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허상을 실재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라는, 보다 정확히는 2차원의 픽셀에 있는 정보가 3차원의 공간에 투영된 것이며, 결국 "정보가 우주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이는 ‘파인만’이라는 과학자의 이론인데... ‘우주 정보이론’ 혹은 ‘우주 시뮬레이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이론에는 많은 논리적 허점이 있고, 그 경향성은 AI기술로 인해 ‘실재’보다는 ‘허상’을 진짜 실재로 간주하려는 강한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중력은 정보이다”라고 주장하는 동영상에서 그 몇가지 논리적 오류를 지적해 보자.
① 첫째, 이들은 정보가 단순히 관념이거나 언어가 아니라, 무개와 부피를 가진 실재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컴퓨터에서 어떤 정보를 지우게 되면, 미세하게나마 열이 발생하고 에너지의 변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논리적 오류 : 컴퓨터에서 정보를 삭제할 때, 미세하게 열이 발생하거나 에너지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정보가 열이나 에너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혹은 기계가 어떤 작업을 하기 때문에 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화가가 그림을 그리다보면 힘이 들고, 땀도 나고, 에너지의 소모가 발생한다. 이것은 화가가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림 그 자체가 무게도 있고,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저항하는 반작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정보가 그 자체로 에너지나 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선입견을 통해 정보가 무게나, 에너지 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을 하고, 정보를 지울 때 일어나는 일을 끼워 맞춘 것이다. 정보란 그 자체 관념적인 존재이다. 책 1권 이라고 할 때, 모든 에너지 모든 열 등은 책에 존재하는 것이지, 1권 이라는 정보와는 무관하다. 이는 <애매어의 오류> 혹은 <전건 긍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아고 보아야 한다.
② 둘째, 이 이론은 우주 속의 모든 존제들은 사실상 우주의 가장자리인 2차원의 평면에 정보가 존재하고, 이 정보들이 3차원의 입체공간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보는 우주라는 것이다.
논리적 오류 : 우리가 살고 있고, 보고 있는 우주란 ‘가시적인 우주’이며, 그 넘어에 우리가 결코 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우주’가 있다. 과학적인 사실 혹은 진실은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해 질 수 있다. 첫째, 실제로 관찰을 하였거나, 실험실에서 실험으로 값을 얻었거나 두 가지 방법이다. 그런데 우주의 가장자리를 볼 수도 실험 해볼 수도 없다. 어떻게 정보들이 그곳에 저장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가?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그리고 2차원이 우주의 가장자리 일 것이라는 것도 전혀 근거 없는 추정에 불과하다. <논리적 비약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정보에는 온갖종류의 정보가 있다. 오늘 내가 파란 옷을 입고 직장에 가는 것도 정보이며, 내 아내에게 전화를 여러번 한 것도 정보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정보들이 사전에 우주의 가장자리에 기입되어 있었던 것인가? 지구상에는 수십억명이 단 한 시간에 수조개의 정보를 만들어 낸다. 이 모든 것이 우주의 가장자리 어딘가에 먼저 정보로 저장된 것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불성이다. 이는 기독교의 ‘예정설’보다 훨씬 더 말이 안되는 이론이다.
③ 셋째, 생명이란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보를 유지하고 전달하려는 아주 정교한 패튼이다. 이러한 고찰은 그 자체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생명의 개념을 매우 물리적 차원으로 축소한 규정이다. 인간의 생명활동은 먹는 것, 자는 것, 생체적 활동, 감성적 활동, 윤리 도덕적 활동, 정신적 활동 그리고 영적인 활동을 모두 포함할 때, 진정한 생명에 대한 유기체적 사유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단계에서 생명은 자신의 현 상황을 뛰어 넘는 창조적 활동을 하며, 심지어 초월적인 세계와 교감하기도 한다. 베르그송은 이들을 ‘신비가’라고 불렀다.
따라서 생명의 다양한 현상을 단 하나의 물리적 생물학적 수준에 그치고 있기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물론 파인만의 이러한 이론은 항상 단서를 달고 있다. 이것이 아직 완전히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논쟁이 많은 이론이라는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정보사회이지, 정보사회라는 것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본말이 전도된 아주 부정적인 용어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인문학자가 “내 정보가 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물질화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눈에 보이는 것도 만질 수 있는 것도, 느낄 수 있는 것도 모두 생략되고, 오직 숫자나 수량 수식으로 환원된 것이 정보이다. 인간을 정보로 고려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권의 침해요, 인간 존엄성을 말살하는 악마적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일상화 되면, 무지한 사람들은 “실재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진실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입력한 그 정보가 마치 사실이고, 진실이고, 진리처럼 간주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온갖 종류의 불의와 부정이 횡횡하게 되고, 억울한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시몬 베유는 이러한 사회를 ‘관료주의’라고 불렀고, 그 최고의 상태가 ‘국가관료주의’라고 하였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정보는 ‘실재가 발생하고’ 그에 적합한 내용을 ‘비-물질적’ 혹은 ‘관념적 방식’으로 ‘기억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의식에 저장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이 아닌한, 인간은 결코 기억이 실재를 앞설 수가 없다. 의식에 생각만 하면 바로 현실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중세의 신학자들은 말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의 과학자들은 유비적인 의미에서 신을 흉내내고자 한다고 보아야 한다.