俱解脫)이라 한다.---→정해탈(定解脫) 참조.
※무색정(無色定)---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과 같은 말인데,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말한다. 사무색정은 1)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2)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3)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4)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구화산(九華山, 해발 1,342m)---중국 내륙 산악지대인 안휘성 청양현에 있는 산, 중국 4대 불교 명산의 하나로서, 신라 제33대 성덕왕 아들 김교각(金喬覺, 697년~794년) 스님이 성불하신 곳이다. 구화산 월신보전(月身寶殿)에 모신 남무대원지장왕보살(南無大願地藏王菩薩) 상이 바로 신라 출신 김교각 스님의 미이라라고 한다.---→김교각(金喬覺) 참조.
※중국 불교 4대 성지---산서성 오대산(2,893m, 문수보살 성지), 사천성 아미산(3,099m, 보현보살 성지), 절강성 보타산(291m, 관음보살의 성지), 그리고 이곳 안휘성 구화산(1,342m, 지장보살 성지).
*국사삼환(國師三喚)---국사가 세 번 부르다는 말이다. 무문관 제17칙이다. 여기 나오는 국사는 육조 혜능 선사의 제자 남양 혜충(南陽慧忠, ?~775) 국사를 말하고, 내용은 남양 국사의 시자였던 탐원(耽源) 스님과의 이야기이다. 이 글은 “과연 시자(侍者)가 국사를 버린 곳이 어디인가?” 라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가) 본칙(本則) ― 혜충 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불렀다. 시자는 세 번 답했다. 이에 국사가 말했다. “내가 너를 저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도리어 네가 나를 저버리고 있었구나.”
나) 평창(評唱) 및 송(頌) ― 국사가 세 번이나 시자를 부르니 혀가 땅에 떨어졌다. 시자는 세 번을 대답하니 마음 빛(和光)이 그대로 드러났다. 국사가 늙어서 마음이 외로워져 소의 머리를 억지로 눌러서 풀을 먹이려 했다. 그러나 시자는 그것을 받을 기분이 아니어서, 모처럼 진수성찬도 배가 부른 사람이 먹기에는 맞지 않다. 말해보라, 어디가 그 시자가 국사를 저버린 곳인가? 나라가 맑게 다스려지면 재간 있는 사람이 귀하게 대접 받고, 집안이 부유하면 어린아이의 버릇이 나빠진다.
다) 송(頌) ―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스님이 계송으로 말했다. “구멍 없는 무쇠 큰칼을 사람 목에 채우려하니 허물이 자손에까지 미쳐 바빠지게 됐구나. 선종(禪宗)의 문호(門戶)를 지키려고 생각한다면 다시 맨발로 칼산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네.” 얻는다고 집착할수록 도(道)는 점점 멀어져간다.
라) 착어(着語) - 청안(淸眼)이 덧붙임.
국사가 세 번 부르니 시자가 세 번 답하다.
① 국사가 옆에 있는 시자를 왜 세 번씩이나 불렀나?
② 국사가 시자를 저버렸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③ 시자는 국사를 저버렸다면 그 저버린 뜻은 어디에 있는가?
마) 설명 ― 국사는 남양 혜충(南陽慧忠) 선사이고, 시자는 탐원 응진(耽源應眞) 스님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세 번 부르고 세 번 답한 사실에는 나름의 비밀이 숨어있다. 스승은 ‘저버렸다’는 말로 제자를 힐책하는듯하지만 예사롭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구멍 없는 무쇠 큰칼이 목에 채워질 판에 무슨 분별과 알음알이가 용납되겠는가. 스승이 혓바닥이 땅에 떨어질 정도의 자비심을 보인 보람이 있었든지 제자 또한 화광(和光), 즉 마음 빛을 그대로 드러냈다. 텅 비고 텅 비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영주(靈珠-신령스런 구슬)에 비추어진 대역량인(大力量人)들의 교감,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인다. 일부러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는 스승의 은혜가 크고 깊으니 제자의 법기(法器)가 운 좋게도 잘 받쳐주고 있다. 억지로 소의 머리를 눌러 풀을 먹이려 하지만 상대는 그러한 배려를 받아야 할 정도로 철부지가 아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진수성찬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문(無門慧開) 선사의 닦달처럼 어디가 그 시자가 국사를 저버린 곳인가? 집안이 너무 부유해 어린아이의 버릇이 나빠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소에게 억지로 풀을 먹여 키우려 하지만 정작 그 소는 먹지 않으려 한다. 시자는 더 이상 스승의 자비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밖으로 무엇을 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기 살림이 이미 튼튼하다는 뜻이다. 득도한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얻는다는 집착이 있는 이상 도(道)는 십만 팔천 리 멀어질 수밖에 없다.
법을 전하는 일은 선종(禪宗)의 문호(門戶)를 지키는 불사(佛事)이다. 그러려면 맨발로 칼산을 오르듯이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을 비롯해 모든 선지식들이 그러하셨다. 덕분에 거울 속의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고 빙그레 웃으니 겸연쩍게 같이 웃는 날이 있게 되는 것이다. 날마다 동거한 보람이 있어 오늘 지금 하나로 나타난다. 그래서 스승의 은혜는 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아 드려도 모자란다고 한다. 그 보은을 생각하면 후학으로서 면목이 없다.
※줄탁동시---너와 나, 안과 밖이 동시에 힘을 합쳐 만들어내는 성과를 말한다. 예컨대 어미닭이 정성껏 품은 알이 20일 쯤 되면 알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알을 뚫고 나올 곳을 골라 쪼기 시작한다. 그러나 힘이 부치는데, 이때 귀를 기울이던 어미닭이 그 부위를 밖에서 쪼아준다. 이와 같이 안과 밖에서 동시에 쪼아서 드디어 알을 깨고 새 생명이 탄생한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 어미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선문답에도 격식이 있다. 제대로 된 선문답이라면 언제나 이와 같이 알듯 말듯 보일 듯 말듯하게 표현된다. 그래서 긴 여운을 남긴다. 선기(禪機)ㆍ선미(禪味)ㆍ선향(禪香)에 젖어서 선천(禪天)ㆍ선지(禪地)의 복락을 누리는 것이 선인(禪人)들의 일생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생각하면 부르고 답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며,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그냥 때가 돼 식사하는 일이며, 피곤해 잠자는 일이다. - 무비 스님.
※혜충(慧忠) 국사는 선승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황제가 제자를 자처할 정도로 명망이 높아 국사(國師)라 불렸다. 아마도 황제를 포함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빛을 전하려고 했지만, 자기와 그렇게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던 시자에겐 무관심했던 사실을 늦게야 자각한 듯하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그래서 혜충 선사가 자신을 아주 오랫동안 도와주던 시자를 부른다. “얘야!” 그러자 시자가 대답한다. 이어서 혜충 선사가 “얘야!” 또 불렀다. 이렇게 세 번 부를 때마다 시자가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 시자가 “예” 하고 세 번째 대답하는 바로 그 순간 혜충 선사의 우려가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등잔 밑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혜충 선사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시자 스님은 어느 사이엔가 깨달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혜충 선사가 말했다. “내가 너를 등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알고 보니 오히려 네가 나를 등지고 있었구나!”
스승이 제자를 등진다는 것은 제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제자가 스승을 등진다는 것은 제자가 이미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마치 배울 것이 있는 것처럼 스승 곁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미 제자는 스승을 스승이라고 집착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제자의 눈에는 혜충이 가진 모든 특징들이 환히 보였던 셈이다. 비오는 날 차를 좋아하는 것, 장이 안 좋은지 자꾸 방귀를 끼는 일, 푹 익힌 채소를 좋아하는 것 등, 한 마디로 시자 스님은 혜충 선사를 스승이라고 집착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 있는 저 늙은 스님에 불과한 것이 바로 ‘선생’이란 지위였으니까. 이렇게 진여의 마음을 얻었는데도, 그는 스승 앞에서 그냥 제자로 있었던 것이다. - 강신주
*국집(局執)---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군다리명왕(軍茶利明王, 산스크리트어 Kundali)---명왕(明王)이란 교화하거나 구제하기 어려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여래나 보살이 무서운 형상으로 변신해 나타난 화신(化身)이다. ‘명(明)’은 명주(明呪), 즉 진언(眞言)을 말한다. 군다리명왕은 오방(五方) 중 남방에 배치된 명왕이며, 머리 하나에 팔이 여덟이고 두 다리에는 12마리 뱀이 휘감겨있다. 이 뱀은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를 나타낸다고 한다. 모든 아수라와 악귀를 항복시킨다고 하며, 힌두교 영향을 받은 명왕이다.
*군다리보살(軍茶利菩薩)---<천수경>에 나오는 보살이다. 보배병을 들고 있으며, 일체고액을 제도해 주는 일을 맡아서 자비를 펴는 보살이다. 즉, 우주중심에서 파멸과 고통을 일으키는 악마들을 엄히 막아내고 선(善)을 굳건히 지켜가는 임무를 담당하는데, 별나라마다 침입을 일삼는 악마를 무찌르고 선을 지키는 일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 급한 보살로, 힌두교 영향을 받아 불교에 편입된 대표적인 보살이다.
그리고 12지신에서 유신장((酉神將-닭띠)이 군다리보살(軍茶利菩薩)이라 한다. 군다리보살은 악마를 지키다가 깜빡 조는 순간에 들이닥친 악마들이 인간세상을 혼란케 하고, 악마의 행위를 자행케 했기 때문에 큰 칼을 빼들고 지상에 내려와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 닭의 신이 됐다고 한다.
*군맹무상(群盲撫象)---<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말로 장님 코끼리만지기라는 뜻이다. 코끼리의 고사를 통해 모든 중생들이 석가모니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자기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무릇 범인(凡人)은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그릇 판단하거나 그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대각(大覺)하시어 일체지(一切智)를 터득하신 분이라 중생과는 다르시다는 비유이다.
*군생(群生)---유정(有情)ㆍ중생(衆生)ㆍ군맹(群萌)ㆍ군품(群品)ㆍ함식(含識)ㆍ함령(含靈)ㆍ함생(含生)이 다 같은 말이다.---→함식(含識) 참조.
*군양승(群羊僧)---<선가귀감(禪家龜鑑)>에 나오는 말이다. 양떼가 많아도 용맹한 호랑이 한 마리를 공격할 수 없는 것처럼 무능한 승려들 무리를 일컫는다. 혀는 있으되 법을 설하지 못하는 무능한 벙어리 승려인 아양승(啞羊僧)과 같다고 했다. 비슷한 말에 조서승(鳥鼠僧)이란 게 있다.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박쥐같은 스님’이라는 말인데, 정체가 명확하지 않아 출가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자, 혹은 스님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를 낮추어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아양승(啞羊僧) 참조.
*굴기하심(屈己下心)---다른 사람에 대해 자기 자신을 굽히고 마음을 겸손하게 갖는 것을 말하는데, 유학에서도 쓰이고, 일반사회에서도 쓰는 말이다.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고 늘 부족하다고 겸손해 하면서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높여주는 마음자세이다. 항상 자기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줄 알며, 인욕하고 참회 반성하는 데에서 굴기하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비굴한 마음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넓게 포용하는 마음에서 남을 이해해 주고 감싸주며 스스로 겸양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충무공(忠武公)도 부하를 통솔함에 있어서 항상 굴기하심 하셨다고 한다.
*굽타왕조(Gupta dynasty, AD 320~550년경)---찬드라굽타1세가 건국한 고대인도 통일왕조임. 3세기 중엽에 쿠샨왕조가 멸망한 후 수많은 군소 왕국들이 부침(浮沈)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가다 지방(지금의 비하르州)을 중심으로 북인도를 통일한 제국이었다.
굽타시대는 고대인도의 문예부흥기로 자주 언급된다. 이때 십진법이 개발되고, 불교에 있어서는 유식학파의 무착(無着, 아상가/Asanga, AD310~390)과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 320~400?) 등이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체계를 세워, 안혜(安慧, Sthiramati, 500~550무렵), 호법(護法, 530~561) 등이 이를 계승 발전시켰으며, 불호(佛護, 470~540)와 청변(淸辨, 500~570) 등은 중관학(中觀學)을 확립했다. 불교논리학의 초석을 세운 진나(陳那, Dignāga, 480~540)와 법칭(法稱, Dhamakirti, 600~650)도 이 시기에 활동했으며, 설일체유부의 경우도 세친과 중현(衆賢, Samghabhadra, 5C후반)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즉, 이 시기는 불교학의 정초를 놓은 위대한 논사들이 활약해 부파불교에서는 아비달마불교의 전성기라고 하겠고, 유식학과 여래장사상이 발달해 대승불교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1700~1899년 전이지만 한 왕조 내에 이와 같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상가들이 활동했었다는 것은 학문과 사상, 종교의 자유가 확보됐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난숙한 왕조문화의 당당한 자신감이 보여주는 관용이고, 포섭력이었다고 하겠다. 유명한 간다라(Gandhāra)미술도 이때가 전성기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굽타 왕조는 이러한 불교의 융성에 자극받아 대중적 신앙으로 기반을 넓히고 등장한 힌두교를 국교로 삼아 신전을 건설하는 등 힌두교를 널리 지원했다. 굽타 왕조의 안정된 정치체제 밑에 문학과 예술이 발달했으며 학문도 번창했다.
굽타 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지만 불교는 점차 힌두교의 세력에 밀리면서 힌두교적 요소를 섭취하거나 동화되기 시작했다. 즉, 인도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 이후 500여 년 만에 다시 통일 왕조를 건설한 굽타 왕조(320~500경)에 들어오면서부터 힌두교의 부흥에 밀려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7세기에 인도를 방문한 당(唐)나라의 현장(玄奬) 법사에 의하면 불교는 이미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불교 사원들은 황폐화되고 있었다. 특히 불교 내에서는 힌두교 밀교(密敎)의 영향을 받아 탄트라(Tantra)라는 밀의적 가르침을 담은 경전들이 성립됐으며 인도 불교는 전적으로 밀교화 되다시피 했다.
한편 굽타시대에는 인도의 민족의식이 부활하고 고전문화가 완성됐다. 그 결과 인도의 고전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와 <라마야나(Ramayana)>, 힌두교 성전인 <푸라나(Purana>가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도 이 때였으며, 인도 정통 6파철학의 수트라와 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주석서도 이 시기 제작됐다.
그리하여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민간신앙을 융합한 힌두교가 형성되기도 했다. 힌두교가 발전하면서 카스트의 영향력이 커져 이에 따른 생활방식을 규정한 ‘마누 법전’이 힌두교도의 일상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한 왕조 시기에 이처럼 가지각색의 다양한 사상가들이 활동했던 일은 세계사상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굿다까 니까야---→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 참조.
*궁극(窮極)--- 마지막 경지까지 도달해 더 이상의 것이 없는, 최고라는 의미로서, 극도에 도달함, 사물이나 이치의 마지막 단계, 또는 마지막 단계까지 도달하는 것, 진리의 가장 오묘(奧妙)하고 깊은 경지를 말하며, 구극(究極)과 같이 쓰이고 있다.
다음은 <신심명(信心銘)> 에 나오는 말이다.
“구경궁극(究竟窮極) 중 구경(究竟)은 ‘사리(事理)의 마지막,’ 궁극(窮極)은 ‘가장 마지막’이니 같은 뜻을 반복해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게송에서 ‘지동무동(止動無動)’이라 해 일체 번뇌를 소멸하고 중생제도의 길로 나가고, ‘양기불성(兩旣不成)’에서 대립되는 양단(兩段)이 성립되지 않으니, ‘만법제관(萬法齊觀)’하여 만법을 있는 그대로 편견(偏見) 없이 가지런히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니 사리(事理)의 가장 마지막인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는지라, 이에는 궤칙(軌則-일정한 법칙), 즉 궤도(軌道)도 없고 법칙도 없다. 구경에는 결국 공성(空性)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공성은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나 바람과 같이 움직이기도 하므로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또 크다고 할 수도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입을 열면 잘못이 된다고 할 정도이니 궤칙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 했다.
다음은 고승들의 열반에 관한 얘기이다.
고려의 보조 국사(普照國師)는 법상을 차려놓고 제자들과 백문백답을 끝마친 다음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걸터앉은 채 그대로 조용히 열반하셨다. 죽음은 범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공포와 괴로움이 되고 있으나 보조 국사나 현대의 한암(漢岩) 선사 같이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서는 죽음이 아무 거리낌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만나더라도 밤에 잠이 들듯 아주 태연히 죽을 수 있다. 이리하여 한암 선사가 아홉 살 때, ’반고(盤古)씨 이전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궁극(窮極)을 캐묻던 어린 소년이었는데, 76세 때에 바로 그 반고 이전의 궁극의 세계로 조용히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한암 선사는 그 궁극의 세계를 넘어서 더 멀리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물질의 궁극에 관한 얘기이다.
물리학에 있어서 쿼크(Quark)는 소립자 바리온(baryon)과 메존(meson)을 이루는 기본입자라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쿼크는 물질의 궁극(窮極)이라 할 수 있다.
※<사략(史略)>에 ‘태고에 천황(天皇)씨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반고(盤古)씨가 있었다고 했다. 중국 전설상의 천자인데, 천지개벽 때 처음 태어났으며, 부부 음양의 시초요 천지만물의조상이라 한다.----구경(究竟), 궁극적 실재(窮極的實在, 빠알리어 빠라맛타/paramattha)참조.
*궁극적 실재(窮極的實在, 빠알리어 빠라맛타/paramattha)---궁극적인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sabhava)을 가진다. 이것은 최종적인 것이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성분이며, 경험을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로서 존재하는 구극의 단위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 한다. 이런 궁극적인 것들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고 이들 자체가 다양한 경험으로 뭉뚱그려진 개념적 존재들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요 실재이다.
예를 들면, '사람' '남자' '여자' 등은 인습적인 것이지 구극의 단위가 아니다. '사람'이란 지ㆍ수ㆍ화ㆍ풍의 사대와 그에서 파생된 물질인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등과 마음(意), 그리고 이 마음과 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작용(마음부수)들이라는 최소단위들, 이들이 다 모여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땅의 요소나 물의 요소, 감각접촉, 느낌, 의도 등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 궁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것은 인습적인 존재의 영역에 속하며, 땅의 요소, 물의 요소, 감각접촉, 느낌, 의도 등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 것을 궁극적인 실재라 부른다.
*궁극적 진리(진리의 본체)---불교에서는 이에 대한 표현이 다양하다. 여래, 열반, 해탈, 적멸, 원적, 공적, 진제, 성제, 승의제, 제일의제, 제일의공, 공, 진공, 진여, 여여, 여실, 법계, 법신, 법성, 불성, 본성, 진성, 견성, 실상, 무상, 무아, 중도, 한 물건, 한 소식, 한 생각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
*궁자(窮子)---<법화경> ‘신해품’에 아버지인 장자(佛)의 곁을 떠나 타국에서 고생하던 아들(二乘者)이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모든 재산[一乘妙法]을 상속받는다는 장자궁자의 비유에서 나온 말로 부처님이 불성(佛性)을 잃어버린 중생들이 삼계를 윤회하고 있음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방편으로 법화(法華)의 묘법을 깨닫게 하기 위해 비유로 설법한 것임.
*궁좌실제 중도상(窮坐實際 中道床) 구래부동 명위불(舊來不動 名爲佛)---의상대사 <법성게> 마지막구절이다. ‘영원토록 참된 법의 중도상에 편히 앉아 억만겁에 부동하는 부처라고 이르니라.’ 그런 뜻이다. 「궁좌실제 중도상」이란, 모든 선약 편견을 떠나고 하고자 함도 배척함도 없는 평온한 마음 상태에 든 자연 상태의 고요함의 자리가 바로 궁극의 자리라면 그것은 바로 중도의 자리인 것 같다. 그 자리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조화와 공존의 자리이고 평화와 고요한 기쁨의 자리이고, 열림의 자리일 것이다. 도둑놈도 대자연의 돌멩이가 놓여 있듯이 한 물건으로 자리하고 선도 악도 없는 자리를 말한다. 「구래부동 명위불」이란 시공간을 넘어선, 이름도 상도 일체가 다 끊어진 그런 것을 일러 부처라고 한다는 뜻이다. 즉, 깨닫고 보니 본래부터 오고감이 없으니 그 이름을 부처라 하더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